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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병욱 Feb 09. 2018

우키요에와 특허의 진보성

미술로 읽는 지식재산 제17편

가츠시카 호쿠사이 <가나가와 해변의 파도>

몇 년 전 일본 도쿄에 방문할 일이 있었다. 인천국제공항에서 출발한 비행기는 두시간 여의 비행을 마치고 도쿄의 나리타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에서 짐을 찾으러 가는데 공항 한편에 거대한 걸개그림이 하나 걸려 있었다. 바로 가츠시카 호쿠사이(葛飾北齋)의 <가나가와 해변의 파도>였다. 일본의 수도인 도쿄의 관문이라고 할 수 있는 나리타 공항에 거대한 그림을 걸어 놓았다는 것은 그것이 일본이 외국인들에게 자랑할만한 문화유산이라는 일본인들의 자부심이 담겨 있는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우키요에(浮世繪)는 18~19세기 에도시대의 여러가지 색채를 이용한 다색 목판화나 이에 영향을 받은 그림들을 일컫는 말이다. 우키요에의 '우키요(浮世)'는 '덧없는 세상, 허무한 세상'이라는 뜻의 같은 발음인 '우키요(憂き世)' 에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일본의 근대화 이전 서민들의 비참한 생활에서 염세적인 불교의 사상을 따라 현세를 덧없는 세상으로 생각한 것이다. 따라서 우키요에는 '덧없는 세상의 그림'이라는 뜻이 된다. 이 용어는 작가 아사이 료이(淺井了意)에 의해 1661년 처음으로 사용되어 초기에는 불교의 경전이나 신상(神像) 등을 제작하였으나, 차츰 일상생활과 여인들의 모습, 유녀들이나 기녀, 가부키 배우들을 묘사하기 시작한다. 우키요에가 덧없는 세상의 그림이므로, 현세에 향락을 추구하고 현실을 즐기자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이에 화가들은 속세의 모습들을 묘사하는 것을 중시하게 되고, 이것이 우키요에의 주된 화풍이 된 것이다. 우키요에는 초기에는 판화의 형태가 아니었지만, 대중들의 수요가 많아지면서 대량 생산이 가능하도록 목판화의 형태로 바뀌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일본의 우키요에가 서방세계, 특히 유럽에 미친 영향은 매우 컸다. 우리가 사랑하는 빈센트 반 고흐나 끌로드 모네를 비롯한 대부분의 인상파(Impressionism) 화가들은 우키요에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급격한 개방과 서양과의 교류를 확대하게 된다. 1855년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서도 일본은 자국의 문화재와 상품을 대량으로 전시하게 된다. 당시 일본의 도자기가 유럽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게 되어 이후 많은 도자기가 유럽으로 수출된다. 도자기를 만드는 기술은 중국과 한국이 훨씬 앞섰지만 서양에 적극적인 프로모션을 한 것은 일본이었다. 물론 영어로 도자기는 차이나(china)라고 하여 중국의 것으로 인정되고 있지만.


하여간 일본의 적극적인 도자기 수출로 유럽에서는 일본산 도자기가 유행하게 되고, 이 도자기가 수출되는 과정에서 깨지지 않게 포장을 할 때 일본에서는 흔한 그림이 그려진 포장지를 사용하게 된다. 도자기를 보호하기 위한 포장지에 그려진 그림들이 바로 우키요에였다. 이 그림들은 유럽의 화가들의 이목을 끌게 되고, 여태껏 보지 못 했던 이국적인 그림들에 마음을 뺏기게 된다. 대표적인 인상파 화가들이 그들이다. 포장지에 불과했던 우키요에를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나 에드가 드가(Edgar Degas)와 같은 인상파 화가에게 소개한 사람은 화가 겸 판화가였던 펠릭스 브라크몽(Felix Bracquemond)였다. 우키요에를 본 화가들은 본 도자기의 포장지를 수집하는데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이를 모사하거나 응용한 그림들을 그리기 시작한다. 일본은 도자기를 수출했지만, 동시에 자국의 그림과 문화를 수출하는 결과가 된 것이다. 이렇게 유럽에서 일어난 일본풍의 그림과 문화에 대해 '자포니즘(Japonism)'이라는 이름이 붙고, 세계 미술사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자포니즘이란 용어는 프랑스의 비평가인 필립 뷔르티(Philippe Burty)가 19세기 중반 이후 유럽의 미술에 나타난 일본풍의 취향과 이를 선호하는 현상을 정의하는 용어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에 기원이 있다. 이러한 자포니즘은 '일본풍', '일본식'이라는 의미로, 수 많은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는데, 대표적으로 인상파의 화가들이 그들이다. 우키요에는 화면의 중심에 인물이 없거나, 명암구분이 명확하지 않고, 원근법에 구애받지 않고 부감법 등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한편, 평면적이고 단순화한 화법과 윤곽선이 뚜렸하고, 색채를 과감하게 사용하는 등 기존 유럽 회화의 원칙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이에 인상파 화가들은 큰 충격과 영향을 받게 된 것이다. 자포니즘의 영향은 화가뿐 아니라 일반인들에게까지 크게 유행이 되어,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도자기를 비롯하여 여자들이 기모노를 입거나 일본의 병풍이나 부채로 집안을 장식하는 것이 유행이 될 정도였다고 한다. 


