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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광제의 『북조선 기행』

고서 수집 이야기 17.

by 한상언 Feb 10. 2025

1. 일제강점기 유일한 전업 영화평론가    

 

2006년이었다. 해방기 영화운동에 관한 석사논문을 쓰던 중 영화평론가 서광제가 쓴 북한 기행문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책의 소장처를 알아보니 그나마 가까운 곳이 단국대학교였다. 용산행 전철을 타고 지금은 사라진 단국대학교 한남동 캠퍼스로 향했다.

      

모교의 도서관이 아닌 타 대학 도서관을 찾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단국대학교의 중앙도서관인 퇴계도서관에 들어가 책을 찾았지만 쉽게 찾을 수 없었다. 내가 찾는 책은 연민 이가원 선생의 기증도서인지라 따로 보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사서의 도움을 얻어 책을 받아 보았다. 


『북조선 기행』은 삼팔선의 철조망을 배경으로 그린 표지화가 인상적이었다. 마치 한 점의 미술작품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화가이자 삽화가, 장정가로 유명한 정현웅의 솜씨였다. 한국전쟁 이전에 발간된 귀중서를 만져본다는 게 그때만 해도 흔치 않은 기회였던지라 감격해하며 책을 펼쳐봤던 기억이 난다. 

     

단국대 중앙도서관 안에 있는 복사실에서 제본한 이 책은 논문을 쓰는데 요긴하게 활용하였다. 해방 후 북한 영화의 상황은 그 어느 문헌보다 풍부하게 수록되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일제강점기 유일한 전업영화평론가이자 영화감독으로 영화산업에 대해 지대한 관심이 있는 서광제가 해방 후 사회주의국가의 틀을 만들어 가고 있던 북한을 방문해 그 당시 막 지어지고 있던 평양의 국립영화촬영소를 비롯해 각종 문화 시설들을 둘러보고 이에 관해 자세히 기술하고 있으니 말이다. 

    

정현웅이 장정한 『북조선 기행』


이 책을 통해 영화인 서광제가 해방 후 신문사 편집국장이라는 새로운 영역에서 활동했으며 또한 남북연석회의라 불리는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의 김구 수행기자로 평양을 방문 후 북한으로 건너갔음을 알게 되었다. 해방기 영화운동을 다룬 여러 글에 추민과 더불어 중요하게 등장하는 서광제의 행적을 이렇게 확인하게 된 것은 큰 수확이었다.

      

서광제는 영화에 관한 가장 많은 글을 썼던, 식민지시기 조선영화계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던 인물이었다. 그는 단성사 선전부장 이구영처럼 매주 새롭게 상영되는 영화를 소개하는 주보를 편집하던 영화관 선전부 소속도 아니었고, 마치 외도를 하듯 영화에 대해 단평을 쓰던 대부분의 문학평론가와도 달랐다. 오로지 영화에 대한 글을 썼고, 그것으로 필명을 떨쳤다.

     

전당포를 운영하던 부친 덕에 부유한 생활을 영위했던 그는 당대의 모던보이였다. 테니스를 즐겼고, 자동차를 몰며 시내를 누볐다. 전문학교를 다니며 영화에 뜻을 두고 있던 그는 1927년 조선영화예술협회 연구생으로 참여하며 영화계에 발을 디뎠다. 이곳에서 알게 된 문학가 윤기정을 통해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카프)에 가입하면서 프롤레타리아 계통의 영화평론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조선영화예술협회의 연수 기간이 끝난 후 연구생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영화 <유랑>(1928)에 단역으로 출연했던 그는 부족한 제작비도 부담하였다. 영화에 출연하기는 했지만 영화배우가 되려는 마음이 없었기에 시나리오를 썼으며 많은 영화를 보고 영화에 관한 다양한 글을 신문과 잡지에 발표했다. 그가 소속했던 카프 영화부의 윤기정, 임화, 김유영, 강호, 추민 등 여러 영화인들도 영화에 대한 글을 썼지만 그처럼 꾸준하고 오랫동안 그리고 엄청나게 많은 수의 영화 글을 쓴 사람은 없었다. 

