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영화의 단골소재 중 으뜸은 우리의 믿음을 완벽하게 깨트리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그래야 마음이 불안해져서 영화를 보는 내내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불안한 가운데 집중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내가 겪어본 것들 중 가장 무서운 공포영화의 소재는 ‘엄마’와 잠잘 때 덮는 ‘이불’이었습니다. 가장 편안하게 휴식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대상이 갑자기 공포의 대상으로 바뀌는 순간 우리의 불안은 극도에 달하게 됩니다.
영화는 일부러 그런 대상을 찾아 신뢰를 깨트리는 것으로 일부러 불안을 만들어내지만 불행하게도 우리 사회에는 대상에 대한 신뢰가 깨져서 생기는 불안이 이미 만연해 있는 것 같습니다.
갤브레이스는 <불확실성의 시대>라는 책에서 “불확실성의 시대에 유일하게 확실한 사실은 서로 원자폭탄을 떨어뜨리면 분명히 지구는 멸망한다는 점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만큼 이 지구상에서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지요.
확실한 것이 없다는 것은 무엇이든 믿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대상이 어떻게 바뀔지 예측할 수 없는데서 비롯되며 그것은 필연적으로 불안을 동반하게 마련입니다.
길을 걸을 때는 차가 언제 나를 향해 덮칠지 몰라 불안하고, 멀쩡히 지나가던 행인이 언제 강도가 되어 나를 위협할지 몰라 불안하고, 내 이웃이 언제 나를 해코지 할지도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신뢰할만한 정치인이라고 생각했는데 돌아서면 온갖 비리의 온상이 되어 있는 일도 이젠 흔한 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일상은 끊임없이 불안합니다. 누군가를 믿지 못하는 일이 반복되면서 점점 이웃과 단절되고 점차 고독한 군중들이 가득한 불신의 사회가 되어갑니다.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인 만큼 반드시 누군가와 함께 해야만 하는데 무엇도 신뢰할 수 없으니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지고 둘보다 혼자가 편해집니다. 이것이 현재 우리가 겪는 사회적 불안의 양상입니다.
신뢰라는 말에는 언제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아야 한다’는 전제가 따라붙습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말과 행동이 변함없어야 한다는 것, 내가 한 행동이 어떤 결과가 나올 것인가를 계산하고 행동하거나 상황에 따라 바뀔 때 바뀌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그렇게 하리라고 예측 가능한 어떤 것이 바로 ‘신뢰’입니다.
불확실하고 변화무쌍한 이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것을 찾기란 너무 어려울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이 또는 사회가 지향해야 하는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가치와 그에 대한 믿음이 있고 그 믿음을 지속적으로 보여준다면 우리가 잃었던 신뢰가 어쩌면 조금씩 다시 쌓여갈 수도 있지 않을까요? 상황에 따라 대처방법은 조금씩 다를 수 있다 해도 종내에는 그것이 사람을 위한 것이고, 생명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라는 믿음…, 개인이 조금 손해를 본다 해도 종내에는 그것이 우리 전체를 위하는 것이라는 신뢰를 개인이 혹은 사회가 지속적으로 안겨줄 수 있다면 지금 우리가 겪는 이 불안이 조금은 가시지 않을까요?
신뢰의 궁극적인 목표는 그 사람과 함께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공동체의 목표이기도 합니다. 불신을 없애고 신뢰의 회복을 위해 노력하는 일은 사회적비용을 줄이고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지름길인 만큼 신뢰를 회복하는 것은 지금 우리 사회가 지향해애 할 가장 첫 번째 덕목이 아닌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