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서 수집 이야기 18.
1. 할리우드를 꿈꾼 조선인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세계 영화시장을 휩쓸고 있던 유럽의 영화 공장들은 작동을 멈췄다. 식민지 조선의 활동사진관의 주요한 프로그램을 차지하던 프랑스의 파테나 고몽의 신작 영화는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유럽의 영화를 대신하여 미국영화가 그 빈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1915년 로스앤젤레스 외곽에 영화제작을 위한 유니버설시티가 조성되었다. 영화를 제작하는 거대한 스튜디오와 그곳에서 일하는 영화인들이 모여 사는 이곳은 영화를 위한 도시이자 꿈의 공장이었다. 유니버설시티가 자리 잡은 이곳을 중심으로 미국의 영화 제작회사들이 모여들었다. 할리우드라 불리는 이곳은 미국영화의 중심지가 되었고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에는 이미 세계 영화시장을 정복하였다.
그동안 유럽을 거쳐 극동으로 들어오던 미국영화는 태평양을 건너 극동으로 왔다. 연속영화가 크게 인기를 끌자 유니버설에서는 필름을 판매하지 않고 일정 기간 상영하고 회수하는 전략을 취했다. 일본영화가 상영되지 않았던 조선인 상설관에서는 미국영화의 상영에 보다 적극적이어서 서울에서는 1916년 우미관이 가장 먼저 유니버설영화를 전문 상영하기 시작하였고, 1918년 단성사가 활동사진관으로 전환되면서 유니버설영화를 위시한 할리우드 영화가 본격적으로 상영되었다.
오랫동안 조선에서 볼 수 있는 서양영화의 대부분은 할리우드 영화였다. 조선의 영화인들은 할리우드 영화를 보고 할리우드 영화와 같은 세련된 영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영화를 꿈꾸던 청년들은 할리우드로 가서 그곳에서 영화를 배워보고자 했다. 할리우드에서 활약하는 일본인 배우 하야카와 셋슈(早川雪洲)는 조선 영화인들에게도 할리우드를 꿈꾸게 만드는 자극제와 같았다.
영화사가 이영일 선생이 인터뷰한 무성영화시대 영화인들의 회고록을 읽다가 일제강점기 영화인 중 할리우드에 가서 영화 공부를 했다는 인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00년 전에 영화를 배우기 위해 미국으로 간다는 것이 아주 허황된 것은 아닐지라도 어쩐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 주인공은 <낙원을 찾는 무리들>과 <딱한 사람들>이라는 영화를 연출한 황운이라는 인물이었다. 아쉽게 그에 관한 자세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았다. 작은 몇 개의 기록을 살펴보았을 때 함흥 출신의 영화인 주인규와 황운의 행적이 겹쳐 있었다. 혹시 남궁운이라는 예명을 썼던 김태진처럼 주인규의 다른 이름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1920-30년대 조선에서 할리우드에 온 영화인이 활동하고 있었던 것인가 하는 의문이 오랫동안 머리를 떠나고 있지 않았다. 어느 날 그런 인물이 있었다면 미국에서 발행되던 우리말 신문에 그와 관련된 보도 내용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014년 11월 국립중앙도서관을 다니며 미주 한인신문인 『신한민보』의 영인본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며칠을 찾던 중 황운의 행적이 나왔다. 퍼즐이 맞춰지는 기분이었다. 단편적인 내용을 토대로 내용을 재구성해 보면 다음과 같다.
