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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봄 Feb 09. 2022

83. 안녕들 하십니까?

‘안녕’이라는 말에는 행복이 배어있습니다. ‘안녕하세요’ ‘안녕히 가세요’ ‘안녕하시죠?’ 등등 하루에도 몇 번씩 전하는 ‘안녕’이라는 단어에는 내가 아닌 상대방에 대한 안부를 기원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타자에 대한 존중이며 그들과 함께 평안하고 싶은 간절한 바람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인간의 삶은 이 ‘안녕安寧’이라는 두 글자를 완성하기 위한 과정일지도 모릅니다. 누군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것은 함께 어울려 살아가기 위한 배려, 잘 이별하기 위한 최소한의 연민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상대에게 항상 ‘안녕’이라 인사하고 ‘안녕’한가 질문하며 ‘안녕’이라는 말과 함께 이별을 고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누구에게도 차마 ‘안녕’이라는 말을 꺼낼 수가 없습니다. 나라가 편안하지 않으니 안녕이라는 말을 꺼내기도 민망한 노릇이지요.


몇 년 전,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제목의 한 대자보에 많은 응답 대자보가 나붙으며 사회적으로 안녕에 대한 생각들을 쏟아낸 적이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안녕하지 않습니다’라는 내용의 대자보를 많이 발견했고 내용을 살펴보며 우리 시대의 자화상을 확인하기도 했습니다.


‘수천 명의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었는데…안녕들 하십니까’라는 제목의 고려대학교 08학번 주현우 학생의 대자보에 이어 ‘이대로 무관심하면 계속 안녕하지 않겠지요’라는 대자보, 그리고 ‘더 이상 안녕하다고 최면 걸지 않겠습니다’라는 응답도 기억납니다. 그때의 글에서 느껴진 것은 목젖까지 치밀어 오른 젊은이들의 울분이었습니다. 차마 말이 되어 나오지 않는 목쉰 울음 같았다고나 할까요. 


그런데 요사이 대통령과 관련해 벌어지는 일련의 상황들에서는 그 목쉰 울음들이 드디어 말이 되어 터져 나오는 것 같습니다. 국민들에게, 깨어나지 않은 청년들에게 안녕하냐고 서면으로만 묻던 젊은이들이 가장 먼저 변화를 부르짖으며 광장으로 모여들고 있으니까요.


어떤 사람들은 아무리 해도 깨어나지 않는 젊은이들을 다시 깨어나게 만들어 준 이 정권에 고마워해야 하는 것인가 라며 자조 섞인 이야기도 하지만 그것은 더 이상 억누를 수 없어 터져 나오는 비명같이 느껴집니다.


미얀마의 아웅산 수치 여사는 “부패하는 것은 권력이 아니라 두려움이다. 권력을 잃을 것이라는 두려움은 권력을 휘두르는 자를 부패시키고, 권력의 채찍에 대한 두려움은 권력에 굴복하는 자를 부패시킨다”고 말했습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믿을 수 없는 현실들을 목도하며 나도 모르게 이 문장을 떠올립니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부패를 저질러도 된다는 확신을 심어준 것인가. 그것은 어쩌면 혹여 자신에게 가해질지도 모를 권력의 횡포에 대한 두려움은 아니었을까, 정치를 외면했던 우리의 잘못은 아니었을까.


며칠 전 또 다시 광화문 광장 가득 1만여 개의 촛불이 켜졌습니다. 그리고 그 촛불들은 또 다른 우리에게 질문합니다. 지금 우리는 정말 ‘안녕한 것인가’, 일상의 안녕은 무엇으로부터 비롯되는가 하는 질문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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