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 가장 많이 듣고 자란 말은 ‘착한 사람이 되라’는 말이었습니다. 그 착한 사람은 어른에게 절대 말대꾸를 하지 않아야 하고, 싫어도 내색하지 않아야 하고, 항상 칭찬 듣는 사람,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순종적인 사람이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
엄마는 ‘착한 사람’의 조건을 실천할 때마다 머리를 쓰다듬어주거나 엉덩이를 두드려주는 것으로 맏딸이 남들에게 인정받는 ‘착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을 흐뭇해 하셨고 덕분에 초·중·고등학교 때는 물론이고 어른이 되어서까지 야단보다는 칭찬을 더 많이 받으며 자랐습니다.
일반적으로 착한 사람이라고 하면 누구에게도 거절하지 못하고, 상대에게 고분고분하며, 자신이 말도 안 되는 피해를 당해도 꾹 참고 넘어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상대의 뜻에 반대하지 않고 잘 따르며 매사에 두루뭉수리해서 누구와도 잘 부딪히지 않는 사람 역시 일반적으로 착한 사람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착한 사람’의 정의에 자칫 순종적이라는 의미가 들어가는 것은 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건 길들여진 사람, 내 권력이 우위를 점할 때 당신은 내 아래에 있어도 좋은 그런 사람을 양산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나 엄마가 요구하는 대로 나 역시 점점 ‘착한 사람’이 되어갔습니다. 상대방이 싫어할 것이 두려워 거절하지 못했고 거절하지 못하는 만큼 거절당하는 것도 두려웠습니다. 싫은 것이 있어도 내색하지 못해 적당히 타협한 후 합리화했고 때로는 처음부터 내 생각 따위는 없는 것처럼 상대방의 의견을 채택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점점 ‘나’는 사라져갔습니다.
착하다는 말이 꼭 칭찬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 후로도 오랜 시간 뒤의 일입니다. 착하다는 말의 정의가 조금 잘못 되었구나 하는 생각, ‘나’라는 존재가 사라진 착함은 오히려 나를 병들게 할 수도 있고, 어쩌면 사람들이 ‘착하다’는 말을 ‘바보 같다’ 쯤으로 여길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건 더 이후의 일입니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착한 사람’의 의미를 ‘순종적인 사람’이 아닌 ‘자연스러운 사람’으로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연스럽다는 것은 억지로 꾸미지 않아 어색한 데가 없다는 말이고 인위적인 부분이 없다는 말이니까요.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 일부러 꾸미지 않고, 무턱대고 남에게 동조하지 않고, 자연스러움에 반하는 일을 목격할 때는 용기 있게 소신을 말할 수 있고, 때론 거절하거나 거절당하더라도 그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인정하는 사람으로 착한 사람의 의미를 이해한 것이지요.
어쩌면 순종적인 사람을 원하던 예전과는 달리 ‘착한 사람’의 의미도 이제는 조금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소신이 고집이 돼서는 안 되겠지만 무작정 착한 사람이 되기 위해 부당한 요구에 남의 눈치를 보며 참아내는 것이 아니라 소신껏 ‘안 돼’라고 거절할 수 있는 사람에게 ‘착하다’는 수식어가 더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 아이들에게는 거절을 두려워하지 않은 용기, 무조건적인 순종이 아니라 상대의 잘못에 대해 잘못이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아이들이라는 의미에서 ‘착한 사람’이 되라는 주문을 해 주는 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