    

전업 영화평론가였지만, 그의 마음은 영화를 만들고 싶은 생각으로 가득했다. 영화감독 이규환 등과 1937년 성봉영화원을 만들었고, 직접 영화를 연출할 기회를 얻게 되자 주저 없이 메가폰을 잡았다. 시대의 변화에 민감한 평론가였기에 그랬을까? 중일전쟁이 터진 직후 전쟁 수송의 대동맥 역할을 담당하는 철도를 소재로 한 스파이 영화 <군용 열차>를 만들어 당시 일제의 대륙침략에 동조했다. 이 영화는 최초의 친일영화로 기록됐으며 서광제는 누구보다 먼저 일제의 침략전쟁에 동조한 영화인으로 기억됐다.

     

서광제라는 문제적 인물에 관심을 두고 그가 쓴 많은 글을 읽기 시작하면서 어느 시점의 글을 읽느냐에 따라 그의 모습이 다르게 그려진다는 것을 알았다. 괴팍하면서도 솔직하고, 가끔은 시니컬한 그의 글은 프롤레타리아 문예운동이 한창이던 시기, 토오키의 충격이 영화계 전반에 영향을 미치던 시기, 전시동원체제기, 해방기의 민족영화운동 시기를 거치며 각기 다른 사람이 쓴 것과 같이 꽤 다르게 다가왔다. 그렇기에 서광제라는 인물을 보다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알기 위해서는 그가 남긴 글을 차근히 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의 글을 순서 있게 읽어 내기에는 그가 쓴 글은 너무나 많으며 정말 다양한 매체에 수록되어 있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언제부터인가 『서광제 전집』을 내야겠다는 생각으로 그의 글을 모으기 시작했다. 수년의 시간이 흘러 이 프로젝트에 남기웅 선생이 합류했다. 우리는 엄청난 분양의 글을 수집해 타이핑을 했다. 하지만 이 글이 서광제가 발표한 글의 몇 퍼센트인지 가늠할 수조차 없다. 아직 드러나지 않은 글이 남아 있을 것이기에 그렇다. 그렇게 다시 시간이 흘러 처음 전집을 계획한 지도 이제 20년의 시간을 바라보고 있지만 아직도 이 기획은 미완성이다. 

          


2. 『독립신보』의 편집국장   

  

해방이 왔다. 해방을 맞은 사람들은 통일된 민족국가 수립을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한쪽에서는 문화예술 부문에 있어서 친일 청산의 목소리가 높았다. 소설가 이광수, 무용가 조택원, 연극인 유치진 등 일제의 침략전쟁에 동참했던 많은 문화, 예술인들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영화계에서는 가미카제를 홍보하기 위해 제작된 <태양의 아이들>과 <사랑과 맹세>의 감독 최인규를 비롯해 최초의 친일영화로 꼽히는 <군용 열차>를 연출한 서광제 등이 민족반역자적 영화인으로 꼽혀 비난받았다. 모든 영화인들을 규합한 조선영화동맹이 만들어질 때도 이들의 자리는 없었다.  

    

1946년 설날 특선 영화로 <군용 열차>의 제목을 바꾼 <낙양의 젊은이들>이 상영되었다. 관객에게 인기 있는 조선 영화를 상영하여 돈을 벌어보자는 흥행업자의 얕은 술수였다. 과거 제작된 친일 영화를 해방 후에도 제목만 바꿔 상영한 것에 언론에서는 연일 비난이 쏟아졌다. 여론은 흥분했고 이 문제가 불거질수록 <군용 열차>의 연출자 서광제는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과거의 잘못은 어떻게 해도 지울 수 없는 낙인과도 같았기에 두문불출의 시간은 길어졌다.   

  

해방의 감격이 사그라지자, 미국과 소련에 의한 분단 점령이 체감되었다. 강대국에 의한 신탁통치 안이 알려지면서 정부를 수립하는 문제가 시대의 화두가 되었다. 이럴 때일수록 대중은 극좌와 극우의 선명함에 이끌렸다. 좌익계통의 문화예술단체들 역시 박헌영이 이끄는 조선공산당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 중도좌파의 위치에서 임시 정부 수립을 통한 통일 정부 수립을 주장하고 있던 조선인민당에서는 조선공산당의 기관지 『해방일보』와 같은 자신들의 견해를 대중에게 알릴 수 있는 신문이 필요했다.      


