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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정책도 학교를 바꾸지 못했다.

섣부른 정책, 빈약한 내용, 불신임의 학교

by 소소인

놀라운 정책의 익숙한 발표

2024년, 수능체제가 바뀌었다. 그 핵심은 수능 선택과목들을 없애고 ‘공통사회’, ‘공통과학’처럼 모든 학생들이 같은 시험을 보는 방식을 적용한다는 것이었다. 어떤 진지한 숙의과정도 들어본 바 없던 이 개편안의 갑작스러운 발표는 고등학교에 큰 당혹감을 주었다. 근래에 고등학교에서 추진되고 있는 정책 중 가장 큰 무게감을 가진 정책인 ‘고교학점제’의 취지에 정면으로 반하는 정책이었기 때문이다.(고교학점제의 핵심은 학생들이 스스로 배울 과목을 ‘선택’하도록 하는 것이다.)


정책 내용의 모순은 참으로 놀라웠지만, 정책의 결정 과정과 발표 방식은 전혀 놀랍지 않았다. 교육정책은 늘 이렇게 새로운 포장지에 쌓여지고, 부실하게 채워진 내용물을 가진 채 세상에 나왔다.


지금까지 발표되어 왔던 수많은 정책들은 하나같이 교육현장의 근본적인 구조를 바꾸지 못했다. 학교가 가진 극심한 경쟁체제, 수많은 스트레스 요인들 앞에서 정책은 별다른 영향력을 가지지 못했다.


오히려 새롭지만 설익혀진 이 수많은 정책들은 정책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리고 현장을 혼란시켰으며 학부모들의 불안을 부추겼다. 그리고 이 진동과 균열은 사교육 사업자들의 따뜻한 활동 공간이었다. 사교육은 언제나 혼란과 불안의 해결사를 자처하면서 그 덩치를 키워 왔다.


왜 학교에 시행되는 정책은 늘 이렇게 설익은 것일까. 학교를 위해 만들어졌다는 정책들이 오히려 혼란을 부추기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리고 무엇보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숙의 없는 결정, 빈약한 정책

우리나라는 5년에 한번 대통령 선거를 한다. 그리고 교육분야는 대통령 선거 때 등장하는 아주 많은 토론 주제 중 하나다.(그것도 주로 말단에 속하는 편이지만) 사람들은 이 광경을 자연스럽게 여긴다. 대통령이 교육분야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거기에 대해 구체적인 실현 방안을 이야기하는, 그런 모습.


문제는 대통령 후보자들이 교육에 대해 이야기할때 늘 기존의 방식은 비판하고 무언가 새로운 이름이 붙은 정책을 표방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면 약속이나 한 듯이 새로운 정책이 언론에 발표되고 학교에는 공문의 형식으로 배달된다. 이 과정이 너무 빠르고 신속해서 놀라울 정도다. 기존의 정책이 왜 존재했는지에 대한 논의와 새로운 정책이 무엇을 대신할 수 있는지에 대한 설득은 늘 생략된다.


정권의 교체와 함께 교육정책이 바뀌고 정책의 개발 기간이 짧다 보니, 정책에 대한 폭넓은 의견의 수렴과 토론의 절차가 생략되거나 그저 형식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 기간은 교육활동의 직접적인 당사자인 교사와 학생, 그리고 학부모들이 정책의 내용을 파악하고 정보를 공유하기도 부족한 시간이다. 이렇게 짧은 숙의 기간은 곧장 어설픈 정책의 내용으로 이어진다. 비전은 창대하지만 콘텐츠가 빈약하거나 현장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반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상황을 가장 단적으로 볼 수 있는 사례가 바로 위에서 예로 든 수능체제의 개편이다. 이런 일이, 학교에서는 심심치 않게 벌어진다.


