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7) 잃어버린 시간. 선택은 각자의 몫.
episode 7.
지수는 당연하다는 듯 말없이 선영을 따듯하게 안아주었다. 지수의 품에 안긴 선영은 들숨만을 삼켜가며 마른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더 이상 울지 않겠다던 선영의 다짐은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선영은 연신 어깨를 들썩이면서도 끝까지 울음소리를 참아내려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선영이 참아낼 수 있는 임계점을 넘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던 지수는 선영을 나무라기는커녕, 지금 선영이 느끼고 있는 감정에 충실하라는 듯 선영의 등을 가볍게 쓸어내주기만 할 뿐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지수의 품에서 가까스로 얼굴을 땐 선영이 지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나, 정완이 보고 싶어. 정완이가 너무너무 보고 싶어 지수야.”
“보고 싶으면 보러 가면 되지.”
“내가 그럴 자격이 있을까?”
“정완이도 지금 속이 말이 아닐 거야. 너도 놓치고 큰 건수도 놓쳐버렸으니까.”
“큰 건수?”
“응. 이번에 곡 작업 들어온 거. 아주 망하려고 작정했나 보던데?”
“망하려고 작정하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갓 데뷔하는 걸그룹이 부를 노래에 이별가사가 웬 말이니. 그것도 쉬어 꼬부라진 이별 얘기가 가당키나 하겠냐고. 뭐 아무튼, 요즘 작업실에만 틀어박혀있는 모양이야.”
“정완이도 많이 힘들겠다..”
“정완이 보고 싶어?”
“아니야, 그냥 해본 말이야..”
“보고 싶으면 가서 보기만 하고 오자. 둘이 오붓하게 데이트하라고는 안 할 테니까, 보고 싶으면 가서 보자. 너 그럴 자격 있어.”
“나, 눈 많이 부었지?, 화장도 다 지워졌네..”
“선영아. 지금 소개팅 아니거든?, 잠깐만 보고 오자.”
“응.., 지수야. 혹시 만약에, 내가 정완이한테 달려가려고 하거든 말려줄 수 있지?”
“당연하지. 그러려고 같이 가자는 거 아니겠니?”
선영은 그날 이후 자신과 정완 사이에 더 이상 설렘이나 두근거림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완을 만나러 가는 지금, 선영의 심장을 휘감고 있는 모든 세포에는 터질듯한 설렘으로 가득 차 있었다. 보고 싶다는 단순한 충동이 빚은 일이었지만 여전히 자신에게 있어 정완이라는 존재는 언제나 늘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정완의 사무실 건너편 상가 앞에 차를 댄 선영은 옷매무새를 고치고 오늘따라 유난히 말을 듣지 않는 머리카락을 몇 번이고 쓸어 넘겼다. 지수는 그런 선영의 행동을 무시한 채 재빨리 사무실의 내부부터 살피기 시작했다. 지수가 커다란 통유리를 훑으며 천천히 시선을 옮기던 그때, 정완의 모습이 포착되었다.
같은 시각, 정완은 경미에게 켈리그라피를 배우고 있었다. 경미는 정완의 옆에 바싹 붙어 앉아 정완과 비슷한 자세를 취하고 정완이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폰트만을 골라 시범을 보이고 있었다.
“이렇게 획이 끝나는 부분에서 살짝 힘을 뺀다는 느낌으로 펜 끝을 들어주면 돼요.”
“이렇게?”
“네. 다른 것보다 이게 제일 쉽죠?”
“다른 것도 어렵지는 않은데, 왠지 나는 이 글씨가 마음에 든다.”
“오빠는 참 신기해요.”
“뭐가?”
“볼 때마다 느끼는 건데요, 오빠는 어떤 일에도 적응하는 속도가 남다른 것 같아요.”
“그래 보여?, 하긴, 아무 데나 던져놓아도 잘 살 거라는 말은 귀가 닳도록 들어봤지.”
“진짜 그럴 것 같아요.”
“농담이라도 그런 말은 하지 마.”
“왜요?”
“실제로 그런 상황이 닥치면 외로워서 금방 죽고 말 테니까.”
“오빠는 외로움을 많이 타는 성격인가 봐요?”
“응. 다른 건 다 참아도 외로운 건 못 참겠더라고.”
