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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별 Jul 31. 2024

정신이 번쩍 드는 매운 파스타

우당탕탕 집밥 일기


간헐적 우울


지난주부터 조짐이 보였다. 새벽 늦게까지 밤을 지새우면서 고의적으로 늦잠을 잤다. 알람을 끄는 것도 귀찮아 아예 폰을 끄고 지냈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어제는 남편이 마트를 가자고 해서 이마트를 갔는데, 가기 싫은 무거운 몸을 이끌고 채비를 해서 나갔다. 하지만 사고 싶은 것도 없었고, 수산물코너랑 정육코너 등을 지날 땐 절로 한숨이 났다. 저걸 사면 또 해 먹어야 하는데ㅡ 냉장고엔 이것저것 한가득 있는데ㅡ. 남편은 내 눈치를 보면서 간식이랑 밀키트로 카트를 채웠고 내가 직접 거라곤 평소엔 먹지도 않던 맥주 한 팩이었다.


그렇게 어젠 맥주를 연거푸 두 캔이나 따 먹으며 일부러 취했다. 한 달은 먹을 것 같았던 과자를 순삭 하며 폭식을 했다. 스스로를 무너뜨릴 심산인지, 내 안의 우울이에게 먹이를 주고 힘을 줬다. 도대체 나는 왜 그러는 건가. 간헐적으로 잊을 만하면 찾아오는 우울에게 조심스레 말을 걸었.


너는 누가 시키지도 않은 요리를 한답시고 난리를 쳤잖아. 요리가 망하니까 기분 나쁘지. 설거지는 해도 해도 끝이 없지. 착한 남편이라면 맛없어도 맛있다고 칭찬해 줄 줄 알았어? 고작 이거 하려고 직장을 때려치운 거야? 네가 선택한 게 마음에 들어?


인정하기 싫었지만 나는 요리를 잘 못했다. 직장을 그만두고 나서부터 본격적으로 요리를 시작했지만 매번 요리가 시원찮았다. 나도 남들처럼 요리를 뚝딱뚝딱 잘하는 아내가 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매번 요리를 할 때마다 기대에 못 미치는 결과물에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 같다. 그래서인가?


나조차도 우울한 나를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반복하고 매번 털고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걸, 그저 체념하듯 알게 되었을 뿐이다. 어쩌겠는가, 이게 나인걸. 요리를 못하는 것도 나인걸. 이젠 요리를 하는 것도 주부로서 나의 역할이란 걸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서 못하더라도 조금씩 노력해야 한다.



나에게 부담 주고 싶지 않은 요리


어제 술 마시고 과자 먹고 스스로에게 땡깡을 부렸더니, 오늘은 좀 정신을 차려야겠다 싶었다. 하지만 오늘 점심을 만들어주겠다고 하니, 남편이 손사래를 쳤다.


"아니, 더운데 또 요리하고 힘들어하지 마요. 시켜 먹읍시다."


이 말을 들으니 더 미안해지는 것이다. 내 곁에는 생떼를 부려도 잘 참아주고 묵묵히 지켜봐 줬던 남편이 있었다. 미안해서라도 오늘 요리를 해야겠다 싶었다. 단, 너무 힘들이지 않게.


"진짜 간단한 걸로 만들어볼게요. 걱정 마요."


딱히 뭘 해야겠다 계획은 없었지만, 간단히 먹을 만한 것으로는 파스타가 있겠다. 어제 마트에서 그나마 잘한 일이라곤, 드디어 면같이 생긴 파스타 면을 샀다는 것이다. 후다닥 오일파스타나 해 먹어야지. 냉장고에는 목숨이 가물가물한 가지가 있었기 때문에 이걸 구출하기로 했다.


가지오일파스타가 있을까? 검색해 보니 있다. 세상에 똑똑한 블로거 님들 덕분에 나는 오늘도 살았다.



오일파스타, 그러나 좀 매운


<참고한 레시피>

 

<나의 가지오일파스타 레시피(2인분)>

1. 재료 준비 - 가지 1개, 양파 1/2개, 마늘 16알(편마늘), 청양고추 4개

2. 소스 준비 - 간장 2T, 멸치액젓 2T, 식초 2T, 올리고당 2T, 면수 100ml

3. 파스타 삶기 (5분) - 물 1200ml 끓으면 소금 2t 넣고 파스타면 120g을 삶는다.

4. 야채&소스 볶기 - 1) 팬에 올리브오일 2T 두르고 편마늘 넣고, 노릇노릇해지면 양파를 투하한다. → 2) 양파 넣고 면수를 넣는다. → 3) 가지 넣고 2번 소스를 반만 넣는다.

5. 파스타 볶기 (3분) - 1) 3번 볶은 야채&소스에 파스타 면을 넣고 2번 소스를 다 넣는다. → 2) 청양고추를 넣고 볶는다.

6. 파스타 내기 - 후추 조금, 계란 노른자 데코레이션


* 참고로 면수를 잘못 계산해 약 200ml 정도를 넣었다. 그 때문에 야채가 좀 많이 익긴 했지만... 그래도 소스가 더 잘 배인 것 같아 그나마 다행이다. 게다가 막판에는 좀 바빠서 후추랑 계란을 빼먹었는데, 없어도 맛있었다고 자신 있게 말해 본다.





신랑) 맛있는데... 상당히 매운데요?
나) 청양고추 레시피보다 덜 넣었는데도 맵네요?!
신랑) 와 씁~ 이거 정신 차리라고 만든 파스타인가?
나) 씁~ 하! 그렇네요. 정신이 번쩍 드네요!!! 그래도 맛있죠?
신랑) 으아~ 맵다~ 맛있다~~!



추신.

오늘의 파스타는 정말 매웠다. 의도치 않게 이렇게 맵삭매콤, 아니 맵디매운 파스타를 먹게 되면서, 나는 다시금 정신을 바짝 차린다. 계속 침잠하지 말라고~ 오늘의 요리는 멱살 잡고 나를 끌어올린다.

가끔 울적할 때나 무더운 날씨에 축축 쳐질 때, 머리에서 땀이 뻘뻘 나면서 온몸에 뜨거운 피가 도는 것 같은 이 매운 파스타는, 생각해 보니 여름철 땀 흘리며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요리로 참 좋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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