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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상언 Feb 10. 2021

주체 문예의 모범 <피바다>

북한영화 이야기 14. 불후의 고전적 명작 <피바다>

“불후의 고전적 명작”이라 불리는 작품이 있다. 1930년대 김일성이 항일유격투쟁을 하던 시기에 창작되었다고 하는 작품들이다. 이 작품들을 1950년대 발굴되어 196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반에 걸쳐 영화로 만들어졌다. 이렇게 만들어진 작품들은 북한에서 가장 중요한 영화로 꼽히고 있다.   

   

영화 <피바다>


가장 먼저 만들어진 영화는 <피바다>(1969)였다. 그 후 <한 자위단원의 운명>(1970)와 <꽃파는 처녀>(1972)가 만들어졌다. 이 작품들 외에 우리가 익히 들어 제목을 잘 알고 있는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1979)와 <돌아오지 않는 밀사>(1984)는 비교적 늦은 시기에 만들어진 작품들이다.        


북한에서 말하는 불후의 고전적 명작은 이 다섯 편이 꼽힌다. 이중 신상옥 감독이 만든 <돌아오지 않는 밀사>는 신 감독이 북을 탈출하면서 북한에서 언급하고 있지 않다.      


<피바다>는 1935년 가을 만주에서 처음 공연되었다고 알려져 있는 작품이다. 처음에는 그 공연 내용이 간단했다. 마을을 습격한 일본군이 유격대원으로 들어간 남편의 행방을 말하라며 머리채를 잡고 횡포를 부리다가 간난 아이를 뺏어 불에 던져 버리는데, 그 모습을 본 마을 사람들이 참지 못하고 들고 일어서서 일본군을 물리친다는 이야기였다. 이 이야기가 여러 번 반복적으로 공연되면서 살이 붙고 플롯도 탄탄해졌다. 제목도 <피바다> 외에 <혈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지게 되었다. 훗날 김일성의 항일유격투쟁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이때의 공연을 회상하면서 이 작품에 대한 내용이 알려지게 되었는데 그게 1950년대였다.      


이 작품은 원래 연극으로 공연된 작품이었다. 1950년대 발굴되어 그 존재가 알려졌고 북한 최고의 예술가들이 동원되어 1960년대 후반에 영화로 만들어지게 된다. 


<피바다>에서 어머니 역을 맡은 양혜련


이 영화가 만들어지게 된 계기가 있었다. 1960년대 들면 북한에서 주체노선을 걷게 된다. 소련과 중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서 독자적인 길을 걷겠다는 의도였다. 정치에서 자주, 경제에선 자립, 국방에선 자위가 이 시기 내건 슬로건이었다. 이를 인민들에게 선전하여야 했다. 김일성은 기존의 선전책임을 맡았던 박금철이나 이효순과 같은 갑산파를 몰아내고 그 책임을 김정일에게 맡긴다.      


김정일은 북한의 문학예술 부문에서 부르주아적이고, 교조적인 부분들이 많다며 영화부문에서부터 숙청작업을 주도하게 된다. 그리고 김일성의 항일유격투쟁 시기 창작되었다고 하는 소위 불후의 고전적 명작들에 대한 영화화 작업을 지시한다. 그래서 북한 최고의 영화인들을 모아 백두산창작단을 조직하고 이들에 의해 북한 영화가 모범으로 따라야 할 영화로 <피바다>를 만든다.     


이 영화는 소위 주체영화의 모범으로 추앙받게 된다. 실제 영화를 보면 스펙타클한 부분들도 있고 플롯도 탄탄하고 재미있다. 당시 관객들도 좋아했다. 해외 여러 나라에 북한영화를 대표하는 영화로 소개되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영화는 김정일의 지시로 가극으로 만들어진다. 그렇게 해서 1971년 만들어진 가극 <피바다>가 예술적으로 성공하면서 일종의 “피바다식 가극”이라는 혁명가극 창작법칙이 만들어진다. 북한 가극의 모범은 바로 가극 <피바다>에 있었으며 이는 영화가 모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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