함흥에서 영화를 꿈꾸던 청년들 몇 명이 할리우드로 건너가 영화를 배워오기로 한다. 고보를 졸업하고 도쿄로 건너가 정칙학원에 다니며 미국행을 꾀하던 주인규와 황운은 관동대지진으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 무렵 함흥에 극장이 생기고 극장을 배경으로 소인극단 예림회가 만들어져 그곳에서 활동하며 초창기 영화제작에 참여하게 된다. 영화인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이들은 더 나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 해외로 나갈 생각을 실행한다. 소비에트 러시아의 영화들이 세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던 1920년대 후반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하고 있던 주인규는 소련으로 방향을 바꿨지만 황운은 미국행에 대한 의지를 꺾지 않았다. 이 둘은 비슷한 시기 조선을 떠났고 노동운동에 헌신하던 주인규는 블라디보스토크의 태평양노동조합에서 프로핀테른의 지령을 받아 고향으로 돌아왔고 황운은 시효가 지난 남가주대학 입학허가서를 들고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지만 미국입국허가가 떨어지지 않아 발을 동동 굴러야 했다.
『신한민보』에는 입국허가를 받지 못한 황운에 관한 소식이 실려 있었다. 힘들게 미국 땅을 밟은 황운은 학교에 입학하지 못하고 할리우드를 돌아보고 카메라와 영사기 등을 구입해 조선으로 돌아왔다. 이후 황운과 주인규는 고향 함흥에 길안 든 영화사를 만들어 <딱한 사람들>이라는 영화를 만든다. 하지만 주인규가 제2차 태평양노조사건으로 체포되면서 더 이상 영화 제작을 이어가지 못했다.
『신한민보』에 식민지시기 할리우드를 방문했던 황운의 흔적을 발견해 흥분하고 있던 무렵이었다. 안형주 선생님이 누구에겐가 연락처를 받아 전화했다며 연락이 왔다. 어느 외국인 연구자가 해방기 외국영화 관련 자료를 찾고 있는데 도와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매일 가다시피 하는 국립중앙도서관에서 뵙기로 약속하였다.
뜻밖에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외국인 연구자와 함께 만난 안형주 선생은 나와 마찬가지로 매일 같은 자리에서 『신한민보』를 찾아보던 노신사분이었다. 안형주 선생님은 아버님께서 일제강점기에 영화감독으로 활동하셨다는 말씀을 하셨고, 나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혹시 아버님께서 안철영 선생님이냐고 물었다. 선생님은 어떻게 알았냐며 깜짝 놀라 했다.
안철영 감독은 일제강점기 <어화>라는 영화를 연출한 영화감독이자 해방 이후에는 군정청 예술과장으로 할리우드를 방문해 그 기행문인 『성림기행』을 썼고, 최초의 칼라영화인 <무궁화동산>을 만드셨다. 우리는 안철영 선생의 이야기를 나눴고 해방기 외국영화 상영에 관한 논문을 찾아 이메일로 보내드리기로 하고 헤어졌다.
얼마 후 안 사실이지만 안철영 감독의 아드님인 안형주 선생은 아주 유명하신 분이셨다. 1926년 독립운동을 위해 하와이로 망명한 안창호 목사의 손주였기에 아버지 안철영 감독이 납북된 이후 미국으로 이민 갈 수 있었고 그곳에서 정착해 살았다. 비행기 제조회사인 록히드항공사에서 오래 근무하고 은퇴 후 미주 한인들이 남긴 자료들이 산실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물론 미주 한인사와 독립운동사 정리를 위해 헌신하며 여러 의미 있는 책을 썼다.
내가 해방기 영화운동과 관련하여 석사 논문을 쓸 때 김정아 선생님의 후의로 KBS에 보관하고 있던 해방기 영상을 살펴본 적이 있었다. “격동의 기록”이라 이름 붙은 이 영상의 출처가 김덕세가 남가주대학에 기증한 것이었는데 이 필름이 남가주대학에 들어가게 된 이야기도 안형주 선생을 통해 들을 수 있었다. 그러면서 미국 도처에 목록화되어 있지 않은 개인 아카이브에 한인 관련 영상들이 보관되어 있을 것이라며, 일제강점기에 하와이에 안석영 연출의 <심청>을 비롯해 여러 편의 영화들이 상영된 적이 있으니 그런 필름들도 어디엔가 보관되어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해주었다.
