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Made By me 05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희완 Jun 03. 2019

EP 5) 끝의 시작점. 시작의 꼭짓점.

episode 5.


작업실에 들어온 정완은 가장 먼저 컴퓨터의 전원을 켰다. 그리고는 의뢰를 받았던 곡을 다시 한번 집중해서 듣기 시작했다. 도입부부터 천천히 가사를 입혀 보려 했지만 이상하게도 자꾸만 훅(Hook)*부터 떠올랐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보통은 버스(Verse)*부터 떠올리고 살을 붙이는 식으로 작업을 해왔지만 이번 곡은 확연히 다른 느낌이었다. 정완은 헤드을 착용하고 볼륨을 줄였다 높였다를 반복하며 곡의 멜로디에 가장 어울릴만한 가사를 떠올렸다. 가이드보컬의 음성에 맞춰 한 글자씩, 그리고 한 단어씩 노트에 적기 시작했다. 상징적인 의미를 반복하는 것보다는 자연스럽게 연결시키는 것이 이 곡의 포인트라고 직감했다. 


*Hook -  대중음악에서 듣는 사람을 사로잡기 위해 만들어진 짧은 구절.

*Verse - 시의 연, 노래의 절.


노트에 가사를 열심히 적던 정완은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경미가 프린트를 해준 자료를 꼼꼼히 읽어보았다. 곡을 의뢰한 엔터테인먼트에서 특별히 한 작사가에게만 의뢰를 한 것이 아닌, 세 작사가에게 의뢰를 한다는 문구가 눈에 띄었다. 평소에 밝고 경쾌하지만 세련미가 있는 작사를 해왔던 정완에게도 같은 조건으로 의뢰가 들어온 것이었다. 이 곡을 부르게 될 주인공은 곧 데뷔를 앞둔 걸그룹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프린트를 끝까지 읽어본 정완의 사고 회로가 뒤틀리기 시작했다. ‘가이드보컬의 목소리가 담긴 곡을 듣지 않았더라면’하는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했다. 정완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어차피 부를 대상도 정해져 있는 곡에 정완이 떠올린 가사를 붙인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억지로 소녀감성을 쥐어짜서 가사를 완성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 역시 의미가 있을 리 없었다. 이 곡에 작사가로서 이름을 올린다면 자신의 인지도와 커리어를 올릴 수 있는 좋은 기회임은 틀림없었다. 정완이 처해있는 상황에서 이를 거부할 여유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랜 고심 끝에 정완은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가이드보컬이 보내온 메시지에 응답하기로 결심했다.


-비가 오면, 우리가 지나쳐왔던 것들을 떠올려.-

-사랑이었을까, 그게 진짜 사랑이었을까.-

-지나간 시간과 지나쳐왔던 것들에게 미안해.-

-끝이 아니라고 생각해.-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기를, 언젠가 우리 사랑은 다르지 않았음을 약속해.-

-이 비가 그칠 때까지만 울게.-


-비가 그치고 우리 다시 만나 함께했던 기억을 더듬었을 때, 부디 같은 기억이기를.-

-다른 기억을 말하고 있는 서로를 보게 되면, 아픈 추억에 몸살이 날 것 같으니까.-


-추억이라는 건 비슷한 기억이라도 갖고 있어야 해.-

-언젠가 서로를 머금었을 때, 같은 기억을 떠올리면 그게 추억이니까.-

-다른 기억을 떠올리면, 그건 추억이 아니니까.-


새벽 두 시. 경미는 쏟아지는 졸음을 결국 이겨내지 못했다. 오른손에 꼭 쥔 노란색 마커펜이 경미를 대신해 달콤한 꿈을 꾸고 있었다. 맥주가 생각나 작업실 밖으로 나온 정완은 엎드려있는 경미를 보았다. 잠들어있는 경미의 책상으로 다가가자 경미가 정성스레 적은 문구들이 보였다. 꿈에 관해 적힌 문구들이 서너 줄 있었지만 태블릿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다. 경미의 펜 끝이 가리키는 마지막 문구만이 정완과 반갑게 눈을 맞추었다.  