“어째서요?, 좌절, 실망, 배신, 이런 최악인 감정들도 있잖아요.”
“사람마다 싫어하는 감정은 제각각이겠지만 그래도 나는 세상에서 외로움이 제일 싫어.”
“그렇구나..”
“경미야.”
“네?”
“뭐하나 물어봐도 돼?”
“어떤 거요?”
“주말마다 뭐해?”
“그냥 집에서 쉬죠. 근데 그게 왜 궁금해요?”
“친구들 만나러 간다는 얘기를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거 같아서.”
“그냥 혼자가 편해요. 친구들은 별로 만나고 싶지 않아요.”
“특이하다. 참 특이해.”
“또 그 소리예요?”
“내가 참견할 일은 아니지만, 오랜만에 친구들 만나서 놀면 스트레스가 좀 풀리지 않을까 싶어서. 요즘 너 정신없이 바쁘잖아.”
“스트레스요?, 풀리기는커녕 더 받을걸요?”
“어째서?, 나는 친구들을 만나기만 해도 스트레스가 저절로 풀리던데. 요즘엔 친구들을 만나고 싶어도 그게 내 뜻대로 되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먼저 드니까 그게 좀 그래. 너도 언젠가 내 나이가 돼보면 알게 될 거야. 그래서 그런지 한편으로는 조금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어. 젊다는 건 그때만 누릴 수 있는 특권 같은 건데 말이야.”
“특권이요?, 그게 무슨 특권이에요?”
“나는 어쩌다 한 번씩 친구들을 만나게 되면 예전처럼 밤새 술 마시면서 본인들 위주로 얘기하던 그때마저 그리워지곤 해. 우연히 친구들이 많이 모인 자리에 가더라도 너나 할 거 없이 내일 해야 할 일부터 걱정하고, 집에 있는 와이프의 눈치를 보고, 그러다 보면 서로들 하고 싶은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슬금슬금 자리를 뜨는 게 다반사야. 그러니까 경미도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지금 누릴 수 있을 때 실컷 누리도록 해. 지금이라는 시간은 아무리 원하고 바래도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으니까.”
“근데 오빠, 오빠도 만나기 싫었던 친구들이 있었어요?”
“왜 없었겠어?, 그때는 진짜 만나기 싫었는데 한 번씩 뭐하고 사는지 궁금해지는 친구도 있지. 잘 살고 있나, 결혼은 했나, 우연히 길에서 마주치면 알아볼 수는 있나..”
“그게 왜 궁금해요?”
“뭐랄까, 그때는 일종의 자존심 같은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야.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딱 부러지게 인연을 끊어내지 못하고 애매한 상황을 끌고 갔던 건 자존심의 문제가 아닌데 말이야. 싫어하는 친구와의 관계를 개선하려는 노력도 자존심이 상하는 기분이었고, 상처를 받든 말든 칼같이 잘라내는 것도 자존심이 상하는 기분이었거든. 싫어하는 친구 때문에 내가 어떤 행위를 실행에 옮기는 것 자체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었으니까. 근데 지금은 그때 그러지 못했던 게 약간은 후회가 돼.”
“후회요?,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할까요?”
“확답은 못하겠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싫어했던 친구들마저도 가끔 한 번씩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꽤 있지 않을까?, 나처럼.”
“그럼 저, 오빠 말 한번 믿어볼까요?”
“믿어봐.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확실하게 바로잡고, 그럼에도 더 이상 관계가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면 똑 부러지게 잘라내면 되지 뭐가 걱정이야?, 경미야. 일부러 피한다고 해서 있던 일이 없어지는 건 아니야. 아무리 네가 그 친구들을 싫어해도 그때의 추억, 그때의 시간 속에는 언제나 그들이 남아있다고.”
“오빠랑 얘기하면 마음이 참 편해져요.”
“그렇다면 다행이고. 그나저나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그러게요.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요?”
“그러자. 어차피 내일은 쉬니까, 집에 가서 원 없이 잠이나 자야겠다.”
“치.., 그럼 오늘은 밥 안 사줄 거예요?”
“맞다, 수강료 내야지. 근데 이 시간에 뭘 먹으러 가야 되나..”
“피곤하면 그냥 집에 가도 돼요.”
