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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Made By me 0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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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희완 Jun 06. 2019

EP 6) 아직은 그 자리, 사랑도 그 자리.

episode 6.


한동안 연락이 뜸하던 지수와 선영의 침묵을 먼저 깬 것은 지수였다. 정완과 선영 사이에 일어난 일을 최대한 자연스럽게 해결해주고 싶었던 지수는 선영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선영아, 선영아. 얼굴 좀 보여주라.-

-미안해 지수야.-

-이사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

                                                                                                                      -아직 다 못했어?-

                                                                                                                -내가 가서 도와줄까?-

-괜찮아. 이제 거의 다 했어.-

                                                                                         -진짜 엄마네로 가는 거야?, 괜찮겠어?-

                                                                                                                   -은영 언니는 뭐래?-

-언니는 형부랑 태호 때문에 신경 쓸 일이 많아서 아직 말 안 했어.-

-엄마 혼자서 고생하는 게 눈에 선한데 내가 모른척할 수는 없잖아.-  
                                                                                                                -착하네 우리 선영이.-

                                                                                                        -그럼, 언제 얼굴 보여줄래?-

-이삿날 잡히면 전화할게.-

                                                                                                                                 -알겠어.-

                                                                                                                   -선영아, 보고 싶다.-

-나도 보고 싶어.-


회사의 업무와 이사 준비를 병행하며 분주했던 선영은 틈이 날 때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찾아갔다. 요즘 들어 부쩍 수척해진 아버지의 간호를 도맡아 하고 계시는 어머니를 볼 때마다 가슴이 시큰거렸다. 대학병원에 종합검진을 예약해 놓은 상태였지만 언제 갑자기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안고 사는 어머니의 심정을 어느 정도는 헤아릴 수 있었다.


한때는 누군가의 아들로, 한때는 누군가의 남편으로, 한때는 누군가의 아버지로 점점 자신의 위치는 바뀌어갔지만 선영의 아버지는 변함이 없었다. 풍요로운 사랑이 가득한 가정에서 자란 선영은 그것이 당연한 줄로만 알았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다닐 때까지 선영은 아버지의 사랑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지금도 애처로워 보일만큼 아픈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 선영의 건강부터 챙기는 선영의 아버지는 늘 한결같은 아버지였다.


선영은 자신의 차량으로 운반할 수 있는 가벼운 이삿짐을 챙기기 위해 옷장의 문을 열었다. 철 지난 두꺼운 외투를 침대에 늘어놓던 그때, 옷장 깊숙한 곳에 넣어두었던 커다란 상자를 발견했다. 무엇이 들어있는 상자인지 대번에 알아차린 선영은 커다란 상자를 안고 거실로 나왔다. 정완과의 7년이 고스란히 담긴 그 상자는 선영에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소중한 보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선영은 잠시 이삿짐을 정리하는 것을 멈추고 그때 그 시절로 거슬러 가보기로 했다.


-째깍, 째깍-


적막한 방안에 울려 퍼지는 시계 초침 소리가 오늘따라 유난을 떠는 것 같았다. 상자의 뚜껑을 조심스레 열자 정완이 만들어준 커다란 편지가 가장 먼저 선영을 반겨주었다.


-나보다 더 너를 사랑하는 내가, 너보다 더 나를 사랑하는 너에게.-


정완이 선영에게 써준 편지의 헤드라인이었다. 커다랗게 쓰인 정완의 글씨를 본 선영은 갑자기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이리저리 상자 속을 헤집기 시작했다. 마치 무언가 잃어버린 것을 찾기라도 하듯 아주 빠르고 날렵하게 상자를 파헤쳤다. 이윽고 상자의 가장 아래쪽에 있던 정완의 시집을 꺼내 든 선영은 시집을 넘기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시집의 사이사이마다 끼워져 있던 즉석사진을 한 장씩 꺼내서 거실 바닥에 가지런히 내려놓았다. 즉석사진의 여백에는 날짜와 장소, 그리고 그날 느꼈던 자신의 기분이 자그맣게 적혀있었다. 


7년이라는 시간을 순서대로 정렬해놓은 선영의 손등 위로 눈물이 떨어졌다. 두 사람이 가장 빛나던 그때, 두 사람이 가장 행복했던 그 시절, 두 사람이 서로를 가장 원했던 그때 그 시간, 매일매일이 새로웠던 그때를 추억하니 그때나 지금이나 선영에게 있어 정완은 매우 소중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어느새 서른이라는 나이가 된 현실 속의 선영은 아무리 그때를 추억하며 그리워해 봤자 근심도 걱정도 없던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 또한 깨닫게 되었다.


