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손을 내밀 때다.
학교는 길고 깊은 균열들로 신음하고 있다. 그러나 이 균열이 학교 전체의 모습은 아니다. 지금까지 이 책에서 묘사해 온 학교의 균열들 너머에는 다채롭게 펼쳐진 다양한 풍경들이 있다. 학교에 인간이 있고, 또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끊임없이 출렁이는 한, 학교의 모습은 하나의 색으로 칠해질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은 하나의 얼굴만을 가지고 살아가지 않는다. 학교도 마찬가지다. 시간과 공간에 따라, 또 누가 주인공이냐에 따라 학교의 표정은 쉬지 않고 변한다.
교실의 한구석에는 우울과 무기력에 가득 차서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책상에 엎드린 학생들이 있다.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마저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돌덩이처럼 앉아 휴대폰만 바라보는, 무겁고 또 무겁게 짓눌린 학생들. 온라인 도박에 빠져 돈을 탕진하고 빚을 진 학생들도 있다. 도박이 중독으로 옮겨 가 삶이 부스러진 학생도 있다.
반면, 쉬는 시간만 되면 학교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친구들과 장난을 치고, 교실이 떠나가라는 듯 소리를 치며 웃어대는 학생들도 있다. 너무 왈가닥이어서 친구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때때로 선생님에게 잔소리를 듣는, 넘치는 에너지를 어찌 할 줄 모르는 학생들. 친구들 한 명 한 명이 너무 궁금해서 참지 못하는 학생들. 그런 학생들은 과거에도, 지금도 학교의 이곳저곳에서 푸른 활력을 뿜어낸다.
점심시간의 캠퍼스는 운동과 산책을 즐기는 학생들로 빼곡하다. 휴대폰을 손에 쥐는 것보다 몸과 입을 움직이는 수다와 운동이 훨씬 더 재미있다는 사실을, 학생들은 가르쳐주지 않아도 안다.
점심시간에 주어지는 잠깐의 여유. 산책과 운동을 허락하는 잠깐의 햇살이 있는 날이면 운동장은 햇빛을 받으러 나온 학생들로 가득하다. 그 길을 산책하다 만나는 학생들의 표정은 웃음기와 편안함으로 가득하다. 봄날의 햇살 아래에서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장난을 나누는 그 풍경은 예나 지금이나 학교가 가진 고유한 아름다움이다.
학교의 공부는 경쟁의 수단이 된 지 오래다. 그리고 수업은 늘 시험의 압력 아래에 있는 힘든 시간이다. 그러나 이런 수업 시간에도 배움의 즐거움을 느끼는 학생들, 독서의 기쁨을 느끼는 학생들이 있다. 성적과 관련이 없는데도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는 학생들. 시험 점수는 만족스럽지 않지만 단지 수업 내용이 흥미로워서 볼펜을 들고 참여하는 학생들이 있다. 학생들에게는 지금도 ‘재미’와 ‘의미’가 공부를 하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인 중 하나다. 재미있으면, 학생들은 한다.
학교는 성장을 목격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1학년 때에는 교실 청소조차 하지 못하던 학생들이 3학년이 되면 당연하다는 듯이 교실을 정리할 수 있게 된다. 담임 교사가 정해주지 않아도 스스로 청소 당번을 정하고, 학급 규칙을 정할 수 있게 되기도 한다. 교무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용건부터 불쑥 꺼내던 학생들이, 3학년이 되면 인사부터 한 후, ‘선생님, 드릴 말씀이 있어요’하며 운을 뗄 줄도 알게 된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시간을 보내며 몸과 마음이 조금씩, 느리지만 한 걸음씩 자라고 있다.
‘선생님 덕분에 저 사람 됐어요’
한 학생이 무심히 내뱉었던 저 말은, 지난 시간 동안 그 담임 선생님이 감내했던 인내와 이해, 그리고 애정이 뭉쳐서 이루어 낸 ‘균열의 봉합’이었다. 이 봉합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교사와 학생이 힘겹게 만든 관계, 그리고 오랜 시간 동안 나누어 온 소통의 시간 들이 모여서 이룩한 것이다.