“배고파?, 배고프면 울잖아 너.”
“안 그래도 지금 눈물이 막 쏟아질 참이었어요.”
“특이하다, 특이해. 그래 밥 먹고 가자. 나도 출출하다.”
“진짜요?, 그럼 얼른 정리하고 나가요.”
같은 시각, 지수와 선영은 차에서 내릴 생각도 하지 못한 채, 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정완과 경미를 지켜만 볼 뿐이었다. 두 사람이 나누고 있는 대화의 내용은 알 수 없었으나 예상했던 것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광경이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양손으로 운전대를 잡은 채 딱딱하게 굳어있는 선영을 대신해 지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내가 전에 얘기했지?, 직접 눈으로 본 소감이 어때?”
“설마.., 아니겠지. 우리가 잘못 본걸 거야.”
“그랬으면 좋겠다. 내 눈이 이상한 거라면 진짜 좋겠다.”
“원래 둘이 저렇게 친했어?”
“그걸 내가 어떻게 아니?, 나보다 네가 더 많이 봤으면서.”
“몰랐어. 저 정도로 친한 줄은 전혀 몰랐었다고..”
“위기감이 조금 느껴지기나 하니?”
“아닐 거야.., 우리 정완이가 그럴 리가 없어. 아니야, 절대 그렇지 않아. 분명,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걸 거야.”
“우리 정완이?, 오해?, 우리 정완이가 아니라 남의 정완이가 될지도 모르는 판국에 답답한 소리 하고 있네. 선영이 너, 지금 저걸 보고도 가만히 있을 작정이야?, 눈뜨고 코 베일 거냐고.”
“그럼 어떡해. 먼저 헤어지자고 한건 나인데.”
“내리자. 지금 당장 내려서 확인하자. 현장을 잡았을 때 확실히 해두자고.”
“아니야, 그러지 마 지수야. 오늘은 그냥 가자.”
“왜 그냥 가?, 우리가 뭐 잘못했니?, 물증이 있는데 왜 심증을 무시하려고 해?”
“일단 가자. 나중에 내가 따로 확인해 볼게. 정완이 잘 있는 거 봤으니까 됐어.”
“네가 알아서 하겠다고 해놓고 알아서 한 게 뭐가 있는데?”
“지금은 아닌 것 같아. 미리 약속하고 온 것도 아닌데 뭘..”
“네가 못하겠으면 내가 해준다니까?, 그러려고 같이 온 거잖아.”
“내가 정완이한테 달려가면 말려달라고 한 거지, 난처하게 만들어달라고는 안 했어.”
“이게 왜 난처한 건데?, 네가 잘못한 거 아니잖아. 억울하지도 않아?, 화도 안나냐고.”
“잘못한 것도 없고, 억울하지도 않아. 그리고 화도 안 나니까 그만하고 가자.”
“선영이 너, 오늘 저 여자 머리채 안 잡은 거 후회 안 할 자신 있어?”
“안 해. 후회 안 하니까 그만 가자. 머리 아프다.”
“나중에 아주 질질 짜기만 해.”
차를 돌려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던 선영과 지수는 이윽고 선영의 집에 도착했다. 힘이 빠진 선영이 현관문을 당기자 고작 하루 동안 비워져 있던 집안에서는 쓸쓸함이 쏟아져 나왔다. 선영의 집에 들어온 지수는 소파에 앉아 TV를 켰다. 선영은 어머니가 당부했던 세탁기를 다시 돌리고 창문을 활짝 열어 환기를 시켰다.
창문을 열고 부쩍이나 냉랭해진 바람에 한껏 건조해진 눈을 연속으로 깜빡이던 선영이 말했다.
“추워졌다. 그치?”
“그러게. 가을 냄새난다.”
“벌써 가을이라니, 시간 참 빠르다.”
“선영아, 나 먼저 씻어도 돼?”
“그래, 나는 부엌 좀 정리할게. 필요한 거 있으면 불러.”
“알았어. 그나저나 너희 집은 진짜 옛날 그대로다.”
선영의 집을 한 바퀴 둘러보던 지수는 익숙한 걸음으로 화장실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지수는 거실의 벽을 장식하고 있는 은영과 선영의 미소가 잔뜩 담긴 커다란 액자에서 아주 조금 세월의 흔적을 느낄 뿐이었다.
