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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진 Feb 07. 2020

뒤돌지 않는 등

_나르시소 로드리게즈 포 허


나이가 들어도 변하고 싶지 않은 것이 있다,는 말이 우스워질 때, 그이는 이미 나이를 먹은 것이다. 내겐 언제나 청신한 냄새가 날 줄 알았다. 그 냄새를 당신에게 어떻게 전할 수 있을까. 당신이 알기 쉽게 풀어보자면 이렇다.


비에 젖은 오 월 중순의 풀 냄새. 촉촉이 젖은 풀에서는 비릿한 물 내음이 난다. 손톱 옆을 물어뜯는 버릇이 있는 사람은 자기의 침 냄새를 알고 있을 것이다. 그 정도로 적당히 묘한, 나쁘지 않은 냄새다. 내가 이십 대에 좋아한 향수들이 그랬다. 겐조의 파르팡데떼Parfum D’ete나 엘리자베스아덴의 그린티Greentea가 그런 냄새였다. 그때 나는 말간 눈동자, 찬 손을 가진 사람이었고 그 손을 맞잡을 상대를 기다리는 사람이었다.

데떼나 그린티가 거의 투명한 병에 담겨 있어서 찰랑이는 것처럼 내 생각에서, 타인과의 관계에서 투명함이 미덕인 줄로 알았다. 나는 아직 오지 않을 것을 기대했던 영민한 여자애였고 언니들을 동경했지만 언니들처럼 영악해지는 것이 두려웠다. 내 몸에서는 비에 젖은 오 월 중순의 풀 냄새가 났다. 그런 냄새를 좋아했고 영원히 그 냄새가 나길 바랐다.


나르시소 로드리게즈Narciso rodriguez의 포허for her는 오 월과는 거리가 멀다. 십이 월의, 캐시미어가 섞인 카멜색 코트와 어울린다면 적당하겠다. 처음 시향한 것은 오 년 전이다.

불투명한 베이비핑크빛 병은, 그 안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 어떤 향일지 짐작조차 들지 않게 했다. 곡면이 없는 직선의 구조와 손으로 쥐었을 때 느껴지는 묵직함은 인상적이었지만 향만은 나쁜 의미로 굉장했다. 지독한 향이, 과장해서 말하면 역할 정도여서 과연 '포허for her'가 맞는지 재차 확인했다. 그런데 작년부터 나는 이 향수에 꽂혀 있다. 수년 만에 다시 이 향기를 맡았을 때 탑노트에서 묵은 과일향이 난다는 것을 알았다. 오래도록 남는 우드계의 잔향은 시트러스 계열의 향수에서 느껴보지 못한 매력이었다. 오 년의 극간만에 오(惡)가 호(好)로 바뀐 순간이랄까.


변하고 싶지 않은 것이 어떤 계기들로 ─ 설사 그것이 내가 알 수 없는 불가해한 이유라 할지라도 ─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근 몇 년이었다. ‘언니’의 영역으로 한 발을 디딘 것일지 모른다. 언니들이 동경할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영악하다’라는 말에 담긴 다채로운 뉘앙스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포허는 뒤돌지 않는 등(背)이다. 간절히 원했던 것을 그러쥐었다가 그것이 결국에는 떠날 때를 직감하고 먼저 돌아서는 등일 것이다. 얼마간은 이 냄새가 내 몸에서 나기를 바란다.  



2017.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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