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피와 살로 이루어 진 존재니까
학교가 사라질 거라는 예언
인공지능과 메타버스가 학교를 대신할거라는 주장이 팽배하다. 유명한 사람들이 TV에 나와서 앞으로 교사와 학교는 사라질 것이라는 예언을 하기도 한다. 이들이 이야기하는 근거는 대부분 학교가 수행하는 지식 전달의 기능을 기술이 대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들의 말대로, 인공지능은 학습에 있어서 새롭고 또 강력한 도구임에 틀림없다. 개개인의 특성에 맞춘 개별화 교육, 정보에 대한 평등하고 손쉬운 접근, 기술발전을 통한 광범위한 소통의 가능성 등. 기술이 보여주는 미래는 참으로 푸르고, 또 세련되어 보인다. 정말로 그렇게 될까? 미래사회에서 학교는 역사의 한 장면으로 사라지게 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절대 그럴 수 없을 것이다.’
학교가 사라질 것이라 주장하는 사람들은 기술이 학교의 ‘모든 것’을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학교의 실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참으로 좁은 생각의 발로일 뿐이다. 그들이 관념적으로 생각하는 학교와 실제 학교 사이에는 크나큰 괴리가 있다. 학교는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여러 기둥 중 하나이며, 그 기둥은 의외로 많은 부품들이 조립된 결과물이다. 학교의 소멸을 주장하는 이들은 학교가 가진 이 여러 조각들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학교가 가진 조각들을 하나씩 뜯어보면, ‘인간이 육체를 가진 한, 학교는 사라질 수 없다’는 사실을 납득하게 될 것이다.
기술이 학교를 대체할거라는 주장의 가장 주요한 근거는 학교의 학습 기능을 기술이 대신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학교가 굳건할 것이라고 주장하려면 그들의 이 핵심 주장이 허구임을 밝혀야 할 것이다. 이 작업 역시 인간이 뇌로 생각한다는 절대 불변의 사실과 ‘학습’이라는 말의 의미를 되새겨 보면 허구임이 드러날 것이다. 왜 기술이 학교의 학습을 대신할 수 없을까. 기본으로 돌아가 보면 그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학습은 몸의 일이다
자, 뇌과학의 이론을 아주 잠깐만 빌려 오자. 뇌과학의 설명에 따르면 학습이란, ‘뇌에 새로운 세포 단위의 연결이 일어나는 과정(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뇌 안에서 새로운 시냅스의 연결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말한다.)’이다. 그러니까, 학습은 뇌 안에서 일어나는 일종의 신체적인 변화의 하나인 것이다. 그리고 이 변화가 일어나는 조건에는 학습내용이 적절히 주어지는 것 뿐만 아니라, 학습이 이루어지는 모든 상황이 포함된다. 학습은 물리적 환경, 학습이 일어날 때의 사회적 관계(예를 들면 지도하는 교사나 모둠학습 때 팀원들), 건강상태 등이 모두 작용한 결과인 것이다.
말하자면, 학습은 공부하기 적절한 분위기의 공간, 함께 공부하는 친구들, 자신을 진심으로 지도하려 하는 교사가 모두 존재할 때 가장 잘 이루어진다는 것이 뇌과학과 교육심리학의 오래 된 정의다. 인공지능과 메타버스는 이들 요소들의 일부를 간접적으로 재현할 수 있을 뿐, 그 자체를 물리적으로 구현할 수는 없다.
반면, 학교는 -비록 완전하지는 않지만- 학습을 위해 고안된 물리적 공간이며 ‘배움’이라는 행위
바람직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특수한 장소이다. 그리고 학교의 규칙들과 사회적 관계도 학습을 지향하도록 목적하고, 또 구성되어 있는 곳이다. 그것도 학생들의 육체가 닿아 있는 물리적인 공간으로서 말이다.
학습의 출발은 학습에 대한 ‘동기’다. ‘동기’란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하게 만드는 힘을 뜻한다. 교육학의 이론에 따르면 학생들이 어떤 동기를 갖게 되는 가장 주요한 근거는 ‘관계성(교사, 혹은 함께 학습하는 사람과의 우호적 관계와 인정에 대한 욕구)’, ‘자율성(스스로 과제를 선택할 수 있을 때 느껴지는 감각)’, ‘유능감(실력이 향상되고 있다는 감각)’이다. 이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었을 때 동기 유발에 직접 관여하는 호르몬 ‘도파민’이 분비되는 것이다. 이것이 학습 동기에 대한 기본적인 이론적인 틀이라 할 수 있다. 이 셋 중, 인공지능은 유능감에는 적합할 수 있다. 그러나 자율성에는 취약하고, 관계성은 아얘 기대하기 어렵다.
어떤 사람들은 인공지능이 제시하는 개별적이고 섬세한 피드백이야 말로 강력한 동기의 요인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인공지능과의 관계도 인간과의 관계처럼 친밀감을 줄 수 있고, 학습에 있어서도 인정의 욕구를 채워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진화론의 설명을 빌리면, 인간은 또다른 인간, 즉 타인과의 친밀함을 행복의 요인으로 삼는 존재다. 인간은 타인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기본적인 생존이 가능하기에, 관계 속에서 안정과 행복을 느끼도록 진화했다는 설명이다. ‘또다른 인간’과의 좋은 관계는, 그래서 인간에게는 생존과 안전에 연결된 강력한 행복의 요인인 것이다.
