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이 ‘봄’이다 보니 사람들이 쉽게 기억한다는 장점도 있지만 왜 그런 이름을 갖게 되었는지 궁금해 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봄’이라는 이름을 두고 계절을 가리키는 ‘봄’인지, 아니면 ‘본다’라는 뜻을 가진 ‘봄’인지에 대해 묻는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봄’을 ‘봉’으로 잘못 듣고 서류봉투에 대문짝만하게 ‘봉’이라고 적어 보낸 사람도 있습니다. 해석이야 어찌 되었든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준다는 것은 참 고마운 일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고유한 이름이 있고 어디를 가든 그 이름으로 불립니다. 그 이름을 벗어나서 내가 있을 수 없으며 나 역시 그 이름으로만 사람들에게 기억될 것입니다. 낯선 곳에 가 있어서 내 이름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나는 그저 어디서나 흔히 만날 수 있는 ‘사람’ 혹은 많은 ‘여성’ 중 한 사람에 불과하겠지요.
집에서 기르는 개나 고양이에게도 모두 제각기 이름이 있습니다. 만일 그들이 집을 벗어나 다른 동네를 떠돈다면 그때부터는 더 이상 이름이 아닌 일반적인 개나 고양이로 인식되고 불리게 될 것입니다. 흔히 보는 개, 흔히 보는 고양이가 되는 것이지요. 반대로 밖에서 떠돌던 개나 고양이를 집에 데려와 이름을 붙이는 순간 그들은 더 이상 일반적인 개나 고양이가 아닌 세상에 하나뿐인 특별한 반려견, 반려묘가 됩니다.
길을 지나다 만나게 되는 ‘이름 모를 잡초’에게도 이름은 있습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일 뿐이지요. 비록 개별적으로 부여되는 이름은 없을지라도 광범위하게 불리는 이름은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그 이름조차도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꽃을 피우고 이 세계에 충분히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데도 단순히 ‘꽃’으로 치부되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흔히 알고 있는 장미나 백합, 민들레 등이 아니더라도 이 세계에는 이름을 가진 수많은 식물들이 있다는 것을 수목원에 가서야 새삼 깨닫게 됩니다. 그런 식물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도 몰랐던 것이 사실이고 보면 어쩌다 식물의 이름을 줄줄이 꿰고 있는 사람이 있을 때 그 사람이 신기하고 왠지 나와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입니다.
이름이 있다는 것은 존재가치가 있다는 것이고 그 이름을 누군가가 불러준다는 것은 그와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름은 스스로 부르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불러주는 것이고 불러주었을 때라야 특별한 의미가 생기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시인 김춘수는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라고 말하는 것이겠지요.
그저 단순한 ‘꽃’에 불과했던 식물도 ‘장미’나 ‘민들레’ ‘백합’으로 불릴 때 조금 더 의미를 갖게 됩니다. 만일 특별한 사람이 전해준 장미라면 그 장미는 내 방안에 꽂히는 순간 흔히 보는 장미가 아니라 사랑이나 우정이라는 조금 더 특별한 의미로 불릴 수도 있겠지요. 몸짓에 지나지 않던 그대가 이름을 불러준 나로 인해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름을 갖는다는 것,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 그것은 이 세계를 조금 더 특별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오래 잊고 있던 이름이 있다면 흰 눈 같은 그리움을 가득 담아 오늘 한번쯤 그 이름을 불러보는 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