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최고의 배우를 꼽는다면 누가 꼽힐까? 사람들 마다 여러 다른 이름을 말할 수는 있으나 문예봉이라는 이름이 나오면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할 것이다.
그녀는 1932년 <임자 없는 나룻배>에 출연한 이후 월북할 때까지 조선영화를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1949년 북한 최초의 영화인 <내 고향>에서 여주인공 역을 맡은 이후부터 1999년 사망 할때까지 북한영화를 대표하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한국영화사를 통틀어 무성영화 시대의 배우 한 사람을 꼽으면 나운규, 1960-70년대를 대표하는 영화인 한 사람을 꼽는 다면 신성일, 1980년대는 안성기, 2000년대는 송강호, 1930-40년대를 대표하는 배우로는 문예봉을 꼽고 싶다. 그만큼 그녀는 한국영화사의 한 시대를 상징하는 배우였다.
문예봉의 데뷔작인 <임자 없는 나룻배>는 나운규의 <아리랑>(1926)에 이어서 대중의 가장 큰 사랑을 받은 영화였다. 이 영화로 이름을 알린 문예봉은 곧이어 <춘향전>(1935)에 출연하게 된다. 이 영화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진 토키 영화였다. 그러니까 한국영화 사상 첫 번째 목소리의 주인공이 문예봉이었던 것이다.
<빨치산의 처녀>에서 문예봉
1935년부터 1945년까지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영화의 여주인공은 대부분 문예봉이 연기했다. 문예봉은 나이와 상관없이 아내, 어머니 역을 많이 맡았다. 이러한 영화 속 이미지는 남편 임선규를 내조하여 성공시킨 이야기와 맞물려문예봉의 스타덤을 형성했다.
당시 일제는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일제가 여성들에게 기대했던 모습은 “양처현모”라는 말로 대표되는 “총후 부인”의 이미지였다. 다시 말해 후방의 여성들은 남편을 전쟁터로 보낸 좋은 부인이자, 자식을 전쟁터로 보낸 현명한 어머니의 모습이어야 했다.
이렇듯 우리가 현모양처라고 알고 있는 이미지는 전쟁 승리를 위해 일제가 만들어낸 이미지였고 그 전형을 문예봉이 연기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문예봉의 이미지는 그렇지만은 않았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토키 영화 <미몽>(1936)에서 문예봉은 남편과 싸우고 집을 뛰쳐나와 자유롭게 살다가 급기야 자신이 타고 있던 차로 자기 딸을 치게 되어 고통스러워하는 여성을 연기했다. 현모양처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북한에서 영화를 만들며 문예봉의 기존의 이미지가 활용했다. 첫 번째 영화 <내 고향>(1949)에서 문예봉은 헌신적이지만 다소 수동적인 모습으로 그려졌다. 영화가 완성된 후 문예봉의 연기에 대해 사회주의 여성의 모습으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게 된다.
이러한 비판 이후 문예봉은 두 번째 영화 <용광로>(1950), 전쟁 중에 만들어진 <소년 빨치산>(1951), 전후에 만들어진 <빨치산의 처녀>(1954)와 <백두산이 보인다>(1956)에서는 일제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여성, 6.25 전쟁 중에 미군에 저항하는 여성을 연기하면서 사회주의 영웅의 모습을 연기했다.
이렇듯 문예봉은 일제 말기에 일제가 원하는 현모양처의 모습을 연기했던 것 처럼 북한에서는 사회주의 영웅을 연기하면서 초기 북한영화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것이다.
문예봉은 북한에서 영화부문 간부로 영화계와 여성계의 지도적 인물이었다. 북한 최초의 공훈배우이기도 했다. 그런데 1960년대 후반에 부르주아 사상이 남아 있다는 이유로 숙청되어 여러 극단을 전전하며 단역배우로 있었다. 그렇게 나이 60이 되어 은퇴를 하게 된 그녀는 신의주의 막내아들 집에서 노년을 보내게 된다.
그러 던 중 김일성이 북한의 애국가를 작곡한 김원균과 관련한 어떤 행사에서 "요즘 문예봉 동무는 어떻게 지내고 있습니까?"라고 묻게 된다. 이 한마디에 문예봉의 복귀가 이루어진다.
다시 평양으로 돌아와 조선예술영화촬영소로 복귀한 문예봉은 공교롭게도 <춘향전>(1980)에서 이몽룡의 어머니 역으로 출연한다. 최초 토키 영화 <춘향전>에서 문예봉은 춘향 역을 맡은 적이 있었기에 인연이 깊은 작품이었다.
이후 그녀는 영화계와 통일 관련 주요 인사로 활동했다. 1980년 중반 인민배우 칭호를 받았고, 말년까지 북한영화에 출연하면서 김일성 세대를 대표하는 영화인으로 큰 존경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