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연은 아니지만 범인륜 차원으로 찰싹 뭉쳐진 나의 남편도 100미터만 뛰어도 숨이 꼴딱 넘어간다고 드러누워버리는 운동 배척자라 할 수 있다
(이 사람이 잘 뛰는 건 내가 분노에 차올라 뒤에서 잡으려 할 때뿐이다)
천지 주변 그 누구도 운동을 하고 있지 않은 몸이 평화로운 집단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비운동의 일상을 무리 없이 살아가던 어느 날 운동을 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사소한 현실과 맞닥뜨리고 말았으니 그건 바로!
청바지가 잠기지 않는다ㅜㅜ
살이 쪘기때문이었다
뭐 살다 보면 살이 찔 수도 빠질 수도 있다지만 나는 여간해선 체중이 늘지 않는 반면 한 번 살이 붙으면 쉽게 떨어지지도 않는 결속형 지방 인자의 보유자다
일단 체중이 불지 않게 평소 조금만 신경을 쓴다면 특별히 다이어트라던가 식이요법 등을 하지 않아도 현상유지 정도는 가능한 어찌 보면 운 좋은 체질에 속하는 편인데
그런 내가 살이 쪘다는 건 지금 당장 빼지 않으면 앞으로 이 체중, 이 체형으로 살아야 할지도 모르며 시간이 흐를수록 과거로 돌아가지 못할 확률이 높아진다는 중대 선고를 받은 거나 다름이 없었다
그렇다고 그 이전이 한눈에 봐도 가냘프고 말라서 흔히 말하는 예쁜 체형이었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다만 스스로 여러 체중을 오가며 경험한 결과 활동 시 힘에 부치치 않고 피로를 견딜 수 있으며 적정하다고 생각한 체중의 한계를 느낄 때가 있었다
또 너무 당연한 이야기로 저체중도 곤란하지만 살이 쪄도 힘든 건 매한가지였다
흔히 말하는 체격이 좋고 살집이 있으면 힘도 좋을 거라는 무지한 생각은 전혀 옳지 않다
오히려 평소보다 체중이 불어버려 숨이 차다던가 그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됐던 건강상의 새로운 문제에 부딪힐 확률만 올라갈 뿐 개개인이 느끼는 '내 체중은 얼마 얼마일 때가 가장 컨디션이 좋아'라고 느끼는 기준이 분명히 있을 거라 생각한다
내 경우는 52kg대가 가장 몸이 가볍고 편안했는데 정확히는 52.9kg일 때가 제일 좋았다
(기분상의 만족으로 남겨두고 싶은 소중한 0.1kg의 미묘한 차이)
그 이하가 되면 (너무 옛날 일이라 기억도 가물가물하지만) 핏기가 머리부터 쫙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고 어지러워 걷는 자체도 짜증이 났던 것 같다
그건 내가 저혈압이라 그럴 수도 있지만 이런저런 상태를 종합해 봤을 때 일단 169cm의 내 키에 체중 53kg대는 사수해야 몸으로 느끼는 일상의 불편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사실은 틀림없었다
운동을 해서라도 살을 빼야겠다고 마음먹었던 당시의 체중은 57kg을 지나고 있었고 이대로 뒀다간 꿈의 60kg도 가능하겠다는 경각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운동을 해야겠다
장한 결심이긴 하지만 운동을 해봤어야지
앞서 말했듯 내가 살아온 지난날 어느 한순간도 운동에 틈을 내줘본 일이 없었고 지금 운동에 대한 결심도 결코 진심에서 우러나온 마음과 행동이 아니지 않은가
어쩔 수 없이 등 떠밀려 운동의 세계에 발을 디디기로 딱 마음만 먹어놓은 상태에서 처음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일단 걷기'였다
걷는 건 또 꽤 잘해서 이전부터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걸으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것을 좋아하긴 했다
집 근처 운동장 트랙을 다람쥐가 쳇바퀴 굴리는 마냥 동글동글하게 걷고 또 걸었다
오래 걷는 정도만으로도 땀이 나고 나름의 상쾌함이 느껴졌지만 내 살은 그 정도의 운동으로 빠질 쉬운 살이 아니기에 이번엔 좀 더 빨리 걸어보기로 했다
성큼성큼 다리를 쭉쭉 뻗어 보폭을 넓혀 걸어봤다
당연히 힘은 들었지만 뭔가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의욕이 올라오는 듯한 상쾌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이 평화롭기만 하던 걷기 운동에사소한 변수가 작용했는데 그건 바로 '급한 내 성격'
이 급한 성격 때문에 차분히 걷기를 오래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조금 걷다 보면 마음이 조급해지면서 빨리 당겨 걸어 끝내버리고 싶은 이상한 욕구에 휩싸이곤 해