술과 담배로 시간을 죽이고 있던 때 여운형이 이끄는 조선인민당 쪽 인사들이 신문 창간에 동참해 달라 부탁했다. 신문을 만드는 데 관심이 있었던 그는 이에 합류하기로 한다.     

 

『독립신보』1947년 8월 15일 자


1946년 5월 1일 『독립신보』가 창간되었다. 사장은 영등포 공장지대에서 방직공장을 운영하는 장순각이었다. 그는 해방 직후 조선기술공업협회에 10만 원의 거액을 기부하여 화제가 된 인물이었다. 고문은 여운형과 백남운, 주필은 고경흠, 논설위원은 윤형식, 최성환 등 조선인민당 소속의 인사들이었다. 서광제는 편집국장 직을 맡았다.    

  

주필 고경흠은 여운형의 핵심 참모였다. 해방 직후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공화국, 조선인민당으로 이어지는 여운형의 움직임에는 실무를 맡은 고경흠의 노력이 있었다. 『독립신보』의 발간 역시 고경흠이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다. 그는 영화계 인사들과도 친분을 가지고 있었는데 해방 전 카프 쪽 인사들과도 관련이 있는 동경 무산자사의 일원이었으며 카프 해산과 관련된 공산주의협의회사건으로 복역하기도 했다. 이후 최남주가 이끄는 조선영화사의 선전부장으로 일하며 조선영화사 직속 극단인 조선무대의 창단에도 관여하였다. 


과거 최남주의 조선영화사에서 고경흠과 손발을 맞춘 인물은 김정혁이었다. 해방 직후 김정혁은 『일간예술통신』을 창간하여 운영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고경흠은 김정혁에게 함께 하자고 권유할 수 없었다. 김정혁이 아닌 서광제가 편집국장으로 선택된 이유였다.      


외부 활동을 자제하던 서광제는 『독립신보』에 합류하면서 신문인으로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조선인민당의 입장을 반영하고 있던 『독립신보』는 공식적인 기관지가 아니었기에 당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었다.  일반 상업지처럼 광고를 싣고 신문을 팔아 신문사를 운영할 수밖에 없었다. 타블로이드 2면으로 제작된 이 신문은 여타의 신문들과 달리 문예면이 돋보였다. 특히 영화 관련 기사가 눈에 띄었다. 영화평론가로 이름이 높던 서광제의 솜씨였다. 발행부수도 크게 늘었다.     

 

활동을 재개한 서광제는 영화계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냈다. 가장 먼저 범영화인 조직을 표방한 조선영화동맹을 해산하고 직능별로 재조직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선영화동맹은 탄생 이후부터 좌우익의 대립으로 그 활동이 제한적이었다. 서기장 추민으로 대표되는 조선영화동맹의 주축 세력은 조선공산당의 영향 아래서 움직였다. 반면 적산 극장의 불하 문제가 달린 극장관리인들이나 흥행업자 등은 입장이 달랐다. 특히 홍찬을 대표로 한 서울시극장협회 측은 이승만을 비롯한 우익 정치세력을 통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했다. 기성의 영화인들 역시 미군정을 통해 영화제작 지원을 얻기를 바랐기에 조선영화동맹의 활동에 참여하지 않거나 비협조적이었다. 

     

서광제는 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 단계에 있는 지금, 정당이나 정파적 활동에 휘둘리는 식의 좌익소아병과 정치소아병에서 벗어나 민족혁명에 요구되는 영화제작에 집중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기 위해 정당한 영화정책 수립이 우선 필요하며 정파적 이해를 떠나 영화인들의 초당적인 협력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이러한 서광제의 제언은 조선영화동맹에 의해 일정 부분 수용되었다. 1946년 8월 우익 진영의 영화인들이 탈퇴한 가운데 열린 1차 영화인대회에서 서광제는 조선영화동맹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어 집행부의 일원이 되었으며 같은 해 12월에는 조선영화동맹 서울시지부의 부위원장 직을 맡게 된다.  

