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후, 평소만큼의 기력을 되찾은 선영의 아버지는 조직검사와 초음파 검사 결과에 대한 설명을 듣기 위해 가족들과 함께 담당의사를 찾아갔다. 선영의 아버지와 가족들은 지금보다 면밀한 검사를 진행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담당의사의 소견을 수렴하고는 병원을 옮기기로 결정했다. 때마침 의료기기를 취급하는 형부의 지인으로부터 췌장암 쪽으로는 국내에서 상당한 권위를 가진 의사를 소개받았다. 지금보다 호전되는 상황을 기약하며 퇴원수속을 마친 아버지는 가족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선영의 아버지가 퇴원을 하던 날, 선영은 잔뜩 밀려있는 회사의 업무로 인해 아버지의 퇴원 소식을 전화로 들을 수밖에 없었다. 도무지 일에 집중할 수 없었던 선영은 사무실 책상에 멍하니 앉아 한숨만 쉬고 있었다.
그때, 같은 부서에서 근무하고 있는 부장이 다가와 선영에게 말했다.
“윤 팀장님. 아침부터 웬 한숨이에요?, 어울리지 않게.”
“안녕하세요 부장님. 요즘 여러 가지로 복잡한 일이 많아서요.”
“지난번에 부탁했던 서류는 아직 인가요?”
“아, 맞다. 죄송해요. 오늘 중으로 바로 제출할게요. 죄송합니다.”
“얼굴에 핏기도 없고, 웃음기도 사라지고..,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그래요?”
“아, 그게.., 아버지가 편찮으셨어요.”
“다치셨어요?”
“다친 건 아니에요. 오늘 퇴원하셨으니까, 걱정 안 하셔도 돼요.”
“다행이네요. 그나저나 요즘 하루 종일 멍하니 있는 우리 팀장님을 보니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에요.”
“죄송해요 부장님.”
“항상 생기 넘치던 팀장님이 요 근래 말도 없어지고 시무룩해 보이니까 직원들 사이에서 이런저런 말들이 오가던데.”
“그게 무슨..”
“남자 친구가 바람이 났다. 남자 친구한테 차였다. 뭐, 그런 소문이요. 그냥 소문일 뿐이죠?”
“..”
“소문이 아닌가 봐요?, 비밀 지킬 테니까 말해보세요.”
“그게..”
“괜찮아요. 나, 가벼운 사람 아니라는 거 팀장님도 알잖아요.”
“부장님, 저랑 커피 한 잔 하실래요?”
“업무시간에 농땡이 치고 싶은데, 공범이 필요하시다 이거죠?”
선영과 부장은 복도 끄트머리에 있는 휴게실로 이동했다. 선영은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양손에 들고 부장이 앉아있는 테이블 쪽으로 갔다. 선영이 건넨 커피를 받아 든 부장이 선영에게 말했다.
“윤 팀장님, 언니 있다고 했죠?, 그냥 편하게 말해 봐요. 언니라고 생각하고.”
커피가 담겨있는 종이컵을 멀뚱히 쳐다보던 선영이 고심 끝에 입을 열었다.
“실은, 남자 친구랑 헤어진 지 석 달쯤 됐어요.”
“그 소문이 결국 사실이었네요. 뭣 때문에 헤어졌어요?”
“7년을 만난 서른 살의 커플이 가장 흔하게 부딪히는 문제 때문에요.”
“결혼?, 아니면 권태기?, 그것도 아니면..”
“결혼요. 종종 결혼 얘기하다가 싸운 적도 많았는데, 이번에는 제 뜻을 굽히기가 싫었어요. 굽힌다기보다 이게 맞는 건지, 틀린 건지 스스로도 좀 알아야겠다는 필요성이 간절해져서요.”
“각오를 단단히 한 모양이네요.”
“각오라고 하기는 좀.., 뭐 대단한 일이라고.., 그나저나 부장님은 어땠어요?, 남편분이랑 오래 만나셨잖아요.”
“나도 선영 씨랑 비슷하게 만났어요. 꽤 오래전 얘기지만.”
“남자 친구는 아기를 원하지 않아요. 저는 결혼을 하면 당연히 아기는 필수라고 생각하거든요.”
“아기요?, 선영 씨는 결혼식 올리면 곧장 아기부터 가질 생각이에요?”
“아무래도 나이가 나이니까요. 요즘은 혼수로 아기부터 만들고 결혼하는 사람들도 많잖아요.”
“남자 친구랑 확연히 다른 희망사항이라는 걸 알면서도요?, 그게 무리라는 것쯤은 선영 씨도 알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언젠가는 생길 거잖아요..”