이렇게 우키요에에 영향을 받은 화가중에 대표적인 화가가 후기 인상주의의 대표인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이며, 그의 <비 내리는 다리(Japonaiserie Bridge in the Rain)>가 표본적인 그림이다. 아래의 그림을 보면, 한 눈에도 고흐가 우타가와 히로시게(Utagawa Hiroshige, 안도 히로시게라고도 불림)의 <아타케와 대교에서의 저녁 소나기(Evening Shower at Atake and the Great Bridge)>라는 우키요에를 모사한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색감을 더 강하게 하고, 그림의 틀 바깥에 일본 글자들을 베껴서 배치하는 등의 일부 살짝 변형을 준 부분도 있지만.

우타가와 히로시게 <아타케와 대교에서의 저녁 소나기>와 고흐 <비내리는 다리>

이 그림 외에도 고흐는 우키요에를 모사한 여러 점의 작품을 남겼는데, 역시 히로시게의 판화를 모사한 <일본풍, 꽃이 핀 자두나무(Japonaiserie, Flowering Plum Tree)>, 잡지 <파리 일뤼스트레(Paris Illustre)>에 실린 케이사이 아이센(Kesai Eisen)의 우키요에가를 모사한 <일본풍, 오이란(Japonaiserie, Oiran)> 등이 있다. 또한 <탕기의 초상화(Portrait of Pere Tanguy)>에서도 탕기의 뒷 배경에 위의 <일본풍, 오이란>을 비롯한 많은 우키요에 그림들을 배치한 것을 알 수 있다. 고흐는 1887년 벵(Beng) 화랑에 전시된 일본 그림들을 보고 큰 관심을 가지게 되고, 일본 판화를 구입하기도 한다. 

고흐 <오이란>
파리 일뤼스트레에 실린 우키요에
고흐 <꽃이 핀 자두나무>
고흐 <탕기의 초상화>

고흐 뿐만이 아니었다. 인상파의 주요 화가인 끌로드 모네(Claude Monet)도 자포니즘과 우키요에에 영향을 받았는데, 미국 보스턴의 현대미술관(Museum of Fine Art)에 가 보면 벽에 여러 점의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다가 어느 한 벽에 단 하나의 그림이 걸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그림이 모네의 <일본풍(La Japonaise)>이다. 

끌로드 모네 <일본풍>

모네의 이 그림은 자신의 아내인 까미유 모네(Camille Monet)를 모델로 그린 그림인데, 모네는 아내와 아들을 모델로 한 그림을 많이 그린 바 있다. 모네는 말년에 파리 근교의 지베르니(Ziverny)에 거주하는데, 집의 벽을 일본 판화로 장식하고 일본풍의 정원을 만들었을 정도로 일본 미술에 관심이 컸다고 한다. 역시 인상파 화가 중 하나인 에드가 드가도 자신의 그림에 있어서 중앙에 중심 인물을 배치하지 않는 등 구도를 잡는데 일본의 우키요에에 영향을 받았고, 영국의 화가인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James Abbott McNeil Whistler)도 일본의 우키요에를 수집하며 이에 큰 영향을 받는 등, 일본의 우키요에가 19세기와 20세기 초에 걸쳐 많은 서양 미술 대가들에 미친 영향을 실로 대단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이제 다시 처음의 그림으로 돌아가 보자.  