급하게 결정되는 만큼 정책의 내용이 자주 바뀌는 것도 문제다. 무엇보다도 현장에서는 ‘어차피 바뀔 정책’이라는 인식이 팽배해서, 어떤 정책이 시행되더라도 깊이 신뢰하지 않게 된 지 오래다. 수능정책이 바뀌었을 때에도 놀라움과 동시에 ‘이게 얼마나 가겠어?’라는 의문이 함께 따라붙은 것은 현장을 오래 경험한 교사들에게는 자연스러운 생각의 흐름이었다.


교과서가 없다

학교 정책이 얼마나 급하게 결정되고 시행되는지는 교과서의 편찬과 배급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교과서는 – 물론 교육학 이론에서는 다르게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 학교 수업에 있어 가장 기본을 이루는 자료다. 교사들은 교과서를 보고 그 교과가 ‘무엇을’, ‘어떻게’가르치려 하는지 이해한다.


최근 몇 년 간 학교에는 새로운 교과목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고교학점제가 시행되면서, 그리고 4차 산업혁명에 적응하기 위한 교육 콘텐츠를 마련한다는 목표 아래에 새로운 교과목들이 여러 개 생겨났다. 그런데 이 교과목을 가르쳐야 하는 교사들은 그 교과서를 2월에 처음 받아보았다. 3월이면 개학이고, 3월 2일에는 오리엔테이션을 해야 한다. 3월 3일에는 정상수업 시작이다. 그런데 그 수업을 담당할 교사들은 교과서는 수업을 시작하기 보름 전에야 처음 접할 수 있는 것이다.


교과서의 늦은 개발과 보급은 이번만의 일이 아니다. 교육과정이 바뀌고 새로운 교과서가 발행될 때 마다, 새 책들은 개학 직전에야 학교에 도착했다. 1년만 더 준비한 뒤에 실행하면 안되는 것일까. 교과서를 보급해서 교사들이 교과에 대해 파악하고 어느정도 준비를 한 후에 가르치면 안될까. 그 1년을, 꼭 일찍 배워야 할 만큼 시급하고 중요한 교과목을 아직 나는 보지 못했다.


섣부른 정책, 과감한 추진력

이렇게 섣불리 만들어 진 정책은 대부분 정치적인 상황, 혹은 성과를 올려야 한다는 조급함 때문에 빠르고, 과감하게 추진된다. 대개 교육정책들은 몇 개의 학교에서 ‘시범학교’의 형태로 초기 실험을 거친 후 전국적으로 확대되는 과정을 거치는데, 이 과정이 대부분은 답이 정해진 형식적인 절차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 시범학교를 운영한다는 자체가 이미 전국적인 확대를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고교학점제나 AI디지털 교과서 등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어서 유명해진 정책들은 모두 이런 형식을 갖추고 전국에 확대되었거나, 또 그렇게 될 예정이다.


이렇게 섣불리 확대되는 정책들은 그 알맹이의 설익은 정도에 따라 광범위한 부작용을 낳을 운명에 처해 있다. 만약 식품이라면, 이정도의 검증만으로 전국의 학생들에게 먹으라고 지급할 수 있을까? 그런데 정책은 그렇게 수립되고 집행된다.


지금 시점에서 이런 우려를 가장 크게 가지고 있는 정책은 누가 뭐라 해도 AI디지털 교과서의 전면 보급이다. AI디지털 교과서의 콘텐츠는 충분히 검증되지 못했고, 디지털 매체가 종이책보다 학생들의 집중력을 끌어올리는 데 취약하다는 연구 결과가 지속적으로 발표되고 있다. 무엇보다 디지털 매체를 교육도구로 적용했던 북유럽 국가들에서 이 정책의 부작용을 뼈아프게 경험한 뒤 그들을 폐기하고 있는 상황이다. 성공의 경험은 없고 실패의 사례는 존재하는 이 정책이 전국의 초등학교에 적용되면 어떤 부작용이 있을까? 음식은 10명중 1명만 먹어서 탈이 나도 학교에 민원이 빗발친다. 그런데 전국의 AI디지털 교과서가 학생들의 집중력을 떨어뜨릴 가능성이 있다고 하는데도 정부는 이 정책을 끝까지 밀어붙일 기세다.