“아직 결정되지 않은 일에 조바심을 낼 필요가 있을까요?”
“그래도 결혼하기 전에 이 부분만큼은 분명하게 매듭짓고 싶었어요. 결혼이라는 건 사랑한 시간을 연장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시간을 만들어가는 거라고 생각하니까요.”
“남자 친구분께 선영 씨의 생각을 똑바로 전달은 했고요?”
“어느 정도는요. 그만큼 얘기했으면 알아들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선영 씨. 마음은 생각만 한다고 전해지는 게 아니에요. 게다가 남자들은 정확하게 설명을 해주지 않으면 절대 알아듣지 못한다고요.”
“정완이는 다를 줄 알았어요. 7년을 함께 보내는 동안 알아서 잘 해왔으니까,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알아줄 줄 알았어요.”
“이름이 정완이에요?, 그래요. 정완 씨가 선영 씨랑 7년을 보내는 동안 알아서 잘 해왔다고 했죠?”
“네, 대부분은요.”
“그런 정완 씨가 결혼에 대해서 아무 생각도 없이 지내왔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도 결혼을 하는데 아기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건, 결혼할 생각이 없다는 것과 같은 이치 아니에요? ”
“그럴 리가요. 정완 씨도 다방면에서 열심히 노력하는 중 일 거예요. 선영 씨가 모르는 곳에서 열심히, 아주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는 확신이 드는걸요?”
“결혼에 관해서도요?”
“물론이죠. 선영 씨 말만 들어도 배려하는 마음이 느껴지는걸요.”
“어떤 부분에서요?”
“7년을 보내는 동안 알아서 잘 해왔다고 말해준 건 선영 씨 본인이잖아요?” “네..”
“그렇다면 문제는 아기밖에 없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 정완 씨의 생각을 들어보려고 했던 적은 있어요?”
“아니요..”
“정완 씨가 아기를 원치 않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결혼을 미루고 싶다거나, 결혼하기 싫다는 핑계는 아니고요?”
“절대요. 선영 씨가 먼저 정완 씨에게 진심을 전해 보세요. 아프지 않게 두드리다 보면 정완 씨도 기꺼이 응답해 줄 테니까요.”
“정완이도 7년 동안 같은 이유로 같은 다툼이 자꾸 반복되는 걸 모를 리 없을 텐데..”
“선영 씨. 아까도 말했지만 생각만으로는 결코 진심을 전할 수 없어요.”
“그럼, 제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선영 씨가 먼저 진심을 전해 보세요. 대신 아프지 않게 살살요. 아프게 두드리면 진심이 닿기도 전에 지금과 같은 결과만 초래할 뿐이니까요.”
매번 결혼 이야기로 정완과 다투었을 때 선영은 단 한 번도 정완의 진심이 무엇인지 그 속내를 조금이라도 헤아려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마음처럼 움직여주지 않는 정완 때문에 서운해서 울었고 속이 상해서 울었을 뿐이었다.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지만 다른 꿈을 꾸고 있다고만 생각했다. 부장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듣던 선영은 최소한 한 번쯤은 정완이 품고 있는 의중이 과연 무엇인지 반드시 알아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아참, 선영 씨. 나도 선영 씨만큼 남편이랑 오래 만났다고 했죠?”
“네.”
“내가 결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딱히 이렇다 할 계획 같은 건 없었어요. 결혼하고 같이 살다 보니까 첫애가 태어났고, 살아가다 보니까 둘째가 태어났어요. 분명히 머릿속에는 아무 계획도 없었는데, 지금은 마치 철저하게 계획했던 일들처럼 신랑이나 나나, 조금의 위화감이나 거부감 없이 잘 살고 있어요.”
“정말요?”
“선영 씨, 오밀조밀 계획을 세웠을 때 나타나는 부작용이 뭔지 알아요?”
“뭔데요?”
“계획대로 되지 않았을 때 관계가 틀어지는 거예요. 예정에 없던 일이었다며 자신을 책망하게 되고, 상대방을 원망하게 되니까요.”
“네..”
“결혼이라는 건 절대로 혼자서 할 수 없는 일이에요. 반드시 상대방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라고요. 그래서 필요한 게 조율이라는 거예요.”
“조율이요?”
“공존하고 상생하려면 어느 한쪽에게만 기대서도 안 되고, 어느 한쪽에게만 의지해서도 안 돼요. 그런 일이 생기기 전에 서로가 서로를 이해시켜주고 받아들여주는 과정이 바로 조율이에요.”
“아기 문제도 조율이 필요한 건가요?”
