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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스미다 3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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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봄 Feb 09. 2022

23. 엽서 한 장

칠월, 어느새 주변에는 한껏 물오른 나무들이 푸름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가까운 천변을 걷다보면 여기저기 만개한 망초꽃이며 풀들이 지천으로 피어있어 계절의 절정에 이르렀음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초록의 풀밭 위를 신부의 순결한 웨딩드레스 자락 같은 날개로 날아다니는 백로들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이 계절이 지나고 나면 과실나무엔 열매가 주렁주렁 달리고 논에는 어느새 황금물결이 일렁이겠지요. 자연이 우리에게 슬며시 건네는 그 편지에 나는 또다시 소녀처럼 가슴이 설렙니다.           

며칠 전, 초로의 시인에게서 엽서 한 장을 받았습니다. 한참이나 어린 내게 그분은 가끔씩 엽서를 보내곤 하셨는데 흰머리를 곱게 틀어 올린 시인에게선 풀 향기가 느껴지곤 했습니다. 그 분이 보내는 엽서는 언제나 특별했습니다. 항상 달력이나 잡지에서 오린 여러 가지 그림으로 엽서를 꾸미고 잘 우려낸 차와 같은 몇 줄의 글을 또박또박 써서 보내기 때문이지요. 나는 잠시 일손을 멈추고 그 분과의 만남을 떠올려 봅니다. 갓 시인으로 등단한 내게 앞으로 발표할 시들을 정리하라고 꽃 그림이 그려진 노트를 사준 일이며 차를 마시며 함께 나누던 대화, 눈빛들까지…. 아마 흰머리 고운 시인은 그 엽서를 만들면서 내 웃는 얼굴을 떠올렸겠지요.          

한때는 나도 누군가를 향해 매일 편지를 쓰던 때가 있었습니다. 상대방의 얼굴을 떠올리며 글을 쓰다보면 어느새 시간가는 줄 모르고 밤을 새기 일쑤였습니다. 하지만 인터넷 메일을 사용하게 되면서부터 더 이상 손으로 쓰는 편지는 쓰는 일도 받는 일도 드물어졌네요. 며칠씩 집배원을 기다리며 행여 내 편지를 못 받아본 건 아닐까 애타던 마음도 이젠 한 번의 클릭으로 상대가 내 편지를 받아보았는지 여부까지 확인할 수 있으니 어찌 보면 참 편리한 세상인 것만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손으로 적어 내려간 짧은 엽서 한 장이 인터넷 메일과는 다르게 따뜻함으로 다가오는 것은 그 편지를 쓰는 이의 여유와 평온함이 글자를 통해 고스란히 내게 전해지기 때문이 아닐까요.          

첨단 과학은 우리의 일상을 현대적이고 편리하게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그 세련된 세상에서 사람들은 전보다 훨씬 피폐해진 느낌입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느린 것을 참지 못하고 빠르게 생산하고 빠르게 소비하고 빠르게 폐기해버리지요.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만나고 백일을 넘기기 힘들다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만남과 헤어짐에 대해 무감각해졌습니다. 만나고 잊히는 것이야 어쩔 수 없는 순리라 해도 그것이 인간이 만들어 낸 속도에 의한 것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아날로그적인 것들에 대한 그리움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깊어집니다.           

속도에 발맞추기 위해 우리가 잃어가는 것은 비단 우체통에 담긴 편지나 엽서만이 아닙니다. 인간에 대한 연민과 시간에 순응하는 기다림, 그리고 작고 여리고 순한 것들을 보듬고 그들에게 동화하는 마음의 여유도 함께 사라져갑니다. 나도 오늘은 잠시 짬을 내어 누군가에게 또박또박 눌러 쓴 글씨로 엽서 한 장 적어 보내고 싶습니다. 지난봄은 너무 짧아 정말 아쉬웠노라고, 10월의 멋진 가을에는 당신을 만나러 어느 날 문득 새벽 기차를 타고 무작정 떠나겠노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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