-마음대로 꿈을 꿔서 미안해요.-


정완은 잠들어있는 경미를 깨웠다. 어깨를 살짝 흔들었을 뿐인데 소스라치게 놀라는 경미를 본 정완은 괜히 깨운 것 같은 생각에 미안함을 느꼈다.


“오빠. 지금 몇 시예요?”

“두 시 조금 넘었어.”

“깜빡 졸았나 봐요.”

“피곤했나 봐?, 가자, 데려다줄게.”

“아니에요. 아직 다 못했어요.”

“더 하려고?”

“오빠는요?”

“할 만큼 했어. 하루 만에 끝낼 수 있는 일은 아니잖아.”

“집에 가려고요?”

“응. 어제 잠을 제대로 못 잤더니 피곤하네.”

“그럼 같이 나가요. 불 끄고 올게요.”


경미는 쪼르르 사무실의 불을 끄러 갔다. 정완은 경미가 불을 끄고 사무실의 문을 잠그는 동안 주차장에 주차되어있던 자동차를 사무실 앞으로 가져왔다.


“괜찮으니까 타.”

“걸어가도 되는데..”

“그러지 말고 타. 가는 길인데 뭐.”


경미는 잠시 망설이는듯하다가 이내 조수석의 문을 열었다. 조수석에 앉은 경미는 오묘한 기분이 온몸을 휘감는 느낌이 들었다. 경미는 정완의 옆자리가 선영이라는 것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조수석 자리마저도 선영의 자리라고 생각해서였는지 가는 동안 편하게 앉아있을 수 없었다.


“여기서 우회전이요.”

“여기?”

“네. 저기 마트 앞에 세워주시면 돼요.”

“잠깐만. 차 돌리면 내려.”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조심히 가세요.”

“내일 보자.”


경미는 정완의 자동차가 시야에서 보이지 않을 때까지 마트 앞을 떠나지 못했다. 아쉬움이 남았던 걸까. 방금 전까지 꾸고 있던 달콤한 꿈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온 경미는 다시는 느껴보지 못할 것 같은 지금의 감정을 소중히 간직하고 싶어 했다. 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생생한 오늘을 아주 소중히 간직하고 싶었다.


한편, 지수는 병준에게 정완의 이해 못 할 행동에 분노를 쏟아냈다. 병준은 지수의 그런 행동을 말리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들어주면 되는 것이고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같이 어울려주면 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병준의 계산법은 간단했다. 사랑이라는 공식에는 변수와 취약점이 많았지만 지수라는 공식은 단순하고 명료했다.


“다 끝났어?, 더 할 거야?”

“너는 화 안나?”

“내가 왜?”

“남자들은 다 그래?, 어리고 예쁜 여자가 나 좀 꼬셔주세요 하면 다 넘어가는 거냐고.”

“그런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그럼 뭔데?, 지금 내가 오버하는 거야?”

“정완 씨는 그 여자를 의식해서 간 게 아닌 것 같은데.”

“어째서?, 같은 남자라고 편들어주는 거니 지금?”

“아니. 나는 누구의 편을 들어 줄만큼 아량이 넓지 않아.”

“너도 어느 날 갑자기 네 앞에 스물네 살짜리 예쁘고 깜찍한 여자가 나타나서 너한테 꼬리 치면 그대로 넘어갈 거지?”

“뭐래 자꾸. 나까지 걸고 넘어갈 필요는 없잖아.”

“불쌍한 우리 선영이..”

“정완 씨 나름의 사정이 있었겠지. 그리고 선영 씨가 갑자기 왜 불쌍해지는 건데?, 지수야. 너무 깊숙하게 접근하지 마. 폭넓은 사고방식이 때로는 재앙을 불러오는 법이니까.”

“기우야?, 전부 다 기분 탓이야?”

“내가 볼 땐 그래. 그냥 정완 씨와 선영 씨는 지금 각자의 일상을 보내고 있는 중이라고 편하게 생각하는 편이 좋지 않아?, 어차피 이건 두 사람의 문제야. 네가 나선다고 해서 쉽게 바뀔 거라고 넘겨짚지 마.”

“참 냉정하다 너. 네 친구들 문제였어도 지금처럼 똑같이 말할 수 있어?”