이 그림의 작가인 가츠시카 호쿠사이는 일본 미술사에서 그림에 미친 천재로 평가된다. <가나가와 해변의 파도>는 원래 그의 <후지산 삼십육경(富三十六景)> 연작 가운데 하나이다. 그림의 파도 뒤로 후지산이 그려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90년의 비교적 오랜 삶을 살았는데, 그 동안 자신의 이름을 30번 넘게 바꾸고, 온갖 기행을 일삼으며 수 많은 작품을 제작하였다. 우리 조선시대 말 자신의 그림이 돈이 될 것으로 판단한 양반이 자신에게 그림을 강요하자 붓으로 눈을 찔러 멀게 했다고 전하는 미친 천재화가 칠칠(七七)이 최북(崔北)이 연상되기도 한다. 


<가나가와 해변의 파도>는 멀리 후지산이 보이고, 그보다 더 큰 파도가 고깃배를 삼킬듯이 덮치고 있다. 배들의 운명은 파도 앞에서 어찌될지 모르는 상황이라고 보인다. 물론 파도의 모습이 단순화되어 있기는 하나, 발톱을 드러낸 존재로 보인다. 호쿠사이는 이러한 거대한 파도를 표현하면서, 자연의 웅장한 힘 앞에 인간이 얼마나 나역한 존재인지를 드러내고 싶어 한 것 같다. 역동적인 파도와 대비되는 후지산은 눈에 덮혀 있고, 파도의 왼편에는 그림의 제목과 호쿠사이의 서명이 있다. 이 그림은 현재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영국의 대영박물관, 파리의 국립도서관 및 일본의 기메 국립 아시아 미술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호쿠사이는 이처럼 자연의 모습을 주로 많이 담아 내곤 했다. 파도의 크기로 보아 지금의 발전된 선박기술에 따르면 크게 문제가 안 될 수도 있다. 그림에서의 배들은 나무로 만든 작은 배이니, 현대의 철로 만든 대형 선박에게는 그리 큰 파도가 아닐 수도 있다. 이 판화는 일본 판화에서는 처음으로 서양의 청색 안료인 프러시안 블루를 사용하였다고 한다. 이로 인해 일본에서도 아주 유명한 작품이 되었고, 이 작품에 영향을 받아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는 <산(Der Berg)>이라는 시를 썼고, 아실 끌로드 드뷔시(achille-Claude Debussy)는 교향시(symphonic poem) <바다(La Mer)>를 작곡하기도 한다. 교향시는 단악장의 교향악곡으로, 신화나 문학, 환상적 이야기 등 음악 외적 이야기나 묘사를 갖는다는 표제음악(program music, 음악만을 담는 절대음악(absolute music)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음악 외적 이야기를 담은 음악)으로서의 특징이 있다. 드뷔시의 <바다> 이외에도 유명한 교향시로는 장 시벨리우스(Jean Sibelius)의 <레민카이넨 모음곡(Leminkainen Suite)>, 베드르지흐 스메타나(Bedrich Smetana)의 <나의 조국>을 들 수 있다. 드뷔시를 우리가 인상주의 음악을 한 작곡가로 알고 있는데, 우키요에의 영향을 받은 그는 역시 인상주의 화가들과 맥을 같이 하는 음악가였다. <바다>는 제1악장의 '바다 위의 새벽부터 한낮까지', 제2악장은 '물결의 희롱', 제3악장은 '바람과 바다의 대화'라는 소제목이 붙어 있는 3악장으로 구성되는데, 제목만 보아도 호쿠사이의 그림을 연상시킨다. 전체 제목은 <바다-관현악을 위한 3개의 교향적 스케치(La mer -trois esquisses symphoniques pour orchestre)이다. 드뷔시는 상징주의 시인인 스테판 말라르메(Stephane Mallarme)와 교류하며, 그의 시 <목신의 오후(L'apres-midi d'un faune)>에 영감을 받아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을 작곡하기도 하였다. 