갑자기 얻은 깨달음 때문일까. 선영은 굳이 지나간 시간에 의미를 붙여야 할 필요성을 잃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7년이라는 시간에 의미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다고 했던 자신의 발언 역시 산산이 부서져 버리는 순간이었다. 갈기갈기 찢어진 기억의 조각조각마다 자신만이 알고 있는 암호 또는 바코드를 닮은 깨알 같은 의미들은 아직도 선영의 기억 속에 질서 정연하게 붙어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의식적으로 상자 속에 가득 채워져 있던 물건들을 거의 다 꺼냈을 때쯤, 오래전 정완과 함께 즐겼던 온라인 게임의 클라이언트가 담긴 CD를 발견했다.


선영이 기억하기로는 단지 한정판이라는 말에 소장하고 싶었을 뿐 다른 뜻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 기억을 되짚어보니 정완과 함께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즐길 수 있었던 게임이라는 것에 의미를 붙이고 싶은 마음이 조금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선영은 정완에게 PC방에 갈 때마다 매번 새로 설치하는 것이 귀찮다는 핑계로 그 CD의 필요성을 어필했다. 선영의 끈질긴 재촉을 마다하지 못했던 정완은 이벤트 경품을 받을 수 있는 응모자격을 갖추기 위해 며칠 동안 밤을 새워 가며 게임을 했다. 그리고 마침내 선영이 그토록 원하던 게임 CD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문득 선영은 그 시절의 정완도, 지금의 정완도 나름대로 최소한의 노력은 유지해왔다는 사실마저 깨달았다는 생각에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인생이 게임이었다면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저장했던 곳으로 마음대로 돌아갈 수 있다면 우리가 헤어질 일도 없지 않을까?


코끝이 빨갛게 달아오른 선영은 갑자기 정완의 목소리가 듣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결혼해 달라고 간곡히 청혼하는 그런 목소리가 아니라 선영에게 CD를 구했다며 한껏 도취되어있던 정완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듣고 싶었다.


‘어째서 그날의 목소리가 쉽게 떠오르지 않는 걸까?’


정완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던 선영은 낡은 카세트테이프 뭉치를 찾아냈지만 그것은 단지 그 시절을 연상케 하는 추억거리일 뿐이었다. 카세트테이프를 한참이나 매만지던 선영은 그때를 추억하는 모든 행위를 포기하고 다시 상자 안에 물건들을 차곡차곡 담기 시작했다.


상자에서 꺼낸 추억들을 다시 상자에 넣을 때마다 눈앞에 천국의 실체가 그려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즉시 대면하고 있는 지금의 현실을 인식하니 곧장 지옥이 펼쳐졌다. 그때의 선영은 단 한 번도 정완과의 이별을 쉽게 인정하지 않았다. 이별도 어디까지나 사랑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별은 세월이 흐를수록 냉정해졌다. 사랑의 일부분이었다고 생각했던 이별은 말 그대로 이별일 뿐이었다. 자신에게 닥친 현실을 마주한 선영은 다시 돌아갈 수 없음에 울고 추억할 수밖에 없음에 또 울었다. 그날 밤, 선영은 열두 번도 넘게 천국과 지옥을 오갔다.


밤공기에 제법 한기가 서려졌다. 습도계의 수치가 40% 이하로 내려갔고 한낮 기온은 여름을 방불케 할 만큼 뜨겁고 따가웠다. 일교차 역시 거세게 출렁였다. 횟집의 수조에는 전어가 가득했고 오가는 사람들의 소매와 바지단이 조금씩 길어져 있었다. 평범하기만 했던 집 앞의 보도블록도 울긋불긋한 색으로 곱게 치장했다.


“경미야, 나 잠깐 나갔다 올게. 늦을지도 모르니까 8시까지 안 오면 먼저 가.”

“어디 가세요?”

“응. 전에 의뢰 들어온 거. 그거 마무리하러 담당자 만나기로 했거든.”

“아, 알겠어요. 좋은 소식 기다리고 있을게요.”

“고마워. 이따 연락할게.”
 

경미는 정완을 배웅하고 책상 앞에 앉아 야간수업을 진행할 때 필요한 도구와 자료를 챙겼다. 지난달부터 수강생이 한꺼번에 몰리는 바람에 혼자서 수용할 수 있는 범위를 초과해버렸다. 오전, 오후, 야간 세타임으로 수업을 진행했지만 매일매일 만석이었다. 더 이상 수강생을 받고 싶어도 못 받는 지경에 이르자 경미는 과부하가 걸린 로봇처럼 실수도 잦아졌다. 그 덕에 정완과 이야기를 할 시간도 줄어들었고 마주치는 횟수마저도 줄어들었다. 좋아서 시작한 일이었지만 좋아서 하는 일 때문에 좋아하는 사람과 멀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 그다지 좋지만은 않았다.