예를 들자면 처음엔 무조건 한 시간 걷기를 하다가 얼마 안 가 매일 7km 걷기로 방식을 바꾸게 됐는데 마음이 급한 나머지 누가 뒤쫓아오기라도하듯일부 구간을 달리게 된 것이다
처음부터 쭉쭉 달렸을 리는 없고 100m를 달리고 100m는 걷는 방식으로 시작해 곧 200m씩 번갈아 달리고 걷기를 반복할 수 있게 됐다
400m 트랙의 절반은 걷고 절반은 달리며 한 바퀴를 완료할 수 있다는 재미는 두 바퀴, 세 바퀴, 네 바퀴로 이어졌고 7km에서 10km로 운동의 거리를 늘려가는 계기가 됐다
한참 재미가 붙었을 때는 이 상태로 매일 12km를 채울 동안 운동장에 머물곤 했었다
처음 이 운동을 시작했던 계절은 봄이었고 평생 운동에 목적을 둔 옷을 사본적 없던 나는 통이 넓은 청바지에 면티셔츠차림으로한 계절을 운동장에서 보냈다
이후 날씨가 더워지면서 실내 운동을 시작하게 됐고내친김에 운동복을 사볼까 싶어 아웃렛에서 제일 가격이 저렴한 운동복 두벌을 구입, 사계절 내내 전천후 운동복 삼아 다시 2년 정도를 보내게 된다
운동화도 당시 신던 신발 그대로 이후의 마라톤 대회에 나섰고 10km까지는 견딜만했지만 결국 하프 코스 달리기에서 발이 터져 피를 본 경험 후 장거리에 맞는 옷과 운동화를 다시 구입하면서 비로소 남들과 같은 운동 외형을 갖출 수 있었다
실내 운동 때도 러닝 머신 외엔 그 흔한 실내 자전거에도 흥미가 없어 오로지 기계 위에서 달리거나 걸어 한 시간의 운동 시간을 채운 것이 전부였지만 나름 나태한 내면의나 자신과 끊임없이 타협하며 스스로 정한 주 네 번의 운동 규칙을 지키려 노력했고 당시의 노력이 꾸준한 운동 습관을 만드는데 도움이 됐던 것은 분명하다
새로운 습관을 만들고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은 어른의 일상에서 이룬 작은 성과였고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나이 들어가는 과정에서어설퍼도 절대 필요할 운동이라는 능력치를 장착하게 됐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이렇게 혼자만의 성취감에 만족하는 사이 2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고 처음 달리기를 시작했을 때와 같은 순간의 충동이 바람처럼 일며 나를 부추겼다
'진짜 마라톤 대회에 나가보면 어떨까'
대회는 응원도 나가본 적 없고 언젠가 광화문의 큰 대회가 끝났을 무렵 인파에 섞여 대회 뒤풀이 구경을 해 본 경험이 전부였지만 당시의 활기가 기억에 인상적으로 남긴 했었다
그 대회가 5km 행사였기에 이후에 달리기를 하면서 막연히 '나도 5km 정도는 뛸 수 있지 않을까'라고 달리는 나를 대회에 훌쩍 끼워 넣는 상상을 하기도 했지만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운동장에 처음 나가 걸었던 날처럼 이번에도 오랜 생각 없이 단번에 참가신청서를 작성하고 마음 변하기 전에 참가비까지 멋지게 지불해버렸다
(이런 일은 빨리 해치울수록 실행 확률이 높아지니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다만 참가비가 생각보다 높아 이왕 참가하는 김에 조금 더 달려보면 어떨까 생각하며 같은 돈을 낼 거면 한 발짝이라도 더 가봐야 실패하더라도 본전 생각이 덜 날 것 같은 마음에10km 부분에 신청서를 냈다
제한 시간은 1시간 30분
평소에도 10km는 걷다뛰다해도 넉넉히 1시간 20분 안엔 끝냈으니까 뭐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작은 자극이 계기가 되어 시작한달리기에서 한 발을 더 나가 용감하게 대회를꿈꾸게 된 것이다
뭐든 처음 마음먹기까지가 멀고 시작 후엔 어떻게든 제 갈 길을 가게 된다고 한다면 나는 꽤 직진으로 제법 먼 거리를 달려온 게 아닐까
달리기의 직접 원인이었던 체중은 이후 몇 번 오락가락한 끝에 적당한 자리를 찾아 정체 중이다
꾸준한 달리기가 체중 조절에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며 운동으로 느낀 정신적 상쾌감이 다음날에도 기꺼이 운동화를 신고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등을 톡톡 밀어준다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취미가 되기까지 여러 과정이 있었지만 지금은 진심으로 스스로 즐거워 달리기를 받아들이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