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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상언 Feb 07. 2021

카프를 대표했던 영화인 추민

북한영화 이야기 11. 조선예술영화촬영소 총장 추민

일제 말기 대부분의 영화인들은 일제의 국책영화 제작에 자의반 타의반 참여하였다. 다른 말로 친일혐의가 조금씩은 있었다. 반면 카프 출신으로 영화배우이자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했던 추민은 영화인 중 거의 유일하게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인물이다. 그만큼 어려운 생활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해방으로 세상이 바뀐 이후에는 가장 주목받는 영화인이었다. 세상일은 알 수 없었다.


카프 영화 <혼가>에서 임화(좌)와 추민(우)


1930년대 중반 소위 신건설사건 이후 프롤레타리아 예술운동을 전개하던 문학, 예술인들은 대거 전향대열에 섰다. 심지어 가장 먼저 친일영화 제작에 참여한 인물들  중에는 서광제, 최승일, 안석영처럼 한때 카프에서 활약한 인물돌도 있었다.


많은 이들이 전향하던 시절 추민은 끝까지 저항했다. 감옥에서 보낸 시간이 감옥 밖에서 보낸 시간만큼 길었다. 가정을 돌볼 수 없었던 그는 영화배우인 부인 김소영과 이혼하 그녀의 행복을 빌어주었다.   


해방 직후 친일영화를 제작하던 조선영화사 소속 영화인들이 주도하여 조선영화건설본부를 만들었다. 추민은 광복 이후에도 이들이 영화계를 주도하는 게 불쾌했다. 그래서 이와 다른 조직인 조선프롤레타리아영화동맹을 만들었다.      


통일된 민족국가 수립을 위해 너도 나도 다 손을 잡아야 하는 상황에서 여러 단체들이 난립하는 건 운동력량을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연안에서 돌아온 김태준을 중심으로 분열된 단체를 통합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난다.


영화부문에는 조선영화건설본부와 조선프롤레타리아영화동맹이 통합한 조선영화동맹이 만들어진다. 추민은 조선영화동맹의 서기장으로 단체를 이끌었다.


1946년 6월, 해방 후 처음 맞는 6.10 만세운동 기념행사에 조선영화동맹은 동맹 차원에서 프로그램을 꾸려 행사를 연다. 행사 프로그램 중 하나가 당대 유명한 만담가 신불출의 만담 대회였다.


중앙극장에서 열린 신불출의 만담 대회는 성황이었다.  하지만 만담  도중 내용에 불만이 있었던 우익 청년들이 단상으로 뛰어올라와 신불출을 두들겨 패는 불상사가 벌어진다. 두들겨 맞은 신불출은 병원에 실려 갔는데 군정 경찰에서는 폭력을 행사한 학생들이 아니라 만담가 신불출, 행사 책임자인 영화동맹 서기장 추민, 『예술통신』의 김정혁 3인을 체포하게 된다. 이유는 연합군을 모욕했다는 이유였다. 결국 이 세 명은 재판에 넘겨져서 벌금형을 선고받게 된다. 재판이 끝나자마자 신불출과 추민은 월북하고 만다.      


서울의 영화동맹을 이끌던 추민은 북한에서도 남한의 영화계를 대표하는 자리에 앉게 된다. 예컨대 추민은 북한의 북조선영화동맹의 부위원장에 임명이 된다. 위원장은 강홍식이었다. 북조선국립영화촬영소가 설립되었을 때는 부총장 직을 맡다. 총장은 주인규였다. 그리고 북한의 영화잡지 『영화예술』의 발행인이자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하게 된다.     

 

민정식 연출의 <조국의 아들> 한 장면


한국전쟁 이후 추민이 쓴 시나리오 중 <조국의 아들>(1956), <위험한 순간>(1958), <길은 하나이다>(1958)는 영화로 만들어졌다. 이중 <조국의 아들>은 전후 북한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전쟁영화였다.


1950년 주인규가 영화촬영소 총장 직에서 쫓겨나고 그 후임으로 해방 후 소련에서 온 김원봉이 임명 된다. 1950년대 중반 소련파에 대한 견제가 시작될 무렵 추민은 김원봉에 이어 촬영소 총장이 된다. 북한 영화계의 총책임을 맡게 된 것이다.      


이 무렵은 소련의 영향력을 축소하고 자체의 혁명전통을 강조하던 시기였다. 북한의 문학예술 전통 역시 카프에서 찾았다. 추민은 카프 영화계를 증언하는 중요한 영화인으로 대우받았다. 카프 영화를 주도하던 인물 중 임화는 간첩으로 숙청되었고, 김유영과 서광제는 이색 분자라는 좋지 않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당시 북한에서 추민은 강호와 더불어 카프 영화를 대표하는 영화인이었다.      


8월 종파사건 이후 추민의 앞날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한다. 추민은 1958년 『조선예술』에 조선영화사를 연재한다. 상중하로 기획된 기사에서 상편과 중편까지만 게재된 후 하편은 끝내 게재되지 못한다. 추민이 종파분쟁과 관련되어 총장직에서 물러나게 된 것이 이 무렵이었다. 이후 그의 이름은 북한 영화사에서 사라졌다. 추민 역시 지금껏 북한 영화사에서 복권되지 못한 이름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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