야간수업을 마친 경미는 책상에 앉아 휴대폰을 확인했다.


‘이따 연락할게.


혹시나 정완에게서 연락이 온 것이 있지는 않을까 싶었던 경미는 휴대폰을 열었지만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음을 확인하자마자 땅이 꺼질 만큼 큰 한숨을 내쉬었다.


“선생님. 잠깐 이것 좀 봐주시겠어요?”


사무실 불이 꺼지기를 기다리던 그날 이후, 현수는 좀처럼 경미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만들지 못했다. 현수는 자신의 키만큼 쌓여버린 오해를 지금까지도 풀지 못한 탓에 하루하루가 찐 고구마를 통째로 삼킨 것 같은 기분이었다.


“네?, 어떤 거요?”

“이 부분이요. 굴곡진 부분을 조금 더 각지게 그리고 싶은데, 잘 안되네요.”

“지금 펜 몇 호 쓰세요?, 손으로 잘 안되면 도구를 한번 이용해 보세요. 조금 더 모나게 그릴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펜도 지금 거 보다 얇은 펜을 쓰시면 될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요즘 글씨 쓰는 게 참 재밌어졌어요. 이게 다 선생님 덕분이에요.”

“다행이네요. 보통은 한 달 정도 배우다 그만두는 분들이 많은데..”

“아참, 그리고 그때는 정말 죄송했어요. 일부러 그런 건 절대 아니었어요.”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다 지나간 일이니까요.”

“다시 한번 사과할게요. 

“정말 괜찮다니까요. 안 그러셔도 돼요.”

그럼 이제 오해 풀린 거죠?”

“오해요?, 오해라고는 생각 안 했는데..”

“이제 다 풀린 걸로 알고 가보겠습니다.”


현수를 마지막으로 수강생들이 모두 사무실을 나가자 혼자 덩그러니 사무실에 남게 된 경미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조금만 더 정완의 연락을 기다려 보기로 했다. 강의실에 뒤죽박죽인 의자를 테이블 밑으로 밀어 넣고 수강생들이 쓰다 남긴 이면지와 종이컵을 모아 재활용 바구니에 버렸다. 9시가 넘었지만 정완으로부터의 연락은 없었다. 경미는 기다리는 것을 단념하고 퇴근 준비를 했다. 겉옷을 챙겨 입고 가방을 챙긴 후 사무실의 불을 끄고 문을 잠갔다.


경미는 언제부터인가 집으로 가는 길에 있는 횡단보도에 멈춰서는 것이 습관이 되다. 그날, 정완과 함께 맥주를 마셨던 건물의 옥상을 바라보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때보다 한층 뾰족해진 바람이 경미의 뺨을 스쳐 지나갔다. 쓸쓸함과 허전함이 경미를 조금씩 채워가던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경미야. 나, 진희.”

“응, 진희야. 오랜만이네.”

“잘 지내?, 학원 차렸다면서?”

“응, 그럭저럭.”

“다음 주 주말에 윤지 생일인 거 알지?, 이번에는 꼭 오기다.”

“못가. 내가 놀 정신이 어디 있니?”

“그러지 말고 와서 얼굴 좀 비추고 그래. 다들 네 소식 궁금해한단 말이야.”

“다음에 갈게. 나 요즘 너무 힘들고 피곤해. 

“주말이잖아. 주말도 바빠?”

“미안, 끊을게.”


사실 경미는 그들에게 진심으로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과연 그들이 궁금해하는 소식이 나의 안부인지, 아니면 그저 안주거리로 삼을 사람이 필요한 것인지 말이다. 진희와 전화를 끊고 가방에 휴대폰을 넣으려던 그때, 경미의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경미는 진희에게 불참 의사를 조금 전보다 강하게 표현하고 싶었다. 그리고 이참에 자신이 궁금해하는 것을 묻고자 누구에게 걸려온 전화인지 확인도 하지 않은 채 전화를 받아 들었다.


“안 간다고 했지?, 내 말이 우습니?, 나 정말 힘들다고!

“경미야. 왜 화를 내고 그래?, 무섭게..”


경미가 그토록 기다렸던 정완의 전화였다.


“그게 아니라, 친구랑 통화하다가 끊겼는데..”

“경미도 힘들구나. 나도 힘든데..”

“그런 거 아니에요, 힘든 거 하나도 없어요.

“퇴근했지?, 늦게 연락해서 미안해.

“네. 이제 막 집에 가는 길이에요. 오빠는요?”

“나는 사무실에 들렀다 가려고.”

“왜요?, 무슨 일 있어요?”

“응. 오늘 담당자랑 미팅했는데, 아주 대차게 까였어.”

“정말요?, 어떡해요..”

“괜찮아. 까일 거 알고 들이댄 거였으니까.”

