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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하고 울었다, 그것도 주저앉아

프롤로그 : 초계획 초효율 인간 기자의 퇴사 일기

by 노력충의 반란 Mar 25.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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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한테 바디로션을 발라 달래?


오랜 기간 운동을 해 왔다. 요가, 헬스, 필라테스까지 10년을 넘게 운동을 해오면서 헬스 PT도 1:1 필라테스도 그룹 레슨도 모두 해봤기에, 나에게 운동 시간이란 오직 내 몸 컨디션에 맞춘 루틴을 스스로 만들어가는 혼자만의 시간이다. 헬스장에 가서는 잡생각 없이 루틴에만 집중하고, 씻는 동안에는 집에서는 누리지 못할 한 바가지의 뜨거운 물을 온몸으로 맞으며 온기를 만끽한다. 그래서 나에게 헬스장이란 공공장소이면서도 무방비 상태가 되는 공간이기도 하다.


근육량 폭발하던 시절 성난 등 자랑하고 싶어서 입어 봤던 원피스. 


꽤나 고강도 운동을 했던 날인 것 같다. 운동을 마치고 씻고 머리를 말리고 있었다. 온수 샤워까지 하고 나니 몸이 꽤나 노곤노곤했다. 아무런 의식도 없이 그저 머리만 말리고 있었다. 옆에서 누군가 말 거는 소리가 들렸다. 나에게 하는 소리였다. 

“바디로션 좀 발라주면 안 돼요?”

“싫은데요”

(수군수군) ‘거봐, 내가 쟤 싸가지없댔지’

나보다 열댓 살은 더 되어 보이는 그녀에게 자동 반사로 “싫은데요”가 나온 이유를 이제 와서 따져보자면,  우선 그들은 몰려다니며 드넓은 스트레칭 존과 헬스 기구를 차지해 잡담을 떨며 헬스장이 떠나가라 웃어젖히는 데다, 샤워실에서의 비매너는 차마 형용하기도 힘든 수준을 보여줘 왔으며,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지나가는 이들(나도 그중 하나다)의 몸매와 외모와 운동 자세를 평가해 오는 것을 수도 없이 목격했기에. 내심 그들이 나에게 평소 눈엣가시였다는 점이 있었다.

요가매트를 모두 차지해 내 운동을 방해했다는 이유로 생긴 억하심정이 없었다 할지라도,  내가 모르는 이의 등에 바디로션을 발라줄 만큼 친절한 인간이 아니라는 이유도 강력하다. 짝꿍과 가족과 친한 친구와 동료 그 이외의 생명체들에게 나는 언제나 꽤나 냉소적인 생명체였으니까.


그냥 있을 법한 이야기다. 언젠가 다른 어딘가에선가 일어날 법한 이야기다. 그리고 평소처럼 집에 돌아와 그에게 이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문제는 이야기를 마칠 즈음 눈물이 쏟아졌다는 거다. 나에게 있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내가 할 만한 반응이었다. 내가 그에게 공유할 법할 수다거리였다. 근데 그것이 왜 그렇게나 서러웠으며 그리 울컥했냐는 거다.



#내 인생 세 번째 F5


최근 직장을 관뒀다. 그 행위는 나에게 회사를 그만뒀다는 개념과 함께, 내 인생의 한쪽 문을 여닫는 행위였다. 말하자면 인생 F5키를 누른 것이다. 6년 간 기자 명함을 지녔다. 다른 꿈을 꾸다 우연히 찾은 길이었지만 부딪히고 깨지고 하루하루 배우고 성장해 왔다. 다시 태어나도 기자를 하겠어?라는 질문에 “예!”라는 대답이 1초 만에 나올 정도로 일을 사랑했다. 그 마음은 지금도 유효하다. 망해가는 업계라는 평판과 박봉이라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지만 그보다 일이 주는 의미가, 그저 내가 일을 사랑한다는 마음만으로 충만했다. 일이 지겹고 이 길이 맞나 의구심이 들 때마다 이 일을, 나만의 방향으로, 더 열심히 하는 것이 답이라고 여겼다. 열심히 했다. 널리 이름을 알리고 세상을 이롭게 한 기자생활을 한 것 같진 않지만 나의 최선을 다했다. 다시 돌아가더라도 딱 내가 한 만큼의 정도의 일만큼 해낼 수 있겠단 느낌이 들 정도로 진심으로 일했다. 좋은 동료들에게 많은 배움과 배려와 사랑을 받았으며, 평생의 동반자도 만났다. 한창 일에 열심이던 시절의 일기장에는 “지금은 내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시기로 기록될 거야. 하루하루 허투루 보내지 말자.”라는 멘트가 수도 없이 적혀있다.

