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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희정 May 31. 2019

다 괜찮아져야 한다.

은연중에 스며있는 인식에 대하여

내가 잘 기억하지 못하는 아주 어렸을 적. 그러니까 내 나이가 한자리 수였을 때 나는 부모가 절대적인 존재였다. 나에게 밥을 주고, 옷을 입혀주고, 어디를 가거나 무언가를 할 때도, 나를 안고 내 손을 잡고 모든 것을 함께 해 주는 부모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만했다. 유치원 소풍날 엄마가 나를 위해 싸준 도시락과 친구들의 도시락을 함께 펼쳐놓고 다 같이 맛있게 먹었고, 재롱잔치 날 날 보러 와준 엄마와 함께 온 친구들의 엄마는 똑같이 행복한 엄마였다.      


시간이 지나고 초등학생이 되었을 때. 그러니까 내 나이가 처음 두 자리 수가 되었을 때 나는 점점 부모가 상대적인 존재임을 느끼게 되었다. 나에게 해주는 밥과 입혀주는 옷, 데리고 가는 곳들이 친구들의 것과 다르다는 것을 조금씩 알게 되었다. 친구의 생일 파티 날. 예쁜 가구들로 꾸며진 친구의 방과 넓은 거실에 차려져 있던 생일상이 나는 낯설었다. 나는 없고 친구들은 있는 게 많았다. 하지만 그것이 슬프지는 않았다. 조금 질투가 났을 뿐. 우리 아빠와 친구들의 아빠는 여전히 그리고 똑같이 든든한 아빠였다.

    

조금 더 자라 교복을 입는 학생이 됐을 때 나에게 부모는 미운 존재가 되었다. 내가 해달라는 것과 사달라는 것을 해 줄 수 없다는 것을 인지했다. 나는 하고 싶은 것도 많고 꿈도 높아져 가는데, 부모님은 점점 할 수 있는 것이 줄고 겉모습도 낮아졌다. 하지만 그것이 좌절은 아니었다. 오히려 동기가 되었다. 성공해야지. 돈도 많이 벌어 야지. 빨리 어른이 되어야지. 다만 그때부터 점점 우리 부모님과 친구들의 부모님은 같아 보이지 않았다.  

   



나이를 먹고 사회생활을 시작했을 때 나는 부모를 감추는 존재가 되었다. 곳곳에서 부와 학벌의 대물림을 마주했다. 내가 다니는 대학교와 직장에는 나와 비슷한 환경의 친구나 동기들은 잘 없어 보였다. 가로로 된 사회에서 세로로 뛰어오른 나는, 내가 만나는 사람들과 소속되어있는 조직 속에서 동떨어져 있는 기분이 자주 들었다. 다시 애써 옆으로 넓히려 거짓말도 하고 꾸미기도 하고 감추기도 했다. 자발적 배경 세탁. 모두가 예스라고 할 때 노 라고 대답하는 건 용기라 했던가. 나는 드러내는 용기보다 숨기는 비겁을 선택했다.     


나는 드러내는 용기보다 숨기는 비겁을 선택했다.


부모를 알게 될수록 자라나 어른이 되고 사회생활을 할수록 나는 왜 괴리감을 느껴야 했을까? 생각해보면 내 주변에는 나의 부모와 비슷한 부모와 배경이 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애써 이만큼 올라왔지만 부모는 애를 써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 애씀이 부족한 것이었을까? 아니다. 애써도 오르기 어려웠던 구조적이고 현실적인 이유들이 있었다. 하지만 어떤 이의 부모는 원래가 이만큼이 있었고, 따라서 그 자식들은 애쓰지 않아도 그만큼의 기본 옵션이 주어졌다. 때론 내가 힘써 쟁취한 것들은 누군가의 태생적 옵션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걸 탓하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다 다른 배경을 지니기 마련이니까. 우리는 다름을 인정하지 않을 때 틀린 것이라 단정 짓는다. ‘다름’과 ‘틀림’은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다.      


문제는 인식이다. 삶을 해쳐나가 성취하고 잘 자란 자녀들이 왜 본인의 목표를 실현하고도 사회 속에서 괴리감을 느껴야 했고, 느낄 수밖에 없었는지. 자본과 학벌의 영역에서 한 계단 한 계단 세로로 올라온 자식들이 왜 성취감이 아닌 박탈감을 느껴야 했는지. 누군가의 잘못 이라기보다 은연중에 스며있는 가로로 된 그 인식에 대한, 인식을 바꾸기 위한 이야기들이 쓰여져야 하고 말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올바르게 바로잡기 위해서. 세상 속 가로와 세로를 없애기 위해서. 이야기가 다양할수록 생각도 여러 가지가 될 수 있다. 경우의 수가 한 가지일 때 우리는 독단하고, 여러 가지일 때 우리는 고려한다.


노동자의 자식은 아나운서가 될 수도, 의사, 변호사, 공무원, 회사원이 될 수도 그리고 노동자가 될 수도 있다. 부와 학벌은 대물림될 수도, 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가난과 무지는 대물림되지 않을 수 있는 기회와 사회가 만들어져야 한다. 선택에 의해서, 각자의 생각에 의해서, 연유에 의해서. 우리 모두는 그 모든 결정과 결과들을 넓게 받아들여야 하고 서로를 이해해야 한다. 다름을 인정해주어야 한다. 궁극적으로는 뭉뚱그리는 말 같지만 다 괜찮아져야 한다.     


너의 젊음이 너의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나의 늙음도 나의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라 하지 않았던가. 나는 나의 성취는 나의 노력으로 얻은 상이 될 수 있고, 부모의 가난은 부모의 잘못으로 받은 벌이 절대 아니라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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