“당연하죠. 선영 씨, 인생을 살다 보면 자연스레 생기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죠?, 아기에 관한 문제도 마찬가지예요. 쉽게 생각해봐요. 흐르는 물 위에 내 몸을 맡기고 물이 흘러가는 방향대로 천천히 떠내려가는 방법도 썩 나쁘지만은 않아요.”
무심코 선영은 살아오는 동안 자신이 옳다고 주장해왔던 모든 일들이 어쩌면 잘못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떠내려가는 게 겁이 나면 정완 씨 붙들어요. 둘이 떠내려가다 보면 혼자 떠내려 올 때 보지 못했던 풍경도 보일 테고, 무섭게만 느껴졌던 물살도 즐길 수 있을 만큼의 여유가 생길 테니까요.”
“감사합니다 부장님, 덕분에 개운해진 기분이에요.”
“그건 그렇고, 부탁했던 서류는 오늘 안에 꼭 결재받으세요. 한 번은 실수지만 두 번은 고의니까요. 잘해봐요, 너무 조급해하지 말고.”
“명심할게요.”
“그럼 일하러 갑시다.”
“네, 부장님.”
선영의 얼굴에 잔뜩 드리 누워있던 어두움이 걷히자 부장은 선영에게 그만 자리로 돌아가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사무실로 돌아와 자리에 앉은 선영은 평소의 모습을 되찾고자 잔뜩 기합을 넣었다. 책상 위에 쌓여있던 서류더미들을 풀어헤치고 침착하게 검토하려던 그때,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던 조급함이 선영을 마구마구 괴롭히기 시작했다. 선영은 조급해하지 말라던 부장의 말을 떠올리며 최대한 침착함을 잃지 않으려 애를 썼다. 어떤 말이라도 의욕적으로 말하고 들을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에 휩싸인 선영은 오늘 일과를 마치면 곧장 정완을 찾아가기로 결심했다.
“팀장님!”
“응, 민아 씨.”
“우리, 점심 먹으러 가요.”
“한 것도 없는데 벌써 점심시간이네.”
“근데, 부장님이랑 무슨 얘기한 거예요?, 요즘 일 못한다고 정신교육받고 온 거예요?”
“정신교육?, 하기사,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나가자. 오늘 점심은 내가 살게.”
“그나저나 팀장님은 왜 결혼 안 해요?, 임자도 있으면서.”
“안 그래도 머리 아프니까 결혼 얘기는 좀 빼주라.”
“남들 결혼에는 그렇게 열정적이면서, 왜 본인 결혼은 뒷전이냐고요.”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는 말, 들어봤지?”
“비운의 웨딩플래너, 뭐 그런 건가요?”
“굶고 싶니?, 한마디만 더 해봐.”
“치사하게 지금 먹을 걸로 협박하는 거예요?”
비슷한 시각, 정완은 사무실 근처에 있는 문구점에 들러 두꺼운 골판지 몇 장과 붓 펜을 샀다. 그동안 정완은 경미에게 배웠던 켈리그라피 중 가장 마음에 들었던 글씨를 완벽하게 익히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오로지 선영에게 자신의 진심을 올곧이 전해주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전하고 싶은 말들이 가슴속에 켜켜이 쌓여만 가는 지금, 정완은 선영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최대한 그 일에 집중하고 몰두하기로 했다.
사무실에 도착해 경미와 인사를 나눈 정완은 경미가 건네는 커피를 받아 들고 작업실로 들어왔다. 책상에 앉자마자 정완은 선영이 주고 갔던 상자의 크기에 맞춰 골판지를 잘라내기 시작했다. 자로 잰 듯 골판지를 잘라내고 붓펜을 굵기 별로 순서대로 정렬해 놓은 정완은 실수가 발생하지 않도록 철저하게 대비코자 만반의 준비를 했다. 그러나 늘 시작이 문제였다. 붓펜의 뚜껑을 열고 글씨를 쓰려던 순간, 맥없이 풀려버리는 손가락에 그저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결국 한 글자도 쓰지 못한 정완은 잘라놓은 골판 지위에 편지를 만들 재료들을 한데 쏟아부었다.
정완이 붓펜의 뚜껑을 닫으려던 그때, 작업실 너머로 작은 노크 소리가 들렸다.
“오빠, 잠깐 들어가도 돼요?”
“응, 경미야. 들어와.”
“저 이번 주말에 친구들 만나러 가려고요.”
“정말?, 잘 생각했어.”
“저번에 오빠 얘기 듣고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해 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잘 풀리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상처받지 마. 네 뜻을 헤아려주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면 억지로 그 관계를 이어갈 필요는 없으니까.”