자상한 아버지와 살림꾼 어머니, 그리고 반듯한 언니. 지수는 선영이 무엇 하나 모자랄 것 없는 가정에서 자랐다고 생각했다.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선영의 집에서 묵기로 했던 어느 날, 지수는 선영의 고민을 들어주며 현실적인 조언을 해주고 있었다. 10대 소녀의 평범한 고민이라고 여기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던 지수는 선영의 마지막 고민을 들어주다 문득 의아함을 느꼈다. 외로움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선영의 입에서 외로움이라는 낯선 단어가 불쑥 튀어나왔기 때문이었다. 선영의 고민을 진중하게 듣고 있던 지수 역시 자신이 느끼고 있던 외로움에 대하여 진솔한 태도로 선영과 대화를 나누었고, 그 외로움이라는 낯선 단어는 선영과 지수의 사이를 더욱 돈독하게 만들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 날이후 선영은 지수에게 가슴속에 싸매어 놓은 자신만의 비밀 일기장을 한 장씩 보여주기 시작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외로움이 존재했다. 그 외로움을 표현하는 방식은 각기 달랐지만 공통분모는 있었다. 사람에게는 반드시 누군가가 필요하다는 것. 외로움을 달래줄 사람, 혹은 그 외로움을 나눌 수 있는 사람. 즉, 자신이 존재하고 있는 이유를 알아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사람이 혼자서 세상을 살아가기에는 무수히 많은 제약이 따르는 것처럼 사람은 사람에게 필수불가결과도 같은 존재였다.
“선영아. 나, 다 씻었어.”
“방에 갈아입을 옷 꺼내왔어.”
“고마워.”
“지수야. 근데 너, 병준 씨랑 언제까지 친구로 지낼 거야?”
“무슨 소리야, 뜬금없이.”
“병준 씨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내가 보기에는 서로 좋아하는 게 확실해 보이는데..”
“나, 차였다고. 너도 알잖아.”
“그건 옛날 얘기잖아. 병준 씨나 너나 지금 하고 있는 행동을 보면 누가 봐도 애인이라고 생각할걸?”
“솔직히 나도 감은 좀 오는데, 섣불리 굴었다가는 그때처럼 될까 봐 겁이나.”
“누가 봐도 병준 씨 눈에서 하트가 뿅뿅 나오는 게 보이는데.”
“알고 싶다. 그 남자의 속마음을..”
“궁금하면 물어보면 되잖아. 도대체 뭐가 문제야?”
“남이 될까 봐.., 겨우겨우 유지하고 있는 이 평화가 깨져 버릴까 봐.., 그게 무서워.”
“네가 무서운 게 있다니..”
“선영아. 너도 솔직히 정완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아?”
“나도 대충은 보이는데, 보이지 않는 곳까지 들여다보고 싶긴 해.”
“그래?, 그럼 내가 작전 한번 짜 볼까?”
“무슨 작전?”
“작전명은 서로의 속마음을 찾아 떠나는 여행. 어때?”
“여행 같은 소리 하네. 내가 지금 어디 놀러 다닐 정신이니?”
“지금 말고. 적절한 시기가 오면 그때 가자는 거지.”
“근데 지수야. 작전명 치고는 너무 허술한 거 아니니?”
“지금 그게 중요해?”
“모르겠다. 아무튼 우리 아빠 퇴원하거든 다시 얘기하자.”
“있잖아, 나는 선영이 너랑 정완이도 궁금하고 병준이도 궁금하지만, 진짜 궁금한 사람이 한 명 더 있어.”
“누구?, 또 데려갈 사람이 있어?”
“아무튼, 꼭 가는 거다?”
선영은 지수의 말에 딴청을 피우며 환기를 위해 열어두었던 창문을 닫고 세탁기에서 빨래를 꺼내 건조대에 널었다. 그리고는 한껏 신이 나서 휴대폰을 만지고 있는 지수의 시선을 피해 화장실로 향했다.
기발한 생각이 떠오른 지수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병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병준아, 자?”
“아직. 선영 씨는 만났어?”
“응. 아버지가 쓰러지셔서 하루 종일 병원에 있었데.”