    

1946년 대구 10월 항쟁 이후 미군정의 좌익에 대한 더욱 심화하였다. 이 시기 미군정에 의해 해산된 조선공산당을 대신할 대중 정당으로 기존의 좌익정당 등을 규합한 남조선로동당(일명 남로당)이 조직된다. 여운형의 조선인민당도 참여하였다. 하지만 여운형은 좌우합작을 위해서는 좌우 간의 완충 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지지자들을 데리고 탈당하여 1947년 근로인민당을 세우게 된다. 끝까지 좌우합작을 통한 정부수립에 노력하겠다는 의지였다. 『독립신보』의 주요 인물들도 여운형과 마찬가지로 근로인민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1947년 들어 좌우익의 대립은 날이 갈수록 극심해져 곳곳에서 테러가 횡행했다. 서광제는 대구 10월 항쟁이 소강상태에 든 1946년 12월 9일 검사국에 불려 가 조사를 받았다. 1946년 10월 26일 『독립신보』 지면에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재판과 관련하여 변호인단의 성명서를 그대로 실은 것이 문제였다. 


이 사건은 좌익 언론에 대한 미군정의 경고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광제가 편집을 맡은 『독립신보』는 좌익 측의 기사를 비중 있게 다루었다. 그 결과 『조선인민보』가 발행을 중단한 1946년 말 무렵부터 『독립신보』는 좌익신문을 대표했다. 1947년 여름,  4만 부를 발행하고 있던 『독립신보』는 우익 지를 대표하는 『동아일보』(4만 3천 부)와 중도지를 대표하는 『자유신문』(4만 부)과 견줄 정도였다. 그러다보니 신문을 인쇄하는 인쇄소가 습격을 당하는 등 『독립신보』에 대한 테러와 협박은 그 강도를 더해갔다. 근로인민당 창당 직후인 1947년 5월 31일 밤 『독립신보』 주필 고경흠이 시내 신당동에서 괴한 5명에게 폭행을 당하여 죽을뻔 하기도 했다. 그 한 달 반 후인 7월 19일에는 수 차례의 테러에도 불구하고 건재하던 여운형이 백주 대낮에 혜화동 로터리에서 총에 맞아 피살당하였다. 


여운형의 장례식 직후인 8월 6일에는 주필 고경흠과 기자 김호진이 체포되었고 신문사 편집실에서 근무 중이던 편집국장 서광제도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다. 1947년 여름 이후 남한 내 좌익 활동은 금지되었고 『독립신보』 역시 정간과 휴간을 반복하였다.           



3. 남북연석회의 수행 기자   

  

좌우의 갈등을 중재할 만한 영향력 있는 정치인인 여운형이 암살당하면서 남한의 정국은 급속히 냉각되었다. 이승만은 반공주의에 기반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노골화하였고 북한의 김일성은 이미 사회주의 체제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미소공위가 정체에 빠진 상황에서 유엔은 남한만이라도 선거를 통해 정부를 수립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는 분단을 고착화시키는 일이었다. 그간 이승만과 함께 극우진영을 대표하던 김구와 중도우파의 김규식은 총선거를 한 달 앞둔 시점에 국토 분단을 막기 위해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평양으로 떠나겠다고 선언했다. 좌우합작을 통한 통일정부 수립을 주장하던 세력들은 환호했으나 단정 수립을 준비하던 우익 측은 이들의 북행을 막기 위해 경교장을 둘러쌌다.  


서광제는 해방 공간에서 극우 정치인의 행보를 보인 김구에 대해 그간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북협상을 위해 평양행을 선택한 그의 결단을 환영하며 1947년 말 발간된 김구의 자서전 『백범일지』를 읽기 시작했다. 인천감옥에서 나온 김구는 고향으로 돌아가 청년 시절 큰 가르침을 주었던 안 진사와 고 선생을 다시 만났지만, 서양 문물을 섭취하여도 부족한 상황에서 여전히 옛 사고에 머물러 있는 그들에게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더 큰 세계를 향해 떠났다. 이 대목을 읽으며 그의 평양행이 노년의 지도자에게 새로운 전기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교장 측에서는 수행 기자단을 5개 언론사로 제한하였다. 다행히도 『독립신보』는 1순위에 들어 김구의 수행 기자단에 포함되었다. 서광제는 사안이 중대한 만큼 편집국장인 자신이 직접 수행 기자로 나서겠다고 했다. 이렇게 결정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북한의 국립영화촬영소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있는지를 확인해 보고 싶은 영화인으로서의 호기심과 기행문집을 발간하여 북한의 실상을 남한 사람들에게 제대로 알려야겠다는 계획도 있었다.     