애석하지만 이 교과서는 학교에, 그것도 전국의 학교에 보급될 것이다. 지금까지 교육 정책들은 그렇게 만들어지고 또 시행되어 왔기 때문이다. 관료제 하의 실적주의 앞에서 교육 이론이나 당사자들의 의견은 ‘비효율을 만들어 내는 소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설득 대신 명령

정책이 만들어 진 후 그것이 추진되는 과정에도 문제가 많다. 먼저 우리나라의 교육현장은 정책의 효율적인 실시가 쉽지 않은 상황에 있다. 일단, 우리나라의 관료적인 정책 결정 방식은 정책에 대한 공감대의 형성에는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 의무적인 연수 실시 정도가 정책을 알리기 위한 노력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교직사회 전체의 공감을 얻기 위한 노력이 별로 없다.


더 큰 문제는 정책을 이해하기 위한 연수에 참여했을 때 생생히 느낄 수 있다. 연수의 내용 자체가 부실하고, 설득력을 갖지 못하는 경우가 흔하다. 때로는 연수를 실시하는 강사 본인도 정책에 대한 자신감을 드러내지 못한다. 콘텐츠가 빈약하기 때문이다.


강의가 끝난 후 대개는 질의응답 시간이 이어지는데, 정책의 헛점에 대한 교사들의 질의에 만족할 만한 대답을 얻는 경우는 정말 흔치 않다. 현장에서 정책을 실천할 교사들이 선도적으로 그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참여하는 연수의 현장이 반대로 정책에 대한 의구심이 시작되는 공간이 되는 경우는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데도 정책의 내용이 수정되거나, 유예되는 경우는 지금까지 경험해 본 바가 없다.


특히 최근에 시행된 ‘최소성취보장제도(학생들이 최소한의 성취수준에 도달하도록 학교에서 의무적으로 교육하도록 하는 제도)’는 그 예산도, 인력에 대한 고민도, 예상되는 여러 문제상황에 대한 대응체제도 마련되지 않은 채 그대로 학교에 시행되었다. 과연 교육부는 이 제도를 시행해서 정말로 모든 학생들이 최소한의 성취 수준에 도달하리라 기대하고 있는 것일까? 학교에서는 학생들의 성취 수준을 끌어올리기 위한 노력이 아니라 성취 기준을 낮춰서 서류상 모든 학생이 최소한의 성취 수준에 도달했다는 보고서를 만들기 위해 골몰하고 있다. 이것은 학교의 탓이 아니다. 교육부는 이 정책을 시행하면서 어떤 예산도, 인력도, 방법도 제시하지 않았다.


사람이 없다


앞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우리나라의 정책은 상명 하복식이다. 그러다 보니 정책이 결쟁되고 예산이 편성되면 그 실행도 자연히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정책이 추진되려면 그것을 추진하는 주체, 즉 ‘사람’이 있어야 하고, 그 사람은 전문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정책들은 예산은 있되, 그것을 추진할 전문적인 인력과 부서는 없다. 그래서 기존의 교사 업무 부서 중 하나로 예산과 정책이 투하되는 형태다. 자연히 기존의 업무에 새로운 업무가 추가되고 학교의 기능에는 부하가 걸리게 된다. 결국 새 정책은 ‘행정업무의 추가’가 되는 것이다.


이 같은 아이러니는 한창 교권문제가 사회의 관심을 받았던 2024년에도 마찬가지였다. 교권이 사회이슈가 되자 교육부에서는 교권을 보호하겠다며 몇가지 대책을 학교로 내려보냈다. 그 대책을 추진하는 것도 결국 학교에서 근무하는 특정 부서의 교사들이었다. 교권 보호를 위한 조치들조차 학교에서는 행정 업무의 연장 이라는 방법을 거쳐 실현되는 것이다.


