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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것을 지키며 버티는 삶의 고결함

존 윌리엄스 <스토너> 리뷰

by 김연정

인터넷을 끊고 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데, 여기저기 자극적인 소식과 콘텐츠가 넘쳐난다. 무엇이든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냐가 중요하겠지만, 올 초에는 무해하면서도 여운이 남는 글을 읽고 싶었다. 그래서 고른 것이 존 윌리엄스의 장편소설 <스토너>다.

이 소설은 출간 후 50년이 지나 재조명받는다. 역주행 소설의 끝판왕이라 불리기도 하고, 꽤 많은 사람들의 인생 책으로 손꼽히기도 한다.

누군가 내게 인생 책을 이야기해 보라고 하면 일단 주저하게 될 것 같다. 어린 시절부터 독서가 취미여서 꽤 많은 책을 읽었는데, 책이란 어느 시기에 읽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올 때가 많았다. 어릴 때 감명 깊게 읽은 책이라도 성인이 되어 읽어보면 그다지 와닿지 않거나, 반대로 어릴 때는 그 의미를 몰라 별로였으나 후에 읽으면서 '왜 그때는 미처 몰랐을까?'하고 무릎을 탁 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이 책은 정말 적절한 시기에 만났다. 좀 더 어릴 때 읽었더라면, 그 가치를 미처 깨닫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저 즐겁지만은 않은 인생,
인내로 쌓아 올린 나날,
그 숭고함에 대하여

윌리엄 스토너. 주인공의 이름이 책의 제목이다. 우리가 기대하는 주인공의 삶은 뭐랄까? 돈과 명예를 얻었다거나, 그도 아니면 세상을 놀라게 할 만한 엄청난 사건의 주인공이었다거나 하는 것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 책의 주인공인 스토너의 삶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다. 이미 첫 부분부터 스토너의 삶에 대한 평가가 나온다. 그는 실존했으나 모두에게 잊힌 존재, 그야말로 아무개와 같은 존재로 스스로를 명명하고 있다.

윌리엄 스토너는 1910년, 열아홉의 나이로 미주리 대학에 입학했다. 8년 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그는 박사학위를 받고 같은 대학의 강사가 되어 195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강단에 섰다. 그는 조교수 이상 올라가지 못했으며, 그의 강의를 들은 학생들 중에도 그를 조금이라도 선명하게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가끔 어떤 학생이 이 이름을 우연히 발견하고 윌리엄 스토너가 누구인지 무심히 생각해 볼 수도 있겠지만, 그 이상 호기심을 충족시키려고 애쓰는 경우는 거의 없다. 스토너의 동료들은 그가 살아 있을 때도 그를 특별히 높이 평가하지 않았고, 지금도 그의 이름을 잘 입에 올리지 않는다. 노장교수들에게 스토너의 이름은 그들을 기다리는 종말을 일깨워주는 역할을 하고, 젊은 교수들에게는 과거에 대해 아무것도 일깨워주지 않고 동질감을 느낄 구석도 전혀 없는 단순한 이름에 불과할 뿐이다.
- <스토너(이동진 Special Edition)>, 존윌리엄스 지음 / 김승욱 옮김 - 밀리의 서재 -


첫 부분만 읽어도 스토너의 삶은 우리가 기대하는 주인공에서 엇나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설을 읽으면서 마지막에는 혹여나 반전이 있을까 생각해 보지만, 그런 것은 없다. 그저 일상의 나열이다. 그 속에 사건이 있지만, 스토너는 그에 적극적으로 맞서기보다는 오히려 빠르게 체념하고, 그저 참고 견딘다. 모두가 기대하는 사이다 전개나 복수 같은 결말은 없다. 원치 않는 일들이 일어나도, 스토너는 동요 없이 그저 받아들인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스토너는 농과대학에 진학해 농업을 공부하고 가업을 이을 운명이었으나, 영문학 개론 수업을 들으며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뜬다. 농부의 길 대신, 학자의 길을 택한 것이다. 삶의 대부분을 그저 받아들이기만 했던 그에게는 놀라운 선택이었다.


영문학에 대한 그의 애정은 그만큼 큰 것이었고, 순수한 애정을 열정적인 교육의 형태로 학생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것이 그의 가장 큰 갈망이었다. 그러나 그의 갈망은 여러 사건으로 인해 끊임없이 도전받고 방해받는다. 스토너는 첫눈에 반한 여성인 이디스와 결혼했으나 그 결혼은 처절한 실패로 돌아갔고, 그 연장선상에서 딸의 삶 또한 평탄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뒤늦게 진정한 사랑을 찾은듯했으나, 끝내 연인과도 이별을 고한다. 동료 교수 로맥스와는 끝까지 대치하면서 평생 이어온 교수 생활도 괴로운 나날로 기록된다.


스토너는 부모의 뜻을 거스르고 자신의 의지를 따랐으나, 그의 삶은 부모님의 삶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부모가 평생 살던 땅에서 일하다 눈 감은 것처럼, 스토너도 그랬다. 물론 이디스가 극렬히 반대한 것도 있지만, 그는 거부하지 않고 그 뜻을 받아들인다. 모욕과 눈총을 받으면서도 스토너는 한 자리에서 버틴다. 스토너의 삶은 떠나는 것이 아닌, 그저 한 곳에서 머무는 삶이었다.