“많이 편찮으신 거야?”
“자세한 건 모르겠고, 검사 한 번 더 받으셔야 한데.”
“그렇구나. 밥은 먹었고?”
“아니. 선영이 씻고 나오면 치맥이나 할까 생각 중이야.”
“이 시간에?, 그래, 많이 먹어. 그렇게 먹다 보면 어느새 혼자 일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 너?”
“악담을 해라 아주.”
“발끈하기는.., 그나저나 그 얘기하려고 전화한 거야?, 아니면 내가 출동해야 될 일이라도 생겼어?”
“출동?, 웃겨 아주.”
“맞지, 뭘. 5분 대기조잖아. 출동 신고 5분 안에 도착한다는 슬로건. 어때?, 마음에 들어?”
“이상한 소리 집어치우고, 전에 너 사진 찍었던 곳 중에 네덜란드 풍차처럼 생긴 펜션, 기억나?”
“응, 기억나.”
“거기 어디야?”
“그건 갑자기 왜?”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어디야 거기?”
“강원도 인제였나, 정선이었나. 아무튼 강원도.”
“강원도?, 가는데 얼마나 걸리지?”
“뭣 때문에 그러는데?, 이유나 좀 알자.”
“됐고, 나중에 또 물어볼 거니까 기억해놓고 있어.”
“나 원 참.., 아주 막무가내라니까.”
“그래서, 싫어?”
“누가 싫데?, 그게 네 매력이라고 말하려던 참이었어.”
“잘 자.”
병준의 마지막 말에 지수는 괜스레 가슴이 콩닥거렸다. 통화를 마치고 거울을 들여다본 지수는 자신의 얼굴에 수줍게 피어난 연분홍빛의 꽃을 보고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이 또한 지수가 생각하고 있는 몇 가지 심증 중에 하나일 것이라고 확신했지만 지수의 가슴속에는 그날의 충격이 아직도 가시지 않은 모양이었다.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지면 수면 위의 파장이 물러가고 다시금 잔잔해질 때까지 오롯이 기다릴 수 있을까. 2년 전 그때처럼 거침없이 밀려드는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도 괜찮은 것일까. 또다시 거절을 당하면 자신이 받은 마음의 상처를 홀로 온전히 추스를 수 있을까. 사랑이라는 감정과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잠시 공존하며 잠시 지수의 발목을 붙잡는가 싶었지만 지수의 호기심은 이미 브레이크가 고장나버린 상태였다.
지수는 머릿속에 커다란 도화지를 펼쳐놓고 천천히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산으로 빙 둘러져있는 풍차 모양의 펜션을 그렸고 정완과 선영을 그려 넣었다. 그 옆으로 병준과 자신을 그린 지수는 마지막으로 남은 한 사람. 경미를 어떻게 그려 넣어야 자연스러운 그림이 될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샤워를 마친 선영이 방문을 열고 들어오자 지수는 잠시 생각을 접어두고 선영에게 말했다.
“선영아. 우리 오랜만에 치맥이나 먹을까?”
“치맥?, 맛있겠다. 나 오늘 한 끼도 못 먹었어.”
“두 마리 다 먹을 수 있을까?, 맥주는 얼마나 시켜야 되지?”
“고민은 나중에 하고, 일단 주문부터 하자.”
경미와 늦은 저녁식사를 마친 정완은 경미를 바래다주고 집으로 돌아왔다. 샤워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은 정완은 책상에 앉아 A4용지를 꺼낸 후, 오늘 배운 켈리그라피를 나열했다. 정성스레 글씨를 쓰다 보니 집중력이 향상되는 기분이 들었다. 오래전 그날처럼 정완은 본격적으로 선영에게 주었던 대자보 같은 편지를 만들 계획을 세웠다. 선영과 헤어지고 난 후부터 줄곧 느끼고 있던 감정들을 자신이 좋아하는 노랫말을 빌려 선영에게 전하고자 했다. 하지만 막상 편지의 내용을 쓰려고 하니 펜의 색상은 어떤 것으로 해야 어울릴지, 문장을 짧게 쓰는 것이 좋을지 길게 쓰는 것이 좋을지, 종이의 질감은 그냥 반들반들한 이면지면 되는 것인지, 시답잖은 고민들로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말았다. 결국, 제목조차 적지 못했던 정완은 구색을 갖추는 것 또한 선영을 위하는 일이라 생각하고 펜의 뚜껑을 닫았다.
