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도 좋지만 공부도 열심히 하렴?
아마 방탄소년단이 데뷔하고 1년 정도 지났을 때 일이다. 사회초년생 시절 나는 업무상 K팝 가수들을 직간접적으로 보는 일이 잦았다. 정확하게는 매니저나 연예기획사 관계자들과 연락해서 아티스트의 스케줄을 조율해야 하는 일이었다.
지금보다도 훨씬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안정화되지 않았던 시절 해외의 전문가들과 업무를 성사시키기 위해 이들을 설득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나조차도 신입사원으로 일이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서 웃지 못할 해프닝이 많았는데, 이제와 돌이켜보면 K팝의 선전 덕에 나의 커리어도 함께 성장한 시기였다. 그중에서도 방탄소년과의 일화가 기억에 가장 남는다.
당시는 가수 싸이가 전 세계적으로 K팝 열풍을 일으킨 뒤 드라마에서 시작한 한류가 점차 대중음악으로 번지고 있던 때였다. 이미 해외에서 인기 있는 가수들도 있었지만, 가수의 꿈을 꾸며 한해에도 약 500여 신인팀이 데뷔했고 그중 대여섯 팀만 이름을 알리는 정도였다. 제삼자의 입장에서 이들을 보고 있자니 앳된 얼굴의 동생 같은 친구들이 일찍 사회에 나와 오로지 꿈만 바라보며 고군분투하는 게 안쓰럽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데뷔를 하고도 인지도를 얻지 못해 방황하는 팀들을 보며 불쌍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누가 그러던가. 연예인 걱정은 하는 게 아니라고?
그렇다. 나는 그 시절 방탄소년단을 걱정했다.
방탄소년단은 데뷔 직후에 인기가 지금처럼 하늘 같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홍콩에서 열린 한 해외 행사 중에 방탄소년단을 만나게 됐고, 어느 날 새벽부터 오후까지 함께 일정을 소화해야 했다.
먼저 새벽에 이들이 묵는 호텔 앞으로 가서 매니저를 통해 멤버들을 깨우고, 홍콩 도심 한복판에서 아침을 먹이고, 빌딩숲 사이 대로를 걸어서 가로질러 인터뷰 장소로 안내하고 촬영을 마무리하면 됐다.
데뷔한 지 갓 1년 넘은 방탄소년단 멤버들은 그때도 꽤나 눈망울이 초롱초롱해 인상적이었다. 특히 RM은 이 인터뷰가 어떤 배경으로 성사되었는지 주최 측의 의도를 이해하려고 애썼다. 당시 여러 K팝 가수들의 해외 인터뷰를 가까이에서 진행하면서 안타까울 때가 많았다. 이게 얼마나 소중한 기회인지, 어떤 파급력이 있을지, 가수 개인을 넘어 K팝을 대변할 수도 있는 자리를 ‘연예가중계’ 쯤으로 생각하는 팀이 많았다.
매니저들은 가수들의 사생활이나 군대, 정치와 연관된 질문은 사전차단하느라 바빴고, 가수들은 질문 하나하나에 매니저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인터뷰를 하고 나서는 어떻게 기사가 나갈지 사전에 보여달라는 상식적이지 않은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가뜩이나 K팝은 authentic 하지 않고 공장에서 찍어내는 상품 같다는 지적이 나오기도 할 때였는데 각 그룹들은 인터뷰를 통해 스스로 증명이라도 하는 듯했다.
어쨌든 방탄소년단은 그 이른 시간에 멋지게 짧은 무대를 포함해 홍콩의 유명한 경제 아나운서와 인터뷰를 잘 마쳤다. 그날 함께 홍콩 대로를 횡보하며 슈가는 영어 통역을 겸하던 나에게 물었다.
“영어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좋아하는 미드를 하나 골라서 자막도 같이 보고, 나중에 미드에 나온 표현을 실생활에 써보고 그러면 도움이 될 거예요. 음악도 좋지만 공부도 놓지 않고 열심히 했으면 좋겠어요”
“네, 저는 음악 작곡 공부도 많이 해요”
나는 사실 방탄소년단을 처음 홍콩에서 만났을 때 별 감흥이 없었다. 지금은 모든 멤버들이 멋져 보이지만 당시엔 나에게 말을 건 RM과 슈가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고, 솔직히 걱정됐다. 남자 아이돌하면 꽃미남, 미소년들이 주로 떠오르던 때여서 이들이 과연 경쟁에서 이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또 한 무리의 소년들이 이렇게 꿈에서 멀어지고 실망할 생각을 하니 큰누나 같은 입장에서 무슨 조언이라도 한마디 더 해주고 싶었다…
내가 방탄소년단의 앞날을 걱정한 건 두고두고 인생의 잊지 못할 에피소드가 됐다. 홍콩의 아나운서도 몇 년 후 이제는 대스타가 된 방탄소년과의 지난 인터뷰를 회상하며 좋은 추억을 남겼다고 했다.
그리고 몸소 깨달았다. 누군가의 가능성을 내 기준으로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연예인 걱정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