“지금 어디예요?, 저도 사무실로 가도 돼요?”

“방금 주차했어. 전에 사뒀던 맥주가 생각나서.”

“저도 갈래요. 같이 마셔요. 금방 갈게요.”


경미는 가까스로 엉망진창이 될 뻔한 기분을 전환시킬 수 있었다. 횡단보도의 보행자 신호가 아직 파란불로 바뀌지 않았지만 경미는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지금 이 순간 정완이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은 아마도 자신일 거라는 생각에 사로잡힌 채 사무실까지 한 번도 쉬지 않고 달렸다.


잔뜩 신이 난 표정으로 사무실에 도착했지만 정완은 보이지 않았다. 옥상으로 가는 계단의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발견한 경미는 옥상으로 올라갔다.


“뭐예요 진짜. 옥상에 갈 거면 옥상으로 오라고 말을 해줘야죠.”

“진짜 나는 왜 이 모양이지?, 경미한테는 어째 미안한 짓만 골라서 하는 것 같네. 일부러 그러라고 시켜도 못할 일인데.”

“진짜 너무하네요. 제 맥주는 챙겨 왔어요?”

“응, 네 개 다 들고 왔어.

“안 가져왔다고 했으면 진짜 화내려고 했는데.

근데, 이거 어쩌지?

“또 왜요?”

안주가 없다. 미안!”


‘자꾸 미안하다는 말 하지 마요.., 내가 더 미안하니까요.’


경미는 정완과 선영의 관계를 알면서도 정완을 좋아하는 것은 반칙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도, 해주고 싶은 일도 하지 못한 채 항상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경미는 하고 싶은 말과 해주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에게도 미안함을 감출 수 없었다.


“경미는 왜 힘들어?, 아까 힘들다고 했잖아.”

“아, 그거요. 그냥 친구들끼리는 그런 말 자주 하잖아요. 변명이나 핑계 같은 거.”

“하긴.., 나는 요즘 힘든 일만 생겨서 큰일이다.”

“아까 그 일 때문에요?, 그건 오빠도 예상했다고 했잖아요.”

“그러게. 걷기만 하면 되는 길을 두고 왜 험한 절벽을 탔을까..”

“왜요?, 어쨌길래 그래요?”

“아니야. 이미 지나간 일인데 뭘. 다음에는 가슴 말고 머리로 해야지.”

“나도 알려줘요. 궁금하단 말이에요.”

“그 곡 말이야.., 사실, 이번에 데뷔하는 신인 걸그룹이 부르기로 정해져 있었거든?, 근데, 내가 쓴 가사는 축축 늘어지는 이별의 장송곡 같은 느낌이었어. 당연히 어울릴 리가 없었겠지.”

“알면서 그랬던 거예요?, 참 용감하네요. 오빠한테도 좋은 기회였잖아요.”

“그렇지. 그러니까 내가 지금 엄청 힘들다는 거야.”

“자꾸 생각하면 뭐해요. 지나간 일 따위는 먼지 털듯 툭툭 털어버리세요.”

“그래, 고맙다.”

“오빠. 우리, 건배해요.”


경미는 정완이 들고 있는 맥주 캔에 자신이 들고 있는 맥주캔을 부딪혔다. 그리고는 몇 번씩이나 정완의 기분이 풀어질만한 말을 늘어놓았다. 경미의 위로 덕분에 어느 정도 기분이 풀린 정완은 슬슬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경미는 쉬지 않고 정완이 하는 말마다 맞장구를 쳤고 궁금했던 것들을 꼬치꼬치 캐물었다. 지금 정완은 누군가가 필요한 순간이라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경미는 근거 없는 용기까지 생기고 말았다.


선영이 다녀갔던 그날 밤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때는 그럴만한 용기가 없었다. 그때는 그랬다. 선영 때문에 정완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망설여야 했고 정완에게 해주고 싶은 것들을 혼자만의 상상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동안 선영 때문에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무조건 배제해야 했던 경미는 더 이상 자신의 감정을 숨겨야 할 이유가 없어졌다고 생각했다.


어느 정도 대화가 마무리되어갈 때쯤, 경미는 내심 가장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기로 했다.


“오빠. 선영언니랑은 화해했어요?”

“아니. 나, 차였어. 아주 보기 좋게.”


경미는 두 귀를 의심했다. 바랐던 말이었지만 면전에서 기뻐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딱히 위로해주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경미는 애매한 경계선상에서 어떤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머뭇거렸다. 그저 입을 앙 다문 채, 텅 비어버린 맥주 캔만 조물 거리고 있었다.


그러던 그때 정완이 새 맥주 캔을 경미에게 건넸다. 그리고는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그 메모지 있잖아.. 

“메모지가 왜요?