2. 안철영의 해방 전후
베를린올림픽이 한창이던 1936년 8월 9일 늦은 밤 올림픽의 꽃 마라톤 경기가 라디오를 통해 중계되고 있었다. 이날 올림픽 메달이 유력한 조선의 두 청년 손기정, 남승룡이 출전하고 있었기에 조선인들의 관심은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동아일보사에서는 손기정, 남승룡 선수의 모교인 양정고보 교장 안종원을 비롯해 조선체육회 이사 김규면, 고려육상경기협회 최재환 등 조선체육계의 중요 인물들과 1932년 로스엔젤스올림픽 마라톤에 출전하여 6위를 차지한 김은배와 복싱계의 스타 황을수, 베를린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안철영 등이 귀빈실에 모여 라디오 중계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안철영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아나운서의 설명에 따라 테이블에 펼쳐 둔 베를린시가 지도를 보고 두 선수가 뛰고 있는 코스를 내빈들에게 설명했다.
출발부터 선두권을 유지하던 손기정은 31킬로 지점부터 선두를 달리기 시작했다. 그 뒤로 영국의 하버와 조선의 남승룡이 달리고 있었다. 드디어 손기정이 1등으로 결승선을 통과하자 귀빈실에 모인 사람들은 환호성을 터트렸다. 그 뒤를 이어 영국의 하버와 남승룡이 2위와 3위로 연달아 들어왔다.
모든 사람들이 감격에 겨워 얼싸안고 환호를 지르고 있었다. 동석한 『동아일보』 기자는 양정고보 안종원 교장에게 소감을 물었다. 그는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이 일을 어쩌면 좋습니까, 우리 학교 학생이 승리한 것을 넘어 조선의 아들이 세계의 무대에서 우승하였으니 민족 전체가 기뻐할 일입니다.”라며 흥분에 쌓여 이야기했다. 손기정과 남승룡의 고보 선배이기도 한 김은배는 4년 전 아쉽게 메달을 따지 못했던 상황을 떠올리며 기자에게 자신이 못한 우승을 후배들이 일궈냈다며 흥분해했다. 이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안철영도 주먹을 불끈 쥐며 만세를 불렀다.
올림픽 마라톤에서 1위를 차지한 손기정은 다음 날 똑같은 코스를 한 번 더 뛰어야 했다. 올림픽 기록영화 <올림피아>를 연출하고 있던 레니 리펜슈탈이 역동적인 화면을 연출하기 위해 재촬영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나치당의 전당대회를 기록한 <의지의 승리>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인물이다. 올림픽 제패의 쾌거가 담긴 레니 리펜슈탈의 <올림피아>는 조선인의 자긍심을 보여주는 역작이었다. 조선의 관객들은 손기정과 남승룡 선수의 모습이 담긴 이 영화를 보기를 희망했다. 필름 값은 천정부지로 올랐고 이 영화를 상영하는 곳은 어디서든 만원이었다.
배재고보와 도쿄전수대학 예과를 졸업 후 독일로 유학 간 안철영은 베를린대학에서 사진학을 전공 후 레니 리펜슈탈의 영화제작 회사에서 잠시 일한 적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그는 조선에서 유럽통으로 인정받았다. 여기에 레니 리펜슈탈에게 사사한 적도 있었기에 독일 영화의 우수함을 체현한 인물로 인식되었다. 그는 큰 기대 속에 서병각, 최영수 등과 함께 극광영화사를 세우고 1938년 <어화>를 연출하였다. 하지만 기대만큼의 큰 성과를 얻지는 못했다.
안철영은 영화제작 시스템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영화를 만드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잘 알았다. 후속작을 준비하였지만, 영화제작은 쉽게 이루어지지 못했다.
중일전쟁 이후 영화산업은 일제의 통제하에 놓이게 되었다. 독일 유학 출신의 지식인 안철영은 일제의 선전영화 제작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언제 불려 갈지 모르는 전장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전한 직장이 필요했다. 요코하마의 독일영사관에 취직한 그는 그곳에서 통역관으로 일했다. 하지만 해방을 얼마 남겨두지 않고 독일영사관 통역 일을 그만두었고 얼마 후 요코하마를 떠나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그리고 해방을 맞았다.