드뷔시

호쿠사이의 <가나가와 해변의 파도>에서 주인공은 역시 파도이고, 그 다음의 조연으로 세 척의 배가 있고, 이들을 처연히 목격하고 있는 후지산이 있다. 여기의 배는 당시 일본에서 생선을 잡아 운반하던 오시오쿠리(押送)라고 추정된다. 배는 비어 있고, 선원은 하나의 배당 8명의 선원이 타고 있다. 이 판화가 제작될 당시는 1831년인데,  영국의 산업혁명이 1760년 경에 시작되었고, 이러한 산업의 발전이 확산되던 시기였다. 당시 유럽을 중심으로 한 서양에서는 바다의 주도권 경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고, 배를 이용한 무역 규모가 급격히 증가하던 시기였다. 또한 이 그림이 제작되던 시기인 19세기 초에는 철구조선이 출현하였는데, 최초의 철선은 1818년 영국에서 건조된 발칸호(Vulcan)라고 알려져 있다. 이후 1858년에는 18,915톤 규모의 여객정원 4,000명에 이르는 그레이트 이스턴호(Great Eastern)가 진수될 정도로 빠른 발전을 이룬다. 이 배는 6개의 돛대와 2개의 증기기관으로 구동하는 외륜과 스크루 프로펠러(screw propeller)를 장착하고 있었다.

그레이트 이스턴 호

또한 돛을 갖춘 서배너호가 증기기관을 이용하여 대서양을 최초로 횡단하게 되고, 스크류를 이용한 배들이 속속 만들어진다. 1884년에는 증기터빈기관이 발명되고, 이어 1894년에는 디젤기관이 발명되어 여러 선박에 적용되기 시작한다. 그러니 <가나가와 해변의 파도>가 제작된 1831년에는 아직 증기기관이 없던 시기이니 당연히 증기기관이나 디젤 엔진을 이용한 배가 있을 수 없었음이 당연하다. 현재는 가스터빈과 디젤기관을 비롯하여 일부 원자력 기관을 이용하기도 한다.


2016년 7월 19일 미국의 연방항소법원(Court of Appeals for Federal Circuit)은 선박의 가솔린 엔진에 나한 특허침해 소송에 대한 판결이 있었다. 이 소송은 웨스터비크(Westerbeke Corporation)과 콜러(Kohler) 간에 벌어진 것이고, 이 두 회사는 모두 배의 발전기 세트(gen-set)를 제조하여 판매하는 경쟁관계에 있었다. 이러한 발전기는 가정용 모터보트에 사용되고 있고, 엔진과 제너레이터(generator)로 이루어진다. 발전기를 가동하면 다른 가솔린 엔진과 마찬가지로 일산화탄소(CO)가 발생하고, 이는 일정 농도가 넘으면 질식을 일으킨다. 보트에서 일산화탄소의 발생은 중요한 문제이고, 탑승자의 건강과 생명에 직결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를 어떻게 줄이거나 배기할 것인지가 문제가 된다. 웨스트비크는 저일산화탄소 발전기 세트를 '044 특허발명(2008년 등록)을 이용하여 제조하고 있었고, 이러한 세이프-CO 발전기('Safe-CO'라고 명명)를 보트에 2004년부터 채용하고 있었다. 두 명의 콜러사 직원은 전시회에서 웨스트비크사의 홍보영상을 보고 어떻게 일산화탄소를 저감하였는지 문의한다. 웨스트비크는 그들에게 세이프-CO 발전기가 촉매와 전자적 연료분사시스템을 통해 어떻게 일산화탄소를 저감하였는지 설명한다. 그로부터 약 1년 후 콜러사는 저일산화탄소 발전기 세트를 만들기 시작한다. 

웨스터비크 로고

웨스터비크의 자회사인 WBIP, LLC는 자신의 특허권을 콜러사가 침해했다고 주장하며 메사추세츠 연방지방법원(District Court of Massachusetts)에 소송을 제기한다. 이것이 2011년이며, 해당 특허는 위에서 언급한 7,314,044 특허와 또 다른 특허로 7,832,196 특허였다.