마치 유서 같았어. 그래서 그랬던 거야. 미친놈처럼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아무튼 그날 너 아니었으면 큰일 치렀을 거야.”

“제가 뭘요..”

“그날, 선영이가 사무실로 찾아왔던 거 알지?

“네.

“나랑 얘기 좀 하자고 몇 번이나 붙잡았는데, 선영이는 자기 할 말만 하고 가버렸어. 

“화가 많이 나신 모양이네요.”

“이 맥주캔 같았어.

“뭐가요?

차가다고. 내가 아는 선영이가 아닌 것처럼. 아마도 선영이를 그렇게 만든 건 전부 내 탓이겠지?”

“아닐 거예요.”

“며칠은 그냥 이러다 말겠지 했는데, 진심인가 보더라고. 내가 하는 연락을 안 받는 건 기본이고, 지수 통해서 얼굴 좀 보려는 수작도 안 통하더라.”

“곧 풀리겠죠. 너무 상심하지 마요.”

“아니, 헤어진 거야. 아마도 우리는 헤어진 게 맞는 걸 거야. 생각해보니까 내가 한 번이라도 뜨거웠던 적이 있었나 싶은 생각이 들더라고. 몰랐던 거지.., 농담 같았던 그 말이 진심이었는 줄도, 싸늘하게 식어버릴 줄도 나 같은 놈이 당연히 알 리가 없었겠지.”

“뜨겁고 차가운 게 다 무슨 소용이에요. 잘 될 거예요. 걱정 마요.”

“경미야. 뜨거운 쇳물에 갑자기 차가운 물을 부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어떻게 되는데요?”

“엄청난 온도 차이 때문에 물방울이 총알처럼 사방팔방으로 흩어지면서 폭발해버려.”

“정말요?”

“응. 그러니까 내가 이 지경이 됐잖아. 

“아직 터진 건 아니잖아요.”

“한쪽이 차가웠을 때는 한이 뜨거웠고, 반대로 한쪽이 차가워지니까 또 한쪽이 뜨거워지고..”

“오래 만난 연인들 보면 대부분 쉽게 헤어지지 못하잖아요.”

“과연 그럴까?,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는데 나는 절대 아니라고 봐. 쉬운 일이 아닐 거라고 착각하는 것뿐이지 헤어지고 나면 참 쉬웠구나 하고 후회하는걸 뭐. 그냥 유서 같은 메모지 한 장 달랑 손에 쥐고 한숨만 쉬는걸 뭐..”

“오빠..”


경미는 천천히 일그러져가는 정완의 얼굴을 차마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지난번 무심결에 마음속으로 바랐던 그 말이 정완과 선영을 저주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경미는 더 이상 정완과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경미야.”

“네?”

“그.., 켈리그라피 말인데. 그거, 초보자도 배우면 금방 써먹을 수 있어?”

“갑자기 켈리그라피는 왜요?”

“노래 가사 좀 적어보려고.”

“이번에 작사한 거요?”

“아니, 내가 좋아하는 노래 가사.”

“금방 따라 할 수 있는 폰트가 몇 개 있긴 해요.”

“나도 배울 수 있을까?, 너 편할 때 말해주면 시간은 내가 맞출게.”


‘이것 또한 기회일까?’


경미는 지금 이 상황을 기회라고 여기면 천벌을 면하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매일이 오늘만 같다면 그 어떠한 벌도 달게 받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빈 맥주 캔을 봉지에 담아 계단을 내려가는 정완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경미는 제멋대로 삐죽거리는 입을 손으로 가린 채 옥상의 문을 닫고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그 순간, 말없이 계단을 내려가던 정완이 갑자기 뒤를 돌아보며 경미에게 말했다.


“아참, 경미야. 수강료는 얼마야?”

“수강료요?, 우리 사이에 수강료라니요.”

내가 아는 명언이 하나 있거든? 

“뭔데요?”

세상에 공짜는 없다.

“진짜 별소릴 다 하네요. 그냥 밥이나 사주세요. 그거면 돼요.”


지수는 일주일이 지나도록 선영에게 연락이 오지 않자 10분 간격으로 선영에게 전화를 걸고 문자를 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영은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지수는 애가 타는 입장이 어째서 선영이 아닌 자신인지 열심히 머릿속의 계산기를 두드려 보았지만 딱히 이렇다 할 이유를 찾아내지 못했다. 지수는 병준에게 자신에게 일어난 상황을 타개할 구체적인 해결방법을 함께 모색해 보자는 제안을 했지만 병준은 그저 웃기만 할 뿐이었다.