“그 말 들으니까 왠지 주말이 기다려지는데요?”
“아, 맞다. 오늘 기획사 컨소시엄에 초대받아서 거기 가야 하거든?, 오늘은 연락 없어도 기다리지 말고 먼저 가. 알았지?”
“네, 그럴게요. 잘 다녀와요.”
“슬슬 준비해야겠다. 수고해 경미야.”
“네, 오빠도요.”
정완은 선영에게 쓸 편지의 재료들은 서랍에 넣고 서둘러 외출 준비를 했다. 오후 수업을 준비하던 경미는 사무실을 나서는 정완에게 손을 흔들었고 정완 역시 경미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경미는 최근, 정완과의 관계가 부쩍 소원해진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 오늘처럼 편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자신과 정완의 모습을 보니 벌어진 거리를 어떻게 좁힐 수 있는지 노심초사했던 시간들이 부질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느덧 오후 수업을 마친 경미는 야간 수업에 필요한 자료를 미리 준비해 놓고 컴퓨터 앞에 앉아 주말에 입고 갈 옷을 고르고 있었다.
바로 그때, 수업시간보다 일찍 도착한 현수가 경미에게 다가와 커피를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아, 네. 안녕하세요.”
“오늘 시간이 남아서 조금 일찍 왔어요.”
“네.”
경미는 현수와의 대화가 불편한 듯 현수가 사 온 커피를 마시는 시늉조차 하지 않은 채, 쇼핑에만 집중하려 했다. 반면, 오해가 풀렸다고 생각한 현수는 경미에게 계속해서 말을 붙이려 했다.
“저기, 사온 사람 성의를 봐서라도 마시는 척 정도는 해주시지..”
“아.., 저 단거 싫어해요.”
“물어보고 사 올걸 그랬나 봐요. 괜히 캬라멜 라떼를 사 와서는..”
“아니에요. 앞으로 이런 거 사 오지 마세요. 부담스러우니까요.”
“선생님, 아직도 화나신 거예요?, 오해 풀린 거 아니었어요?”
“오해요?, 저는 오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분명히 말씀드렸을 텐데요.”
“그럼 그렇다고 말씀해주시지 그랬어요.”
“말했어요 분명. 도대체 저한테 이러는 이유가 뭐예요?”
“미안하니까요. 여자를 울려본 적도 처음이었고..”
“그쪽 때문에 운 거 아니거든요?”
“뭐가 됐든 제 앞에서 운건 사실이잖아요. 제가 말 걸어서 운 거잖아요.”
“켈리그라피랑 관련 없는 얘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으니까, 앞으로 사적인 얘기할 거면 말 걸지 마세요.”
조금 전까지 현수는 경미와 오해를 풀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 현수를 대하는 경미의 태도는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강의실에 들어가 책상에 앉은 현수는 오해가 풀렸다고 확신했던 그날을 떠올리며 그날의 상황과 정황들을 일목요연하게 압축시켰다. 경미와 다정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은 켈리그라피가 화두였기 때문이었을까. 혹은 아무 감정 없이 그저 본업에 충실할 뿐이었던 경미의 행동을 본인 스스로가 착각한 것은 아니었을까. 현수는 겨우 오해를 풀었다고 생각했지만 그 오해가 또 다른 오해를 불러온 것 같은 묘한 기분에 혼란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강의실에 멍하니 앉아있던 현수는 창문 너머에 있는 경미를 힐끔 쳐다보았다. 자신은 안중에도 없는 듯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한 채 싱글벙글하고 있는 경미의 모습이 조금 괘씸해 보였다. 경미의 날 선 반응 하나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자신의 모습이 한심하다고 느낀 현수는 무언가 결심한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로 그때, 야간수업시간에 맞춰 수강생들이 삼삼오오 사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기회가 올 때까지 또 한 번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현수는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 그 기회가 찾아올 것이라 믿으며 자리에 앉았다.
선영은 퇴근시간이 가까워져서야 부장에게 제출해야 할 서류를 들고 부장을 찾아갔다. 꼼꼼하게 서류를 검토한 부장은 결제사인을 함과 동시에 가을에 예정되어 있는 웨딩 퍼레이드에 참석을 희망하는 직원들의 명단과 각종 이벤트에 관한 기획을 총괄하라는 지시사항을 주문했다. 퇴근 후, 선영은 회사 동료들에게 오래전부터 예정되어있던 회식에 불참하겠다는 의사를 내 비친 뒤 거듭 사과의 뜻을 전했다. 선영은 곧장 지하 주차장으로 간 후, 차에 시동을 걸자마자 정완의 사무실로 향했다. 신호 대기 중이던 선영은 시간을 확인했다. 정완의 퇴근시간이 가까워졌다고 느낀 선영은 조금씩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가까스로 시간 안에 도착한 선영은 정완의 사무실 앞에 주차를 하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저기, 경미 씨?”