1948년 4월 22일 서울 출발 4일 만에 평양에 도착했다. 해방 전 몇 번이나 다녀온 곳이지만 38선으로 분단된 이후에는 처음이었다. 어느 때보다 긴 시간이 걸려 당도한 평양은 행사 준비로 분주했다. 서광제는 여장을 풀었다. 서울을 떠나기 전부터 북한의 이곳저곳을 소개할 목적으로 기행문집을 계획했기에 그의 가방에는 두툼한 원고지 뭉치로 가득했다. 그리고는 가장 궁금한 촬영소에 전화를 걸어 그곳에 근무하는 지인들의 안부를 묻고 빨리 그곳을 방문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했다.     

  

남북연석회의에서 연설하는 김일성


평양 거리로 나온 서광제는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익숙한 얼굴들을 만났다. 대가극 <춘향> 공연을 준비 중인 국립가극장에 들렀을 때 무대감독 강호와 연출가 나웅을 만나 반갑게 인사했다. 약관의 나이 때부터 영화 운동을 함께 했던 동지들이었다. 조쏘문화협회 중앙위원회를 방문했을 때는 부위원장인 시인 이찬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이찬의 시집 출판기념회 때 종로 선술집에서 헤어지고 십여 년 만이었다. 모란봉극장에서 열린 인민군협주단음악무용회에서는 김승구, 신고송, 안막, 박치우, 이원조 등도 만났다. 이중 안막은 유년 시절부터 40이 넘은 지금까지 막역하게 지내던 사이로 유년시절 개구쟁이 서광제가 친구들과 양말목을 풀어 공을 만들고 버드나무를 잘라서 배트를 만들어 야구 놀이를 하거나 다른 장난을 할 때도 같이 놀지 못하고 멀찍이 구경만 하는 얌전한 축에 들던 친구였다.     


남한에서 온 기자단은 남북연석회의 행사를 취재하는 한편 해방 후 3년간 비약적인 발전을 해가고 있는 북한의 주요한 산업, 문화 시설 등을 방문하였다. 체구가 크고 비대한 데다가 양복마저 유별난 것을 입은 서광제는 어느 곳에서나 사람들의 눈에 띄었다. 4월 25일 경축시민대회를 관람하기 위해 거리에 나섰을 때 인민위원회 선전국 부국장 윤규섭(윤세평), 북조선통신사의 한효, 영화인 주인규, 강홍식 등이 그의 모습을 보고 뛰어와 반갑게 악수하였다. 


4월 26일 고대하던 국립영화촬영소를 방문하기로 한 날이 되었다. 시찰단은 김일성종합대학과 혁명유가족학원을 들러 국립영화촬영소로 향했다. 


서광제는 1930년대 중반 이후 영화기업화를 화두로 삼아 여러 편의 글을 남긴적이 있었다. 수공업적인 영화제작 관행에서 벗어나 영화산업에 대한 이해가 있는 자본가가 나서 제대로 된 촬영소를 짓고 영화제작에 나서야 조선영화가 발전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1938년 성봉영화원에 참여하면서 의정부에 촬영소를 지으려고 했던 것도 이러한 생각의 발로였다. 하지만 이 계획은 최남주의 조선영화사가 성봉영화원을 인수하면서 조선영화사의 계획으로 이어졌고 어렵게 완공된 의정부촬영소는 1942년 일제의 통제회사가 설립되면서 문을 닫았다. 그러다보니 영화기업화와 국립영화촬영소의 설립은 해방 후 우리 영화계의 숙원 사업으로 남아 있었다.  


