요양보호사 실습실 과정에서
인생의 한 시즌이 저물고, 나는 새로운 계절의 문턱에 섰다. 익숙했던 직장을 뒤로하고 내가 선택한 곳은 ‘요양보호사’ 실습 현장이었다. 누군가는 예순이라는 나이에 왜 사서 고생을 하느냐고 물었지만, 나는 인간의 생애가 완성되는 그 마지막 페이지에 강제로 와 있었다.
실습 첫날, 주간보호 센터의 아침은 부산하다 못해 소란스러웠다. 오전 8시 30분. 낯선 앞치마를 챙겨 입고 마주한 풍경은 삶의 활력과 소멸의 징후가 기묘하게 뒤섞인 현장이었다. 우리 실습생들은 조를 나누어 주간보호센터, 요양원, 방문요양으로 흩어졌다. 내가 처음 실습을 위해 간 곳은 어르신들이 등교하듯 찾아오시는 노치윈이라고 이름하는 ‘주간보호 센터’였다.
8시 50분이 되면 셔틀버스가 도착하고, 어르신들이 하나둘 센터로 인도되어 들어오신다. 우리는 그분들의 가슴에 이름표를 달아드리고 정해진 자리로 안내하며 첫인상을 살핀다. “어르신, 어젯밤에 잘 주무셨어요? 어디 불편한 데는 없으시고요?” 혈압을 체크 하고 안색을 살피는 이 짧은 물음은 단순한 업무가 아니었다. 그것은 오늘 하루도 무사히 우리 곁에 머물러주심에 대한 안도이자, 이들에 대한 예우였다.
주간보호 센터에서의 5일은 생각보다 따스했다. 오전에는 가벼운 신체 운동으로 굳어가는 근육을 깨우고, 10시가 되면 정성껏 준비한 간식을 대접한다. 소화력이 약해진 어르신들을 위해 하루 두 번, 점심과 저녁 사이사이 채워지는 식탁은 그분들에게 유일하게 남은 감각적 즐거움일지도 몰랐다.
오후 프로그램은 더욱 다채로웠다. 서툰 손놀림으로 그림을 그리고, 퍼즐을 맞추고, 노래와 율동을 함께하고, 화분에 꽃씨를 심는다. 흙을 만지는 주름진 손등 위로 햇살이 내리쬐면, 그분들의 얼굴에도 유년의 아이 같은 미소가 번졌다. 일주일에 한 번 나가는 공원 산책길에서 나는 어르신들의 말동무가 되어드렸다.
“선생님은 참 말을 예쁘게 해. 내 말도 잘 들어주고, 내 마음을 잘 알아줘서 고마워.” 어르신들은 그저 말씀을 들어 들이는 것만으로도 참 좋아 하신다.
유난히 나를 예뻐해 주시던 한 어르신은 실습 마지막 날, 내가 내일부터 나오지 않는다는 소식을 듣고 내 손을 꽉 쥐셨다. 마디 굵은 손등 위로 툭 떨어진 눈물 한 방울. 고작 일주일이었다. 하지만 생의 끝자락에서 만난 인연은 시간의 길이와 상관없이 밀도가 높았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한 사람의 세상을 비출 수 있다는 것을, 나는 그 눈물 속에서 배웠다.
실습 둘째 주, 주간보호 센터의 온기는 요양원의 서늘한 현실로 이어졌다. 요양원은 24시간 돌봄이 필요한 중증 어르신들의 거처였다. 이곳의 아침은 평화롭기보다 ‘전쟁터’에 가까웠다.
중증 치매를 앓고 계신 한 어르신은 매일 아침 출입구 앞에 짐을 싸 들고 서 계셨다. “우리 아들 밥해줘야 해. 문 좀 열어줘!” 평생을 가족을 위해 헌신했던 기억만이 유령처럼 남아 그어르신을 괴롭히고 있었다. “어르신 여기가 어르신 집이에요 가긴 어딜 가신다고 그러세요?” 아무리 여러 번 말씀을 드려도 날마다 같은 일의 반복이다. 식사를 거부하고 고집을 부리는 어르신들과 씨름하는 요양보호사 선생님들의 얼굴엔 언제나 피로가 깊게 패어 있었다.
가장 힘겨운 시간은 목욕 서비스였다. 일주일에 두 번, 청결을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지만 치매 어르신들에게 물은 공포의 대상이기도 했다. 한 어르신은 선생님과 함께 목욕을 돕는 나를 향해 거칠게 저항하셨다. 옷을 벗지 않으려 비명을 지르고, 급기야 내 팔을 할퀴고 옷을 뺏어 갔다며 소리를 높이셨다. 상처 입은 팔을 문지르며 잠시 자리를 피해야 했던 그 30분의 시간. 하지만 더 가슴 아픈 것은 30분 뒤 다시 마주한 어르신이 나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신다는 점이다. 기억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본능적인 방어와 이유 없는 분노뿐이었다.
그러니 하루에도 몇 번씩 싸우기도 하고 큰소리가 나는 게 일상이다.
실습의 정점은 거동조차 불가능한 어르신들이 계신 층이었다. 그곳은 침묵이 지배하는 방이었다. 의식 없이 누워만 계신 분들, 의식이 있으셔도 누워서 움직이지 못하시는 분들, 기저귀에 배설물을 받아내야 하는 분들 곁에서 요양보호사들은 쉴 틈 없이 몸을 움직였다. 매일의 이러한 현장에서 선생님들은 만성적인 손목 관절염과 어깨와 허리의 통증을 훈장처럼 달고 살았다.
나는 의식이 거의 없는 한 남자 어르신의 식사를 돕게 되었다. 물처럼 묽게 만든 미음을 작은 스푼으로 떠서 입가에 가져다 대는 일. 벌어진 입 사이로 미음은 삼켜지는 대신 반 이상이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한 숟가락도 삼키지 못하고 그조차 넘기지 못하고 간호사가 수액을 연결했다.
앙상하게 뼈만 남은 몸으로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는 어르신을 보며 나는 심한 회의감에 휩싸였다. ‘이것을 살아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인간으로서의 존재감은 어디에 남아 있는 걸까?’
죽음보다 가혹한 연명(延命) 앞에서 나는 삶의 존엄을 생각했다.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는 이들을 돈으로만 환산하는 원장들, 그리고 죄책감 혹은 방치 사이에서 갈등하는 가족들. 요양원은 누군가에게는 안식처였지만, 누군가에게는 사회로부터 격리된 채 소멸을 기다리는 씁쓸한 대기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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