“어머, 언니. 안녕하세요.”
“잘 지냈어요?, 오랜만이죠?”
“그러게요. 정완 오빠 만나러 오셨어요?”
“네. 정완이 안에 있어요?”
“아니요, 오후에 기획사 컨소시엄에 초대받았다고 나갔어요.”
“그래요?..”
“미리 연락해 보고 오지 그랬어요.”
“그러게요.”
“싸우셨다면서요?, 아직도 화해 안 한 거예요?”
“경미 씨가 어떻게 그걸..”
“오빠가 다 말해주던데요?, 언니한테 차였다고. 그나저나 요새 오빠가 되는 일이 참 없나 봐요. 의지할 사람도 없는 것 같고.”
“못 보던 사이에 둘이 많이 친해졌나 봐요?”
“벌써 반년도 넘었는걸요 뭘.., 언니, 마실 것 좀 드릴까요?”
“아니에요. 금방 가야 돼요.”
“그럼, 오빠한테 언니 왔었다고 전해드릴까요?, 아니면..”
“내가 알아서 할게요. 신경 써줘서 고마워요 경미 씨.”
“고맙긴요.”
“오늘은 이만 가볼게요. 다음에 또 봐요.”
아무렇지 않은 듯 차로 돌아온 선영은 그날 지수가 했던 말이 떠오르자 그때 머리채를 잡았어야 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느 틈에 가까워진 것일까. 언제부터 정완과 자신의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떠벌일 만큼 가까워진 것일까. 선영은 점점 더 압박해오는 조급함에 숨을 쉬지 못할 지경이었다. 선영은 차에 시동을 걸고 출발할 때까지 꽤나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정완에게 전화를 걸어보려 했으나 그것 역시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지수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것 말고는 딱히 방법을 찾지 못했던 선영은 갓길에 잠시 차를 세우고 지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지수야. 지금 어디야?-
-연구자료 때문에 아침부터 지금까지 도서관에 있어.-
-바빠?-
-정신없지.-
-논문 제출 기한이 얼마 안 남아서.-
-바쁘구나..-
-왜?, 무슨 일 있어?-
-아니야. 그냥 해봤어.-
-수상한데?-
-아니야, 정말 아무 일도 없어.-
-이따 도서관에서 나오면 연락할게.-
선영은 오늘 부장과 나누었던 대화를 계속해서 떠올리며 조급함을 억눌렀다. 지금 선영에게 벌어진 이 상황 또한 정완의 속마음까지 완벽하게 헤아려주지 못한 자신의 잘못이라 여기기로 했다. 하지만 선영은 짙은 서운함이 섞인 질투심을 느꼈다. 그동안 정완과 자신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려는 경미를 아무렇지 않게 대해주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잠시 후, 갓길에 차를 세워두었던 선영은 비상등을 끄고 집으로 향했다. 선영은 스스로에게 조금만 더 관대해지자고 주문을 걸었다. 어쩌면 정완과 경미가 친해질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준 것이 자신의 탓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본능적으로 정완의 전화번호를 누르려는 자신의 손가락을 몇 번씩이나 깨물었다. 그저 만날 수 있다면, 만나서 이야기를 할 수만 있다면 어긋나 버린 지금의 상황들이 전부 제자리를 찾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소심한 믿음만이 선영의 조급함을 위로했다.
복잡하고 껄끄러운 심정은 경미도 마찬가지였다. 경미는 사무실의 문을 잠그고 집으로 걸어가는 동안 선영에게 조금 더 도발적인 말을 퍼부었어야 했다며 못내 아쉬워했다. 경미는 오늘따라 집으로 가는 길이 평소보다 멀게만 느껴졌다. 정완은 이제 선영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각인시켜주지 못한 그 결정적인 한마디가 자꾸만 경미의 발목을 붙들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병준은 지수가 물어보았던 풍차 모양의 펜션을 기억하고 있었지만 펜션의 정확한 위치까지는 기억하지 못했다. 일과를 마친 병준은 지수가 언급했던 그 펜션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아보기 시작했다. 병준은 자신에게 촬영을 의뢰했던 지인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가며 수소문한 끝에 어렵사리 펜션 사장의 연락처를 알아낼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누구세요?”
“사진작가 김병준이라고 합니다.”
“아, 병준 씨?, 오랜만이에요.”