한반도 남쪽을 점령하게 된 미군은 조선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다. 이들은 영어가 가능한 인물들을 통해 한국을 이해했고 이들을 행정 관료로 임용하여 통치에 활용하였다. 아버지 안창호 목사가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었고 독일영사관 근무 경험도 있었기에 안철영은 손쉽게 미군정 관리가 되었다. 영화감독으로서의 경력을 인정받아 군정청 예술과장직에 임명되었다.
해방 후 미주 교포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해방된 조국의 건설에 도움을 주기 위해 많은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하와이 이민자들은 인천에 대학교를 지어 인천의 하와이라는 뜻의 “인하대학교”를 설립하는 등 해방된 조국의 발전을 위해 기꺼이 성금을 냈다. 그러다 보니 미주 한인들의 지도자급 인물들 혹은 그런 사람들과 관련된 인사들은 미국 교포들의 자금을 통해 조국의 발전을 도울 수 있는 사업들을 생각하였다. 군정청 예술과장 안철영도 이런 사람들 중 하나였다. 그는 하와이 교포들의 힘으로 영화건설에 앞장서야겠다고 생각하고 이를 추진했다.
해방 전 조선의 유일한 영화회사는 일제의 영화통제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조선영화사(약칭 조영) 한 곳밖에 없었다. 조선영화의 전부라 할 수 있는 이 회사는 해방과 동시에 적산으로 분류되었고 적산 관리인으로 조선영화사 기획과장으로 있던 이재명이 선임되었다.
적산 조영은 이 당시 조선영화인들이 주장하는 영화산업 국유화의 상징 같은 곳이었다. 물적 토대라고는 조선영화사 한 곳밖에 없는 상황에서 영화인 대부분은 해방 후 조선영화의 출발점은 이곳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곳을 개인에게 불하여 소유하게 만든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안철영의 생각은 달랐다. 해방 후 조선영화가 제대로 작동되기 위해서는 조영의 시설과 설비를 인수한 민간기업이 나타나 회사를 정상화시키는 것이 우선이라고 보았다. 이를 위해서는 거대 자본이 필요한데 미국 동포들의 힘으로 가능하다고 보았다. 안철영은 미군정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서 활동한 김호와 도진호 등 미국에서 온 독립운동가들을 앞세우고 영화산업이 일제에 의해 통제되기 전 최대 규모의 영화회사를 소유했던 기업인 최남주와 적산 조선영화사의 관리인 이재명, 백병원의 백인제, 문학가 백철 등과 손을 잡았다. 이는 적산 조영을 불하받아 운영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사실 미국에서 온 김호는 안철영의 장인이자 당시 남한과도입법의원 적산분과위원장이었으며 이재명은 적산 조영의 관리인, 안철영 본인은 군정청 예술과장으로 적산 불하 문제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여타 적산 기업의 불하 문제와 달리 적산 조영의 인수는 여론의 악화로 인해 큰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유일한 영화 기관을 사유화하는 문제는 공교롭게도 이들이 미군정 내에서의 차지하고 있는 위치 때문에 스캔들로 번질 수 있었다. 결국 조영 인수 문제는 여론의 악화로 인해 이재명이 적산 관리인의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고 이들은 조선영화사 인수가 아닌 새로운 영화회사의 설립으로 방향을 틀게 된다. 결국 하와이에서 활동하던 사업가 도진호와 이재명, 안철영, 백철 등이 중심이 된 서울영화사가 탄생하게 된다.
3. <무궁화동산>과 할리우드 기행
서울영화사가 탄생하던 시기는 본격적인 냉전의 시작과 맞물려 있었다. 1947년 5월 이태준의 『소련기행』이 백양당에서 나왔다. 좌우의 혼란 속에 많은 사람이 이 책을 통해 사회주의 체제를 동경했다. 미국도 소련이 그랬던 것처럼 조선의 사회 지도적 인사들과 작가, 예술가들에게 자본주의 미국을 체험하게 하고 이를 통해 자본주의 체제의 우월함을 선전한다.
