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달팽이러너 Dec 19. 2019

42.195 마이런

셀프 시즌 오프 / 타이베이 마라톤 2019

새벽을 여는 마라톤은 처음이다

대회 시작은 6시 30분, 대회장이 북적이니 늦어도 6시까지는 도착해 준비를 해달라는 안내를 받았다

이런 내용을 감안해 대회장과 멀지 않은 곳에 숙소를 잡았고 캄캄한 새벽 3시부터 눈을 말똥말똥 뜨고 긴장에 뒤치락거린 끝에 4시에 일어나 준비를 시작했다





타이베이 마라톤 2019



한 해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대회를 앞두고 있다

마라톤에  완벽히 꽂혀 지냈던 한 해였고 흥미에 이끌려 꽤 다양한 대회에 다녀왔으며 마지막으로 선택한 대회가 이 날의 타이베이 마라톤이다

대회 신청은 5개월 전이었고 참가비가 일본과는 비교가 안될 만큼 높아 중국어 번역이 잘못돼 신청을 잘못한 것이 아닌가 몇 번을 보고 또 봤다

다행히 대회가 가까워지면서 대회 주최 측의 꾸준한 메일이 들어왔고 신청은 제대로 됐나 보다 안심과 함께 구구절절 긴 문장의 중국어 메일을 받을 때마다 새로운 시름을 안고 대체 무슨 내용일까, 대체 이 대회는 내게 무슨 할 말이 이리 많은 걸까 고민 아닌 고민에 휩싸이곤 했다


다른 해외 대회 때와 마찬가지로 대회 이틀 전 타이베이에 도착했다

차근차근 일찌감치 꼼꼼하게 준비를 하는 성향이 아니다 보니 준비에 많은 난관이 있었는데 일단

대회에 임박하면서 숙소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일정에 닥쳐서 찾아본 대회장 근방의 호텔은 만실이었고 그나마 남아있는 얼마 안 되는 곳은 시설 대비 터무니없는 가격이 붙어있었다

타이베이가 원래 숙소 여유가 있는 도시는 아니라는 것은 이전의 경험으로 잘 알고 있지만 당장 대회에 닥쳐 숙소를 찾지 못하니 급한 마음에 에어비앤비까지 둘러보게 됐고 마침 멀지 않은 곳에서 괜찮은 숙소를 발견, 바로 메일을 보내고 확정을 받아 숙소를 해결했다

급하게 찾은 만큼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도착한 숙소는 기대 이상으로 훌륭해 오랜만에 타이베이를 찾은 우리를 위한 깜짝 선물인가 싶을 정도였다



숙소에 캐리어를 두고 배번과 기록칩을 받으러 갔다

첫날이고 이른 오후라 한산했지만 그보다 큰 문제는 언어의 장벽이다

배번과 칩을 받는 것까지는 문제없었지만 제품과 기념품 판매 부스가 그토록 많았건만 하나도 제대로 둘러보지 못했다

발이라도 들여놓을라치면 상냥한 중국어가 사방에서 쏟아졌고 외국인인걸 알면 애매하게 물러서서 말없이 방긋방긋 웃으며 따라다니는 통에 도저히 마음 편하게 구경을 할 수 없어 우리가 구경을 포기하고 말았고

결국 건진 것은 기념 패치뿐



그 외에 작은 휴대용 물컵을 받았는데 이번 대회는 개인 물컵이 없으면 물을 못 마실 수도 있다는 엄청난 경고와 함께 꼭 소지하고 다니라는 당부를 받았다

