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희와 더불어 북한 최초의 인민배우로 선정된 황철은 1930-40년대 우리 연극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배우이다. 1948년 월북하여 북한에서 활약했음에도 김동원이나 이해랑 같은 남한의 연극인들 조차 그를 20세기 최고의 배우로 꼽았다.
1930년대 중반부터 1950년대 중반까지 우리나라는 연극의 시대였다. 어려서 본 강홍식의 연기에 이끌려 연극배우가 된 황철은 1935년 설립된 동양극장 청춘좌의 대표배우였다. 우리가 잘 아는 “홍도야 우지마라 오빠가 있다.”라는 대사는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에서 황철의 목소리로 울려 퍼졌다.
임선규의 대표작인 이 연극은 오빠를 공부시키려 기생이 된 동생 홍도가 오빠의 친구와 결혼하지만 시집살이 끝에 소박을 맞아 거리를 헤매다가 살인을 저지르게 되고 동생이 번 돈으로 공부를 해 경찰이 된 오빠는 그 동생을 체포하게 된다.
황철은 동양극장 청춘좌에서 <춘향전>을 비롯해 <단종애사>, <황진이> 등 한국연극의 중요 작품에 주인공으로 출연했다. 또한 동양극장의 지배인 홍순언이 급서하자 동양극장 청춘좌를 떠나 극단 아랑을 세워 직접 극단을 운영하기도 했다.
해방 당시 황철은 연극계의 가장 인기 배우이자 극단 운영자였다. 또한 조선연극동맹과 같은 좌익문예단체의 지도자였다. 1947년 남한에서 좌익 활동이 금지되고 좌익지도자에 대한 체포 선풍이 불 때 황철도 그 대상이 되었다. 다행이도 경찰과 친밀한 탓에 체포되지는 않았으나 언제나 테러의 위험에 시달릴 수 밖에 없었다. 1948년 북한으로 간 그는 평양 국립극단에 소속되어 북한 연극계를 대표하는 배우로 활동했다.
<리순신 장군>에 출연한 박영신(좌)과 황철(우)
한국전쟁이 터지자 북한의 문화예술인들을 중심으로 전선위문단이 조직되었다. 황철이 포함된 전선위문단은 평택을 지나 대전으로 가는 도중 미군의 공습을 받았다. 황철은 가까스로 목숨은 구했지만 오른쪽 팔을 잃었다. 황철은 동유럽에서 의수를 제작하여 그것을 달고 다시 무대에 섰다. 전쟁 후 공연된 <리순신 장군>에서 이순신 역으로 황철이 등장 하여 그 굵직한 목소리로 연기를 시작했을때 관객들은 극장이 떠내려 갈 것 같은, 우뢰와 같은 환호를 그에게 보냈다. 황철은 전쟁의 파괴를 딛고 새로운 국가를 설립하는 과정에서 인간승리의 표본 같은 존재였다.
한국 연극 역사상 최고의 흥행작인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가 고려영화협회에서 영화로 만들어졌을 때 황철은 주인공 역을 맡아 연기했다. 이어 일제가 조선인을 전쟁 동원하기 위해 만들었던 <젊은 모습>(1943)에도 조선인 선생 역을 출연했다. 이 영화는 일제의 침략 전쟁에 학생들이 참여하도록 독려하는 영화였다. 조선에 가장 인기 있는 배우들이 차출되듯 영화에 등장했던 시절이었다.
월북 이후 북한 최초의 영화 <내 고향>에 주인공 역으로 거론되었다. 하지만 나이가 있다 보니 그 역은 황철 보다 어린 신인 배우 유원준에게 돌아갔다. 이어 리기영 원작 소설 <땅>의 주인공 곽바위 역으로 캐스팅 되어 촬영하던 중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촬영이 중지되었다.
해방 후 영화 출연과 인연이 크게 없던 그는 최승희와 함께 조쏘합작영화 <형제>에 출연했다. 당 간부로 등장하여 당의 입장을 전달해주는 인물을 연기했다. 이어 1958년 제작된 윤룡규 연출의 <춘향전>에 변학도 역으로 출연하였다.
황철은 제1국립극단 총장으로 연출가이자 배우로 활동했다. 1957년 최고인민회의대의원에 선출되었으며, 1958년에는 교육문화성 부상, 평양연극영화대학 교원직을 역임했다, 후학들을 위해 『무대화술』 등 다양한 저작울 발표했던 그는 전쟁 시절 얻은 상처로 고생하던 중 과로로 인해 1961년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