“아니,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됐어. 너랑 말 안 해.”

“지수야. 이건 누구 편을 들어준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잖아. 네가 두 사람의 일거수일투족까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해?, 어차피 오늘 일도 그냥 정완 씨가 보내는 하루 중 한 장면일 뿐이야. 지금 선영 씨도 직장상사랑 밥을 먹고 있을지도 모르는 거고, 늦게까지 카페에서 직장동료랑 커피를 마시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지수 네가 두 사람이 보낸 7년을 속속들이 전부 다 알 거라고 착각하지 마. 아마도 네가 모르는 일이 더 많을걸?, 네 논리대로 이미 시작부터 끝까지 네가 다 알고 있었다면 처음부터 두 사람을 만나게 해주지 말았어야지. 안 그래?”


선영은 지수와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였고, 정완은 대학교 때부터 친구였다. 지수는 정완이 첫 시집을 출간했다는 소식을 우연히 선영에게 말하게 되었고 선영은 호기심에 그 시집을 구매하게 되었다. 선영은 주변에 책을 출간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책을 구매했으니 나중에 꼭 사인을 받을 수 있게 해 달라는 둥, 시집을 읽다 보니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있다며 그 부분을 좀 물어봐달라는 둥, 선영의 요구는 날이 갈수록 점점 늘어갔다. 나이도 같고 서로 잘 통하는 부분이 있을 것 같은 생각을 한 지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선영과 정완의 만남을 주선했다. 낯을 많이 가리는 편이었던 정완은 선영이 가지고 온 자신의 시집에 연예인처럼 사인을 해주었고 선영은 침착한 얼굴로 조급한 행동을 반복했다. 굳이 지수가 발 벗고 나서지 않아도 정완과 선영은 서로에 대해 차근차근 알아가기 시작했다.


7년 전 그날, 세 사람은 서로가 만족할만한 만남이었음에 술잔을 높이 들어 올렸다. 그들의 앞날에 장밋빛 인생만이 펼쳐지길, 창창한 앞날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없기를 바라며 밤새 코가 삐뚤어질 때까지 술을 마셨다. 그날 이후 정완과 선영은 연인이 되었다. 결국 두 사람의 시작점은 지수가 찍어준 셈이었다. 즉, 시작의 꼭짓점에는 지수가 있었다.


“나, 완전 착각한 거야?”

“착각이라고 해서 미안한데, 달리 대체할 표현이 없네.”

“나는 내가 다 알고 있는 줄 알았어.., 맞네, 나 착각한 거 맞네.”

“네가 두 사람과 밀접한 관계라는 건 부정하지 않을게. 근데, 이번 일도 분명 네가 모르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이 헤어진 게 아닐까?”

“듣고 보니 그런 거 같아. 내가 다 알고 있었고 정확하게 미래까지 예측하고 있었다면, 둘이 헤어질 일도 없었겠지. 결말까지 알고 있었으면 애초부터 만나게 해주지 말았어야 하는 게 맞지.”

“차갑게 말해서 미안해.”

“얼음물로 샤워한 기분이야. 정신이 번쩍 든다.”

“비꼬는 거 아니지?”

“응. 억지 부려서 미안. 그래도 속상한 건 속상한 거다 뭐.”

“알아. 네 기분 모르는 건 아닌데, 나는 그 두 사람보다 네가 더 걱정돼.”

“나?, 내가 왜?”

“지금, 두 시가 넘어버렸거든.”


엉뚱하다고 생각해야 되는 걸까. 지수는 ‘걱정돼’라는 한마디에 무중력 상태가 되고 풍선의 바람이 빠지는 소리와 함께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쳐진 것 같은 기분이 마치, 최고 속도로 질주하는 롤러코스터를 탄 것 같았다. 하지만 지수는 불쾌해하지 않았다. 오늘도 하고 싶은 말을 실컷 했고 위로도 받았으니까. 잠시 위태로울뻔한 상황도 있었지만 평화를 잘 유지했으니까.


지수의 집 앞까지 데려다준 병준이 지수에게 물었다.


“지수야. 뭐, 잊은 거 없어?”