1인 3인분의 역할을 해내던 이 날을 기억해. 고생했다 나 자신.. 


그러나 이 일을 평생 하겠어,라는 마음은 아니었다. 2~3년 차쯤 되었을 때 큰 번아웃과 함께 내 커리어에 점프업이 필요하다는 자각이 크게 일었다. 그 시기부터 나의 넥스트 스텝을 찾겠다며, 스스로도 성장할 수 있고 사회에도 기여할 수 있는  업을 찾아 멋진 기자 출신 OOO이 되겠다며, 시간을 쪼개 영어 공부를 하고 매일 책을 읽고 누구도 시키지 않은 기획안을 만드는데 열을 올렸다.  내 인생 두 번째 F5를 눌렀다고 해도 좋을 만큼 이 시기에 많은 노력을 했고 많은 성장을 했다. 일을 사랑하는 마음과 별개로 내가 바치는 노력과 업무 강도에 비해 턱없이 적은 월급, 세상은 빠르게 변해가는데 여전히 윤전기에 의존하고 있다는 동기도 분명히 작용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흘러 6년 차 기자가 됐고, 그 사이에 그저 그런 기사, 좋은 기사, 그냥 할 만한 취재, 해 볼만한 취재, 쉽고 어려운 취재 모두 해보았으며, 결혼도 하였다.


매일 했던 토플 공부, 오늘을 기록하고 반성하고 미래를 설계했던 소중한 시간들.



#난 기계가 아니었어


시간은 금이라 생각하기에 성격이 급하다. 뭐 하나 진득하게 기다리는 법을 모른다. 엘리베이터가 내려오는 걸 기다리기가 귀찮아 계단으로 걸어 올라갈 정도이니, 아마 나의 가족 중 2인이 소방관이 아니었다면 습관적으로 무단횡단을 하는 인간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식사도 먹을 만큼 먹으면 끝! 하고 상을 치운다. 잠을 설쳐 몸이 무거운 날에도 이만 잤으면 됐지, 끝! 하고 몸을 일으킨다. 커피를 사러 가거나 내리는 시간도 아깝고 귀찮아서 20초만 탈 수 있는 스틱 커피를 선호한다. 숫자로 세어지는 개념이라기보다, 그냥 나에게 다가오는 느낌이 있다. ‘이 정도면 되었다’라는 느낌일 수도 있고, ‘이걸 했으니, 자 이제 다음 과업!’이라는 느낌일 수도 있다. 그 느낌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철저하게 계획을 세우고 그에 따라 움직이기도 하고 시간을 칼같이 지키기도 하지만 대개 내 안에서 들리는 목소리와 느낌이 있다. 그리고 경험상 선택을 하는 데 있어 그 느낌은 대체로 맞았고, 지나고 보니 옳았다. 