“저, 기억하세요?”
“기억하다 마다요. 병준 씨만큼 사진 잘 찍는 사람이 어디 흔한가요.”
“밤늦게 정말 죄송해요. 급히 여쭤볼게 생기는 바람에.”
“그게 뭐 죄송할 일이라고.”
“사장님네 펜션 위치 좀 알 수 있을까요?, 통 기억이 나질 않아서요.”
“왜요?, 놀러 오시게요?, 여기 강원도 화천이에요, 화천.”
“화천이요?, 거기 주소 좀 메시지로 보내주실 수 있나요?”
“물론이죠. 전화 끊고 바로 보내줄게요.”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네요.”
“말 나온 김에 언제 한번 놀러 오세요.”
병준은 펜션 사장의 메시지를 확인하자마자 펜션의 주소를 자신의 명함에 옮겨 적었다. 한껏 들뜬 병준은 한시라도 빨리 이 사실을 알려주고 싶은 마음에 지수에게 곧장 전화를 걸었지만 지수는 병준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병준은 전화를 받지 않는 지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바빠?, 전화 안 받네.-
-미안, 지금 도서관이야.-
-도서관에는 왜?-
-말했잖아. 곧 졸업논문 마감 기한이라고.-
-근데, 왜 전화했어?-
-아니야, 나중에 다시 전화할게.-
-뭔데 그래?, 궁금하게.-
-네가 알면 깜짝 놀랄만한 소식이 있어서.-
-깜짝 놀랄 기운도 없다.-
-아무튼 이따 나가서 전화할게.-
-매정하기는.-
-그래서 싫어?, 싫으면 언제든지 말해.-
-누가 싫다고 했어?- -끝나면 바로 전화해.-
병준은 왼손에 쥐고 있던 명함을 책상에 내려놓았다. 펜션의 위치를 알아냈다고 위풍당당하게 말을 꺼내면 기꺼이 기뻐해 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지수에게는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문득 졸업논문 때문에 이따금씩 머리를 쥐어뜯던 지수의 모습을 떠올린병준은 지금 자신이 느끼고 있는 서운한 감정을 섣불리 토로했다가는 지수와의 관계가 틀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일에는 우선순위가 있다는 것을 재차 상기시킨 병준은 지수가 논문에 집중할 수 있도록 말을 아끼기로 했다.
그러나 책상 위에 놓인 달력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 병준의 가슴속에는 자그마한 노파심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지금과 같은 상황이 장기화될 경우 코 앞으로 다가온 12일을 지수가 기억하지 못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병준은 지수에게 재촉하려 하거나 보채려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병준은 지수와 어디까지나 친구로서의 감정, 그 이상을 서로에게 요구할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매우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완은 모든 업무를 마치고 집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집 근처에 도착했을 무렵 누군가로부터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안녕, 정완아. 잘 지냈니?”
발신자는 선영의 언니인 은영이었다. 정완과 은영은 자주는 아니었지만 한 번씩 서로의 안부를 묻거나 선영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특히나 선영의 상태가 조금이라도 수상할 때면 은영은 귀신같이 알아채고 정완에게 불쑥 전화를 하곤 했다.
“누나, 안녕하세요.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나야 뭐, 매일 똑같지. 요새 바쁘다며?”
“바쁘긴요. 근데 어쩐 일이세요?”
“너, 선영이랑 싸웠지?”
“어떻게 아셨어요?”
“왠지 그럴 거 같더라니..”
“선영이는 요즘 어때요?, 선영이가 별말 안 해요?”
“응. 정완이 네가 바쁘다고만 하던데?, 정말 바쁘긴 한 거야?”
“잠깐 바쁠 뻔했는데, 다시 한가해졌어요.”
“아빠가 쓰러지셨었어.”
주차를 하기 위해 자리를 물색하던 정완은 은영의 말에 몹시 당황했다.
“뭐라고요?, 그게 정말이에요?”
“응. 췌장 쪽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아. 너도 알고는 있으라고.”
“지금 병원에 계세요?”
“아니, 퇴원하셨어. 조만간 대학병원으로 옮기려고.”
“지금 어디세요?, 잠깐 뵐 수 있어요?”
“그럼, 누나네 집 앞으로 올래?, 오는 김에 김치도 좀 가져가.”
“네, 금방 갈게요.”
정완은 정정했던 선영의 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져 병원에 입원을 했다는 말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평소에도 술과 담배, 유흥과는 담을 쌓고 지내며 규칙적인 생활과 꾸준한 운동으로 자기 관리에 여념이 없던 선영의 아버지가 쓰러지고 입원까지 했다는 것이 정완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정완은 덜컹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킬 겨를도 없이 재빨리 차를 돌려 은영의 집으로 향했다.