답답함을 참을 수 없었던 지수는 병준과 함께 복지관을 다녀온 직후, 곧장 선영의 본가로 향했다. 지수는 기억을 더듬어가며 겨우겨우 선영의 본가에 도착했만 그곳에서는 어떠한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주말 저녁이었음에도 켜진 불도 없거니와 사람이 머물고 있는 흔적 찾아볼 수 없었다. 지수는 선영이 매우 걱정되었다. 정완 때문에 힘든 것도 있겠지만 무언가 좋지 않은 일이 늘어났다는 것을 직감하니 연락이 닿지 않는 선영이 너무나도 걱정스러웠다.


같은 시각, 선영은 언니와 형부 그리고 어머니와 함께 모여 병실에 누워 잠을 자고 있는 아버지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오전에 아버지가 급작스럽게 쓰러지는 바람에 예약했던 날보다 일찍 병원에 오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예정보다 일찍 병원에 입원을 했음에도 때마침 적절한 검사를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선영의 가족들은 얌전히 아버지의 검사 결과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병실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휴대폰을 들고 시간을 확인한 선영은 꾸벅꾸벅 졸고 있는 언니를 깨웠다. 그리고는 재차 마다하는 형부의 등을 떠밀며 언니와 형부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언니와 형부가 병실을 떠나자 간이침대에 누워 겨우 잠이든 어머니의 몸에 담요를 반쯤 덮었다.


선영이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켜던 그때, 노크소리와 함께 병실의 문이 조용히 열렸고 간호사를 대동한 담당의사가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윤형일 님 보호자분?”

“네. 제가 막내딸이에요.”

“검사 결과 췌장 끝부분에 5센티가량의 종괴가 발견되었습니다. 당분간 환자분의 상태를 조금 더 지켜보고, 추후 조직검사를 진행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종괴라면.., 암인가요?”

“정확한 건 조직검사를 해봐야 알 것 같습니다.”


담당의사와 대화를 하는 동안 간호사들은 가느다란 아버지의 팔에 혈관을 찾아 주사기를 꽂았다. 링거액의 잔존량을 확인하고 혈압과 맥박도 확인했다. 담당의사와 간호사들이 빠져나가자마자 선영의 눈에서는 맥없이 눈물이 흘러나왔다. 단순한 소화불량, 혹은 감기몸살 같은 가벼운 잔병이라고만 생각했던 선영은 청천벽력 같은 의사의 말에 결국 울음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황급히 손등으로 입을 틀어막은 선영은 아무것도 모른 채 잠들어있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번갈아보고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병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병실 문 앞에 쪼그려 앉아 오열하고 있던 그때 전화가 걸려왔다.


“방금 집에 도착했어. 아빠 주무셔?, 엄마는?”

“언니.., 아빠가 암일 수도 있데. 어떡해 우리 아빠.”

“결과가 그렇데?, 의사가 뭐라고 했는데?”

“종양이 발견됐데. 5센티 정도..”

“선영아 울지 마. 아직 암 아니라잖아. 의사가 암이라고 안 했잖아.”

“언니, 어떡해.., 우리 아빠 죽으면 어떡해.”

“아빠 안 죽어. 너 결혼하는 거 보기 전까지는 죽을 생각 없다 그랬으니까 그만 울어.”

“눈물이 안 멈춰. 나도 그만 울고 싶은데.., 눈물이 안 멈춰 언니..”


한동안 대화를 나누기 어려울 정도로 울고 있던 선영을 가까스로 달랜 은영은 냉큼 화제를 돌렸다.


“엄마는?, 엄마도 같이 들었어?”

“아니, 엄마 자고 있어.”

“그랬구나. 정완이는?, 정완이 안 왔어?”

“응..”

“요새 정완이랑 별로야?, 얼굴 본 지가 꽤 된 것 같은데.”

요즘 정완이 바빠.”

“싸운 건 아니지?, 또 저번처럼 죽네 마네 하는 건 아니지?”

“그런 거 아니야. 피곤해 보이던데 얼른 자.”

“그래. 내일 언니가 일찍 갈게.”


은영과 통화를 마친 선영은 화장실로 간 후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찬물로 씻었다. 세수를 하고 화장실에서 나온 선영은 병실 앞에 잠시 멈춰 섰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뱉기를 몇 차례나 반복 선영은 살그머니 병실의 문을 열었다. 조심스레 병실에 발을 들였을 때, 곤히 잠들어있는 아버지의 손등에 양손을 포개 놓은 채 눈을 질끈 감고 있는 어머니를  선영은 아무렇지 않은 척, 아무 일도 없는 척하며 어머니의 어깨에 살포시 손을 얹었다.


“엄마, 깼어?”

“응. 도무지 편히 잘 수가 있어야 말이지.”

“시끄러웠어?”

“아니, 네 아빠가 런데 내가 어떻게 편하게 자겠니.”

“힘들지?”

