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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샘 Sep 09. 2019

임신하기 싫다는 말에 악마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임신과 출산, 대신해줄 수 있나요?

브런치로 연동된 메일함을 확인하는 일은 늘 설렌다. 적어도 이 곳 브런치에서는 작가인 내게 새롭고 설레는 제안들을 받는 창구이기 때문이다.


여느 때와 다름없던 퇴근길, ‘작가님에게 새로운 제안이 도착했다.’는 브런치 알람을 받고 다소 상기된 마음으로 메일함을 열었다. 메일을 확인한 순간 집으로 향하는 가벼운 발걸음을 잠시 멈추었다. 이게 뭐지?


흠.... 첫 번째 팬레터 치고는 격하군.


그렇다. 여성의 몸을 가지고 임신과 출산을 할 생각이 없다는 글을 쓰는 내가 받은 첫 악의적인 편지였다. 브런치 아닌 다른 곳에서도 글을 쓰는 내가 이 편지를 받기 직전에 썼던 글의 제목은 <아기를 낳든 안 낳든 내 몸은 내 의지대로 씁니다.>였다. 그동안 임신과 출산으로 겪는 몸의 변화에 대해서 거의 알지 못했던 어린 소녀들이 자라 내 몸에서 일어날 수 있는 날 것 그대로의 진실을 원하는 여성들이 되었다는 취지의 글이었다. 물론 뒤에 몇 마디 더 붙였다.


임신과 출산의 고통을 감당하고 싶지 않은 나에게 이기적이라 비난해도 나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 나 대신 상상 입덧조차 안 해줄 사람의 비난은 잠시 듣는 그때뿐이지만 내 몸과 삶에 대한 변화는 평생 나 홀로 책임져야 하는 일이란 걸 매우 잘 알기 때문이다-고 말이다.


그 후 내게 돌아온 답변은 ‘출산을 막으려는 악마적인 행동’이라는 말이었다. 물론 내 의견에 동조해주는 댓글도 많았다. 하지만 누군가는 굳이 나의 브런치 계정까지 들어와 개인 메일까지 보내는 수고스러움을 감내하며 나를 비판했다. 타인이 이 정도 정성을 쏟아 나를 비판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은 거라면 나도 정말 무언가를 잘못한 것이 아닐까? 곰곰이 반성해보았다.


반성 해 본 결과 내가 생각하는 나의 죄목은 이러했다.

1. ‘임신과 출산의 고통’이라는 주제로 글을 써서 몇 천의 사람들이 보게 만들었다. 내 글로 인하여 임신과 출산의 의욕이 저하된 여성들이 있을 수 있다. 저출생 시대에 이런 글을 써서 출산의 사기를 저하시키고 말았다.

2. 감히 임신과 출산의 고난 사례를 최대한 듣고 모아본 뒤 여성 당사자가 임신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임신할 수 있는 몸을 가지고 태어난 여성이라면 그냥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임신과 출산의 성스러움을 기쁘게 누리면 될 것을.

3. 내 몸과 삶에 대한 결정권은 오직 나에게 있다는 소리를 해댔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남편이나 시부모님 등 나 아닌 타인의 허락이나 양해가 우선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아내와 며느리로서의 ‘도리’를 다 하지 않을 거라면 난 왜 결혼했을까?


스스로 죄목을 나열해보고 나서는 실소를 금할 수가 없었다. 나 지금 몇 년대에 살고 있는 거지?

내가 살고 있는 지금이 21세기라는 사실에 그나마 안도했다. 아마 중세 시대라면 말 그대로 악마가 되어서 짧은 생을 끔찍하게 마감하지는 않았을지.


헛웃음 터지는 상황이 하나 더 있다. 내 남편이 다른 사람들에게 ‘아내의 몸이니까 임신에 대한 권리와 선택은 오로지 아내에게 있다.’는 말을 하면 그에게는 멋진 남편, 대단한 남편이라는 찬사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나의 몸의 권리와 선택을 주장하면 돌아오는 답변은 ‘악마’라는 것. 이 촌극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러워하는 내게 모유수유 문제를 두고 시부모와 한바탕 소동극을 벌 친구가 말했다. “이제 알았어? 이 땅에서 여자 내 몸은 온전히 내 것이 아니야.”

 

공교롭게도 내가 ‘악마 메일’을 받은 이 날, 청문회가 열린 국회에서는 미혼의 서울대 교수인 여성 후보자에게 대뜸 이런 훈계를 해대는 의원도 있었다. “본인의 출세도 좋지만 (임신과 출산으로) 국가 발전에도 기여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서울대 경영학과 최초로 여성 교수로 임용된 자도 ‘임신과 출산’을 하지 않았다고 혼나는 마당에 내가 무슨 수로 같은 문제에 대한 비난을 피할 수 있을까 싶은 생각에 한 번 더 허탈했다.


천사같다는 말을 듣고도 행복하지 못하다면 차라리 악마라는 말을 듣고 나답게 살래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부지런히 쓰고 말하는 것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내 몸에 대한 권리와 내 삶에 대한 결정권을. 내 몸의 고통을 대신 겪어 주는 사람도 없듯이 내 몸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자도 오직 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악마’라는 말을 듣음으로써 내게 주어지는 것이 내 삶에 대한 자유와 다양한 선택, 그리고 행복이라면 기꺼이 감당하겠다. 더불어 지금 나의 딸들 세대가  “아기를 낳든 안 낳든 내 몸은 내 의지대로 씁니다.” 따위의 말을 했을 때 적어도 ‘악마’ 라는 말은 듣지 않게끔 나는 주장할 것이다.

 

임신도, 출산도 모두 내 몸으로 하는 것이니 전적으로 내가 선택하겠습니다.

나대신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건 타인의 삶에 대한 존중밖에 없습니다.  



이미지 출처


작가 이름: Phan Phan

브런치: http://brunch.co.kr/@phanphan

인스타그램: @phan. p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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