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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상언 Feb 09. 2021

"우리 할머니"라 불렸던 무성영화시대 스타

북한영화 이야기 13. 인민배우 김연실

문예봉이 스크린에 등장하기 이전 가장 인기 있던 여배우는 김연실이었다. 그녀는 신일선이 화순으로 시집간 이후에 스크린에 등장 일약 조선영화를 대표하는 배우가 되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영화인 1934년 작 <청춘의 십자로>에서 그녀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오빠는 김학근이라는 변사였다. 부모도 일찍 돌아가시고 오빠도 갑자기 죽게 되자 김연실은 뒷날 카메라맨이 되는 동생 김학성과 함께 생활해야 했다. 그녀는 오빠의 친구들을 통해 영화계에 진출하였고, 1927년 나운규가 만드는 영화 <잘 있거라>를 통해 영화배우로 데뷔하게 된다.     


<세 동무>에 출연한 김연실


<잘 있거라> 이후 <세 동무>(1928)나 <승방비곡> (1930)같은 영화에서 주인공을 맡으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노래 <아리랑>도 그녀가 불러 취입한 것이다. 김연실이 조선 최고의 스타로 군림하던 당시 영화잡지에는 그녀에 대해 짝사랑의 열병을 앓는 사람들의 글을 찾아보는 건 어렵지 않다.      


1930년을 전후한 시기에 조선에서 가장 인기 있는 배우이다 보니 스캔들도 많았다. 그 스캔들이 또 다른 인기를 불러오기도 했다. 김동인은 훗날 자신의 소설에 『김연실전』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어떻게 보면 정말 스타 같은 스타가 등장했던 것이다.     


김연실은 문예봉이 등장하면서 일종의 세대교체의 대상이 된다. 문예봉의 데뷔작인 <임자 없는 나룻배>(1932)에서 김연실은 나운규의 부인이자 문예봉의 엄마 역을 맡았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당대 가장 인기 있는 배우 2명과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최고의 배우가 되는 문예봉이 함께 나온 영화였다.     

 

<임자 없는 나룻배> 출연 후 김연실은 경성극장을 운영하던 일본인 야쿠자 두목 와케지만 슈지로가 세운 경성영화촬영소 전속배우가 된다. 와케지마는 일본에서 유행하고 있는 여자들로만 구성된 여성가극단을 참고하여 여성들로 구성된 영화를 제작하기로 한다. 우선 <홍길동전>(1934)을 영화로 만들기로 하고 주인공 홍길동 역에 김연실을 캐스팅 한다. 고민하던 김연실은 남자역을 맡는 건 이게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출연하게 된다.


이어서 만들어지는 <춘향전>(1935)에서 와케지마는 춘향 역에 문예봉, 이몽룡 역에 김연실을 캐스팅한다. 김연실은 이건 너무하다고 생각하고 출연을 거부한다. 이 사건 이후 그녀는 영화계에서 퇴출된다. 김연실이 차지하고 있던 영화계의 왕좌는 이후 문예봉에게 넘어 간다.      


김연실은 여배우가 독립된 인격체로 활동하려면 경제적 기반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순석이 세운 다방 낙랑파라에서 마담으로 일했다. 얼마 후 김연실은 아예 다방을 인수해 버리고 이름을 낙랑으로 바꾸었다. 이 다방에서는 각종 전시회, 기념회 등을 개최하면서 경성 살롱문화의 중심에 있었다.      


중일전쟁이 터지고 다방운영도 여의치 않자 만주로 건너갔다. 이 시기 만주에 거주하면서 만영에서 운영하는 순회가극단을 조직하여  이끌었다. 해방 후 서울로 돌아온 그는 다방 낙랑을 다시 열었다.      


노년의 김연실


6.25전쟁이 터지자 북한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김연실과 남편 김혜일을 북한으로 데리고 간다. 잠깐 다녀올거라 생각하고 큰 딸은 동생 집에 맡긴 후 서둘러 북한으로 갔다. 그 딸은 1960년대 인기 가수로 활동하던 김계자이다.      


북한에서 김연실, 김혜일 부부는 한명은 배우, 한명은 영화미술가로 노년까지 활동했다. 그러다가 1980년대 초반에 신상옥 최은희 부부가 북한으로 갔을 때 그곳에서 최은희를 만나게 된다. 최은희는 남북으로 헤어지기 전에 동생인 촬영감독 김학성의 부인이었다. 헤어질 때는 시누이, 올케 사이였는데 다시 만났을 때는 남남이 되었던 것이다. 최은희는 다방 낙랑을 운영하며 커피를 좋아했던 시누이 김연실을 생각해 김연실의 아파트를 방문할 때 북한에서 구하기 힘든 커피를 가져갔다. 김연실은 서울의 낙랑을 생각했을 것이다.      


신상옥 감독은 자신이 연출하는 영화에 김연실을 계속 출연시켰다. 그렇게 김연실은 말년까지 할머니 역을 주로 맡으며 북한사람들에게 “우리 할머니”라는 애칭으로 불리면서 활동하였다. 인민배우라는 칭호를 얻은 그녀는 1990년대까지 스크린 앞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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