콜러사의 광고

이 특허침해 소송은 2013년 5월 공판이 진행되었고, 1심 판결에서 콜러사의 침해가 인정되어 3,775,418 달러의 손해배상을 하라고 판결한다. 이에 콜러사는 항소하게 되고, 이에 대한 판결이 난 것이다. 콜러사가 다툰 부분은 해당 특허의 청구항이 유효하지 않고, 그 기재도 적법하지 않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청구항이 무효(invalid)이며, 기재불비(written description)에 해당하여 무효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외에도 침해금지(permanent injunction)나 고의침해(willful infringement) 여부에 따른 징벌적 손해배상(treble damages) 및 변호사 비용(attorney fee)의 전가(shift) 문제도 있었으나 이는 생략하고, 특허 무효에 대한 부분만 살펴보도록 한다. 

WBIP의 '044 특허 대표도면

콜러는 전문가 증언을 요청하며, 해당 기술분야의 통상적 기술자(person having ordinary skill in the art; PHOSITA)라면 종래의 선행기술(prior art)을 결합하여 WBIP의 특허를 용이하게 도출할 수 있어 비자명성(non-obviousness)을 결여하였기 때문에 무효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콜러사가 주장한 특허는 미국 등록특허 No. 5,832,896이었는데, 이 특허로부터 WBIP의 특허는 통상의 기술자라면 자명하게 도출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소송에서 쟁점이 된 것 중 하나는 WBIP 특허가 무효가 되어야 하는지를 판단하는 것이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선행문헌으로부터 해당 특허발명이 용이하게 발명할 수 있다면 진보성이 결여되어 무효가 된다고 판단한다. 하지만 미국의 경우에는 우리나라와 유사하게 해당 특허의 무효여부를 판단할 때 해당 특허발명이 선행문헌으로부터 자명한 것인지를 판단하며, 이러한 판단에 더하여 소위 2차적 고려사항(secondary consideration)을 적극적으로 고려한다. 이에 따라 이 소송에서 쟁점이 된 것은, (1) WBIP의 특허가 선행기술부터 자명하게 도출될 수 있는지,  즉 미국 특허법 103조의 비자명성을 만족하고 있는지, (2) 객관적인 고려사항으로서, 예를 들면 오랫동안 해결되지 않은 문제였는지, 산업계의 평판이 어떠한지, 산업계에서 문제해결이 회의적이었는지, 선행기술과 얼마나 카피 제품이 등장했는지, 상업적으로 해당 제품이 얼마나 성공했는지 등을 판단하게 된다. 이를 차례로 살펴보자.


첫번째로, 선행기술로부터 WBIP의 특허가 자명한지 여부이다. 콜러사는 선행 특허로부터 WBIP의 특허가 통상의 기술자의 관점에서 보면 자명하게 도출될 수 있어 무효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법원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는는데, 먼저  '044 특허의 청구항 1항의 발명을 구성하는 구성요소(element)들은 선행의 특허에 다 기재되어 있는데, 이를 보트에 적용하는 것이 통상의 기술자가 자명하게 할 수 있는지 여부였다. 즉 다른 분야에서 이미 알려진 기술을 보트라는 분야에 적용하는 것이 자명한지를 판단한 것이다. WBIP는 선행의 특허가 보트에 채용되기 위해서는 배기통로에 워터 재킷을 채용하고, 점화 장치에도 전기적 부품을 적용하는 등 많은 부분에 변경이나 부가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법원은 WBIP의 특허가 엔진과 제너레이터로 이루어진 발전기 세트이고, 이는 자동차나 다른 분야에 적용되는 선행의 특허를 보트에 적용하기 위한 동기(motivation)가 충분하다고 판단하고, 콜러사의 주장처럼 자명한 기술이라고 보았다. 