거창한 이유가 많았지만 퇴사의 이유 중 하나도 이 느낌 때문이었다. 짝꿍의 위로와 권유와 다독임이 큰 역할을 해주기도 했지만, 내 인생에서 기자 그림 6년 그렸으면 됐어. 열심히 했어. 이제 다른 문을 열어서 다른 책을 써보겠어,라는 느낌도 크게 작용했다. 곧장 퇴사 통보를 하고 사직서를 냈다. 그간 쌓아온 많은 것들, 취재력이든 문장력이든 기획력이든, 업무 스킬을 떠나 그냥 나의 내공을 믿었다. 연초에 사직서를 냈기에 그간 누적된 연차가 많아서 퇴사일을 앞두고 한 달 이상을 쉬었다. 퇴사를 하서 재정비를 하는 동안 어떤 일들을 할지 체크리스트로 철저하게 계획했다. 일하는 인간일 때와 마찬가지로 새벽같이 집을 나서 노트북과 태블릿을 켜고 무언갈 쓰고, 읽고, 공부했다. 그저 쉬기도 하고, 새로운 직장에 지원해 보며 면접도 봐보고, 여행도 다녀왔다. 시간은 금세 흘렀다.  퇴사 당일 모든 동료에게 인사를 마치고 단톡방도 삭제했다. 회사와 관련된, 기자 일과 관련된 모든 것에서 철저하게 나를 지웠다. 그 행위 자체는 괜찮았다. 이제까지 퇴사한 동료들이 하던 방식대로 인사했고, 스스로도 안녕을 고했다. 


내가 쓴 건 아니고.. 인터넷에 돌아다니던 귀여운 퇴사 짤.. 


그런데 그런 나에게, 헬스장에서, 모르는 그녀가, 내가 운동하고 싶었던 요가매트를 늘 얄밉게 차지하던 그녀가,  바디로션을 발라 달라고 한 거였다. 근데 그게 그렇게 울컥할 일이었냐는 거다. 그 울컥함은 그냥 올라온 것이었다. 아기가 분유를 토하듯 올라온 것이었다. 내 울음을 보며 당황하는 짝꿍에게 내가 왜 울었는지 설명할 수도 없었다. (그도 굳이 나에게 왜 우는지 묻지 않았다.) 그냥 심신이 다 지쳤고 하관과 아랫목에 울음이 가득 차 있었다. 어딘가  특별히 아픈 건 아닌데 정말 너무 많이 피곤했다. ‘아이고 고되다 피곤하다’ 정도가 아니라 몸 전체에 누군가 압박붕대를 묶어두었다가 잠시 숨을 고를 때 급히 풀어주고, 다시 붕대로 금세 휘감아버리는 것이 반복되는 느낌이었다. 내 기준 내가 하든 모든 ‘생산적인 일들’에  대해 손을 떼어야 하겠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아직 목구녕에 울음은 가득 차 있었지만 눈물을 그쳤다. 일부러 멈춘 건 아니었다. 그냥 느낌이 들었다. 다 울었네, 끝! 하고. 눈물샘이 아쉬워하는 듯했다. 나 오랜만에 일 좀 했는데, 지금을 위해 아껴왔는데, 쩝. 모든 ‘생산적인 일들’에 손을 떼고, 사람도 만나지 않을 것이며, 자유롭게 시간을 쓸 것이라 선언한 나는 ‘일주일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기’라는 줄글마저 알람에 맞춰두었다. 돌아보니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지만, 그 모습조차 나다. 그다음 날엔 새벽 5시에 칼같이 눈을 떴다. 약속했던 일주일은 지키지 못했다. 운 건 운 거고, 좀이 쑤시는 건 쑤시는 거다.




#평생 지키고 싶은 장면에 대하여


이 모든 과정 속에서 나의 건강은 많이 무너졌다. 건강검진 결과서에는 겨우 저혈압 하나 주의하라고 명시되었지만, 나도 안다. 내 몸이 지금 쓰레기란 걸 (ㅋㅋㅋ). 정신 마음 몸 모두 지쳐버린 나에게 짝꿍은 퇴사를 강력히 피력했다. 쉬었으면 좋겠다, 가 아니라 쉬어야 한다. 의 수준이었다. 나도 동의했고 그렇게 기자의 끈을 놓은 건 정말 잘한 선택이었다. 나의 성장을 위해서도, 재정비를 위해서도.

바디로션 눈물 사건 이후 그가 내게 해준 음식들. 다른 음식들도 짱짱 많은데 이게 젤 맛있었다>_<  시금치크림리소토+양배추쌈+땅콩소스!!!


