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30년. 숫자로만 보면 참으로 아득한 시간이다. 청춘을 바치고, 머리카락 사이에 흰 눈이 내려앉을 때까지 나는 ‘공무원’이라는 견고한 성안에서 살았다. 행정, 교육, 민원 대응. 매일 아침 나를 기다리는 업무가 있었고, 나를 찾는 사람들이 있었으며, 매달 박히는 월급은 내 존재의 유효기간을 증명해 주는 가장 확실한 영수증이었다. 퇴직을 앞두고 나는 막연히 ‘조금은 편안한 삶’을 꿈꿨다. 그동안 수고했으니 이제는 느긋한 아침을 맞이하고, 좋아하는 글을 쓰며 배우고 싶던 수채화도 그리면서 유유자적하게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었다. 은퇴라는 이름의 문을 열고 세상 밖으로 걸어 나온 순간, 내가 마주한 것은 따스한 햇볕이 아니라 시리고 날카로운 현실의 바람이었다. 인생의 계획표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수정되어야 했고, 나는 다시 삶을 지탱하기 위해 ‘경제활동’이라는 현장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30년 넘게 쌓아온 나의 경력이 세상에서는 마치 ‘호환되지 않는 소프트웨어’처럼 취급받는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취업 시장이라는 거대한 컨베이어 벨트 앞에 섰을 때, 내가 내밀 수 있는 것은 초라하기 그지 없었다.
“그동안 무슨 일을 하셨나요?”
“30년 동안 공직에서 행정과 민원을 담당했습니다.”
돌아오는 대답은 차가웠다. 사회는 나의 ‘성실함’이나 ‘조직에 대한 충성심’ 같은 추상적인 단어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오직 하나, “그래서 지금 당장 우리에게 필요한 어떤 기술을 가지고 있느냐?”였다. 서류상으로 나를 증명할 실질적인 ‘도구’가 내게는 없었다. 그토록 익숙하게 다루던 워드프로세서나 엑셀, 한글 자격증은 이제 신입사원조차 이력서에 쓰지 않는 기본 중의 기본이 되어버렸다. 전문적인 기술이 없는 60대 은퇴자에게 30년 공직 경험은 그저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했다.
그때 느꼈던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나는 그동안 무엇을 위해 달려왔나?’라는 자괴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명함 한 장에 담겨 있던 직함이 사라지자, 나는 세상에서 가장 무력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누군가가 나를 불러주지 않는다는 것, 내가 사회의 톱니바퀴에 더는 끼워질 수 없는 부품이라는 사실이 나를 엄청나게 불안하게 만들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어 소멸해 버릴 것만 같았다.
불안은 나를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 되었다. “아무도 나를 찾아주지 않는다면, 그들이 나를 찾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만들자.” 나는 곧바로 현실적인 선택지에 뛰어들었다. 막연한 희망보다는 손에 잡히는 기술이 필요했다. 가장 먼저 문을 두드린 곳은 요양보호사 자격증 과정이었다. 고령화 사회에서 가장 확실하게 ‘수요’가 있는 곳, 중장년층이 다시 사회로 진입하기에 가장 문턱이 낮은 곳이었다.
하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요양보호사라는 주춧돌 위에 치매 인지 활동 지도사, 병원 동행사 등 현대 사회가 요구하는 구체적인 전문성 들을 하나씩 얹어갔다. 자격증 공부를 시작하자 내 뇌는 다시 깨어나기 시작했다. 30년 동안 익숙한 매뉴얼에 갇혀 있던 사고가 새로운 지식을 흡수하며 활력을 되찾았다.
이후 대학에 진학하며 나의 도전은 더욱 구체화하였다. ‘한식조리기능사’ 자격증을 시작으로 양식, 제과제빵, 떡 제조기능사까지. 칼을 잡는 법부터 식재료의 성질을 이해하는 법까지, 모든 과정은 나 자신을 새롭게 빚어가는 과정이었다. 시험장 입구에서 느꼈던 그 팽팽한 긴장감은 내가 아직 ‘살아있음’을 증명해 주는 짜릿한 신호였다. 합격 통지서를 손에 쥘 때마다, 나는 내 몸을 보호할 수 있는 작은 갑옷 한 조각을 덧대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자격증에 집착하듯 매달린 이유는 단순히 취업을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나를 지배하고 있던 ‘불안’이라는 무엇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한 방어기제였다. “나도 사회에서 꼭 필요한 사람이다”, “나는 여전히 배울 수 있고, 해낼 수 있는 사람이다”라는 확신을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주입해야만 했다. 자격증은 나라는 사람의 가치를 세상의 언어로 번역해 주는 통역기이자, 아무도 나를 찾아주지 않을지 모른다는 막막한 어둠 속에서 나를 지켜주는 유일한 등불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