이건 또 무슨 새로운 상황인가

아, 생각만 해도 머리가 복잡하다

개인용 물컵을 만들어 배포할 정도로 이 나라가 환경에 민감한 나라였던가

달리기도 간신히 하는데 물컵을 챙겨 다니며 물을 받아마시라니

갈증으로 말라죽는 건 아닐까

달리던 사람들이 앞다퉈 물을 마시려 들 테고 내게 그만한 경쟁력이 있을 리가 없는데

결론부터 말하면 물컵은 정수기 회사에서 이벤트용으로 만들어 공급을 했고 그와 상관없이 여느 대회처럼 종이컵에 담긴 물이 제공됐다

그리고 직접 따라 마실 수 있는 물통도 별도로 구비되어 있어 걱정과 달리 물은 원 없이 마셨다



대회 준비를 위해 짐을 싸면서 굉장히 고민됐던 것은 12월의 타이베이가 얼마나 따뜻한가에 대한 부분이었다

레깅스를 챙길지, 쇼츠를 챙길지 햇빛을 가릴 수 있는 모자가 필요한 지 요즘 즐겨 사용하는 헤드밴드로도 충분할지, 그리고 타이베이 대회에 비가 많이 내렸다는 여러 해의 기록을 검색을 통해 접하고 나니 비가 올까 그것도 걱정이었다

하프마라톤에 참가해 두 시간 동안 비를 맞고 달린 적은 있지만 다섯 시간을 비를 맞으며 견딜 수 있을까

날씨에서 비롯된 태산 같은 걱정을 비웃듯 대회 당일의 기온은 무려 30도에 육박했었고 그늘 없는 땡볕의 공원을 두 시간 정도 달리기까지 했다

한동안 춥게 지내다가 오랜만에 온몸의 땀을 증발시켜버릴 고온에 던져지니 시간이 흐른 뒤엔 어지럽기까지 했다

다만 일찍 시작한 만큼 12시쯤 되면서 대회는 마무리됐고 정오 이후의 거리는 아무 일 없었던 듯 평소로 돌아갔다


바뀐 잠자리와 새벽 기상의 부담감으로 뒤척이다 일찍 일어나 집에서 준비해 간 마라톤 세트를 꺼냈다

차례로 복장을 장착하고 배번을 달고 스트레칭을 하며 긴장도 풀었다

너무 이른 시간이라 배가 고프진 않았다가 아니라 전날 마라톤에 도움되는 탄수화물이라며 밥을 너무 많이 먹어서 새벽에도 위가 두둑한 기분이었다

이런 배라면 두 시간은 족히 버틸 수 있을 것 같다

두 시간이면 20km에 가까우니 일단 하프까진 가보고 다시 먹을 것을 찾아보자라고 생각하며 길을 나섰다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새벽이고 택시로 이동하며 대회장에 가까워진 사이 대회장을 향해 걷는 사람들도 눈에 들어왔다

모여드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있으니 대회에 대한 실감이 들었다

뛸 수 있을까 간만에 떨리고 겁난다

사이사이 섞여있는 대회에서 자주 봤던 익숙한 마라톤 동호회의 티셔츠들이 보였다

우리 러너들도 많았지만 일본에서 온 러너들도 정말 많았는데 얼마 전 오사카 대회에서 대만 참가자들을 꽤 봤던 기억이 떠올라 역시 이 둘은 여전히 서로 사이가 좋구만 싶기도 했다


6시 30분, 대회가 시작됐다

'자, 오전의 달리기를 마치고 점심은 맛있게 먹자'

얼마나 꿀맛일까 황홀한 상상을 하며 갈길 바쁜 러너들 틈에 섞인 달팽이의 올해의 마지막 달리기도 시작됐다




의외로 시티런이었다

코스 맵만 봤을 땐 정신없이 꼬였다고 생각해 걱정했는데 도시 안을 돌던 첫 15km는  볼거리도 많았고 막연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재밌었다

달리면서 바라보는 풍경은 여행으로 길을 걸으며 보는 풍경과 감흥이 다르다

길게 쭉 뻗은 이국적인 가로수 아래의 대로를 많은 사람들과 달리고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즐겁고 짜릿하다

특한 응원, 제공되는 먹거리, 여러 날에 걸쳐 관광으로 스쳐갔던 랜드마크를 하나씩 지나칠 때마다 이 대회에 참가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온이 높다 보니 얼마 달리지 않았음에도 얼굴에 열이 오르고 땀이 비 오듯 흐르기 시작했다

시원한 음료가 마시고  싶다는 생각으로 급수대까지 남은 거리를 가늠하는데 저 앞에 반가운 입간판이 손짓하며 나를 불렀다

"대만에 왔으면 밀크티 한 잔은 해야지?"