사실 이런 사례는 너무 많아서 더 나열할 수 없을 정도다. 학교에서는 새로운 사업이나 정책이 추진되면 ‘어느 부서에서 맡아야 하는지’를 놓고 교사들 사이에서 입씨름을 벌이는 장면이 심심치 않게 연출된다. 이들 사이를 조율해야 하는 교감, 교장선생님의 고충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입시 앞에서 녹아내리는 정책들


우리나라의 학교가 가진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극심한 경쟁체제에 있다는 점은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학교교육에 대해 비평하는 모든 사람들, 미래학자들, 학생과 학부모, 교사, 이 모든 사람들이 드물게 동의하는 말이다. 자연히 학교를 향한 정책들의 대부분은 ‘극심한 경쟁의 스트레스로부터의 구원’이라는, 사뭇 거대하고 이상적인 비전을 내세운다. 학생들의 행복 정도, 청소년 자살률과 같은 비극적인 통계를 근거로 평가의 방식과 교육과정을 개편하는 것은 지금까지 보아 온 교육정책 발표의 일관된 패턴이었다.


이런 정책들은 대부분 학교가 내리는 ‘평가’를 문제삼아 왔다. 그래서 중학교 1학년까지의 무시험 제도나 ‘성취평가제(절대평가와 비슷한 개념으로, 학생들이 도달해야 하는 ‘성취기준’을 정해놓고 그것을 달성하면 점수를 부여하는 방식)’같은 것들이 제시되어 왔다. 그렇다면 이 제도들이 시행된 이후 학교는 ‘덜’결쟁적인 공간이 되었을까? 여기에 동의하는 사람은 찾기 어려울 것이다.


학교의 경쟁체제는 학교에서 ‘평가’를 시행하기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다. 본래 평가는 – 고전적인 교육학의 가르침을 인용하자면- ‘얼마나 잘 배웠는지’를 점검하고, 더 잘 배우기 위한 방법을 찾기 위한 것이지 학생들 사이의 우열을 가리기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학교가 경쟁의 악순환에 빠져 있는 것은 평가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평가의 결과를 ‘입시’와 연동하는, 말하자면 평가 결과를 활용하는 방식 때문이며, 그 활용의 방식이 실제 학생들의 삶에 큰 영향을 주도록 설계된 우리 사회의 구조 때문이다.


결국 어떤 평가 방식을 적용해도, 아니, 학교에서 학생들의 성취에 대해 어떤 평가도 내리지 않는다 해도 학생들의 학력이 우리 사회가 가진 경쟁체제의 일부로 작동하는 한 학교는 여전히 경쟁의 공간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평가와 관련 없는 정책들도 마찬가지다. 어떤 정책이 시행되더라도 ‘그것이 입시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가 가장 중요한 관심사가 된다.


‘그 정책이 시행되면 어떻게 1등급을 맞아야 해?’

‘그 정책은 의대 진학에 어떤 영향을 줘?’


모든 정책에 이 같은 질문이 따라붙은 것은 학교가 가진 태생적인 체질 때문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가진 차가운 경쟁의 구조가 학교에게 그 선별의 과정을 떠넘겼기 때문이다. 누누히 말하지만 학교의 경쟁체제를 바꾸려는 시도는 우리 사회를 바꾸려는 노력이 출발점이다. 학교는 사회의 일부다.


언론과 사교육 업계의 콜라보


언론과 인플루언서들도 입시 문제에 있어서는 같은 영향을 미친다. 클릭수와 시청 시간이 모든 가치에 우선하는 뉴미디어의 속성 상, 이들은 위기감을 고조시키고 사람들이 관심있어 하는 방식으로 세상의 일들을 소비하려 한다. 교육정책이 실시되면 이들은 모든 것을 입시와 관련시켜 해설한다.

