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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별 Apr 21. 2022

아빠는 더 이상 옛날 아빠가 아니다


지금이 세 번째인가.

아니면 네 번째였나, 다섯 번째였나.


아빠가 지난해 암 선고를 받으신 후, 9개월이 지났다. 그동안 아빠께서는 아까 세어본 것처럼 한 세네다섯 번쯤 집안을 뒤집어 놓으셨다. 해말간 햇살과 벚꽃이 흩날리는 봄날, 그에 반해 우리 집은 난리 벚꽃장이었다. 아빠 덕분에 온 가족이 난리를 겪는 수밖에 없었다.


쓰나미처럼 갑작스레 몰아닥치는 아빠의 '화'.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어쩌면 분노일 것이고 너무나 억한 심정일 것이다. 아빠는 맹폭하셨고 거침없는 독설을 무기로 쏘아대셨다. 거기에 무방비 상태로 맞는 것은 언제나 늘 엄마였다.


도대체 어쩌다 아빠의 화를 돋구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 순간들 투성이었다. 분명히 아빠는 오전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셨고 평소에는 자주 점심 약속이 있으셨지만 그날은 딱히 점심 약속이 있다 없다 엄마께 말씀하지 않으셨다. 한 시가 넘어서까지 점심시간을 넘겼지만 아빠는 친구분과 하하호호 웃으시며 통화를 끝내고 나서, "점심은~~?"이라고 엄마께 물어보셨다. 엄마는 별달리 준비된 것이 없었기에 "뭐 먹을래요? 칼국수 먹으러 갈까?"라고 물어보셨다. 그러고 나서 아빠는... 폭발하셨다.


도대체가 니는,

내를 죽이려고 하나,

맨날 이런 식이고,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노,

굶어 죽으란 말이가,

니는 내가 죽기를 바라제,

6개월 선고받고 아직까지 살아있는 내가 잘못한 기제,

내가 잘못했네,

그래, 내가 어서 빨리 죽어야지,

죽어야 안 되겠나,


.

.

.


다시금 되새겨 본다.


되새길 수밖에 없다.


저주와 같은 그 말들을 쓰노라면, 다시금 억장이 무너져 내린다.


이건 아빠의 말이 아니었다.


내가 기억하는 아빠는 교양 있고 이성적이셨고, 본인 스스로 "객관적이고자 노력한다"는 말씀에 거짓됨 없는 분이었다. 평생을 환자를 돌보신 한의사이셨고 또 학생들을 가르치시던 교수님이었던 아빠는 이제 온데간데없었다. 우리 집에서 난닝구를 입고 계셔도 그저 든든하고 멋지기만 했던 우리 아빠...... 그분이 아니었다.


아빠는 내가 모르는 사람으로 변해버리신 것 같았다. 마침내 하이드 씨로 빙의된 지킬박사처럼, 하지만 요즘 들어 자주 하이드 씨는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 같았다. 그는 속사포처럼 울분에 가득 찬 말을 퍼부었다. 그동안 참고 참았던 감정을 더해 분노에 분노를 쌓아갔다. 마치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아빠는 엄마를 항상 미워했던 것처럼, 그 분노는 너무나 맹렬하기만 했다.


아니, 도대체 왜 지금 아빠가 화를 내시는지 알 수 없었다. 엄마는 거의 아무 말도 못 하셨다. 그저 당황스러웠고 그저 놀라우셨으니까. 하지만 엄마도 참다못해 한 마디 덧붙이셨다.


"더 어떻게 해줘야 되는데? 나도 지친다 지쳐..."


하지만 그 말 또한 아빠의 화를 더 돋우기만 할 뿐이었다.


한두 번 겪은 게 아니었지만, 매번 어쩜 이리 새로울까. 낯선 아빠의 모습을 받아들이는 건 어려웠다. 별 일 아닌 일로 치부하고 싶었지만, 자꾸만 독설은 되살아나서 아직도 뜨거운 감정 그대로 마음을 후벼 판다. 엄마는 또 우셨다. 나는 또 눈을 감아버렸다.


아빠는 너무 억울해서 화를 내신다.

아빠는 너무 답답해서, 내 탓 아닌 남 탓을 하기를 바라고 화를 내신다.

