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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상언 Aug 22. 2021

평양의 영화관

북한영화 이야기 26.

해방 후 북한의 영화관은 어떻게 되었을까?


평양은 광복 전 조선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였기에 여러 의 영화관이 있었다. 공업도시로 급속하게 성장하고 있던 청진 같은 도시는 서울 다음으로 많은 숫자의 영화관 있었다. 남한과 마찬가지로 북한에서 영화관은 대부분 일본인들이 소유하고 있었는 광복과 함께 모든 극장들이 국유화된다. 이름도 바뀌게 되는데, “금천대”라는 이름의 술을 만들던 양조장 주인이 세웠던 금천대좌라는 극장이나 해락관이나 사쿠라극장 같은 일본식 이름이 광복 후에는 삼일극장, 로동극장, 문화극장 같은 이름으로 바뀌었다.     


금천대좌


해방 전 영화관 중에 현재도 남아 있는 극장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6.25 전쟁 중에 평양의 모든 규모 있는 건물들은 소실되었으며 영화관도 마찬가지였다. 평양에 있었던 영화관들을 비롯해 북한 대도시의 모든 영화관이 전쟁 중 미군의 폭격으로 사라졌을 것이다.      


광복 소식을 처음 들은 평양 시민들이 달려간 곳이 바로 모란봉에 있던 평양신사였다. 평양시민들이 그곳에 불을 질러 없애 버렸는데, 평양신사가 있던 곳에 모란봉극장이라는 호화로운 극장이 만들어진다. 1948년 김구, 김규식 선생이 참석했던 남북연석회의가 이곳에서 개최되었고, 북한의 유명한 연극과 무용, 창극 등이 역시 이곳에서 공연되었는데 이곳도 전쟁 중에 파괴되었다. 그래서 북한에서는 광복 6주년 기념식을 위해서 모란봉 지하에 지하극장을 짓고 그곳 지하 극장에서 기념식과 공연을 열기도 했다.

    

대동문 영화관


전쟁이 끝나자 모란봉 극장을 새롭게 지었다. 외관은 처음 만들어졌을 때와 똑 같이 만들었으나 내부는 더욱 화려하고 호화롭게 바뀌었다. 북한은 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선전했기에 그 승리를 더욱 강조하기 위해 전쟁 이전보다 나은 상태로의 복구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 과정에서 1955년 12월 영화관으로는 대동문영화관이 전쟁 이후 처음으로 만들어지게 된다. 이 영화관은 2000년대 들어 새롭게 시설을 정비하여 현재까지도 남아 있는 평양의 유서 깊은 영화관이다.      


영화관은 아니지만 1960년에 만들어진 평양대극장은 북한이 자랑하는 혁명가극이 주로 공연되는 장소로 유명하다. 1989년 평양국제영화제를 시작하면서 만든 평양국제영화회관이라는 곳도 있다. 이곳은 5개의 관람실이 있는데, 2000석의 대극장에서부터 600석, 300석, 100석, 50석 규모의 극장이 있다.


북한 전역에는 1,000개가 넘는 대규모 극장들이 있으며 지역이나 직장마다 영화 상영이 가능한 극장이나 회관 같은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영화관  수는 적지 않다.      


평양국제영화회관


사회주의권이 붕괴되지 전에는 북한에서 상영되는 영화들은 북한영화들을 비롯해 소련이나 중국, 그리고 동구권 영화들도 수입되어 상영되었다. 이들 영화들은 더빙해서 상영되었는데, 영화를 노동자 농민들까지도 이해시키기 위해 전쟁이후부터 외국영화 더빙해서 상영하는것이 원칙이었다. 최근에는 수입되는 영화는 거의 없고 북한영화도 많이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에 영화관이 거의 문을 닫고 있는 상태이다.      


외국영화를 볼 수 있는 기회가 흔치 않은 북한에서는 평양 국제영화제는 외국영화를 볼 수 있는 중요한 기회이다. 그래서 평양 국제영화제가 열릴 때는 암표가 거래되기도 하는 등 평양시민들에게 인기가 많다고 한다. 그나마 평양 국제영화제는 평양에 살고 있는 사람들만이 즐길수 있는 것이라 지방에 있는 사람들은 TV에서 방송해주는 중국영화나 드라마, 혹은 중국을 통해 들어온 DVD를 통해 외국영화를 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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