요 며칠 작업실에서만 생활했던 터라 온몸이 찌뿌둥했던 정완은 눈꺼풀이 무거워짐을 느끼자 짧은 탄성을 뱉어내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눈꺼풀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정완은 침대에 누워 푹신한 베개를 힘껏 끌어안고 잠을 청했다. 부디 오늘 밤은 편히 잠들 수 있기를, 부디 개운한 기분으로 아침을 맞이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다음날. 이른 아침부터 선영의 휴대폰이 울려댔다. 모처럼 단잠에 빠져있던 선영은 화들짝 놀라며 잠에서 깼다.
“선영아, 언니야.”
“응.., 벌써 도착했어?”
“아니, 이제 출발하려고.”
“도착하면 전화하지..”
“엄마가 전화를 안 받아서. 혹시 뭐 챙겨 오라고 한 거 있니?”
“아빠 속옷이랑 칫솔. 그리고 수건이랑, 또 뭐였더라..”
“우리 집에 없는 것들 뿐이네.”
“뭐야.., 잘 자고 있었는데.”
“미안. 오늘 태호도 같이 갈 거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그럼 이따 봐.”
선영은 전화를 끊고 시계를 쳐다보았다. 일요일 아침 8시. 조금 더 자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선영은 다시 침대에 눕는 것을 포기하고 화장실로 갔다. 세수를 하고, 이를 닦고, 먹다 남은 치킨과 맥주를 살그머니 치웠다. 소파에서 자고 있는 지수가 깨지 않게 조심히, 그리고 조용히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했다. 선영은 혹시나 모를 빨랫감이 더 있지는 않을까 싶은 생각에 집안 구석구석을 샅샅이 살펴봤다. 그리고는 부엌으로 가서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아침식사를 만들 준비를 했다. 가스레인지에 불을 켜고 프라이팬을 올려둔 그때, 어젯밤 어머니가 부르는 대로 적어두었던 쪽지가 생각났다.
선영은 한 손에 쪽지를 쥐고 어머니가 부탁한 물건을 하나씩 찾기 시작했다. 집안 곳곳을 누비며 쪽지 속의 물건들을 찾아 나선 선영은 손이 닿는 곳마다 아버지의 흔적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최근까지도 아버지의 빈자리를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었던 선영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버지의 부재를 떠올려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선영의 눈에는 금세 눈물이 차올랐다. 한바탕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던 그때, 잠에서 깬 지수가 선영에게 말했다.
“선영아, 이거 무슨 냄새야?, 탄내가 심하게 나는데?”
“응?, 무슨 냄새?”
프라이팬에 불을 켜놓은 것을 잊고 있던 선영은 지수가 눈치채지 못하게 황급히 뒤를 돌아 가스레인지의 불을 끄고 환풍기를 켰다. 하지만 이를 모를 리 없던 지수는 거실의 창문을 열며 구시렁거렸다.
“연기 좀 봐. 불이라도 나면 어쩔뻔했어. ”
“내 정신도 참..”
“나이 서른에 계란 프라이 하나 제대로 못해서 어디 시집이나 가겠니?”
“그게 아니라, 잠시 다른 생각 좀 하느라고..”
식탁 앞에 멀뚱히 서있던 선영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눈물을 쏟고 말았다. 남아있는 창문을 마저 열고 있던 지수는 난데없이 울어버리는 선영의 모습에 적잖이 당황했다. 황급히 선영에게 다가가던 그때, 지수의 발끝에 무언가 채였다. 지수가 내려다본 그곳에는 아버지의 물건이 가득 담겨있는 가방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제야 지수는 이른 아침부터 선영이 눈물을 쏟고 있는 이유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탁했던 실내의 공기가 물러가자 지수는 천천히 창문을 닫았다. 그리고는 식탁의자에 앉아 서럽게 울고 있는 선영에게 다가갔다.
“미안해 선영아. 내가 미안해.”
“아니야. 나이 서른에 계란 프라이도 못하는 내가 너무 바보 같아서 그래.”
