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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상언 Feb 03. 2021

세기의 무희 최승희와 영화

북한영화 이야기 8. 인민배우 최승희의 영화 

1955년 인민배우 칭호가 만들어진다. 무대예술과 영화예술 분야에서 큰 공헌을 세운 예술가에게 수여하는 명예로운 칭호였다. 무용가 최승희와 배우 황철이 최초의 인민배우로 선정되었다. 전후 북한에서 가장 중요한 무대예술가가 이 둘이었다. 특히 최승희는 사회주의권을 대표하는 유명 인사였다.   

   

세계적인 무용가 최승희는 영화와 밀접한 인연을 가지고 있었다. 1930년대 중반에 최승희가 일본에서 대중적인 인기를 얻게 된 계기가 바로 영화 <반도의 무희>(1936)에 출연하면서 부터였다. 조선에서 건너온 한 여인이 일본인 무용가의 눈에 띠어 무용수가 되는데, 스타로 발돋음 하던 그때 스승은 눈을 감게 된다는 이야기였다. 이 영화에 출연 후 최승희는 조선에서 온 세계적인 무용수라는 인식이 생겨난다. 이후 미국과 유럽에 무용여행을 다니면서 그 이름을 세계에 널리 알렸다.      


최승희는 해방 후 북한에서 무용 활동을 이어갔다. 남편 안막과 오빠 최승일을 비롯해 최승희를 세계적 무용가로 만드는데 일조한 사람들 역시 북한을 선택했다. 최승희무용연구소가 평양 대동강변의 유명 요릿집 동일관 건물에 설립되었다. 지금의 옥류관 자리이다.      


한국전쟁 중 최승희는 중국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중국 현대무용 발전에 이바지했다. 1952년 공훈배우 칭호가 처음 생겼을 때 공훈배우 칭호를 수여 받았으며 1955년 8월 인민배우 칭호가 생겼을 때 처음으로 인민배우 칭호 받았다.     


1956년 북한 최초의 칼라 예술영화로 최승희의 무용극 <사도성 이야기>가 제작된다. 삼국시대 신라를 배경으로 일본의 침입에 항거한 사도성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었다. 이 작품은 1955년 최승희가 만들고 직접 출연했던 무용극을 정준채가 칼라영화로 만든 것이었다.      


이 영화는 최승희의 국제적 명성을 이용하여 여러 나라에서 수출되었다. 특히 홍콩에서 상영되었던 당시 홍콩영화인들과 합작영화를 제작하던 우리 영화인들은 <사도성 이야기>야 말로 남한 영화가 넘어서야할 기준이었다. 한홍합작영화 <이국정원>(1958)이 일본의 기술을 이용하여 칼라영화로 만들어지게 된데에는 그러한 이유도 있었다.      


최승희는 무용극을 영화화 한 <사도성 이야기> 이외에 다른 영화에도 출연했다. 1957년 러시아혁명 발발 40주년을 기념하여 소련 고리키 영화촬영소와 북한의 국립영화촬영소가 합작으로 만든 영화 <형제>에서 최승희는 큰 아들이 전쟁으로 파괴된 댐을 운용하는 지배인, 둘째는 전쟁 중 사망, 셋째는 서울에 유학하고 있던 어머니 역으로 출연했다.      


<형제들>의 러시아어 포스터


이 영화는 서울에서 유학하던 셋째가 간첩이 되어 고향에 돌아오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는 마을사람들이 전후복구를 위한 헌신적으로 노력하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흔들린다. 여기에 어머니의 사랑, 연인과의 재회 등을 겪으며 마음을 고쳐먹고 간첩으로서의 행동을 후회하게 된다.      


이 영화에서 셋째 아들의 연인으로 소련에서 무용공부를 하고 돌아온 여인은 최승희의 후계자이자 딸인 안성희가 맡았다. 안성희는 당시 사회주의권에서 가장 주목받는 무용수였다. 소련영화 <일리야 무로메츠>(1956)에도 출연한 적이 있었다.     


최승희는 북한에서 자랑하는 세계적 예술가로 화려한 생활을 보냈다. 하지만 말년 생활은 외롭고 우울했다. 안막이 숙청 된 후 최승희는 더 이상 무대에 서지 않았다. 자신의 무용경험을 기록하는 데 주력했다. 『조선민족무용기본』(1958)과 『조선아동무용기본』(1964)을 출간했으며 자신의 후계자인 안성희에게 무용계 권위를 그대로 넘겨주었다. 하지만 1967년 문화예술계에 불어 닥친 숙청의 파도에 밀려나게 된다. 최승희는 숙청 직후인 1969년 사망했다. 현재는 복권되어 애국열사릉에 묻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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