지수는 또 한 번 롤러코스터를 탄 기분이 들었다. 드라마에서 여자 주인공을 바래다준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에게 뽀뽀를 요구할 때 쓰는 유치한 대사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응?, 뭐?, 내가 뭐 잊은 게 있나?, 있을까, 없을까..”


말이 점점 길어지는 지수를 바라보던 병준이 웃으며 말했다.


“다음 주 토요일 말이야. 혹시 잊었나 싶어서.”

“셋째 주 토요일!”

요즘 너, 정완 씨랑 선영 씨 때문에 정신없잖아.”

걱정 마. 아무리 정신없어도 잊어버릴게 따로 있지.”

“고마워. 얼른 들어가서 씻고 자. 나, 갈게.”

“응. 운전 조심히 해. 도착하면 메시지 보내고.”


집에 도착해서 샤워를 하는 동안 지수는 정완과 선영의 시작을 기억해내듯 병준과의 처음도 기억해냈다. 고작 2년 전의 일이었지만 특별함 없었다면 아마도 기억해내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저 평범한 하루 일과 중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했다면 또렷하게 기억해내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기 때문이었다.


지수는 샤워를 하고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병준에게 온 메시지를 확인하고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 침대에 누워 있던 지수는 2년 전 병준을 처음 만났던 그때를 회상했다.


2년 전, 지수는 대학원의 지도교수로부터 봉사활동 제안을 받았다. 지도교수의 입김이 다분히 묻어있다는 것을 감지한 지수는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혹시라도 불참하게 되면 불이익이 생기지는 않을까 고심했다. 지수는 결국 같은 학과에 재학 중인 지인들과 함께 한 장애인복지관으로 봉사활동을 하러 가게 되었다. 그날 그 복지관에서 지수는 병준을 처음 만나게 되었다.


지수는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갖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장애인을 결코 다르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교육을 수도 없이 받았지만 생각은 그렇게 할지언정 행동으로는 실천하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지수는 마치 자신의 가족처럼 장애인들을 대하는 병준이 굉장히 유별나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쪽도 봉사활동 오셨나 봐요?”

“네?, 뭐 그렇죠.”

“너무 열심히 하시는 것 같아서 보기 좋네요.”

“아네, 고맙습니다.”

“자주 오시나 봐요?, 저는 오늘 처음 왔어요. 교수님 제안 때문에 등 떠밀려온 것뿐이지만..”


지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병준의 얼굴에서는 웃음기가 사라졌다. 병준은 지수가 불순한 의도로 이곳을 찾아온 것 같은 기분에 화가 났다. 아주 작은 동정심 때문이었다면 차라리 이해를 해주었겠지만 그저 사회적 공헌의 일환으로 왔다는 말을 뻔뻔하게 내뱉는 지수를 경멸로 가득 찬 눈으로 쳐다보았다.


“왜 그러세요?, 제가 뭐 잘못했나요?”


병준은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는 지수를 무시한 채, 복지관 직원들의 뒤를 따라 식사 준비를 돕기 위해 곧장 식당으로 가버렸다. 지수는 지금껏 살아오는 동안 처음으로 느껴보는 모멸감에 입술이 바들바들 떨렸다. 지수는 잔뜩 억울해진 자신의 감정을 이기지 못한 나머지 병준을 쫓아 식당으로 갔다.


“저기요. 제가 솔직하게 말한 게 그렇게 잘못한 건가요?”

“..”

“그쪽도 여기 올 때 목적이 있어서 온 거잖아요.”

“..”

“사람이 말을 하면 들어는 줘야 되는 게 기본 아니에요?”   


복지관 직원들이 자리를 피하자 병준이 지수를 밀치며 쏘아붙이듯 말했다.


기본?, 이봐 당신. 솔직한 거 참 좋아하나 본데, 그럼 나도 솔직하게 말해줄게. 그런 시답잖은 목적으로 왔으면 조용히 시간만 때우다가 가. 나는 듣기 거북한 목적을 갖고 오는 당신 같은 사람들을 세상에서 가장 증오하니까. 알아들었으면 귀찮게 알짱대지 말고 저리 비켜.”  


