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애

by 은봄

그 애와 나는 꼭 말굽자석 같았다. N극과 S극에서 서로를 끌어당기는. 나란히 있을지언정 교차할 수 없고, 한 몸임에도 만나지 못하는 우리는 가장 친밀하면서도 낯선 관계였다. 가장 깊숙한 곳을 알지만 가장 얕은 곳을 엿볼 수 없었다. 우리의 교집합이 끝나는 순간까지 서로를 가질 수 없으리라는 건 그 애도, 나도 잘 아는 사실이었다. 나는 그 애를 늘 창망하게 바라만 보았다.


그 애와 함께하는 순간마다 그네를 탔다. 삐걱거리는 쇳소리를 들으며 불어오는 바람에 무심히 흔들렸다. 시야에는 멀어졌다 가까워지는 그 애가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속눈썹에 몇 번이고 새겼다. 눈꺼풀 안에 담아두었다가 고요한 밤이 되면 꺼내 하늘 위에 그림을 그렸다. 그러면 수만 개의 별들 사이에서도 그 애를 찾을 수 있었다. 그 애는 나를 완벽하게 끌어당기는 N극이었다.


이따금씩 그 애의 몸에는 온갖 자석들이 붙었다. 오래 몸을 비비기도, 순간의 끌어당김에 그치기도 했다. 나는 그때마다 그들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오롯이 나를 위해. 그 애를 가질 수 없었기에, 도피는 내가 선택한 최선이었다. 하지만 정신없이 뛰었다고 생각했을 땐 이미 뒤를 바짝 따라온 그 애의 다정이 있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제자리걸음을 했을지도 모른다. 확인과 안심을 위해서. 그 애는 손짓했고, 그러면 나는 못 이기는 척 달리기를 멈췄다.


반대로 내가 낯선 자석들과 몸을 부대낄 때면 그 애는 가볍게 웃으며 등을 돌렸다. 그 순간만큼은 나란히 서지 않았다. 우리는 곁에서 느껴지는 체취로 존재를 실감했다. 그 애는 나처럼 도망치지 않았다. 다만 단정한 뒷모습을 보였다. 나는 그 애의 마른 등을 바라보며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상상하곤 했다. 우리는 매번 일정한 간극을 유지했다. 달과 바다처럼, 주기를 두고 만조와 간조를 넘나들었다.


그 애는 좀처럼 선을 넘는 법이 없었다. 대신 늘 같은 다감을 베풀었다. 나는 그 애의 호의를 받을 때면 유일이 된 것 같은 환상에 구름 위를 뒹굴었다. 조용히 비행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건 그 애의 몫이었다. 그 애는 아무런 말 없이 시선으로 나를 좇았다. 그 순간 하늘은 안전지대가 되었다. 바람에 추락한 들 언제고 나를 끌어당길 N극을 믿었다. 그 애는 나를 지켰고, 내가 살포시 착지하고 나면 우리는 또다시 나란히 섰다.


어느 날 그 애가 물었다. 어떤 사랑을 하고 싶느냐고. 차마 뱉지 못 한 그 애의 이름만 입 속에서 십 수 번을 굴렸다. 늘 달콤했던 세 글자가 아렸다. 한참을 머금던 이름을 통째로 삼키자 툭 하고 치고 올라오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목구멍을 지나, 코를 지나, 눈물샘으로 치닫았다. 작은 틈도 주지 않으려 부러 더 퉁명스레 대답했다. 그런 건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내 대답에 그 애는 평온하게 웃었다. 미소에 안도감이 묻은 것 같기도 했다. 어쩌면, 그 애가 바라던 답이 아니었을까.


고백하지 않았다. 겁이 나서였다. 그 애가 멀어질까 두려웠다. 솟아오르는 마음을 숨기고 덮으려 무던히도 애를 썼다. 밤하늘에 그 애가 수놓아질 때면, 나는 별 위에 올라 탄 어부가 되었다. 은하수에 가득한 목소리와 익숙한 얼굴들을 건져가며 지우개질을 반복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꼬박 몇 달 동안, 그렇게 긴 새벽을 보냈다.


내가 떨어져 나와 또 다른 자석이 되었을 때에야 그 애는 말했다. 나를 좋아했다고. 놀라지 않았다. 나는, 우리는 알고 있었으니까. 고백은 고요한 마음에 빠진 조약돌이 되었다. 찬찬히 물결이 일었고, 호수가 일렁였다. 그것이 전부였다. 답은 하지 않았다. 대신 그 애가 늘 그랬듯 다감하게 웃으며 뒤를 돌았다. 그 애가 내 등을 보며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나는 아직도 알지 못한다.


그 애는 마음을 온통 물들인 꽃이었다. 황홀했고, 향기에 취한 채 계절을 누비게 만들었다. 한 철 시드는 것임을 알면서도 나는 그 애를 덧없이 바랐다. 봄을 지나, 여름을 보내고 가을을 맞이하는 순간까지 눈꺼풀에 새겨진 그림자는 날마다 빛을 냈다. 그 빛이 흔적이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마침내 찾아온 겨울의 한가운데서 비로소 회상한다. 기억의 중심에는 그 애가 있다. 나는 너에게 어떤 사람이었을까. 스치는 바람이었을까, 옆자리에 뿌리내린 꽃이었을까. 아주 늦은 밤, 잠든 그 애를 찾아가 속눈썹을 훔쳐보면 내 흔적이 남아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추억의 길목에서 너울거리는 생각들을 잡아 내린다. 그러면 그 애가 천천히 흐드러진다.


이제야 깨닫는다.

우리가 함께 보낸 시간은 지독히도 찬란한 봄이었음을.

keyword
작가의 이전글마음 목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