인공지능의 피드백은 성장을 일부 촉진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성장의 궁극적인 동기가 되는 것은 결국 또다른 인간의 인정이다. 인공지능과의 친밀한 관계(?)는 인간이 인간의 사회 속에서 느끼는 소속감과 안정감, 유대감을 대체할수가 없는 것이다. 다름 아니라, 인간이 그런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의 칭찬을 받으며 열심히 쓴 글이 있다면, 학습자는 그것을 최종적으로 인간 교사에게 제출하여 점수를 받고, 또 칭찬을 받아야 그 글이 비로소 완성되었다는 감각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내가 그렇듯이.
학교의 붕괴를 말하는 사람들
학교의 붕괴를 주장하는 이들을 자세히 보면, 대부분 거대 기술기업의 책임자이거나, 관련 종사자들인 경우가 많다. 최근에 인공지능이 교사를 대체할 것이라 주장했던 이도 마이크로소프트의 수장인 빌 게이츠였다. 이러한 상황은 많은 의구심을 불러 일으킨다.
학교를 붕괴시키고 기술이 그 자리를 대신하면, 기존의 교육 재정의 상당수가 기술 기업들에게 돌아갈 것이다. 학교를 짓는 비용이 태블릿과 AR기기 사용료 지급으로, 교과서 구입 비용이 콘텐츠 구독료로 바뀐다면 이들은 큰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다. 학교의 기능을 아웃소싱 받고자 하는 이들이 학교의 한계를 지적하는 건 그들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 결과가 어떤 교육적 결과를 가져올지에 대해서는 진지한 논의와 결론이 나온 바가 없다. 단지 기능적으로 대체할 수 있다는, 그 막연한 주장이 있을 뿐이다.
학교를 메타버스로 대체하는 일에는 정책적 결단도 필요할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섣부르고 경솔하며, 그 결과에 책임지지 못하는 교육정책들을 숱하게 보아 왔다. 다만, 앞으로 어떤 정책 결정자가 기술의 시대에 걸맞는 결정을 하겠다면서 학교를 해체하는 것 같은 실수는 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 결정은 지금까지의 작은 실패들과는 전혀 다른, 다시 수습하기 힘든 대형 사고로 기록될 것이다.
한편, 나는 인공지능에게 교육을 맡기려는 시도의 원천에 ‘게으름’과 ‘편의주의’가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한다. 교육에는 여러 조건들이 필요하고, 또 투자한 만큼의 성과가 일정하게 나오지도 않는다. 이런 현실에서 학생을 앉혀 놓고 그 앞에 있는 컴퓨터의 전원을 켜 주기만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거라는 기술의 장담은 매혹적으로 들릴 만도 하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광고에 불과하다. 인간의 뇌는 컴퓨터의 CPU와 하드디스크가 아니다. 엔터 키를 누른다고 해서 정보가 입력되는 기계장치가 아니다.
불완전하지만 대체할 수 없는 그 곳, 학교
지금까지 인공지능과 메타버스는 학교를 대신할 수 없는 이유들을 나열했다. 그렇다고 해서 학교가 완전한 곳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많은 이들이 학교의 의구심과 불만, 심지어 적대감을 표현하기도 한다. 이 비판의 시선들은 모두 의미 있는 것이며 또한 탄탄한 근거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학교는 학교를 향한 비판에 겸손해질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앞으로 학교가 극복해야 할 문제이지, 학교를 없애야 하는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인공지능과 메타버스가 기존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 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학습과 사회적 관계에 있어 교사들이 불완전한 것도 사실이다. 학교의 모든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바람직한 모델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때로는 같은 교사라도 어떤 학생에게는 존경의 대상이 되기도, 또 다른 학생에게는 미움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것이 교사의 숙명이다. 교사 자신도 때때로 학교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혼란스러워 한다.
교사들이 학생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그것은 학생들의 학업 의욕을 고취시키고, 정서적인 안정감과 자신감을 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교사들에게도 그것은 어려운 일이다. 나는 학생들과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은 교사의 성품 보다는 일종의 전문적 역량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학교의 교사들이 -물론 나를 포함해서- 모두 이런 역량을 갖추지는 못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자리를 인공지능이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공지능은 그 기능의 수행 주체가 될 수 있는 가능성 자체가 없다.
나아가 학교는 학생 간의 관계에 있어서도, 늘 우호적인 환경을 조성하지는 않는다. 아니, 오히려 학교는 학생들을 등급으로 나누고 경쟁관계를 조성하며 학생들의 관계를 나쁘게 하는 구조를 가진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려면 결국 학교가 조금이라도 덜 경쟁적인 곳이 되는 수밖에 없다. 만약 학생들 간의 관계가 지금보다 우호적이고 협력적인 방향으로 흐를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 진다면 오래된 학습 이론이 말하는 대로, 학생들의 학습 효율도 더 올라갈 것이다.
명심해야 할 것은 학교가 나아가야 하는 그 길의 종착역이 메타버스와 인공지능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 사회가 근본에서 변화하지 않는다면, 학교가 품고 있는 그 경쟁체제는 메타버스 속에서도 똑같이 재현될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학교를 인공지능과 메타버스라는 디지털 공간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다. 아날로그의 세상에 존재하는 인간이 더 행복하게 거주할 공간으로 학교를 바꾸는 것, 그리고 그 안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서로를 조금이라도 더 우호적이고 협력적 대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일이다.
학교는 인간이 거주하는 물리적 기반이다. 그리고 인간이 피와 살로 존재하는 한 그 공간은 언제까지나 필요할 것이다.
인간이 포기하지 않는 한, 학교는 언제까지나 거기에 있을 것이다.
* 이 글은 출판을 목적으로 한 원고 '학교의 회색풍경'의 일부를 편집한 것입니다. 이 챕터의 전체 원고는 탈고된 상태로 보관중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