지수는 눈물이 찔끔 나왔다. 자신에게 막말을 쏟아내는 남자는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막말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모호했다. 자신보다 몇 배는 더 강력한 솔직함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도리어 맞는 것 같았다. 병준은 적잖이 당황한 지수를 또 한 번 무시하고 자연스럽게 사람들 틈에 섞여 환한 미소로 식사 준비를 도왔다. 무엇이 그렇게 즐거운지, 무엇이 그렇게 그를 웃음 짓게 만드는지 지수는 알지 못했다.


지수는 단지 봉사활동이라는 임무를 받아 들고 그 임무를 수행하러 오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또래의 사회초년생들이나 학교, 기업체 같은 곳에서 찾아온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과 같은 마음가짐으로 이곳에 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잔뜩 억울해진 지수는 고작 이런 일로 혐오를 넘어서 증오라는 표현까지 사용한 병준은 도대체 얼마나 순수한 마음으로 헌신적인 봉사활동을 하러 이곳에 오는 것인지 궁금했다. 하지만 병준의 입장을 들어볼 기회가 쉽게 주어지지 않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병준과 대화를 나눌 수 없었던 지수는 잠시 바람을 쐬러 밖으로 나왔다. 복지관의 이곳저곳을 바라보던 지수는 식당 건물의 뒤편과 나란히 붙어있는 작은 장애인시설을 발견했다. 길을 따라가 그곳에 들어간 지수는 원장실이라고 쓰여 있는 곳의 문 앞을 서성거렸다.


“어머, 안녕하세요. 처음 보는 분 같은데.., 무슨 일이시죠?”

“저, 그게..”

“들어오세요. 마침, 휴식 시간이니까요.”  

“아니에요. 다음에 다시 올게요.”

“괜찮으니까 들어오세요.”


그 시설의 원장으로 보이는 중년의 여성을 따라 들어간 곳은 장애인복지관과 연계된 일종의 위탁시설이었다. 곳곳에 붙어있는 장애인들을 모습을 담은 사진 속에는 햇살처럼 따스한 미소가 넘실거렸다. 원장은 벽에 걸려있는 사진을 보고 있던 지수에게 국화차를 대접했다. 코끝에서부터 진하게 스며드는 국화꽃 향기가 한껏 상기되어있는 지수의 예민함을 천천히 가라앉혀 주었다.


“봉사활동 오셨나 봐요?”

“네.., 그렇긴 한데..”

“근데 여긴 어쩔 일로..”

실은, 여쭙고 싶은 게 생겨서요. 실례인 줄 알지만 꼭 여쭙고 싶은 게 있어요.”

“실례까지는 아니지만 드문 일라 조금 놀랍네요.”

“혹시, 여기 봉사활동 오시는 분들 중에 키 크고 짧은 머리 하신 남자분..”

“아, 병준이요?”

“잘 아시는 분인가 봐요. 그분, 여기 자주 오시나요?”

“그럼요. 중학교 졸업하고부터니까, 10년 조금 넘었네요.”

“10년이요?”

“네. 궁금하신 게, 병준이 얘기인가요?”


지수는 조금 전 병준과 있었던 일을 원장에게 상세하게 털어놓았다. 초면에 실례되는 행동이었음을 자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수는 억울하고 분통한 자신의 심정을 누군가에게 표출하고 싶었다.


“그 아이네 형이 이곳에 있었어요. 그리 오래 머물지는 않았지만..”

“친형이 장애인이었나 봐요?”

“네, 뭐..”

“지금은 어디에 계세요?”

“안타까운 얘기지만.., 죽었어요. 10년이 넘었다고 했죠?, 형이 그렇게 되고 나서부터니까.”

“돌아가셨다고요?, 왜요?”

“그것까지 제가 말씀드리기는 곤란하네요. 혹시라도 나중에 병준이 만나게 되면 직접 물어보세요. 남의 가족사를 함부로 말하는 건  예의가 아니니까요. 그리고 병준이 그렇게 막돼먹은 아이 아니에요. 오해가 있었다고, 그런 뜻은 결코 아니었다고 말하면 반드시 이해해줄 거예요.”