1946년 들어 미군정에서는 본격적으로 조선의 지도적 인물들을 미국으로 초청하여 미국을 체험하고 그 경험을 조선인들에게 소개하는 방안을 추진한다. 1946년 4월 군정청 외무과장 문장욱 박사를 비롯한 조선교육문화사절단이 6개월 일정으로 미국을 방문하였다. 이후 각 부문을 대표하는 인사들이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와 선진 미국의 모습을 대중들에서 소개했다. 안철영도 이러한 목적을 띄고 미국 방문을 꾀한다.
1947년 9월 24일 안철영은 미국으로 향했다. 미국의 발전된 모습을 대중들에게 알려주기 위한 목적 외에 영화 제작에 필요한 기자재를 확보하는 것도 하나의 이유였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안철영이 주도하던 서울영화사는 적산 조영을 인수하여 출발하려 했으나 이러한 계획이 수포가 되면서 회사 간판만 있을 뿐 영화제작에 필요한 기자재가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하와이에 도착한 안철영은 먼저 하와이에 와 있던 서울영화사 사장 도진호와 만난다. 그리고 하와이에 체류하며 미리 구해놓은 기자재를 이용하여 영화제작을 시작한다. 이들이 하와이에서 영화활동을 시작하자 하와이 교민 박보광과 한경희 두 명이 고국의 문화발전에 사용해 달라며 2만 3천 달러를 후원한다. 이러한 지원에 힘입어 안철영은 하와이 한인들의 생활 모습이 담긴 기록영화를 제작한다. 다음 해 여름 안철영이 귀국한 후 일반에 소개된 <무궁화동산>은 한국 최초의 칼라영화로 의미가 있다.
아버지 안창호 목사가 활동하고 있는 하와이에 지내던 안철영은 1947년 12월 미국 영화계를 살펴보기 위해 할리우드로 떠난다. 당시 미국영화계는 영화계 내 공산주의자 색출을 위한 반미활동조사위원회의 활동으로 인한 영화인들의 파업이 한창이었다.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한 안철영은 할리우드에서 동양인 배우로 입지를 확보하고 있던 도산 안창호의 장남 필립안을 만났다. 그리고는 영화인들이 파업이 마무리되기를 기다리며 뉴욕과 워싱턴 등 동부 각지를 방문하고 돌아오기로 한다. 이는 상무성, 미국영화협회 등 기관 방문을 통해 지원과 협력을 얻기 위한 공무 외에 처남과 작은할아버지 등 친척들을 만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1948년 2월 안철영은 다시 로스앤젤레스로 왔다. 그 사이 할리우드는 다시 영화제작을 시작했다. 안철영은 필립안의 안내로 본격적인 할리우드 시찰을 시작했다. 때마침 할리우드에는 조택원이 이끄는 무용단과 그의 부인인 영화배우 김소영도 도착해 있었다. 필립안은 고국에서 온 영화인들에게 뜻밖의 선물을 전하는데 아카데미시상식에 초청받을 수 있도록 주선한 것이다.
1948년 3월 20일 저녁, 필립안의 집에서 나온 자동차가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리는 슈라인 오디토리움(Shrine Auditorium)으로 향했다. 시상식장이 있는 웨스트 제퍼슨 거리(W. Jefferson Blvd.)에는 이미 자동차가 가득했다. 교통경찰들은 거리에 가득 찬 군중들을 정리해 질서를 유지했고 그 사이로 느릿느릿 차가 움직였다. 행사장 앞에 도착하자 10여 대의 서치라이트가 밤하늘을 밝게 비추었다. 마치 빛으로 만든 기둥이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듯 보였다.
