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인생을 바꾸는 곳
내 입으로 뭔가를 좋아한다는 의지를 피력할 수 있을 때부터 나는 동물을 좋아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우연한 기회로 강아지를 키우게 되었고 우리 집엔 늘 강아지가 살았다.
세계일주 후 원래 하던 전문직을 내려놓고 새로운 직장을 찾아다녔다. 나는 이왕 평생 일하며 살아야 한다면 ‘덕업 일치’를 하고 싶었다. 여행사 몇 곳을 전전하며 면접을 보았고, 아무리 덕업 일치라지만 급여나 복지면에서 내가 견뎌내지 못할 것 같아 고민이 많았다. 그러던 중 나는 뜬금없이 한 사료 수입회사에 입사하게 되었다.
이 회사를 고른 이유는 면접 때 받은 사료를 입 짧은 콩이가 너무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다는 것과 면접을 보는 동안 사무실 강아지 한 마리가 내 무릎 위에 앉아서 내 손길에 기분 좋은 그르릉소리를 냈다는 것 때문이었다.
일도 많고 사람도 힘들었지만 이거야말로 ‘덕업 일치’였다. 사료를 파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인 것은 맞지만 온종일 강아지 사진을 보고, 유기견을 돕고, 사무실에서 강아지를 만졌다. 무엇을 주어도 시큰둥하던 콩이가 10년 만에 맛있게 먹어주는 비싸디 비싼 동결건조 사료도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었다.
일이 익숙해졌을 때, 나는 결혼을 했고 그로 인해 분가를 하며 콩이를 자주 볼 수 없게 되었지만 강아지 욕구(?)를 채울 수 있어 좋았다.
나는 내가 해결하지 못할 안타까운 사실을 외면하는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그렇게 동물을 좋아한다고 해놓고 유기견 보호소에 봉사활동 한 번을 가지 못하고 기부금이나 무심히 보내는 그런 사람. 가슴 아픈 사연은 아예 접근조차도 꺼려하는 못난 사람이었다.
하지만 내가 하는 루틴 업무 중 하나가 도와줄만한 유기견이 있는지 찾는 일이었고 그때 우연히 민우를 보았다.
20년 12월 말 눈이 쌓인 강원도 고성의 들판.
‘개는 밖에서 크는거지.’라는 좌우명같은 믿음과 아집을 가진 어르신이 중성화도 없이 묶어놓은 어미가 임신을 했다. 사람도 법적으로 지정을 해야만 아빠가 되듯, 책임을 물을 상대가 헤아릴 수 없게 많아 아빠를 알 수 없는 아이 일곱이 태어났다. 하나만 잡아들기 힘든 모래알과 들어 올리기 힘든 바위가 뒤엉킨 차가운 바닥에서. 엄마도 문제였지만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갓난장이들이 눈밭에 놓여있는 것이 안타까웠는데, 다행히 구조 예정이며 임보처를 찾는다고 했고 나는 회사 일과는 별개로 임시보호를 결정했다. 남편에게 딱 3개월만 이 아이를 지켜주자고 설득했다. 종이 뭔지는 물론 얼마나 클지, 어떻게 클지도 알 수 없는 아이였기에 입양이 될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미끄러운 거실 바닥에 매트를 깔고 배변패드를 720개 샀다.
하루 종일 오줌을 닦고 똥을 집어도 집안은 난장판이었다. 잠깐 쓰레기라도 버리고 오면 며칠 만에 들어온 나쁜 사람 취급을 하며 울어대는 민우가 자주 미웠다. 입양 홍보를 열심히 했지만 생각만큼 문의는 들어오지 않았고 그 사이 남편은 우리가 키웠으면 좋겠다는 의사를 비췄다.
제멋대로 돌아가던 꼬리도 때맞춰 살랑거릴 줄 알고, 배가 부르면 식사를 남기기도 했다. 민우는 열심히 성장 중이었다. 나는 이 아이가 우리에게 단 하나의 조건도 없는 사랑을 가르치게 될 것임을 느꼈고 입양을 결정했다. 그렇게 민우는 우리의 가족이 되었다.
*지금은 그 회사를 그만두었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기억의 장소지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아이를 만나 그걸로 모든 것이 용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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