김치통을 들고 아파트 정문까지 나와 정완을 기다리고 있던 은영은 정문 쪽으로 다가오는 정완의 차량을 발견하고는 미리 받아둔 방문차량 출입증을 정완에게 건넸다. 주차를 마친 정완은 시동을 끄지도 않은 채 쏜살같이 차에서 내려 은영에게 달려갔다.
“빨리 왔네?”
“어떻게 된 거예요. 자세히 좀 말해 봐요, 누나.”
“엄마랑 아빠랑 아침 먹으러 나갔는데 아빠가 갑자기 쓰러지셨어. 엄마는 당황하셨는지 나한테 먼저 전화를 했더라고. 나도 너무 놀라고 경황이 없어서 119를 불러드렸어. 그리고는 병원에 도착해서 이런저런 검사를 끝내고 바로 입원을 하셨고, 6일 정도 입원해 계시다가 퇴원하셨어. 조만간 대학 병원으로 옮길 예정이고.”
“병원에서는 뭐래요?, 어디가 잘못된 거래요?”
“입원하던 날 혈액검사랑 CT를 찍었을 때만 해도 큰 이상은 없다고 했는데, 초음파 검사랑 MRI를 찍고 나니까 담당의사가 췌장 쪽에서 작은 종양이 발견됐다더라고.”
“종양이요?, 암은 아니죠?”
“응. 병원 옮기면 곧바로 조직검사부터 해야 할 것 같아. 아직은 아니니까, 너무 걱정 마.”
“일단은 다행이네요. 선영이는 좀 어때요?”
“펑펑 울었지. 안 그래도 눈물이 많은 애인데.., 그래도 뭐, 지금은 엄마도 선영이도 다들 괜찮아.”
“죄송해요 누나.”
“네가 왜?”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괜찮아. 너한테 뭐 해달라고 바란 적 없어.”
“그래도요..”
“선영이 옆에나 잘 좀 붙어있지.”
“실은 그게.., 선영이랑 화해하려고 계속 시도하는 중인데, 마음처럼 잘 안되네요.”
“얼마나 됐어?, 둘이 그렇게 된 지.”
“석 달 정도요.”
“진전은 전혀 없고?”
“네. 통 만날 수가 없어요. 전화도 안 받고 답장도 없으니까요.”
“선영이랑 그렇게 오래 만났으면서 아직도 선영이를 잘 모르는구나?”
“네?”
“엇갈리나 보다. 너희 둘.”
“엇갈리다니요?”
“말 그대로지 뭘. 그래서 넌 어떻게 할 건데?”
“저는 끝이라고 생각 안 해요. 원래대로 다시 돌려놓고 싶어요.”
“그 말 진심이야?”
“진심이에요. 요즘 그것 때문에 일도 집중이 안되고, 밤에 잠도 잘 못 자요.”
“네가?, 별일이네.”
“이제부터라도 노력해 보려고요.”
“잘 들어 정완아. 사랑은 노력으로 해결되지 않아. 아무리 발버둥 치고 벽을 두들겨가며 노력을 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선영이랑 헤어지라는 뜻인가요?”
“그냥 단순하게 생각하라는 말이지. 복잡하고 어렵게 생각하지 마.”
“단순하게 생각이 안 되니까 그러죠. 7년 동안 정말 많이 싸우고 헤어졌었지만 이번만큼 불편한 적은 처음이에요.”
“왜?”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냥 만나. 만나서 얘기해봐. 지금 선영이도 그러길 바라고 있을 거야. 아마도 내 생각엔 적어도 한두 번 정도는 정완이 너를 찾아갔을 거라고 생각해.”
“저를요?, 그걸 어떻게..”
“내가 선영이에 대해서 만큼은 너보다 더 많이 알고 있을걸?, 선영이는 내 동생이니까.”
정완은 은영이 하는 말을 그 어떤 때보다 빠르게 이해했다. 항상 정완과 선영의 애정전선에 문제가 생기면 은영은 정완을 이해시켰다. 오래전부터 선영을 이해시키는 몫은 지수라는 것을 은영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마워요 누나. 매번 이럴 때마다 면목 없네요.”
“됐고, 여기까지 온 김에 김치나 가져가. 전에 가져간 김치는 아직 있고?”
“다 먹은 지 좀 됐어요.”
“이거 차에 실어. 가지고 내려오는데 애먹었어.”
“잘 먹을게요.”
“정완아.”
“네, 누나.”
“우리 집 김치가 왜 맛있는 줄 알아?”