미디어는 어떤 정책이 실행되던 간에 학원 관계자들을 인터뷰하여 그것이 입시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중심으로 해설을 한다. 정책의 내용이 얼마나 교육적인지, 거기에 참여하면 어떤 성장의 효과를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 해설하는 장면을 나는 미디어에서 본 일이 없다.(정책홍보 영상을 제외하면)

일반 대중과 학부모는 이런 도식에 익숙하고, 또 사교육 업계는 이런 방식을 적절히 사용하여 사업 아이템으로 활용하고 있다. 바뀌는 교육정책은 사교육 업계에게 그야말로 ‘공짜 점심’이다. 한때, 한국사가 수능 필수 과목으로 지정되면서 교육계가 떠들썩했던 때가 있었다. 누구나 수능에서 한국사를 치러야 하니, 어릴 때부터 한국사를 배워야 한다는 마케팅이 우후죽순 전파를 탄 것이다. 결과적으로 한국사 수능은 별다른 의미 없는, 응시만 하면 대학 진학에 별다른 지장이 없는 형식적인 시험이라는 것이 증명되었지만 사교육 시장에서는 이런 사실을 잘 알려지지도, 중요하지도 않았다. 문제는 무언가 바뀌었고, 그래서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미디어와 시장의 콜라보 마케팅 이었다.


정책이 현장을 바꾸려면


우리나라의 교육 정책들은 셀 수 없이 많았지만, 그 중 현장을 근본에서 바꾼 것은 없었다. 아니, 학교의 ‘행정업무’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은 찾기 힘들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정책이 공문이 아니라 학교의 변화를 추동하는 힘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명확한 답은 없지만 방향을 찾기 위해 골몰해 보았다. 그리고 부족하지만 몇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느리고 오래 가야 한다는 점이다. 정책이 결정되는 과정은 지금보다 훨씬 더 느리고, 신중해야 하며 더 많은 사람들과, 더 자주 토론한 결과물이어야 한다. 최대한 많은 사회 구성원들이 그 토론의 쟁점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노력도 필요하다. 그래야 정책이 실제 추진되었을 때 그 과정과 성과에 대해서도 다같이 돌아볼 수 있을 것이며, 무엇보다 정책을 현실에 맞게 수정해 가며 살아있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책을 실제로 추진하는 주체인 교사들의 목소리가 설계 단계부터 반영되어야 한다. 교사들의 목소리는 무엇보다 이 정책이 현실에서 구현될 수 있을지를 가늠 해 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척도가 될 것이다. 학생과 학부모, 교육 전문가들의 의견이 다방면으로 표출되어야 함도 물론이다. 정책은 결국 학교가 처한 현실을 기준삼아 만들어 져야 한다. 이들을 전문가로 대우할 때, 정책은 학교를 움직일 수 있는 힘으로 작동할 것이다.


정책은 단일한 문서가 아니라 살아있는 시행의 과정으로 설계되어야 한다. 늘 비판에 열려 있어야 하며 조정될 수 있고, 실패를 인정하기도 해야 한다. 그럴 때에만 정책은 교육의 일부가 된다.


그러나 정책이 아무리 신중하게 설계되더라도, 학교가 계속해서 우리 사회가 가진 경쟁 체제의 한 조각으로 남아 있다면 그 어떤 정책도 학교를 근본에서 바꾸지 못할 것이다. 지금까지 수많은 정책이 경쟁을 완화하겠다며 등장했지만 이들은 모두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경쟁의 한 부분으로 흡수되거나,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사라져버렸다.


결국 학교를 바꾸려는 진짜 노력은 학교 바깥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우리 사회가 ‘덜’ 경쟁적인 곳이 되어야 학교도 그렇게 될 수 있다. 학교의 회색을 조금이나마 밝히는 정책을 만들고자 한다면, 학교를 둘러싼 세상의 색부터 밝혀 나가야 한다.


학교는 동떨어진 섬이 아니다. 이 세상에 끈적하게 달라붙은 등껍질의 일부다.


* 이 글은 책 '학교의 회색 풍경'원고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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