퇴사 이전에도 비슷했지만 퇴사 이후 더더더 밀착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특히 저녁엔 거의 매일 같은 공간에서 함께 시간을 보낸다. 둘이 있는 시간이 좋고, 세상에서 가장 서로에게 서로가 가장 유익한 존재라는 걸 알기 때문이라는 점도 있지만, 나의 경우 저녁 시간이 곧 온전히 쉬는 시간이자 에너지를 충전하는 시간이기에 대부분 움직이지 않는 편이다.(ㅎㅎ)  반대로 야행성인 그는 저녁 시간에도 뭐가 됐든 무언가에 몰입하거나 작업을 하거나 오래오래 여유 있는 식사 시간을 갖기도 한다. 함께 긴긴 대화를 나누는 밤도 많지만 많은 경우 이러하다.


침대에 앉아 하릴없이 영화를 보거나 핸드폰을 하고 있으면 슬쩍 방문이 열린다. 나의 컨디션을 살피러 오는 건지 내가 보고 싶어 오는 건지  그냥 오는 건지 모르겠다. 별안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만 알고 있는 은어로 대화하고 시시덕거리며 재롱잔치를 벌인다. 재롱잔치는 짧으면 20초 길면 2분이면 끝난다. 사진을 찍어두는 경우도 많지만  사진을 찍다 보면 장면을 놓치는 경우가 많아서 주로 눈에 담아 둔다. 찍어둔 사진은 일과 중에 종종 꺼내어 본다. 멍하니 쉬고 있는 나에게 두 팔 벌려 다가오는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나는 이 장면을 평생 지킬 것이다, 이 장면을 평생 사랑할 것이다. 나는 평생 이 장면을 지키기+보호하기+유지하기 위해 살아갈 것이다’라는 글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32년을 살며 몰라 왔던 지키고 싶다, 지키겠다, 지켜주겠다, 지켜주고 싶다는 보호와 지킴이라는 개념을, 그리고 이것 또한 ‘사랑’이라는 전체 집합의 일부라는 것을, 그가 나에게 알게끔 해주고 있다. 사랑이 무엇인지 사랑하는 법이 무엇인지 배운다.


바디로션 눈물사건 이틀 뒤에 공짜로 다녀온 호텔. 와인+맛있는 거+야경 = ♡


계획과 효율은 목숨이며 매일 책상에서 책으로부터 공부해야 한다는 키워드로 살아왔다. 이 키워드는 그를 처음 알게 된 뒤 단 1~2시간 나눴던 대화에서 무력해졌다. 혼자 책상 앞에서 씨름하는 8시간보다 그와 나눈 30분 간의 대화가 주는 성장의 크기가 컸다. 나이를 먹으면서 혼자서도 힘을 내고 피로에서 회복하는 방법 (=운동, 글쓰기, 잠, 독서, 여행  등등)도 나름으로 찾을 수 있게 됐지만, 나에겐 두려움이 없다. 세상에 오직 한 사람만 있으면 된다. 세상에 오직 한 사람만 있으면 된다. 세상에 오직 단 한 사람만 있으면 된다. 하늘을 전부 가진 척하는 것보다는, 어떤 것을 아주 조금만 갖는 편이 우주에 대한 특별한 감정을 더 깊이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조금씩 깨우쳐가고 있다. 함께 살며 배우고, 성장한다.


돌아보면 바디로션이 아니라 나를 발견하는 때마다 세상 밝은 얼굴로 양팔을 벌려 달려오는, 그의 양팔이 테두리와 울타리가 되는 그 세상이, 내가 구르다 온 세상과 온도가 너무 달라 눈물이 났던 것도 같다. 이 세상에서 당신이 내게 주는 이 사랑만큼 부족함 없이 느껴지는 게 또 있을까 싶다. 당신과 함께하며 이해하고, 지켜주고, 사랑하는 것만큼 멋진 일이 또 있을까 싶다. 아마 없을 것이다. 세상에 오직 단 한 사람만 있으면 된다는 것 역시 느낌이었다. 그도 느끼고 있을 것이다. 나는 이 느낌을 믿는다. 우리는 이 느낌을 믿는다. 이것이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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