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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상언 Feb 05. 2021

노동운동가로 유명했던 영화배우

북한영화 이야기 10. 영화배우 주인규

북한영화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 있다. 북한영화의 건설자라 불리는 주인규이다. 그는 영화배우 출신으로 해방 후 함남지역 치안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1946년에는 북한영화 건설의 총책임자로 임명되었으며 1947년 북조선국립영화촬영소 총장으로 북한영화의 기틀을 닦는 임무를 맡아 이를 이끌었다. 주인규는 해방 후부터 6.25 전쟁 시기까지 북한영화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1930년대 후반 주인규


그는 우리가 잘 아는 나운규의 <아리랑>에 출연했던 배우이다. 


고향은 함흥이었고, 미국에 가서 영화를 공부하려다가 돌아와서 연극 활동을 시작했다. 그가 처음 발을 디딘 단체는 소인극 단체인 예림회였다. 이곳에는 훗날 영화계에서 함께 활동하게 되는 이규설, 김태진도 함께 있었다. 이들 모두 아마추어였기에 예림회에서는 기성 연극계에서 활동하고 있던 안종화를 문예부장으로 초빙해 왔다. 회령 순회공연에서는 나운규가 합류했다. 그러니까 함흥의 예림회에서는 주인규를 비롯해 김태진, 이규설, 안종화, 나운규 등 초기 한국 영화계의 중요 인물들이 다 함께 모여 있었던 것이다.      


예림회가 해산된 후 안종화의 주선으로 부산의 조선키네마주식회사에 입사하여 영화배우가 되었다. 서울에 올라와서는 윤백남이 만든 <심청전>에 제작비를 투자하기도 했다. 1926년 나운규가 만든 <아리랑>에서 악역인 마름 오기호 역을 연기하면서 조선의 대표적인 성격파 배우로 이름을 떨치게 된다. 


그는 영화인으로는 드물게 사회주의 운동과 아주 밀접하게 관련된 인물이었다. 1928년 원산총파업이 일어나자 원산영화공장을 세워서 파업 노동자들을 위로하는 활동을 전개했고, 1929년에는 아예 조선질소비료공장에 노동자로 입사하여 노조를 만들고 파업을 주도하다가 해직되었다. 이후 다시 영화계로 복귀하였지만 여전히 함흥 지역의 노동운동가로 활동하여 조선의 혁명적 노동운동에 관한 지침을 담은 "10월 서신"을 국내로 가지고 오기도 했다. 급기야 그는 1932년 제2차 태평양노동조합사건으로 투옥된다.      


출옥 후 다시 영화배우 활동을 시작한 그는 태평양전쟁 말기 소련군이 참전한 것을 알고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자신의 근거지인 함흥으로 갔다. 소련군에 의해 함흥이 해방되자 그 지역 치안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영화배우로도 유명했지만 함흥지역의 영향력 있는 노동운동가였던 그는 북한의 영화산업을 발전시키는데 중책을 맡게 된다. 소군정에서는 그의 영화인으로서의 경력도 중요했지만 사회주의 운동가로서의 경력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해방 후 주인규는 북한의 영화 제작, 배급, 상영 일체를 국유화하는 과정을 책임졌다. 우선 제작부문은 북조선영화사를 설립하여 위원장직에 올랐고 배급 상영을 관장하기 위해서는 극장영화관위원회를 조직하고 그 위원장이 되었다. 1947년 영화 제작뿐만 아니라 배급까지도 관장하는 북조선국립영화촬영소가 만들어질 당시에는 총장직에 올랐다.       


촬영소 총장으로 <내 고향>과 <용광로> 두 편의 예술영화를 지도 후 세 번째 영화인 <초소를 지키는 사람들>은 직접 연출을 맡았다. 한국전쟁 직전 38선을 두고 일어났던 국지전을 소재로 했다. 이 영화는 6.25 전쟁 발발 직후 완성되었기에 제대로 보급되지 못했다.      


주인규가 연출한 <초소를 지키는 사람들>


1950년 10월, 그러니까 평양이 국군과 유엔군에 의해 점령되었을 무렵 주인규는 그 직위에서 물러나게 된다. 인천 상륙작전으로 고착되었던 전선이 붕괴된 상태에서 국군과 유엔군의 진격이 빠른 속도로 이루어졌고 인민군은 제대로 된 저항도 없이 후퇴를 시작했다. 불과 며칠 만에 국군 1사단이 평양을 점령하였는데 국립영화촬영소도 평양을 떠나 강계로 소개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촬영소 책임자인 주인규는 그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고 그 책임을 물어 해직된 것이다. 


정치적 고초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주인규의 아들이 이강국의 딸과 결혼하여 이 둘은 사돈지간이었기에 한국전쟁 말기 남로당 계열 숙청에 연루되기도 했다.     


북한영화의 건설자라는 명예로운 직책에서 물러나 있던 주인규는 1950년대 중반  그 무거운 중책을 한 몸에 지닌 영화계의 거물이 아닌 아무런 직책도 없는 촬영소의 조역 배우로 영화계에 복귀한다. 그나마 당시 북한 문예계의 최고 권력자인 한설야가 고향 선배였기에 주인규의 복귀를 도울 수 있었다.       


복귀 작은 함경도 바다 마을을 배경으로 한 윤재영 연출의 <바다는 부른다>(1956)였다. 이 영화에서 오랜 경험을 가진 늙은 선원 역으로 등장하여 평자들의 찬사를 받았다. 이어서 <승냥이>(1956)와 <잊지 말라 파주를>(1957)과 같은 영화에 출연했다. 그러다가 8월 종파사건이 일어나면서 소련에서 온 소련파들과 친했던 인물들에 대한 숙청작업이 진행될 때 주인규는 견딜 수 없는 고통과 마주하게 된다. 결국 그는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했다고 전해 진다. 그가 언제 사망했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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