아빠는 그렇게 엄마에게 실컷 화풀이를 하고, 발걸음마다 화풀이를 하고, 차키를 움켜쥐는 손아귀에 짤그랑 화풀이를 하신다.


아빠는 그 길로 나가버리시고야 말았다. 다시 집에 들어왔다가 다시 나가시길 반복하며...  점심도, 저녁도, 끊임없이 화를 내셨다. 그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엄마가 매번 떡하니 밥상을 차려놓고 밥 한 숟갈이라도 먹어보라고 말해도 눈길 한번 주지 않으셨다.


아빠는 시위를 하시는 거였다.


"6개월 살아야 되는 놈이 뭔 밥을 먹노"라시며 보란 듯이 나가버리셨다.


꼬박 이틀을 밖에서 드신 뒤에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빠께서 멀리 떠나셨다. 매달 서울 병원에 예약돼 있는 정기 검진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빠는 아침밥도 마다하고 엄마가 터미널까지 태워준다는 것도 마다하고, 아침부터 나가버리셨다. 아빠의 가시가 돋친 저주의 말들이 친친 감고 있는 집안 분위기였기에 아빠가 떠나시고나서 조금이나마 그제서야 집안에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암환자는 몸도 병들고 마음도 병들고.


아빠는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 걸까.


뒤늦게 다시금 아빠 생각을 한다.


 아빠가 안 계셔서 평화로운 듯했지만 깊은 불안함을 감출 수 없었다. 자꾸만 걱정스럽다. 이렇게 아빠가 자꾸만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여버리는 날들이 잦아지면 몸 건강도 안 좋아지실 게 불 보듯 뻔한 것 같아서, 그게 제일 걱정되는 부분이었다.


내가 보기엔... 아빠는 지금 정상적인 상태로 보이지 않았다. 아빠는 지금 '이상(異常) 한 상태'였다. 몸도 이상하고 마음도 이상한, 많이 버거운 상태인 것이다. 아빠는 힘들어 보였다. 몸과 마음이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닐 것이다. 암으로, 그리고 온갖 약으로 너덜너덜해진 몸에 마음이라고 멀쩡하실까. 아빠는 어느새 마음도 깊게 병들어 있으셨던 건 아닌지 걱정이 된다. 하지만 몸이 아프신 것만 신경 쓰느라 아빠의 마음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 아빠가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 알 수 없다는 핑계로 아빠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게 새삼 너무 죄송스러워졌다.


아빠의 화를 마주하면서 알게 된 건, 아빠의 분노보다는 두려움이다. 아빠는 그동안 너무 무리해서 두려움을 감추어 오고 계셨다. 겉으로 아무렇지도 않은 척 엄마와 나에겐 별말씀이 없으셨다. 하지만 그건 하고 싶은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실은 할 수 없어서였던 게 아닐까.


아빠의 화난 말들을 들으며 가장 경악스러웠던 건 아빠버릇처럼 '죽음'과 관련된 단어들을 꺼내왔기 때문이다. 아빠는 자꾸만 "내가 죽어야 되겠냐"라고 엄마와 나 앞에서 다그치셨다. 그도 그럴 것이 엄마와 내가 제일 크게 반응을 보이는 게 바로 그 죽음이다. 그래서인지 아빠는 그걸 알고, 엄마께서 말이 씨가 된다시며 경기를 일으키는 그 말을, 죽는다는 말을 자꾸만 내뱉으셨다. 마치 나를 이대로 내버려 둘 거냐고, 죽음을 무기로 협박하고 시위를 하시는 것 같았다.


사실 아빠 입에서도 '죽음'이란 단어 제대로 박힌 건 아빠가 화를 내실 때뿐이다. 어쩌면 그게 문제였을 지도 모른다. 말기 암이라는 위중한 병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가족은 어느 누구도 죽음을 말하려 들지 않았다. 금기처럼, '만약에 돌아가시면...'이라고 가정문으로라도 입 밖에도 꺼내기 싫은 게 바로 아빠의 죽음이었다. 나조차도 애를 쓰고 피하고 싶은데 오죽하면 아빠는... 사실 누구보다도 가장 삶이 간절한 사람은 아빠이기에, 누구보다도 죽음이 두려운 사람은 아빠일 테다.