스타들을 보기 위해 몰려든 군중들의 환호 소리로 가득 찬 광장에 차가 멈췄다. 문이 열리고 차에서 내린 필립안은 동행한 안철영과 김소영의 팔을 양쪽에 끼고 레드카펫을 걸어 행사장으로 향했다. 군중들은 필립을 연호하였고 필립은 다른 때보다도 훨씬 더 감격한 표정으로 손을 들어 그들에게 인사했다.
안철영은 마치 취재기자가 된 것처럼 아카데미시상식을 꼼꼼하게 기록했다. 그러면서 아카데미 시상식과 같은 전 세계적인 영화인들의 잔치에 우리 영화가 초대되는 날이 있기를 기원하였다.
할리우드를 돌아보며 안철영은 여느 영화인들과 마찬가지로 조선에도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와 같은 거대 영화회사가 만들어져 영화가 예술이자 산업으로 성장하여야 한다는 확신을 얻었다. 워너브라더스나 유니버설의 거대 스튜디오는 물론 필립이 출강하는 연기학교를 비롯해 다양한 영화시설을 둘러보며 머릿속에는 거대한 청사진을 그렸다.
할리우드를 떠나 귀로에 오른 안철영은 우선 하와이에 들러 <무궁화동산>의 후반작업을 마무리했다. 때마침 줄리어드음악원으로 유학길을 떠난 임원식과 윤기선이 하와이에 체류하며 하와이 호놀룰루 교향악단에서 객원 연주자로 있었다. 1948년 6월 이들의 특별 연주회를 구경하고 하와이 동포들에게 <무궁화동산>을 선보인 후 7월 8일 귀국한다.
4. 한국전쟁과 행방불명
서울로 돌아온 안철영은 예술과장직을 벗어던지고 서울영화사 운영에 매진한다. 서울영화사에서는 16밀리 칼라영화 <무궁화동산>을 상영하였고 1949년에는 할리우드를 시찰하면서 적었던 메모들을 토대로 『성림기행』이라는 제목의 기행문을 수도문화사에서 발행했다. 참고로 성림(聖林)은 할리우드의 한자식 표기이다.
미국을 다녀오기 전과 후의 분위기는 크게 달라져 있었다. 남한 내에서 좌익 활동은 금지되었고 좌익 단체에 가입해 활동하거나 좌익 인사라 낙인찍힌 사람들의 경우 경찰에 체포되어 조사받았다. 자연히 정치 활동에 적극적이었던 인물들일수록 외부 활동은 위축되었으며 어디에서든 백색테러에 시달렸다. 우익인사들도 마찬가지였는데, 평양에서 내려온 조선민주당 소속 시나리오작가 오영진은 귀가 중 총에 맞아 목숨을 잃을 뻔하기도 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안철영이 미국 체재 중이던 1948년 초 서울영화사에서 1회 작품으로 기획했던 <꿈이 그리워>의 경우는 촬영이 무산되었다. 백철 기획, 이재명 제작, 김이식 시나리오, 윤용규 연출, 김학성 촬영으로 제작하기로 했던 이 영화는 필름 부족을 비롯한 여러 가지 제작 환경적 문제 외에도 영화제작에 관여한 이재명, 윤용규 등이 좌익단체인 조선영화동맹 서울지부를 이끌던 핵심간부라는 이유로 인해 제작에 애로가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해 서울영화사에서는 유명한 영화인들을 앞세운 극영화 제작은 당분간 접어 두기로 하고 문화영화 제작 및 영화 배급을 위주로 운영 방향을 바꾼다. 그 결과 정부가 의뢰한 문화영화 <농부와 목장>의 제작을 시작했다. 이 영화는 <제주도풍토기> 등 뛰어난 문화영화를 연출한 적이 있는 이용민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1949년에는 중국영화 <진양옥>과 동서영화사에서 제작하여 호평받은 <마음의 고향>을 배급했다. 이 영화는 프랑스와 일본에 수출을 추진한다.
