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상형은 병규씨다. 그 사실이 종종 억울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내가 병규씨같은 사람을 만나기엔 너무 늦어버렸기 때문이다. 내가 15살로 돌아갈 수도 없고, 48년을 더 살 수 있을지도 미지수이고. 무슨 소리냐고? 내 이상형인 그는 15살 때부터 63세가 될 때까지 무려 48년을 오직 한 여자만 사랑한 다시없을 일편단심의 남자이기 때문이다.
병규씨는 첫사랑과 결혼했다. 이 둘은 아직도 손을 잡고 걸어 다닌다. 함께 등산을 가면, 옛날 동화책에 나올 법한 철수와 영이처럼 손을 잡고 흔들며 걷다 길가에 핀 꽃을 꺾어 서로의 귓가에 꽂아주고는 한다. 함께 등산을 왔던 나의 존재를 까맣게 잊어버리는 건 예삿일이다.
두 사람은 어린 시절 같은 중학교에 다녔다. 그녀는 오빠의 사업 실패로 갑자기 가세가 기울어 어려운 형편이었다고 한다. 병규씨는 매일 아침 버스 창문 밖으로 책을 읽으며 걸어서 학교를 가는 그녀를 보았다. 버스비가 없어 20km가 넘는 거리를 매일 씩씩하게 걸어 다니면서, 성적도 좋고 반장까지 하던 그녀가 병규씨 눈에는 반짝반짝 빛나 보였다. 하지만, 수줍음이 많았던 병규씨는 그녀에게 말 한마디 붙여보지 못하고 그렇게 병규씨는 남고에, 그녀는 여고에 진학했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공무원 시험 준비를 위해 학원에 등록했던 병규씨는 그곳에서 낯익은 사람을 발견한다. 3년 전과 변함없이 책에서 눈을 떼지 않은 초롱초롱한 눈을 한 그녀였다. 서로 다른 고등학교로 떨어져 지낸 지난 3년을 후회했던 병규씨는 이번만큼은 용기를 내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겨우 다시 만나기는 했지만, 병규씨는 공무원 시험 합격 직후 군대에 가게 되었다. 병규씨는 군대에서 수 십 통의 편지를 그녀에게 보냈다. 물론, 쿨한 그녀는 단 한 번도 답장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녀의 프라이버시를 지켜주기 위해 굳이 앞에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새침한 외모와는 달리 ‘여장부’ 같은 성격에 가족들의 생계까지 책임지고 있던지라 감성 넘치는 군인의 편지에 답장해줄 여력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수하고 쓸데없이 긍정적이었던 병규씨는 그런 그녀의 쌀쌀맞음에 전혀 굴하지 않았다. 4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그녀는 그때의 일을 아주 조금 후회한다고 말하곤 한다. “그래도, 답장 좀 해줄걸. 생각해보니 그거 조금 미안하더라?“
병규씨는 지금도 그녀가 뭔가가 먹고 싶다고 하면 바로 사러 나갈 채비를 한다. 시간이 아침이건, 밤이건, 새벽이건 상관없다. 얼마 전까지 약 6개월 간 그녀가 중요한 시험공부를 했었다. 집이 답답해서 공부가 안된다는 그녀를 위해 병규씨는 매일같이 식량과 간식을 차에 싣고는 경치 좋은 곳으로 그녀를 데려갔다. 책상을 펴 공부할 자리를 만들고 어깨에는 담요를, 입에는 달달한 과일을 깎아 넣어주며 그녀가 답답하지 않게 공부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 시점에서 다시 한번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 저런 사람이, 저런 사랑이 현실에 또 있을 수 있을까?
내가 종종 그녀와 다투면 보다 못한 병규씨가 나타난다. 그리고 내게 경고를 한다. “난 무조건 이쪽 편이야. 억울하면 너도 네 편 만들어서 나가~”. 그 말이 화날 법도 싶은데, 나는 오히려 그런 병규씨가 멋있어 보였다. 그리고, 맞는 말 아닌가? 결혼했으면 평생 같은 편인 거지. ‘무조건 그녀 편’이라는 병규씨의 대사에 감복한 나는 “결혼은 잘 모르겠지만, 평생 내 편인 사람 한 명은 있었으면 좋겠어.”라고 말하고 다니곤 했다.
나의 이상형은 병규씨다. 평생 한 여자만을 사랑한 남자. 그 무엇보다 그녀가 우선인 남자. 그녀를 위해 시간과 돈.. 아니 인생 전부를 쓰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는 남자. 여전히 어린 시절의 순수한 눈과 마음으로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
나는 가끔씩 병규씨의 그녀를 보면서 ‘여자로서의 그녀의 인생이 부럽다’라는 생각을 하고는 한다. 그리고 나는 꽤 높은 확률로 나의 이상형을 만날 수 없는 것이란 불길한 예감을 한다. 하지만 그 이상형이 나의 아빠라서, 그런 아빠가 나의 엄마를 사랑해주는 것이 나는 참 기쁘다.
나의 이상형 병규씨의 이야기를 이렇게 마무리하려고 하니 아무래도 병규씨의 그녀가 병규씨의 구애에 마지못해 결혼한 것처럼 보였을 것 같아 그녀에 대한 TMI를 추가해본다.
2년 전, 병규씨가 아주 큰 수술을 했다. 의사는 병규씨가 6개월도 살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때 처음 보게 되었다. 어린아이처럼 바닥에 주저앉아 대성통곡을 하던 그녀를. 쌀쌀맞아 보일 정도로 늘 애교도 리액션도 없던 그녀였다. 나도 어릴 적에는 병규씨의 절절한 일편단심 짝사랑이 둘을 결혼까지 이끌었다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하지만 알게 되었다. 확실히, 그녀는 병규씨를 아주 많이 사랑하고 있었다. 그날 이후 병규씨의 안색이 조금만 안 좋아도 그녀는 겁에 질려 입버릇처럼 말하고는 한다. 그가 없으면 단 하루도 살아갈 자신이 없다고. 그러니 반드시 자신의 손으로 건강해지게 만들 것이라고.
그녀는 하던 모든 일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병규씨가 건강해질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좋은 의사와 좋은 음식을 찾아 헤맸다. 그리고 2년이 지난 지금 병규씨는 마술을 부린 것처럼 건강해졌다. 6개월 시한부를 선고하던 여러 의사들도 어리둥절할 정도로 병규씨는 아주 건강하다. 병규씨는 행복한 표정으로 말하고는 한다. 그녀의 정성에 하늘이 감복한 것이라고. 그녀만큼 자신을 사랑해줄 사람이 세상 어디에 있겠느냐고.
내 이상형 병규씨와 그녀의 사이에 나는 도저히 끼어들 틈을 발견할 수 없다. 둘에 대한 질투보다는 나에 대한 걱정이 앞선다. 이런 완벽한 사람을 봐버린 내가 또 다른 이상형의 사람을 찾을 수 있을까? 하... 어디, 병규씨같은 남자 또 없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