시찰단이 촬영소에 도착하자 조선영화계의 스타 문예봉과 심영이 이들을 맞아주었다. 얼마 전까지 서울의 극장과 집회 현장에서 얼굴을 비추던 이들이 어느새 평양에 와서 촬영소의 방문객을 환영하고 있었다. 촬영소의 안내는 카프영화부에서 함께 활동했던 박완식이 맡았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라 반가웠다. 촬영소는 모든 게 최신식이었다. 특히 거대한 스튜디오와 영화제작소의 웅장한 발전 계획은 압도적이었다. 당장이라도 이곳에 남아 시나리오도 쓰고 연출도 하고 싶었다.      


서광제는 촬영소를 돌아본 후 북한에 남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곳에서 영화인으로 화려한 꽃을 피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이후 시찰단의 일정은 일제강점기 노구치 재벌이 경영하던 동양최대의 화학공장인 흥남인민공장, 일제가 파괴한 성진고주파공장을 재건한 성진제강소, 부전·장진발전소, 신의주방적, 아오지탄광 등을 둘러 보는 것이었다. 일정 내내 서광제의 머릿속에는 촬영소에 대한 생각만이 가득했다. 


김일성과 남한 기자들과의 기자회견만을 남기고 모든 일정이 마무리 되었다. 안막의 집에서 지인들의 환송연이 열렸다. 안막, 최승희 부부를 비롯해 민촌 이기영, 신고송, 허정숙, 윤규섭 등이 모여 오랜만에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서광제가 최승희가 따라주는 맥주를 받아 마시며 안막과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꺼내자 말수가 적은 민촌 선생은 빙긋 웃을 뿐이었고 신고송은 너털웃음을 짓고 부리부리한 황소 눈을 가진 윤규섭은 유쾌한 표정을 지었다. 허정숙의 정열적인 열변과 웃음으로 가득한 밤을 보낸 후 서광제는 이기영의 건강을 빌며  다시 돌아오겠다는 말로 작별 인사를 대신했다.       


    

4. 이색분자의 말로     


4월 30일 오전 남한에서 올라온 기자단은 김일성과의 기자회견이 끝난 후 서광제는 안막의 집으로 가 이찬과 셋이 맥주와 냉면으로 점심을 먹은 후 이들이 정성껏 모아준 책을 한 아름 안고 평양역으로 갔다. 오후 2시 40분 평양역을 출발하는 기차를 타기 위해서였다. 


서울로 돌아온 그는 기행문 집필에 들어갔다. 평양에서부터 가져온 자료들도 많았고 일정별로 적어 둔 원고도 그 양이 꽤 되었다. 이를 책 한 권 분량으로 정리하여 해방 3주년에는 책으로 낼 계획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시간이 필요했다.      


신문사에 복귀하자마자 주필 고경흠과 함께 사직서를 제출했다. 사직서 제출은 북행을 결심했다는 것이기도 했다. 『독립신보』의 편집국장으로서의 임무는 이로써 만 2년 만에 끝났다. 다시 영화인으로 사는 삶이 그를 기다렸다.   


기자로서의 마지막 행적이 담긴 『북조선 기행』이 1948년 여름 청년사에서 출간되어 나왔다. 서광제는 서울의 지인들에게 책을 전해 주었다. 그중에는 일제강점기 『야담』을 발행하던 임경일도 있었다. 그는 당시 성균관대학교에 재직하고 있었다.   


1948년 말 서광제는 북한으로 갔다. 그의 평양 생활은 평탄치 않았다. 다소 늦게 월북하였기에 그가 맡을 만한 번듯한 자리는 없었다. 시나리오 창작사의 작가로 배속되어 기록영화 시나리오를 작성했다. 북한에서 그가 쓴 작품으로는 제목만 알려진 <위대한 역사> 한 편만이 있을 뿐이다.     