자꾸만, 자꾸만 떠오르는 아빠의 얼굴, 그리고 그 말들. 어쩌면 그럴 것이다. 이를 악물고 화를 내시며 하시던 "내가 죽어야 되겠냐"는 말은 사실 '나는 살아야 되겠다!'라는 말이었을 것이고, 증오에 가득 찬 눈으로 "내를 죽이려 드나"라는 말이 사실은 '내 좀 살리도!'라는 말이었음을.



아픈데 또 아프고


아빠는 왜 그러실까.


그동안 아빠는 병 투정이 잦으셨다. 사실 아빠의 몸은 여기저기 골병이 들고 있었고, 항암제 부작용도 조금씩 나오는 듯했다. 여기저기 울긋불긋한 발진으로 가려움을 호소하셨고 목, 입술, 손발을 가리지 않았다. 임플란트를 했던 치아도 탈이 나서 어느 달은 치과를 다니느라 힘들어하셨고, 이가 다 나을라치면 코에서는 진물이 나오고 역한 냄새가 나서 피가 나올 정도로 고통스러워하셨다. 갈수록 약이 늘어나는 바람에 설사도 잦았다. 약을 제하고 약을 바꾸었는데도 여전히 많은 약이었다. 아픈 데는 이유를 알 수 없었고, 으레 암 때문이려니 항암제 때문이려니 짐작할 뿐이었다.


아빠는 자꾸만 아파 자꾸 예민해지셨던 것 같다. 아빠는 아픔을 곧잘 짜증으로 표현하셨다. 다른 것들은 다 신경 쓰기 싫어 보이는 표정으로, 본인이 아픈 그 환부에 온 신경을 집중하느라 가족들이 묻는 말에도 건성으로 대답하기 일쑤였다. 아빠는 점점 더 말이 없어지셨고 주변 사람들에게 쏟을 여유가 없어지셨다.


몸이 아프신 건 당연히 그렇다지만 요즘 들어 반찬 투정도 잦으셨다. 그날 아빠가 갑작스레 화를 내시던 날도, 아침부터 엄마는 두릅 봄나물에 감태에 생선구이에 갖은 노력으로 아침밥상을 내놓으셨는데, 아빠는 그런 엄마의 정성은 깡그리 잊어버리고 점심이 되어 먼저 챙기지 않았다고 화를 내셨던 거였다. 선뜻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아빠는 더 많은 정성과 더 많은 이해와 더 많은 관심을 아주 당연히 요구하시게 되었다.


아빠는 편찮으시니까.


뒤돌아보면 이해가 된다. 하지만 내 머리와 마음은 옛날 아프기 전의 아빠를 기억하는 것 같다. 아빠의 예전같지 않은 이상한 모습에 도리어 '이성적인' 모습을 요구하곤 했다. 아빠에게 말을 걸어도 그 대답이 영 시원찮은 것도, 말없이 너무 급하게 밥을 드시 것도, 뉴스를 보면서 남일을 두고 자꾸만 화를 내시는 것도, 사소한 일에 불같이 화를 표현하시는 것도 그런 모습들을 보며 목이 매여오고 마음에 걸려 말없불만이 쌓여가고 있었다.


아빠가 변한 것도 변한 거지만 그걸 알아채지 못한 나는 하나도 변하지 못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암환자의 가족도 어쩔 수 없이 아프다.


아빠가 서울에 가셨을 때, 엄마와 나는 막막한 심정을 애써 추슬러 보았다. 아닌 게 아니라 엄마는 아빠의 날카로운 말들로 상처를 입고 많이 힘들어하셨다. 엄마의 마음에 박힌 그 가시 같은 말들은 빼낼 수 없 여기저기 마음에 멍자국들은 어느새 늘어가고 있었다.


엄마는 아프셨지만 아플 수 없었다. 감히 아빠에 비교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어쩔 수 없기도 하고 어쩌지 못하기도 했다.


엄마는 다음날 작심하고 장을 봐 오셨다. 각종 채소들과 고기, 그리고 오늘의 주인공을 귀띔해줄 만두피까지. 나는 그걸 보고 참으로 반갑다 못해 사르르 안도감이 들었다. 엄마는 아빠를 이해하고, 끝까지 기다려 보기로 작정하신 것이다. 아빠가 정말로 좋아하고 못 배기는 음식인 만두를 빚기로 하셨던 건.