“네 아빠 좋아하는 버섯전골 먹이려고.., 안 나가겠다는 사람 억지로 끌고 나가서 이지경이 된 것 같아서 미안해 죽겠어. 다 내 탓인 것 같아서..”


말끝을 흐리던 어머니는 이내 가슴을 부여잡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등 뒤에 서있던 선영은 두 팔을 벌려 어머니를 감싸 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의 흐느낌은 조금씩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잠긴 목을 가다듬으며 말을 이어갔다.


“먹을 거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네 아빠는 가리는 거 없이 뭐든 다 잘 먹는 줄 알지?”

“응. 아빠는 편식 안 하잖아.”

“은영이는 날 닮아서 식성이 까다롭지 않았는데, 선영이 너는 아빠를 닮아서 편식이 심했어.”

“지금도 열심히 편식 중인걸 뭐. 근데, 아빠를 닮아서라니?”

“실은, 아빠도 편식이 심해. 엄마 신혼 때 네 아빠 반찬투정 때문에 얼마나 싸웠는지 모르지?”

아빠가?”

“그래. 아빠는 야채를 싫어하고 나물도 싫어해. 너처럼 고기만 좋아한다고.”

“에이 설마.., 거짓말이지?”

“네가 유치원에 다닐 때였나.., 한 번은 내가 카레를 해줬지 아마?, 네가 양파랑 당근을 밥상에 골라놓가 나한테 들킨 적이 있었는데.., 기억나? 

기억 안 나. 그래서 어떻게 했는데?”

“편식할 거면 밥 먹지 말라고 네 밥그릇을 빼앗았지.”

“어머.”

“그걸 본 네 아빠가 길길이 날뛰면서 네가 골라놓은 당근이랑 양파를 한입에 욱여넣더라고.”

“우리 아빠 진짜 멋있다. 

“멋있기는, 너 때문에 그날 네 아빠랑 얼마나 싸웠는 줄 아니?

“그 말 들으니까 기억이 날 것도 같은데..”

“네 아빠가 펑펑 울고 있는 네 옆에 바싹 붙어 앉더니, 우리 딸 괜찮으니까 어서 먹으라고 어찌나 너를 달래주던지..”

“달래주기만 했어?”

“자기가 먹던 밥그릇에 카레를 쓱쓱 비벼서 네 입에 넣어줬지. 나한테 또 혼날까 봐 당근이랑 양파는 본인 입에 털어 넣으면서.”

“엄마가 그걸 그냥 지켜만 봤다고?, 막 뭐 어떻게 한 거 아니지?”

“뭘 어떻게 해. 하도 기가 차서 웃었지.”

“아빠는 가만히 있었어?”

“가만히 있었겠어?, 아주 눈에서 광선을 뿜더라. 그날 네 아빠한테 나는 새끼 밥그릇 뺏어간 나쁜 아줌마로밖에 안 보였을 거야.”

엄마가 아니라 계모네, 계모.

“얘가 말하는 것 좀 봐. 너도 나중에 너랑 쏙 닮은 자식새끼 낳아봐. 네가 나보다 더 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거다.”

“그럴지도 모르겠다.”

네 아빠는 말이야, 네 언니랑 너만 있으면 무서울 게 없는 사람이었어니들이 싫어하면 같이 싫어해주고, 좋아하면 더 좋아해 주는 사람이었고. 엄마가 볼 때는 아빠가 은영이랑 너를 키우면서 정말 많은 희생을 해왔다고 생각해. 아빠는 왜 그걸 희생이라고 하냐면서 화를 냈지만.., 그러면서 그러더라. 그건 희생이 아니라 사랑이라고. 참 대단한 사람이야, 네 아빠.”

“희생은 엄마도 많이 했잖아. 아빠는 사랑. 엄마는 희생. 어때?, 이러면 공평하지?”


갑자기 선영은 아버지의 커다란 손을 꼭 붙들고 고깃집에 갔던 날이 떠올랐다.


서로 먼저 먹겠다고 겁 없이 불판으로 덤벼드는 어린 은영과 선영을 따끔하게 혼내던 어머니와 왼손으로는 어머니를 지하고, 오른손으로는 고기가 타지 않게 정성껏 뒤집던 아버지의 모습 또렷하게 되살아났다. 된장국에 밥을 말아 드시던 아버지도 분명 고기가 먹고 싶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갔다. 그때의 아버지는 지금처럼 어린 딸들을 배불리 먹이는 것을 희생이 아닌 사랑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철딱서니 없던 어린 자매는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알 리가 없었다. 그저 바닥이 훤히 드러난 불판을 두드리며 떼를 쓸 뿐이었다. 멋쩍게 웃어 보이는 아버지의 마음속을 훤히 꿰뚫고 있던 어머니는 매번 아무렇지 않게 자신을 희생하는 아버지의 행동에 무척이나 속이 상했다. 그날따라 은영과 선영은 어째서인지 평소보다 더욱 심한 꾸지람을 들어야 했는지 알지 못했다.