지수는 본인과 본인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오직 자신만의 기준으로만 판단했다. 어느 정도 이해관계가 성립이 되는지 되지 않는지, 실현 가능성이 있는지 없는지, 명확한 근거를 제시할 수 있는지 없는지, 그 근거가 설득력이 있는지 없는지 마저도 철저하게 본인만의 기준으로 판단했다. 그것이 가장 합리적이고 이상적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지수는 원장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기분이 들었다. 연거푸 고개를 숙이며 원장에게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온 지수는 그 길로 곧장 병준을 찾아 식당으로 갔다. 하지만 병준은 그곳에 없었다. 지수는 식당을 정리하고 있던 직원에게 병준의 행방을 물었다.


“병준 씨 금방 가셨는데..”


지수는 복지관의 초입까지 전속력으로 달려갔지만 끝내 병준을 만나지 못했다. 때마침 지수와 함께 온 일행들이 집으로 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아쉬운 마음으로 다음을 기약하려던 그때 원장이 지수를 불러 세웠다.


“병준이는 매달 셋째 주 토요일마다 복지관에 와요. 10월에는 두 번 오고요.”

“두 번이요?”

“네. 그 달이 병섭이 기일이거든요.”

“병섭이?, 병준 씨네 형이요?”

“네. 그 아이네 형 이름이에요.”

“감사합니다.”


원장은 온화한 미소를 보이며 지수 일행을 배웅했다. 지수는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병준이 신경 쓰였다. 병준이 자꾸만 신경 쓰이는 원인을 찾아보려 했지만 집에 도착한 이후에도 그 원인을 찾지 못했다. 지수는 답답하고 혼란스러운 기분으로 다음 달 셋째 주 토요일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 달 후, 지수는 이른 아침부터 복지관에 가기 위해 준비를 했다. 우여곡절 끝에 겨우겨우 복지관에 도착한 지수는 복지관 안으로 들어가고 있는 병준을 발견하게 되었다.


“저기요.”

“오늘은 또 어떤 분의 제안으로 오셨나요?”

“그런 거 아니에요. 병준 씨 만나러 왔어요.”

“제 이름은 어떻게..”

“그건 됐고요. 지난번 일에 대해서 일단 사과부터 할게요.”


지수는 병준의 앞에서 손을 모으며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굳이 모르는 상대에게 이유를 덕지덕지 붙여가며 주절주절 말하는 타입이 아니라서요. 그래서 그랬어요. 필요한 말만 한 것뿐이에요. 솔직하게.”

“그게 솔직한 거라고 생각해요?”

“다른 사람들처럼 ‘이러이러해서 왔습니다.’하면서 도무지 억지웃음을 지을 수가 있어야죠.”

“그래서 지금 따지러 온 겁니까?, 사과하러  겁니까?”

“저, 아무한테나 허리 숙이는 그런 여자 아니에요. 사과도 했고 그때 그 상황에 대해 해명도 하는 중이잖아요.”


병준은 자신의 눈을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을 하고 있는 지수를 관찰했다. 제법 날이 서있는 날카로운 칼처럼 보였지만 날카롭게 세워져 있는 칼날을 제어할 수 있는 손잡이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거들먹거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화가 났고요. 아무튼 저도 심하게 말한 부분에 대해서는 사과드리겠습니다.”

“아니에요, 저도 잘한 건 없는데요 뭘. 근데, 저 기억하고 계셨나 봐요?”

“네, 뭐..”

“오늘 할 일은 뭐예요?, 저도 좀 도울게요.”

“일부러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저하고 화해하러 오신 거면 목적은 달성하신 거니까, 그만 돌아가셔도 됩니다.”

“이지수예요. 대학원에서 심리학 전공하고 있어요.”


병준은 별안간 자기소개를 하며 손을 내미는 지수의 행동에 조금 당황했지만 지수가 내민 손을 잡았다.


“김병준입니다. 사진작가입니다.”

“혹시, 원장실에 걸려있던 사진들도 병준 씨가 찍은 거예요?”

“원장님 만나셨나 봐요?, 원장님이랑 무슨 얘기 했어요?”

“병준 씨가 이곳에 봉사활동 하신지 10년 조금 넘었다, 형님이 한분 계셨는데 돌아가셨다, 뭐 그 정도요.”

