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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별 Jun 18. 2021

누군가의 평온한 일상을 깨뜨리기 싫어서

보내지 못한 편지


Y에게


익숙한 편지지에 익숙한 너에게 몇 자 적어 본다.




어제, 너는 카톡으로 웃기는 영상이라며 링크를 보내줬어.


마음이 헝겊처럼 너덜너덜한 상태에서 너의 카톡을 보 현실과 괴리감을 느꼈지.


하지만 네게 그 현실을 말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에 대한 생각이 들더라.


평화로운 일상 속에서 너무나 당연하게 누리던 햇빛, 커피 한 잔의 여유,


웃긴 동영상을 보며 피식 웃는 그 순간이 어느새 너무나 먼 세계가 되어버렸다면.


남들과 공감할 수 없는 나만의 슬픈 현실에 처하게 되었다면.


타인을 나의 공간으로 끌어들이는 것보다 나는 또 다른 아바타를 두고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게 낫겠지,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한 번도 일식이니 월식이니 볼 생각도 하지 않았던 내가 어제는 달을 찾으러 나갔어.


소원 좀 빌어 보려고.


하지만 그렇게 시도 때도 없이 고개를 들면 보이던 달이,


하필이면 간절히 찾아 헤맬 땐 보이지 않더라.


생전 처음 개기월식을 보러 시간에 쫓겨 밖엘 나갔단 말이지.


그런데 또 하필 그때 한 번도 통화를 한 적이 없던 아빠 친구분께 전화가 왔어.


마음은 급한데, 또 당황스러운 전화에,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지.


전화를 애써 해 주셨다는 게 너무 감사하고


그분께선 친구의 비보에 친구 딸인 나까지 걱정이 되어서 이렇게 전화를 주셨으니


흔치 않은 정성에 안타까울 정도로 감동적인데,


근데 그게 너무 싫은 거야.


아빠를 위해 절에 기도를 하러 가시겠다고 하시는 거야...


"그래, 아직은 모르는 거지만 또 사람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그쟈?"


아빠는 친구들 사이에서도 정 많으신 분이라


이렇게 천일기도를 기꺼이 해 주시겠다는 친구분도 계시는데,


그런데 그런 아빠가 하필,


왜 하필 편찮으시게 된 걸까.




Y, 어제는 아빠가 서울에 있는 큰 병원에 진료를 받으러 가신 날이었어.


그리고 정밀검사를 위한 입원을 예약하고 돌아오시던 날이었지.


최근에 받으신 건강검진 결과가 너무 안 좋아서,


우리 가족은 모두 다 노심초사하고 있어.


차마 입에 올리기도 싫지만 Y,


아빠가 폐암이실지도 모른대.


나 아직 실감이 안 나.




문득 너의 반려견이 생사의 갈림길에 있을 때 네가 이런 기분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라.


너는 담담한 목소리로 소식을 전했지.


나는 그때 최선을 다해 너의 슬픔을 상상하려 애썼어.


네가 위로가 된다는 말을 듣고 조금은 안심이 되었지.


하지만 과연 너는 위로가 되었을까?


다른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아픔을 홀로 삭이고자 했던 시간들.


타인의 슬픔에 우리는 공감할 수가 없는데


ㅡ 심지어 나도 위로했으면서 그럴 수 없다고 믿는데 ㅡ


차라리 타인의 슬픔을 모르는 게 더 나은 게 아닐까?


여전히 그에게도 일상은 존재하니까.


누군가의 평온한 일상을 깨뜨리고 싶지 않고


아무렇지 않은 너와 이야기하면


나도 그 평안한 일상을 누리는 것처럼 착각할 수 있을 테니까.




언제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좋지 않은 소식을 무슨 뉴스라도 되는 것처럼 알리고 싶지가 않아.


내가 지금 말이 없다고 해도 이해해줘.


훗날 너는 이해해 줄 거라 믿어.


대신 네가 가장 슬플 때, 너에게 말하고 싶어.


우리 슬픔의 온도가 비슷할 때 너의 그 감정을 빌려서 얘기해 줄게.




미안해,


편지를 다 쓰고 나니


보내지 못할 거란 예감이 이제서야 드네.




어제는 개기월식이라던 그 귀한 달을 결국 찾을 수 없었지만


언젠가 어느 흔해 빠진 달을 찾을 수 있길.


문득 은은하게 주위를 감싸고 있던 달빛에


환한 은가루처럼 뿌려진 밤 풍경에 새삼 감탄을 하며,


지나가는 말처럼 소원을 빌 수 있길.




안녕.


보고 싶다.




2021년 5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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