시내를 통과하는 동안은 뒤에 출발한 하프 주자들과 같은 길을 달렸는데 이전의 일본에서 달렸던 대회들과 달리 하프코스의 참가자들이 굉장히 많았다

함께 도시를 빠져나가고 풀코스 기준으로 20km가 지난 한적한 공원길로 접어들면서 두 갈래로 흩어졌는데 잠시 길을 잃고 우왕좌왕 헤매고 말았다

무리 지어 우르르 달려 나가는 사람들의 뒤에 있었는데 그들이 하프코스의 주자였던 탓에 혼동이 와버린 것이다

가까이 있던 자원봉사자에게 이 길이 풀코스냐 물었지만 당황하며 손사래를 친다

"우린 몰라"

(.. 그럼 왜 거기 계신 건데요..)

다행히 옆에 있던 사람들이 진행방향을 가리키며 가라고 손짓을 해줘 그대로 내달렸는데 달리는 와중에도 어째 느낌이 싸하다

 결국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 달려오는 사람들의 배번을 살피며 뭔가 다른  같다는 안 좋은 예감에 휩싸일 찰나 조금 전에 쭉 가라고 알려줬던 봉사자가 급하게 달려오며 여기가 아니라고 열심히 내가 지나온 뒤를 가리켰다

(그러면 그렇지ㅜ)

다행히 얼마 안 가 발길을 돌리긴 했지만 조금만 더 갔어도 수습이 힘들어질 뻔했다

길에 서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내가 갔어야 할 길을 팔을 쭉 뻗어 가리키며 되돌아온 내 등을 응원으로 가볍게 두드려준다


우여곡절 끝에 접어든 공원

여기서부터는 그늘 없는 아침 땡볕을 15km 정도 달려야 한다

각오는 했었지만 발을 딱 디디고 나니 눈앞이 까마득했다

이 길을 달려야 하다니

30km 같은 15km를 달려야 이 마라톤이 성공인지 실패인지 알 수 있게 된다

결판이 날 때까지는 버텨야 한다

솔직히 살아남을 수나 있을지 모르겠지만 발을 디뎠으니 일단 가보자



소음이라고는 새소리, 근방 송산공항에서 간간히 떠오른 비행기의 엔진 소리뿐 조용하다 못해 고요하고 평화로운 오전의 공원에 해가 드니 호흡도 거칠어지고 오랜만의 더위에 몸이 깜짝 놀랐는지 생각보다 빨리 지치고 말았다

중반까지는  각각 3km, 다시 2km 되는 지점에 스펀지와 물이 준비되어 있었고 방울토마토와 바나나도 넉넉히 제공받았다

과자류는 보기만 해도 목이 턱턱 막히는 느낌이라 손대지 않았다

급수대를 포인트로 삼아 건너뛰듯 달려가던 나는 결국 30km 지점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하고 근방의 긴 의자에 그대로 드러누워버렸다

'아, 살 것 같다'

누워서 바라본 하늘은 맑은 파랑에 간간히 구름도 보였다

풀냄새와 약하게 살랑이는 바람이 마음을 간지럽혀 금세 기분이 상쾌해졌고 대회 중 누워버린 이 상황이 진짜 웃기다는 생각에 실소가 나왔다


'미쳤구만'


잠깐 쉬었을 뿐이지만 기분전환이 도움이 됐는지 잠깐은 방금 다시 시작한 듯 기운 좋게 달릴 수 있었다

32km를 지나면서 '이제 10km 남았고 이제 와서 돌이킬 수도 없으니 가다 보면 결국 도착하게 될 것이다'라는 셀프 격려로 자신을 다독이는데 어디선가 신나는 뽕짝 음률이 흘러와 귀에 꽂혔다

대만 뽕짝이다!

음악의 근원지는 달리는 조금 앞의 공원 매점 같았다

뭔가 신나는 게 있나 보다 가보자

으쌰 으쌰 달려가 보니 공원의 식당과 매점에서 음식과 마실 것을 잔뜩 차려놓고 지친 사람들을 불러들이고 있었다

콜라! 커피!!  타이완피주(맥주)!!!