“농담인 거 알잖아. 네 마음 다 아니까, 이제 그만 뚝 그쳐. 내가 잘못했어.”
“지수야, 우리 아빠.., 정말 괜찮은 거겠지?”
“당연하지. 확정된 건 아무것도 없잖아.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괜찮을 거야.”
울음을 그친 선영이 화장실로 들어가 세수를 하는 동안 지수는 선영을 대신해 데워진 된장국을 그릇에 담고, 튀긴 듯 잘 익혀진 계란 프라이를 접시에 담았다. 간단하게 아침식사를 마친 지수와 선영은 은영의 전화를 받고는 병원으로 갈 채비를 했다.
병원에 도착한 선영은 가장 먼저 자신을 향해 밝게 웃어 보이는 아버지를 보고는 한달음에 달려가 아버지를 안았다. 어머니는 은영과 태호에게 과일을 깎아주고 있었다. 선영의 뒤를 따라 들어온 지수를 본 선영의 가족들은 하나같이 지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지난밤, 무거운 침묵과 차가운 정적만이 가득했던 병실은 어느새 생기가 넘치는 웃음소리와 따사로이 내리쬐는 햇살로 가득 차 있었다.
“언니, 형부는?”
“같이 올라왔다가, 일이 있어서 먼저 갔어.”
“일요일인데?”
“네 형부 요즘 주말도 없이 일만 해.”
“그렇구나. 태호야, 이모 오랜만이지?”
“이모 살 빠졌어요?, 우리 이모 팔 좀 봐.”
“태호 너, 이다음에 사회생활 진짜 잘하겠다.”
“사회생활요?”
“하긴, 네 엄마보다 이모가 용돈은 참 많이 줬지. 태호야, 사람은 줄을 잘 서야 돼. 알겠지?”
“얘 좀 봐. 우리 태호한테 이상한 거 가르치지 마.”
“엄마. 줄을 잘 서야 된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
“엄마 말 잘 들으라는 뜻이야.”
“영화를 찍어라 영화를. 그만들 하고 이리 와서 과일이나 먹어.”
“어머니는 참 여전하시네요. 예나 지금이나 깔끔하게 한방에 정리!”
“지수 너도 쓸데없는 소리 말고 여기 앉아서 과일이나 먹어.”
은영과 태호, 지수와 어머니는 선영이 사온 빵과 간식거리를 함께 나누어 먹었다. 금식 중이라는 팻말이 유난히 거슬렸던 선영은 침대맡에 걸터앉아 아버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아빠. 괜찮아?, 이제 안 아파?”
“우리 막내가 밤늦게까지 아빠 간호했다며?”
“내가 뭘.., 엄마가 다했지.”
“사랑하는 우리 딸. 많이 놀랬지?, 미안해.”
“아빠가 왜 미안해. 내가 미안하지.”
“그나저나 배고파 죽겠는데, 도대체 언제까지 금식을 하라는 거야.”
“어제 엄마한테 들었지?, 아빠 또 무슨 검사해야 된데.”
“그랬어?, 하라면 해야지. 너희들 걱정 안 시키려면 말 잘 들어야지.”
“얼른 퇴원해서 나랑 고기 먹으러 가자. 내가 소고기 사줄게.”
“아빠 소고기 좋아하는 거 어떻게 알았어?”
“어떤 계모가 그러던데, 나랑 아빠랑 식성이 똑같데. 나도 삼십 년 만에 처음 알았어.”
“우리 막내가 벌써 서른이야?, 언제 그렇게 나이를 먹었데.”
“그러게. 아빠도 나도 이제 많이 늙었다. 아, 언니랑 엄마도.”
선영은 아주 오랜만에 체증이 가시는 기분이었다. 이번 일을 계기삼아 별것 아닐 것 이라며 넘겨짚었던 일도 다시 한번 생각하고 되짚어보아야겠다는 다짐이 절로 드는 순간이었다. 선영의 가족들은 긴박하고 위급했던 순간이 지나가자 평소의 모습을 되찾아 갔다. 아버지의 환한 미소를 한참이나 바라보던 선영은 앞으로 들려올 소식이 부디 절망이 아닌 희망이기를, 앞으로 다가올 일들이 슬픔이 아닌 기쁨이기만을 가슴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