스토너는 누군가의 관계 속에서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일이 거의 없다. 이디스에게 첫눈에 반해 구해하긴 했으나, 그 이후로는 그의 선택을 담담히 받아들인다. 딸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핀치와 로맥스, 부모와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그는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빠르게 포기하고 체념하고 그저 자신이 할 일을 묵묵히 한다.


스토너에게 학문이 없었더라면, 교육자의 길을 걷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이디스가 계속해서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찾지 못하고 계속해서 집착의 대상을 옮겨갈 때도, 스토너는 그저 자신의 일을 한다. 책을 읽고, 강의를 하고, 학생들의 논문을 지도한다. 서재를 잃고, 좁은 공간에서 있을 때도 그는 별다른 저항 없이 읽고 쓴다.


나는 스토너가 진정으로 사랑했던 것은 학문이라는 생각을 한다. 아들, 남편, 아버지, 연인, 어떤 입장에서도 그를 온전히 채워준 것은 없었다. 오로지 교육자의 입장일 때, 가장 열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서 그는 불행했으나, 역설적으로 행복했을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대부분의 인간관계에서 수동적으로 체념하고 말지만, 로맥스와 끝까지 대치한 것도 자신이 생각하는 신념을 저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결국 스토너가 가장 고결하게 생각한 가치는 교육이었지 않았나 싶다. 그가 가장 크게 분노한 사건도 교육과 관련된 일이었고. 그렇지 않고는 그렇게 길고도 지루한, 그리고 질 것이 뻔한 싸움을 쭉 끌고 가지는 않았을 것 같으니까.



마지막까지
내가 지키고 싶은
가치란 무엇일까?


넌 무엇을 기대했나? 그는 생각했다.
뭔가 무거운 것이 그의 눈꺼풀을 누르고 있었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그가 힘들게 눈을 떴다. 그가 느낀 것은 빛이었다. 오후의 밝은 햇빛. 그는 눈을 깜박이며 창문으로 보이는 파란 하늘과 눈부신 태양 가장자리를 덤덤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것들이 진짜라는 결론을 내렸다. 손을 움직여 보았더니 몸속에 묘한 힘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마치 공기 중에서 흘러들어온 것 같았다. 그는 심호흡을 했다. 통증이 없었다.
- <스토너(이동진 Special Edition)>, 존윌리엄스 지음 / 김승욱 옮김 - 밀리의 서재 -


스토너가 자신의 삶을 바칠 학문을 이른 나이에 만난 것이 그의 인생에 가장 큰 행운이었달까? 그의 남은 인생에는 늘 어둠이 따라오고, 볕 들 날이 없다. 왜 이렇게 고난의 행군을 계속 가는가 싶을 정도로 미련스럽게 보일 삶이었으나, 그의 삶이 대단하게 다가오는 건 그런 삶을 버텨냈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런저런 위기 속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자신이 사랑에 빠진 학문을 고수하고, 그 열정을 교육을 통해 전달하려고 했다는 점이.


마지막에 죽음을 앞둔 그가 병상에서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 "넌 무엇을 기대했나?". 이것은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으로 다가온다. 누구에게나 찾아올 죽음의 순간, 그 순간에 우리는 무슨 답을 할 수 있을까? 무엇을 기대했고, 무엇을 얻었을까? 그리고 무엇을 잃었을까? 이 소설이 전하는 여운은 그런 것이다. 너는 마지막 순간에 어떤 답을 스스로에게 하게 될 것이냐고, 묻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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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너는 마지막에 그의 책을 손에 쥔다. 글쎄 남들이 보기에는 성공하지 못한 삶일지 몰라도, 마지막까지 자신이 원하는 가치를 지켜낸 그는 그 책을 쥘 자격이 있다고 본다. 그것이 그가 주연으로서 자격이 있음을 당당히 선언해주고 있는 셈이다. 특히 나는 강의를 많이 하고 있기에 교육에 대한 그의 열정과 애정에 공감한 부분이 많았다.


매해 스스로에게 묻곤 한다. 앞으로 어떤 일을 할까? 어떤 가치를 고수해야 할까? 하는 질문들이다. 갈수록 시간은 빠르게 흐르는 것 같고, 세상만사가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니 무력해질 때도 많다. 그러나 화려함과 자극으로 가득 찬 세계 속에서 더 스스로에게 많이 묻고 답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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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너의 삶을 돌아보며, 평범하지만 비범한 삶을 살았던 그의 가치에 대해 오래 생각해 보려고 한다. 왜 많은 사람들이 인생 책으로 손꼽는지 알 것도 같다. 내 의지대로 할 수 없는 일들이 많다. 올해는 서예를 쓰면서 마음을 수양하며 올곧게 글을 쓰고 있다. 사람과의 관계나 예기치 못한 사건들. 그러니 내가 온전히 빠질 수 있으며, 내 의지로 통제할 수 있는 것. 어떤 위기 속에서도 내가 숨 쉴 수 있는 공간이 중요한 게 아닐까. 정말 멋진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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