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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영 Dec 12. 2017

초식동물의, 나의 "천국"

스와질란드, 밀와네에서의 하루


스와질랜드의 국경에 도착한 건 밤 11시가 넘어서였다. 무사히 입국도장은 받았지만 해는 이미 오래전에 저물었다. 눈앞이 칠흑 같았고 달을 잃은 하늘엔 별들만 무성했다.  

지도에 표시된 작은 길로 꺾자마자 차가 덜컹거리기 시작했다. 오프로드였다. 좁고 정돈이 되지 않은 것을 보면 분명 일반 승용차:우리가 타고 있는 이 차를 위한 길은 아니었다. 이제 시간은 12시를 넘겼고 앞뒤로 어떤 존재도 없었다. 차가 스스로 내고 있는 빛이 아니었다면 금세 패닉에 빠졌을 수도 있었다.

잔뜩 어깨를 움츠린 채 누구도 입을 열지 않고 있던 찰나, 차량 앞으로 작은 불빛 여러 개가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 뒤로는 모래바람이 흩어지는 게 보였다. 오밤중 예기치 못한 빛과 바퀴소리에 놀라 어둠 속을 도망가는 사슴 떼였다. 그러니 '밀와네국립공원'이 적힌 표지판을 본 것은 이미 공원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안 다음이었다.

긴장이 풀리자 우리는 모두 차에서 내렸다. 선선한 바람을 타고 초록 냄새가 몰려왔다. 살갗을 스치는 공기는 차가웠지만 춥지 않았다. 미묘한 새벽의 소리들이 섞여 들렸다. 여름날 매미소리, 나보다는 분명히 클 동물의 울음소리, 나뭇잎끼리 속닥이는 소리. 모두 생명의 소리였다.




아프리카를 동행하는 순덕 언니 부부와 우리 커플 중 아침에 제일 먼저 눈을 뜨는 건 언제나 나였다. 그런데 그날은 눈을 뜨자 바깥에서 누군가의 인기척이 들렸다. 커튼을 살짝 걷어 내다보니 숙소 앞에서 식사 중이었던 사슴이었다.

 


'내 방앞에서 풀을 먹는 사슴이라니. 천국이라는 게 존재한다면 이런 형태이지 않을까.'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문을 열고 나갔다. 뿔이 커다란 사슴은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다시 식사에 열중했다. 사람이 자신을 해치지 않는다는 것을 긴 생에 동안 터득한 것이 분명했다.
"고마워요!"

나는 이 나라의 사람들에게 진심만으로 가득한 감사의 인사를 내뱉었다.




세렝게티에서는 사자만을 찾아다니던 가이드 아저씨를 만난 탓에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초식동물들을 무심히 지나쳤었다. 초베에서는 좀 더 좁은 땅 안에 동물들이 한데 모여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지만, 너무 거리가 멀었다.
반면 밀와네 국립공원은 초식동물이 서식하여 도보로 돌아다니는 것이 가능하고, 가이드 없이 지도와 표지판으로 충분히 길을 찾아갈 수 있었다. 시야가 트인 초원임에도 시선이 닿는 모든 곳에 수많은 종류의 초식동물들이 존재했다. 그 거리도 손에 닿을 듯 가까웠다. 나는 그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조용히 그들의 집에서 머물고 즐기다가 돌아온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었다.



저녁시간이 되어 더 이상 트레킹을 할 수 없어지자 숙소 앞마당에서 불을 피워 고기를 구웠다. 은박지에 쌓인 감자 위로 육즙이 떨어졌다. 노쇠한 얼룩말 한 마리가 한 번씩 고개를 숙여가며 풀을 뜯고 있었다. 완벽한 하루가 모닥불의 연기와 함께 하늘 위로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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