두번째로, 소위 2차적 고려사항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객관적인 고려사항에 대해 법원의 판단을 살펴 보자. 이러한 2차적 고려사항은 우리나라 특허심사에서는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1차적으로 선행기술로부터 용이하게 발명할 수 있어 진보성이 부인되면 2차적 고려사항들이 긍정적이라도 진보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우리나라의 실무이다. 반면, 미국에서는 우리나라와 달리 1차적으로 선행기술로부터 자명하다고 해도 2차적 고려사항에서 이를 뒤집어 자명하지 않아 무효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는 경우가 많다. 이 사건의 경우에도 1차적으로 선행의 특허로부터 자명하다고 판단했지만, 2차적 고려사항들을 다시 판단한 것이다. 만일 우리나라의 특허실무라면 2차적 고려사항을 판단하지 않거나, 판단하더라도 이를 이유로 진보성을 인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사건에서 법원은 1차적으로 자명한 발명이라고 하였지만, 2차적 고려사항을 보았을 때도 자명한지를 판단한다. 먼저, 콜러사는 WBIP가 제시한 선행기술의 증거는 제시된 증거와 특허발명의 효과 내지 이점과의 관계를 명확하게 보여주지 못 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법원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다음으로, WBIP의 해당 특허발명이 업계에서 오랫동안 해결되지 못 한 과제인지 여부를 판단하였는데, 이에 대해 법원은 WBIP의 특허발명이 해결한 문제가 해결을 필요로 한 기간이 수 년에 불과하여 오랫동안 해결되지 못 한 과제에 해당하지도 않는다고 판단하였다. 또한 해당 산업계의 평가에 대해서도 판단하였는데, WBIP의 특허기술이 미국의 전국해양제조자협회에서 주는 혁신상을 받는 등 관련 산업계의 평가를 긍정적이라고 판단하였다. 그 다음으로, 업계의 회의론에 대한 판단을 하였는데, 이는 관련 산업계에서 WBIP의 특허발명의 문제 해결이 회의적이었는지를 판단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법원은 WBIP의 전문가 증언 등에 비추어 봐서 저일산화탄소 배출효과가 있는 발전기 세트를 개발하는 것이 어렵다는 판단을 한 것이 합리적이라고 판단하였다. 법원은 다음으로 콜러사가 웨스터비크의 기술을 베낀 것인지 여부에 대해 판단하였는데,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콜러의 종업원 2명이 전시회에서 웨스터비크의 기술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는 것이 인정되므로, 웨스터비크의 기술을 충분히 베낄 수 있었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상업적인 성공에 대해 살펴 보았는데, 법원은 해당 보트 업계에서 모방품이 얼마나 나왔는지를 보았는데, WBIP는 이미 콜러사의 저일산화탄소 발전기에 대한 상당한 수준의 상업적 성공을 증거로 입증하였으므로, 이는 WBIP의 특허발명의 가치를 인정하는데 긍정적인 가치가 있다고 보았다.

WBIP v. Kohler 미국 연방항소법원의 판결문

결국, 법원은 위와 같은 이유로 선행의 특허로부터 해당 기술분야의 통상의 기술자의 입장에서 볼 때 자명한 기술임을 인정하고도, 나머지 2차적 고려사항에서 특허발명의 특징을 인정하면서 이로부터 상업적인 성공을 하였고, 보트 산업계의 인정도 받고 있으며, 특허발명이 해결한 과제가 어려운 과제였으며, 콜러사가 웨스터비크의 기술을 베꼈다고 인정되므로 해당 WBIP의 특허가 선행의 특허로부터 자명하게 도출되는 것이 아니어서 무효가 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결국 판결이후 사는 합의에 이르렀고, 2016년 분쟁을 종료하였다.

2016년 12월 웨스터비크와 콜러의 합의 발표(웨스터비크사 홈페이지)

 만일 우리나라였다면 무효로 판명날 가능성이 높았지만, 미국에서는 반대의 결론이 난 것이다. 이처럼 전 세계적으로 특허제도와 법률 및 법원의 태도는 많은 통일과 조화를 이루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서로 차이가 있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우리는 구체적으로 어떤 나라에서 분쟁을 겪든 그 나라 특유의 제도나 법원의 해석 및 태도에 맞추어 전략을 수립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라는 말처럼.


앞서 이야기한 릴케의 시 <산>의 전문으로 마무리한다.


TheMountain
      
Six and thirty times and hundred times
the painter tried to capture the mountain,
tore it up, then pushed on again
(six and thirty times and hundred times)
      
to the incomprehensible volcanoes,
blissful, full of temptation, without counsel,—
while the outlines of his glory
went on without coming to an end:
      
Fading a thousand times out of all the days,
nights without comparison from which
dropped, as if they were all too small;
each image at the moment it was needed,
increasing from figure to figure,
not partaking and far and without viewpoint—,
then suddenly knowing, as in a vision,
lifting itself up behind every crev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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