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청유 Nov 13. 2024

고객님, 다음 기회는 없어요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지역번호나 070 같은게 아니라 휴대폰 번호였다.


주차?? 라인에 맞춰 잘 했고, 혹시 내차를 긁었어?? 아님 남편이 과로로 쓰러져서 회사동료가 다급히 내게 전화를? 아니면, 우리 아들이 학교를 뛰쳐나와서 배회하다가 어떤 어른에게 걸려서 혼이 나다가 부모님 전화번호를 술술 불어서 전화를..?

유기성 없는 추측 사건들이 머릿속에서 쏟아져 나왔다. 단 5초만에.

나의 긍정성은 태어날 때부터 있던게 아닌 노력형이었다는 다시금 깨닫는다.

어디갔니, 내 긍정회로.


어쨌든 전화를 받고야 말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여보세요?"


"네네~고객님 안녕하세요. 저희가 쿠팡 우수고객담당업체인데 고객님이 리뷰대상자로 선정이 되셔서 연락드렸거든요~"


"아..예..?"


"좋은 상품도 받아보실 수 있게 되셔서요~"


"한클 좔 몰라여"


딸깍



요즘에는 이렇게 쿠팡 제휴 우수협력업체(?)로 선정된 샵이라고 소개하 알바모집 광고전화가 자주 온다. 일주일에 두어 번씩 겪다 보니 이제 조금 필터링이 된다. 은근히 스트레스 받는 걸로 보아 나는 원래 거절을 잘 못하는 사람이 맞는가 보다. 15년째 쓰는 전화번호라 스팸의 늪에 빠진지 오래됐지만 영업 거절을 연습하고 실행해본 건 불과 1년 전부터였다.


차라리 리뷰알바제안은 단박에 봐도 스팸이기 때문에 그나마 거절난이도가 낮다. 문제는, 내가 정보공개동의를 했다고(언제요?) 고객님의 동의 하에 전화를 드렸음을 일언지하에 공지하며 시작하는 전화다.(금시초문인데?) 이 상냥한 으름장을 시작으로 현란하게 펼쳐지는 광고에는 내 응답이 낄 틈이 없다. 살짝 주저하는 막간의 감탄사를 놓치지 않고 그들은 나의 희망찬 미래를 예언해준다. 이 보험과 함께라면 두려울 것이 없다고.


최근 들어서는 광고전화에 대한 민원이 많은 건지, 바쁘다고 잘라 말하면 공손히 끊어주는 상담사도 있는 것 같다. 그래도 대다수의 상담사들 "바쁘실테니 최대한 빨리 알려드릴게요", "바쁘실테니 한가지만 말씀드리고 끊을게요"라며 이미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해줘서 할 말이 없게 만들고 만다.


그들이 나쁜 사람이겠는가. 그저 그들의 일을 할 뿐일테지. 광고전화란 대다수에게 반갑지 않은 연락이기에 시큰둥한 고객을 마주할 깡 정도야 기본소양으로 갖춰져 있을 것이다. 고객의 대답을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멘트를 이어가는 저돌적 코스프레가 그들의 생업인 것을 모르는 바 아니다. 하지만 그 마음을 입장전환까지 해가며 이해할 의무는 없다.


나는 거절을 잘 못하는 사람이었기에 이런 광고를 최대한 정중하게 멈추도록 노력해왔다. 하지만 나름의 배려가 오히려 길을 돌아가게 만들어 쓸데없이 양쪽 시간을 모두 축낸다는 걸 깨닫고 나서 노력의 방향을 바꿀 수 있었다.

거절은 나쁜게 아니라는 걸, 초등학생 아이에게도 가르쳐주었던 기본적인 상식을, 정작 나는 너무 늦게 깨우친 것이다.




다양한 광고전화를 접하며 한가지 터득한 것이 있다.

이들에게 무례해서는 안되지만, 대화를 주도하는 건 나여야 한다는 것. 그리고 거절하기로 결정했다면 틈을 기다려선 안된다는 것.


시작부터 따발총을 쏘아대는 상담사의 말을 끊을 필요가 있었다.

아, 말씀 중에 죄송한데, 혹시 혜택 좋은 보험을 소개해주시려는 건가요? 하고 말이다.

조금은 명랑하게 바톤을 빼앗아 와야한다.

그러면 반가워하는 목소리가 재빠르게 답변을 이어갈 것이다. 한번 더 끊어야겠다.

"잠시만요, 근데 혜택이 좋아도 계획에 없던 거라 내용 안 들어도 될 것 같아요."

여기서 끝내주면 얼마나 고마운지. 내가 분명 '혜택이 좋아도'라고 조건까지 달았지만 10에 8은 직진신호로 받는다.

"고객님 이거 혜택이 아니라~ 요새 상속세 이슈인거 아시죠. 자녀분 있으시잖아요? 이건 그 문제에서.."


음, 마지막으로 끊어내보자.

"저기, 아무튼 계획도 없고 관심도 없고 전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노련한 상담사라면 화룡점정이 있다.

"다음 기회란게 없어요, 고객님. 이제 이런거 없어요."

 

"없어도 돼요. 감사합니다."


끝이다. 상담사가 여기서 더 나간다면 무리수일 것이다. 내가 일방적으로 끊어도 되는 구간이다.


예전에 남편이 가르쳐준 게 있었다. "감사합니다"를 넣음으로써 거절의 예를 갖추게 되더라는 직장인의 노하우였다.

마음만 받을게, 처럼.

넣어둬 넣어둬, 처럼.

아무리 그래도 이들의 감정은 건드리지 않았으면- 하는 거절 방안은 감사의 남발이었던 것이다.




전화를 끊고 그들이 말한 다신 없을 기회를 곱씹어본다.

그들에겐 내게 상품을 팔 기회였고, 나에겐 선을 지키는 기회였던 그것.

그리고 그들에겐 가능성 있는 기회를 찾아 떠나게 한 거절, 나에겐 자존감 보존 기회를 준 거절도 떠올려본다.

이 거절이 마음속 남는 자리가 되어, 감정에서 한층 자유로워진 나를 찾아주었으면 좋겠다.

둘러대지 않아도 되는 당당한 거절의 기회를 앞으로도, 부디, 놓치지 않길 바래본다.  

난 좀 변해야되니까ㅠ.ㅠ



작가의 이전글 당신의 빛 나는_을 읽고 씁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