“원장님도 참..”

“왜요?, 말 못 할 사연이라도 있는 거예요?, 말하기 곤란하면 안 해도 돼요.”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일단 가죠. 오늘은 복지관 청소랑 밀린 빨래도 해야 돼요. 곧 추워질 테니까요.”


지수는 병준을 따라 복지관 안으로 들어갔다. 복지관에 모여 있는 직원들을 비롯해 일부 거동이 가능한 장애인들이 병준을 따듯한 미소로 반겨주었다. 지수는 거부감이 조금 있었지만 일단은 겪어보기로 했다. 편견인지 아닌지, 편견이 아니라면 극복할 수 있는지 없는지 병준과 함께 부딪혀보기로 했다. 뉘엿뉘엿 해가 질 때까지 계속된 중노동에도 병준은 한 번도 힘든 내색을 보이지 않았다. 상대방이 미소로 다가오면 그보다 더 환한 미소로 화답해줄 뿐이었다. 그제야 지수는 병준이 왜 목적을 가지고 이곳에 발을 들이는 사람들을 싫어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지수는 달콤한 휴식을 마음껏 누려야 될 황금 같은 주말을 힘들고 고단한 육체적 고통과 맞바꾸었지만 굉장히 뿌듯하면서도 개운한 기분이었다. 병준과의 오해도 풀었고 편견이 아니었음을 조금이나마 깨닫게 되었기에 그 어떤 주말보다 높은 점수를 매길 수 있는 주말임을 수긍했다. 캄캄한 밤이 되어서야 병준과 지수는 병준의 차를 타고 복지관을 떠났다.


“용케 여기까지 혼자 올 생각을 다했네요.”

고속버스도 타보고, 마을버스도 타보고 좋던 데요 뭘.”


그렇게 복지관을 나선 지 1시간여 동안 지수와 병준은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서로 어색해하면서 딴청을 부린 것은 아니었지만 이상하게도 대화를 주고받지 않았다. 하지만 두 사람이 짓고 있는 표정은 너무나도 닮아있었다.


내비게이션의 목적지 근처에 도착해서야 병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정말로 저한테 사과하러 오신 거예요?”

“네. 그쪽이 자꾸만 신경이 쓰여서요. 왜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무지무지 신경 쓰이더라고요.”


병준과 지수의 대화는 또 한 번 맥없이 끊겨버렸다.


“저기, 횡단보도 앞에 세워주시면 돼요.”

“아, 네. 집 앞까지 가도 괜찮은데..”

“아니에요. 태워다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한걸요.”

“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차에서 내리는 지수를 바라보던 병준의 가슴속에는 아쉬움이라는 감정이 피어났다. 지수에게도 그런 감정이 전해진 걸까. 병준의 차에서 내린 지수가 병준에게 말했다.


“저기.., 다음 달에 또 가도 돼요?”


병준은 환하게 웃으며 지수에게 자신의 명함을 건넸다. 그리고는 비상등을 켜고 차에서 내려 횡단보도의 신호가 두 번 바뀔 때까지 지수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병준은 점점 작아져가는 지수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았다.


처음 복지관에서 먼저 말을 걸어온 지수를 보았을 때 병준은 ‘첫눈에 반했다’라는 말을 실감했다. 하지만 지나치게 당돌하고 솔직한 지수의 모습에 호감을 표하기는커녕 도리어 화를 내고 말았다. 다른 감정은 억누를 수 있던 병준이었지만 복지관만큼은 예외였기 때문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보내야 했다. 다르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고 피해를 준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그저 나의 가족, 너무나도 사랑했던 형을 떠나보내야 했던 그날을 떠올리면 병준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적인 감정이 이입되었다.


형을 잃고 난 후에 밀려오는 감정들은 어린 병준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가혹했다. 어른들은 그런 병준을 보며 ‘성숙하다.’ 또는 ‘어른스럽다.’라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가슴속에 박혀있는 커다란 응어리는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 밑바닥에 고스란히 가라앉아있을 뿐, 흩어지거나 날아가버리지는 않았다.


이전 04화 EP 4) 딱 맞고 편한 옷. 꿈과 현실의 경계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