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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봄 Feb 09. 2022

119. 봉숭아 꽃물

요즘은 한 달이 지나도 여전히 처음 한 것 같이 멀쩡하게 유지되는 새로운 매니큐어가 등장했습니다. 싫증이 나면 몇 번이고 지웠다가 다시 칠할 수도 있고 내가 원하는 색으로도 칠할 수 있으니 참 편리한 세상입니다.     

그러나 불과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매니큐어는 소수의 사람들만 사용하는 것으로 인식됐었습니다. 그러니 그 소수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은 손톱을 물들일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아 멋을 부리곤 했었지요. 그것은 바로 손톱에 봉숭아 꽃물을 들이는 것이었습니다.     


<동국세시기>에는 “계집애들과 어린애들이 봉숭아를 따다가 백반에 섞어 짓찧어서 손톱에 물을 들인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우리가 어릴 때는 비닐로 감쌌지만 그보다 더 이전에는 호박잎이나 피마자 잎, 헝겊 같은 것으로 감아두곤 했으니 봉숭아 꽃물을 들이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이전부터 전해오는 우리민족 고유의 풍습입니다.  

   

해마다 7~8월이 되면 친구와 함께 서로의 손톱에 봉숭아 꽃잎을 얹어 비닐로 꼭꼭 싸매주었습니다. 오래 기다릴수록 물이 잘 들기 때문에 오후에 물을 들이면 아침까지 기다려야 했지만 긴 기다림이 지난 후 붉게 물든 손톱을 보면 참 행복했습니다.     


담벼락 밑에 곱게 핀 봉숭아 꽃잎과 이파리를 적당히 떼어서 하얀 백반을 넣어 콩콩 찧은 후 잘 찧어진 꽃잎과 이파리를 손톱에 조금씩 얹어 비닐로 싸매고 실로 몇 번 감아 놓고 나면 손톱보다 마음이 먼저 붉게 물이 들어 설레곤 했습니다     


밤새 손톱이 잘 물들기를 기다리던 아이는 잠을 잘 때도 두 손을 베게 위로 올려두고 자거나 가슴에 고이 얹어두고 잠을 청했습니다. 아침이 되면 열손가락에 싸맨 비닐 중 몇 개는 빠져나가기 일쑤였고 덕분에 이불에 묻은 꽃물은 어머니에게 된통 혼이 나는 이유가 되기도 했지만 그래도 좋았습니다. 손톱이 매니큐어를 칠한 것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고 붉게 물든 손톱으로 학교에 가도 야단맞지 않았으니까요. 1년 중 유일하게 봉숭아꽃이 필 때만 물을 들일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손톱이 다 잘려나갈 때까지 최소 서너 달은 손톱에 남아있을 테니 그 시간이 결코 짧지는 않았습니다.     


그 서너 달 동안은 첫사랑이 이뤄지기를 기도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첫눈이 올 때까지는 손톱에 봉숭아 꽃물이 남아있으면 첫사랑이 이뤄진다고 믿었으니까요. 손톱이 길어도 여간해서는 자르지 않았고 꼭 잘라야 했을 때에도 반드시 새끼손톱만큼은 자르지 않겠다고 악착같이 버티곤 했습니다.     


첫눈이 올 때까지 내 손톱에 봉숭아 꽃물이 남아있던 적은 없었지만 손톱이 비교적 긴 친구들 중 몇몇은 첫눈이 오는 날까지 봉숭아 꽃물이 남아 있어서 자랑을 하곤 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정말 첫사랑이 이뤄진 건 아니지만 그때의 기다림은 가슴에 품은 희망이자 소망이었습니다.     


손톱에 봉숭아 꽃물을 들이는 것은 단순히 손톱에 물을 들이는 행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손톱에 꽃잎을 얹고 실로 싸맬 때부터 혼자가 아닌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공동체의 행위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물이 들 때까지 조급해하지 않고 참아야 한다는 기다림, 인내와 성숙을 배우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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