썩어 문드러지는 마음 대신, 김치와 두부를 잔뜩 넣은 만두 속을 채워 본다. 자꾸만 차오르는 눈물 대신, 고소한 파 기름과 고기가 부엌을 가득 채운 터였다. 딸도 위로해줄 수 없는 공허한 마음을 애써 요리로 채워나가는 엄마의 모습엔 울컥하는 게 있었다. 엄마는 홀로 묵묵히 치유를 하는 법을 알고 계셨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서울에서 며칠간 떨어져 있으면서 살짝 기대를 한 것도 사실이다. 아빠가 돌아오실 때면 조금 달라져 있으시려나. 하지만 그 일말의 기대도 잠시, 아빠는 돌아오시자마자 다시 집을 떠나기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가시려는 것 같았다. 여전히 쌀쌀맞고 밥을 안 드시겠다는 거였다.


"아빠, 저녁 안 드세요? 엄마가 만두 빚으셨는데..."

"......"

"아빠 정말로 안 드세요? 맛있을 텐데요."

"......"

"아빠~ 딱 한 입만 드세 보세요, 네?"

"......"


계속되는 애원에도 아빠는 묵묵 부답이었다. 다시 차키를 챙기시며 아빠는 또 밖에 나가 밥을 드시려는 것이다.


아빠를 이해하려고 했지만. 이젠 안 되겠다. 엄마의 마음을 몰라주고 우리 마음을 몰라주고. 아빠 마음만 알아줄 게 아니라 우리 마음도 좀 알아주셨으면 했다. 아빠는 아무 잘못도 없는 엄마한테 화를 낼 게 아니었다. 잘못이 있다면, 잘못한 누군가가 있다면, 그건 바로 그 누구도 아닌 당신, 폐암 때문이다.


왜 암 때문에 죄 없는 우리 가족이 슬퍼져야 하는가. 왜 아프고 힘들 때 서로를 탓하고야 마는가. 아빠가 초라하게 메말라버린 것은 누구 때문인데, 이 모든 원흉을 놔두고 이렇게 죄 없는 엄마와 아빠와 내가 고생해야 하느냔 말이다.


참다못해 아빠에게 그런 말들을 쏟아내 버렸다.


아빠는 잠시 말씀이 없으시더니,


"그래 먹자."


라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엄마와 나는 동시에 울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마치 각본이라도 짠 것처럼 동시에 그렇게 울었던 게 지금 생각하면 좀 웃기기도 하다. 엄마는 아빠를 끌어안고 토닥토닥... 아빠는 금세 쑥스러워진 듯 보였다. 아빠의 말 한마디로 다시 밥을 함께 먹을 수 있다니. 참 멀게만 느껴졌던 아빠의 마음이었는데, 어느새 성큼 다시 그 마음이 나를 위로하고 있었다.


우리는 많이 아팠지만, 서로를 위로할 수밖에 없는 가족이란 걸 잘 알기에, 그렇게 또다시 아무렇지 않은 척 일상으로 돌아갔다. 사실 이것 또한 임시방편일 것이다. 암이 완치되지 않는 한, 우리집은 언제나처럼 사상누각이고 불안불안하다. 하지만 부인할 수 없는 게 있다면, 누구보다도 우리 아빠는 그 힘든 투병을 잘 참아내고 계신 것이고, 엄마도 그 어려운 병 간호를 꿋꿋이 참아내고 계시는 거였다.


더이상 돌아갈 수 없는 '일상'. 하지만 이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자. 아빠의 변화된 모습은 물론이거니와, 우리 가족 모두에게 닥쳐온 지금의 변화된 모습 또한 '이젠 일상이겠거니'하고 받아들여야만 한다. 젊은 20대의 얼굴만 기억하며 매일같이 거울을 보며 불만족스러워하는 날들을 반복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래. 우리 가족은 잘 하고 있는 걸꺼야.


그런 생각을 하며 먹다 보니 목이 매였다. 울퉁불퉁 오동통통한 만두를 먹으면서, 나만 목이 매이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아빠는 그 좋아하시는 만두국을 참말로 국물 한 방울도 안 남기고 다 드셨다. 다시 찾은 이 아무것도 아닌 일상이 참으로 다행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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