은영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입시를 무사히 통과했을 때도 그랬다. 예쁘고 비싼 가방을 선물 받은 은영이 마냥 부러웠던 선영은 은영과 똑같은 가방을 사달라고 아버지에게 울며불며 떼를 썼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잔소리를 들을 것을 알면서도 선영의 손을 잡고 백화점에 갔다. 은영의 가방과 똑같지는 않았지만 선영의 마음에 쏙 드는 가방을 선영의 품에 안겨 주었다. 단지 선영은 예쁘고 비싼 가방을 선물 받았던 행복한 추억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 행복한 추억 속에는 아버지의 낡고 허름한 코트는 저장되어있지 않았다. 아버지 본인 역시 그 코트가 좋아서 겨울이 올 때마다 그 코트를 꺼내 입었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마저도 아버지 당신의 희생이었을까. 아니면 입버릇처럼 말하던 아버지 당신만의 사랑이었을까.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선영이 핼쑥해진 아버지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우리 아빠.., 언제 이렇게 늙었데?”

“나이가 몇인데, 너는 뭐 아직도 꼬맹인 줄 아니?”

“그러게.

“엄마 잠 다 깼으니까, 이제 그만 가봐.”

“엄마 혼자 두고 어떻게 가.”

“갑자기 오는 바람에 아무것도 못 챙겨 왔어. 필요한 거 생각나면 말해줄 테니까, 내일 그거나 챙겨 와. 빨래도 하다 말고 왔으니까 좀 널어놓고.”

“정말 혼자 있어도 괜찮겠어?”

“왜?, 아빠랑 단둘이 있겠다니까 질투 나?, 그럼 평소에 잘했어야지.”

“엄마도 참.

“됐으니까 얼른 가. 엄마도 좀 쉬게.”

뭐, 엄마가 가라고 했으니까 진짜 가야겠다.”

“언제부터 그렇게 말을 잘 들으셨을까, 우리 막내딸은.”


선영은 겉옷과 가방을 챙긴 후 병실을 나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주차장으로 가는 길에 부재중으로 통화목록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지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돼?”

“병원이야. 아빠가 아침에 엄마랑 밥 먹으러 가다가 쓰러지셨어.”

정말?, 아빠는 좀 어떠셔?, 병원에서는 뭐래?, 괜찮은 거래?”

“잘은 모르겠는데, 또 검사받아야 된데.”

“오늘 병원에 계속 있는 거야?”

“그러려고 했는데 오늘은 일단 집으로 가려고.”

“나 아까 복지관 다녀오는 길에 너네 집에 갔었어. 하도 연락이 안 돼서.”

“그랬구나. 지금은 어디야?”

“아직 너네 집 근처야.”

“왜?, 집에 가서 좀 쉬지. 

“왜긴 왜야. 너 보고 가려고 했지.

“오늘 너무 울었더니 기운이 하나도 없다..”

“선영아.

“응?”

“오늘 나랑 같이 잘까?, 내일 병원도 같이 가.”

“그래 줄래?”

“당연하지.”

“고마워 지수야. 조금만 기다려. 금방 갈게.”


선영은 주차장에 세워두었던 차 올 시동을 걸었다. 안전벨트를 매고 호흡을 가다듬어 보았지만 여전히 심장은 빠르게 뛰고 있었다. 룸미러를 조정하던 선영은 룸미러에 비친 가련해 보이는 자신의 얼굴과 맞닥뜨렸다. 그 순간 선영의 눈가에는 가냘픈 눈물이 번지기 시작했다.


두 번 다시 지수에게 기대지 말아야겠다는 단호함으로 정완과의 이별을 결심했지만 지금 선영은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 누군가가 열 번 정도 차가울 때 한 번씩은 따듯했던 정완인지, 언제나 현실적이지만 최대한 선영의 입장을 배려해주는 지수인지는 정확하지 않았다.


차를 몰 병원을 나선 지 20분 정도 지났을 무렵, 선영은 자신의 집 앞 계단에 앉아있는 지수를 발견했다.


“미안, 오래 기다렸지?”

“얼른 들어가자. 춥다.”


선영은 주차를 마치고 차에서 내렸다. 선영이 차에서 내리는 것을 확인한 지수는 앞장서서 선영의 집으로 들어가려 했다. 바로 그때, 콧등이 갛게 달아오른 선영이 울먹이며 계단을 오르던 지수의 소맷자락을 움켜쥐었다.


“지수야, 나 좀 안아주면 안 돼?, 나.., 너무 힘들어. 너무 힘들어 죽겠어 지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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