“글쎄요..”
“선영이한테 물어봐. 무슨 뜻인지 알지?”
“알겠어요 누나.”
정완은 트렁크에 김치를 싣고 운전석에 앉았다.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은영에게 다시 한번 인사를 하고 창문을 닫으려던 그때 은영이 정완에게 말했다.
“뭐가 어떻게 됐든 일단 만나. 만나야 얘기라도 할 거 아니야.”
“네. 저도 그 생각이에요.”
“그래. 조심히 가.”
“감기 걸리겠어요. 얼른 들어가세요.”
정완이 떠나는 것을 지켜보던 은영은 곧장 선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응, 언니. 안 자고 뭐해?”
“정완이 왔다 갔어.”
“정완이가?, 왜?”
“내가 오라고 했거든.”
“언니가 왜 정완이를 불러?, 설마 이상한 소리 한 건 아니지?”
“정완이 살 많이 빠졌더라. 밥은 제대로 먹고 다니는 건지..”
“언니가 왜 정완이 걱정을 해?,”
“선영아. 정완이 전화는 왜 안 받는 거야?, 답장은 왜 안 해주는 거고.”
“언니, 이상한 소리 한 거 아니냐고!, 내가 먼저 물었어. 빨리 대답해.”
“안 했어, 안 했다고. 그냥 김치 가져가라고 불렀어. 됐어?”
“뜬금없이 웬 김치야?”
“이제 네 차례야. 대답해. 왜 정완이 연락 피해?”
“정완이가 그래?, 나한테 차였고 내가 연락 안 받는다고?, 아주 동네방네 다 떠들고 다니네.”
“대답해.”
“울 거 같아서 그랬다 왜?, 정완이 목소리 들으면 울 거 같아서 안 받았다. 왜.”
“지금 싸우자는 거 아니거든?, 그럼 메시지는?”
“뭐라고 답장을 보내야 좋을지 모르겠으니까. 그냥 만나서 얘기하려고 했어.”
“역시 내 동생답다. 7년을 붙여놓으니까 둘이 하는 짓도 점점 닮아가네.”
“무슨 소리야 그게.”
“알 거 없고, 정완이한테 김치 보냈으니까 그런 줄 알아.”
“하긴, 김치 다 떨어졌겠다.”
“걱정은 되나 봐?”
“몰라.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아빠랑 엄마는?”
“주무셔.”
“그래. 너도 얼른 자.”
“그래야지. 얼른 자야 내일 또 출근하지.”
“선영아.”
“응?”
“주말에 언니랑 저녁 먹을래?”
“갑자기 왜?”
“너랑 밥 먹은 지도 오래된 거 같고, 할 얘기도 있고 해서.”
“알았어. 별일 없으면 가는 걸로 할게.”
“그래. 잘 자.”
“응, 언니도.”
집으로 돌아온 은영은 식탁에 앉아 물을 마셨다. 오후 11시가 다 되어갔지만 집 안에는 은영뿐이었다. 언제부터인가 은영의 집은 낮이고 밤이고 할 것 없이 고요하기만 했다. 은영의 남편은 이미 오래전부터 주말도 팽개친 채 오로지 일에만 매달려 살고 있었고 하나뿐인 아들은 학교를 마치기가 무섭게 학원으로 가, 자정이 넘어서야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가끔씩 은영은 지금처럼 혼잣말을 하곤 했다. 하지만 은영은 이러한 자신의 행동을 외로움과 결부시키지 않았다. 은영은 본인에게 주어진 시간을 헛되이 소비하지 않도록 최대한 불필요한 감정은 절제하려 했다. 누구나 그렇게 살았다고 생각했고 누구나 다 그렇게 살아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영이 혼잣말을 했던 것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외로움을 인정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아니면 감정을 절제하는 자신의 모습에서 측은함을 감지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외로움은 언제나 깊은 밤에 불쑥 찾아오곤 했다. 실내에 가득 쌓인 무거운 공기 때문일까. 적막함에 울려 퍼지는 짧은 한숨소리 때문일까. 혹은 보이지 않는 두려움 때문일까. 어쩌면 어느새 텅 비워져 버린 마음 때문일까. 결코 외로워서가 아니라며 혼잣말을 하는 지금 이 순간마저도 은영은 끝내 외로움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사람들은 종종 외롭지 않다며 스스로를 쓰다듬는 행위마저도 외로움에서 비롯된 행동이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생각하기 나름이라며, 받아들이기 나름이라면서 말이다. 일순간에 사그라질 감정이라며, 지나고 나면 별것 아니라는 소모적인 감정이라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