학교는 교사들에게 불안과 두려움의 공간이지만 자신을 실현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수업은 교사에게 두렵고 긴장되는 시간이지만 다른 직업에서는 느낄 수 없는 행복을 줄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선생님 수업 덕분에 처음으로 공부했어요’
가끔 교무실에서 들려오는 이 고마운 고백은 학교가 인간과 인간의 접점이며, 인간의 변화가 일어나는 장소임을 알리는 소리다. 학교의 기쁨은 대단한 철학이나 수업 기술을 완성했을 때가 아니라 학생의 이 한 문장에서 온다.
‘수업이 재미있어요’
이 말이야말로, 교사에 대한 최고의 찬사다. 한구석에 육중한 무기력에 빠진 학생이 있다면, 다른 한켠에는 ‘재미’의 눈으로 칠판을 응시하는 학생이 있다. 수업이 끝난 후 쪼르르 달려와 교과서의 이것저것을 질문하는 학생들도 있다. 그 질문들에는 그저 시험이 걱정되어서 나온 것들도 있지만, ‘궁금해서’하는 질문들도 있다. 수업이 학생 중 누군가를 ‘궁금하게’ 만들었다면, 그 수업은 완전히 성공한 수업이다. 때로는 학교의 수업이 이렇게, 성공할 때도 있다.
학생들은 교사를 의심하지만 때로는 존경하고, 또 의지하기도 한다. 부모님께 말하지 못하는 속내를 털어놓기도 하고 쉬는 시간마다 선생님을 찾아오는 이들도 있다. 교사의 수업방식이나 이야기, 혹은 교사가 들려주는 삶의 과정을 동경하기도 한다. 때로는-고맙게도-선생님을 존경한다고 말해주는 학생이 있다. 누군가를 존경할 줄 아는 사람은 대부분 스스로 존경받을 자질을 갖춘 사람이다. 학교는 이렇게, 누군가를 존경할 줄 아는 누군가를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이런 공간은 세상 어디에서도 좀처럼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누누이 지적했지만 학교가 가진 균열은 많은 부분 우리 사회가 학교에 강제로 떠넘긴 경쟁체제에서 비롯되었다. ‘구조’의 시각으로 보면 학교는 오직 깊은 균열로 채워질 운명에 처해 있다. 하지만, 학교는 기계가 아니라 셀 수 없이 많은 인간의 모임이다. 그래서 학교는 구조 밖의 표정과 인간관계들이 다채롭게 펼쳐진다.
나는 학교에서 다양한 풍경을 목격해 왔다. 그들 중 어떤 것은 깊은 상처가 되기도 했고, 때로는 그 상처에 오랜 시간 동안 고통받기도 했다. 교사가 과연 나의 길이 맞는지, 수십 번 고뇌하고 흔들린 적도 있다. 한때는 진지하게 다른 길이 없을지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도 나는 학교에 남아 있다. 그것은 용기가 없어서, 미련 때문에, 그리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생각과 고민의 결과이기도 하다.
나, 그리고 이 책을 읽고 있는 당신. 나아가 세상의 모든 인간이 그러하듯, 학교는 완벽한 곳이 아니다. 학교의 균열을 메우기 위하여, 우리는 상상하고 또 움직여야 한다. 그 발걸음에는 종착지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미래를 위한 상상이 덧대어진 학교의 풍경은 지금보다는 밝을 것이다. 밝아진 학교의 풍경 속에서 교사인 나도, 나와 함께하는 학생들도, 그리고 학교가 뿌리내린 이 세상도, 균열의 틈을 덜어내고 조금이나마 단단한 기둥으로 자리 잡아나가길 꿈꾸어 본다.
학교는 인간과 인간의 공간이다. 그리고 학교의 인간은 학교 밖의 인간과 연결되어 있다. 학교 안, 그리고 학교 밖의 이들이 보내는 따듯한 시선, 그리고 맞잡은 손의 개수만큼, 학교의 균열도 조금씩 메워질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손을 내밀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