"피주 주세요!!"


종이컵으로 반 컵이 조금 안되게 받아 마셨는데

진짜

이 세상 시원함이 아니다!!

맥주가 이렇게나 맛있는 음료였나

아무리 들이켜도 미지근한 대회장의 물로는 해소가 안되던 갈증이 한방에 쑤욱 내려가며 혈관을 타고 온 몸을 빠르게 돌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아. 너무 좋아"

내 표정을 읽었는지 맥주를 따라 내주던 사람들이 웃으며 힘내라고 상쾌한 응원을 건넸다

(진정 은인들이십니다ㅜㅜ)



맛있어 보이는 국수와 샐러드들을 두고 가려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현재 기록이 다섯 시간에 간당간당해 아쉬움을 꾹 눌러 담은 채 다시 발길을 옮겼다

그 바쁜 와중에 향로 앞에서 대만식으로 합장 세 번을 하며 "완주하게 해 주세요"라고 씩씩하게 외치며 발을 뗐다


뭐, 가다 보니 드디어 공원을 벗어나게 됐다

공원 안에서도 코스가 꼬인 편이라 가도 가도 안 끝날 뫼비우스의 띠처럼 두렵게 느껴졌던 공원을 뒤로하고 시내로 접어들었다

어지간히 지나갈 주자들은 다 지나갔고 피니시의 대미를 장식할 달팽이들만 남은 건가요

우두머리 달팽이가 돼 볼까 싶어 남은 기운을 짜 넣으며 발걸음을 끌어올렸다

솔직히 40km를 지나면서 굉장히 흥분되고 이제 다 왔다는 기쁨에 이때 찍힌 사진들을 보면 활짝 활짝 웃기도 하고 나름 퍼포먼스도 하며 즐기고 있다는 티를 아낌없이 내고 있기도 했다

이렇게 웃고 있었나 싶을 정도다

(5시간을 달린 끝이라 몰골은 염전에서 일하다 탈출했다고 해도 믿게 생겨가지곤 기분좋게 웃고 있었다)


눈 앞의 피니시라인도 왜 그리 먼지 심장 터지기 직전에 헉 소리를 내며 선을 넘었다

기록을 알리는 삐 소리를 듣는 순간

후회 없다, 행복하다는 감정에 눈물이 벌컥 솟구쳐 올랐다


내 기록은 초단위가 붙지 않은 깔끔한 5시간 3분

(대회 제한 시간은 5시간 30분)

사진도 많이 찍고 길을 잃었다가 되돌아오기도 하고 어디 드러누워도 보고 맥주도 마시고 신나게 놀아 기록에 대한 아쉬움은 1도 없었다


지금껏 받았던 메달 중 가장 공들여 제작된 듯 시간도 맞출 수 있으나 받았던 당시는 몰랐다


메달과 완주 타월, 완주 시 제공되는 아디다스 피니셔 바람막이, 그리고 도시락을 받은 후 잠시 다리를 쉬어 가려고 나무 그늘 아래 자리 잡고 앉았다

(참가비가 비싼덴 그럴만한 이유가 있단 납득이 될 만큼 이것저것 후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이번엔 대회 시작이 너무 일러 남편은 숙소에 남고 혼자 대회를 치렀는데 끝나고 나니 혼자 여운을 감당하기가 버거워 다음부턴 꼭 마중 나와달라 당부했다


이렇게 한 해 동안 계획했던 대회를 모두 뛰고 셀프 시즌 오프를 경험하게 됐다

올해 10km 2번, 하프 6번, 풀코스 9번을 완주했고 이번 대회가 한해를 닫는 마지막 대회였다

이 대회에서 아쉬웠던 건 공원에서 국수를 못 먹었다는 후회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고 해외의 일반 참가자로써 즐길 수 있는 모든 즐거움을 다 누려 추레한 기록조차 아쉽지 않았다


한 해동안 수고한 내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작가의 이전글 42.195 마이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