그나마 남한에서는 볼 수 없었던 소련영화를 자유롭게 볼 수 있다는 것은 북한 생활의 낙이었다. 그가 김구 수행 기자단의 일원으로 평양에 처음 왔을 때 소련영화 <그 전날 밤>을 보려 했으나 하루 전 상영이 끝나 볼 수 없었다. 20년 전 일본 교토의 영화촬영소를 시찰하러 갔을 때 푸도프킨의 <인생안내>를 본 후 더 이상 소련영화를 본 적이 없었는데 평양에 와서까지 소련영화를 못 보게 되어 유감이었다. 하지만 평양에 자리 잡은 후에는 그런 아쉬움은 없었다. 1949년 8월 발간된 북한의 영화잡지 『영화예술』에 서광제는 스탈린상을 받은 소련영화 <참된 사람의 이야기>와 <제삼작전>을 보고 앞으로 북한영화의 나아갈 길에 대하여 많은 시사를 준 작품으로 평하기도 했다.      


6.25 전쟁이 발발하고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북으로 갔던 신문인들이 서울로 내려와 신문을 발간했다. 그 행렬 속에 『독립신보』의 편집국장 서광제의 모습은 없었다. 영화인들 사이에서도 서광제의 소식은 알수 없었다. 서울의 지인들은 북한으로 떠난 서광제가 어떻게 되었는지 이런저런 추정만 할 뿐이었다. 「순애보」의 작가로 유명한 소설가 박계주는 6.25 전쟁 발발 1년 후인 1951년 6월 『동아일보』에 인민군 치하 90일 간 서울에서 겪었던 이야기들을 풀어놓았다. 그중 서광제의 말로를 비교적 자세히 적어 두었다.     


김일성이 스탈린을 만나 회견한 것이 1950년 4월이었으니 그 직후 언제였을 것이다. 지인들과의 술자리에서 서광제는 김일성 스탈린 회견 관련 『로동신문』의 기사가 마치 김일성이 스탈린을 알현한 것처럼 표현했다며 북한이 자주 국가가 맞냐며 술주정했다. 며칠 후 술자리에 동석했던 지인의 고발로 서광제는 정치보위국에 체포되었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의 지인들이 문화상 허정숙을 만나 서광제에 대한 선처를 부탁했다. 서광제의 지인이기도 한 허정숙이 이 문제에 대해 알아보았으나 말 한마디 꺼낼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사안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박계주의 글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아주 허튼 이야기만은 아니다. 서광제는 카프가 북한 문예의 혁명적 전통으로 중요하게 취급되던 1950년대 당시에 이미 김유영과 더불어 이색분자 혹은 주책바가지로 불렸다. 임화 등 숙청된 남로당 계열 문학예술인들이 반역자로 표현된 것과는 다르다. 아마 서광제의 숙청 이유는 술주정과 같은, 그를 주책바가지로 부르게 된 것과 같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계기가 있었을 것이다.


<군용 열차>의 타이틀


서광제는 남북 모두에서 지워진 인물이 되었다. 남한에서는 월북작가이자 북한 선전용 기행문인 『북조선 기행』의 작가로 오랫동안 언급할 수 없었다. 해금 후에도 유명 문학예술인들과는 달리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가 주목받게 된 시점은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연출한 친일영화 <군용 열차>가 발굴되면서부터이다. 2005년 광복 50주년을 맞아 한국영상자료원에서 공개한 이 영화는 서광제에게는 지우고 싶었던 인생의 오점이었다. 그 부끄러운 과거가 그를 기억하게 만드는 계기가 된 것은 그의 비극적 운명만큼이나 씁쓸하다.


단국대 도서관에서 처음 접한 서광제의 『북조선 기행』은 내가 책을 수집하면서부터 꼭 소장하고 싶었던 책 중 하나였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책은 근대서지학회 오영식 선생님 소장본이다. 내가 소장하던 책과 오 선생님이 소장하던 책을 맞바꿀 때 선물로 함께 주신 것이다. 내가 오래전부터 『서광제 전집』을 출간하려 자료를 찾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신 오 선생님의 후의이다.     


서광제의 친필 필적이 남아 있는 이 책은 『야담』의 발행인이던 문학가 임경일에게 전해 준 것으로 그의 월북 직전 남한에서의 마지막 흔적이다. 그가 남긴 많은 글을 읽으면서 유독 오식과 오자가 많은 것을 보고 식자공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악필일 것이라 생각했다. 『북조선 기행』에 쓴 서광제의 육필을 보며 그의 필적이 내가 생각한 것과 비슷하게 악필이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 것은 또 다른 발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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