좌익 영화인으로 꼽히던 윤용규가 만든 <마음의 고향>이 작품성에서 큰 호평을 얻게 되자 서울영화사에서는 창업 4주년 기념작으로 『월간 소학생』에 게재된 정인택 원작의 <하얀 쪽배>를 윤용규 연출로 제작을 추진한다. 서울영화사에서 한창 촬영을 준비하던 중 한국전쟁이 발발하였고 <마음의 고향>의 해외 진출을 위해 국외 출장을 준비하고 있던 안철영은 발이 묶였다.
전쟁 발발 이틀 만에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했고 얼마 후 성북동 자택으로 보안서원들이 들이닥쳤다. 안철영은 그들에 의해 연행되어 집을 나갔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하얀 쪽배>의 영화 연출을 맡기로 했던 윤용규와 주역으로 캐스팅된 배우 최운봉 등은 북한으로 가서 전쟁 선전을 목적으로 만든 영화제작에 참여한다. 하지만 안철영은 집을 떠난 후 그 생사가 알려지지 않았다.
전쟁이 끝나고 납북자 가족으로 어려운 상황에 있던 안철영의 남은 가족들은 할아버지가 살고 계신 미국으로 떠난다. 미국에서 안철영의 부친 안창호 목사는 동지적 관계로 맺어진 벗으로 납북되어 북한에서 활동하고 있던 엄항섭과 1955년 서신을 교환한다. 이때 엄항섭이 보낸 3통의 편지에는 북서에도 안철영을 찾아보았는데 찾을 수 없었다는 소식만 전해 들을 수 있었다.
경기중학에 다니던 큰아들 안형주는 끌려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머리에 서리가 하얗게 내리고 난 후까지 생생히 기억했다. 2013년 아버지와 관련한 자료들을 국립중앙도서관에 기증하였다. 그러면서 전쟁 중 행방불명된 아버지의 흔적을 모아 자료집을 내는 것을 자신의 마지막 임무라 생각했다. 다행히도 죽산안씨 내승공파 종중에서 비용을 지불해 주기로 했다.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국립중앙도서관을 다니며 아버지에 관한 작은 자료라도 보이면 복사하였다. 아버지에 관한 자료들은 여행 가방 하나에 가득 찼다. 불편한 몸으로 무거운 여행 가방을 끌고 동년배의 원로 영화사가 김종원 선생이 사는 분당에까지 찾아가 자문을 청했다.
2023년 구순을 바라보는 노년의 안형주 선생은 『영화인 안철영 자료집』을 세상에 내놓았다. 꿈에도 잊을 수 없는 아버지에 관한 자료들이 1,000페이지가 넘는 두터운 자료집으로 묶어 낸 것이다. 이로써 평생의 과업이 마무리되었다.
어느 날 노마만리로 안형주 선생이 보내 주신 『영화인 안철영 자료집』이 배송되어 왔다. 안형주 선생에게 자료집 발간을 자문해 주신 김종원 선생님께서 노마만리 주소를 알려주어 이곳으로 책을 보내주신 것이다. 아마 안 선생님은 2014년 국립중앙도서관에서 만났던 인연을 잊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선생님께 흥미롭게 들었던 그때의 이야기들을 부드러운 햇살처럼 따뜻하게 기억하고 있다.
100년이 넘는 한국영화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은 2020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기생충>이 4관왕을 수상한 것이다. 시상식장을 종횡무진으로 휘어잡은 봉준호는 이날의 주인공이었다. 1948년 처음으로 아카데미 시상식을 참관하였던 안철영은 아카데미 시상식을 “영화인의 생일잔치”라며 부러워했다. 세월이 흘러 그 생일의 주인공이 봉준호가 될 줄은 안철영도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김소영도 할리우드에서 동양인 배우로 명성을 떨친 필립안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느 해 코베이 경매에서 안철영의 『성림기행』을 낙찰받았다. 이 책을 바라볼 때마다 나는 봉준호의 기특한 수상 소감이 생각난다. 어디선가 봉준호의 수상을 기쁘게 축하해 주었을 이들, 어쩌면 감격의 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를 1948년의 조선영화인들을 다시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