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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Made By me 0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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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희완 Jun 25. 2019

EP 9) 각자의 주말. 여전한 엇갈림.

episode 9.


주말 아침, 동이 트기 전부터 잠에서 깨어있던 병준은 전날 미리 사두었던 물건들을 살펴가며 빠뜨린 은 없는지 몇 번이고 확인을 했다. 이른 아침부터 병준이 유난을 떨어가며 부산스러웠던 까닭은 바로 오늘이 병섭의 기일이기 때문이었다. 매달 방문하는 장애인복지관과 멀지 않은 곳에 병섭의 유골함을 모셔둔 봉안당이 있었다. 수년간 홀로 쓸쓸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병섭을 챙기는 사람은 병준이 유일했다.


병준은 병섭이 생전 가장 좋아했던 음식과 물건들을 트렁크에 싣고 넥타이를 반듯하게 고쳐맸다. 운전석에 앉은 병준이 다소 긴장한 듯 숨을 고르며 휴대폰을 지그시 바라보던 그때, 마치 텔레파시라도 통한 듯 병준의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병준아, 준비 다 했어?”

“일어났네?, 안 그래도 전화해볼까 고민하던 참이었는데.”

“나, 기특하지?, 빨리 칭찬해줘. 요 며칠 동안 논문 때문에 힘들어 죽는 줄 알았단 말이야.”

“응, 기특해. 그리고 정말 고마워.”

눈뜨자마자 씻고 전화한 거니까, 너 오는 동안 준비  할게.

“알았어. 천천히 준비해.”


10월 12일만큼은 지수가 반드시 기억해 주기를 진심으로 바랐병준은 최근 지수에게 닥친 복합적인 문제들로 인해 병섭의 기일이 임박했음을 대놓고 말하지 못했다. 지수와는 혈연관계도 아니었고 연인관계도 아니었음을 자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병준은 해마다 병섭 기일을 기억해주고 그 시간을 함께해주길 바라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라 생각했다. 그저 기억해준다면 고마울 뿐이었고 함께해준다면 더더욱 고마울 뿐이었다.


작년, 병섭의 기일에는 그랬다. 지수가 먼저 병섭의 기일을 기억해 주었고 지수가 먼저 병준의 곁에 있어주었다. 그리고 지수는 병준가슴속에 단단하게 얼어붙어 있던 응어리도 따듯하게 품어주었다. 그런 지수가 올해도 자신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는 생각에 신이 난 병준은 콧노래를 흥얼대며 지수의 집 앞으로 향했다.


지수의 집 앞에 도착한 병준은 지수가 모습을 보이자 곧장 차에서 내려 지수를 마중했다. 지수의 짐을 받아 든 병준은 뒷좌석에 짐을 싣고는 비로소 모든 준비가 완벽하게 끝났다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봉안당에 도착한 병준은 매년 그래 왔듯, 조심스레 병섭의 사진이 담겨있는 액자와 유골함부터 꺼냈다. 병준이 병섭의 물건들을 모두 꺼낸 후, 유리로 된 구조물의 구석구석을 깨끗이 닦기 시작하자 지수는 병준 몰래 준비한 화병에 물을 채워왔다. 병섭이 좋아하던 동화책을 새것으로 사 온 병준은 빨강, 파랑, 검정의 사인펜을 동화책 위에 올려 유골함 옆에 비스듬히 놓아두었다. 마지막으로 환히 웃고 있는 병섭의 사진을 넣고 열쇠를 잠그려던 병준은 병섭의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병섭에 대한 그리움으로 병준의 눈시울이 붉게 달아오르던 그때, 수수한 화병에 향기가 넘실거리는 예쁜 꽃을 가득 담아 온 지수가 말갛게 웃어 보이며 축 쳐져있던 병준의 손을 잡았다. 병준 역시 지수의 손을 힘주어 잡고는 발끝을 나란히 맞춘 채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병섭을 추모했다.


지수는 병준과 함께 봉안당을 찾아온 것이 이번이 두 번째였지만 병섭이 죽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여전히 함구했다. 남들보다 호기심이 지나치게 과했던 지수는 병섭에 대해 어렵게 말을 꺼던 병준의 표정을 두 눈에 고스란히 담아두고 있었다. 세상에 혼자 버려진 사람처럼 어둡게 변해버린 병준의 얼굴을 보았던 지수는 그 후로 병섭에 관한 일만큼은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지수는 누군가의 감정과 사정을 무시하고 짓밟아 가면서까지 자신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성과가 없던 것은 아니었다. 추모를 마치고 봉안당을 떠날 채비를 하는 동안 병준에게 병준의 부모님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좁디좁은 마음의 틈에서 새어 나오는 병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지수는 병준의 표정 변화에 온신경을 집중했다. 천천히 입을 떼기 시작하는 병준의 표정이 흡사 그때처럼 변하지는 않을까 심히 마음이 쓰였기 때문이었다.


병섭의 비보를 접하게 된 어머니는 그 충격에 갑자기 쓰러졌고 그 길로 병원에 실려가 장기간 입원을 하게 되었다. 그 후, 아버지는 오랜 세월 동안 몸담았던 직장을 그만두고 어머니의 수발을 자처했다. 그렇게 몇 해가 지나고 병준 스무 번째 생일이 막 지났을 무렵,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한 어머니와 성인이 된 병준을 한자리에 불러 모은 아버지는 다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자는 제안을 했다.


병섭에게 유독 모정이 강했던 어머니는 주변에서 들려오는 이야기에 가끔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발작 증세를 일으키곤 했다. 또한 비슷한 장애를 가진 병섭 또래의 장애인을 보기라도 하는 날에는 며칠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울기만 했던 적도 부지기수였다. 늘 그 모습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보던 아버지는 오랜 고심 끝에 보유한 재산을 모두 처분하고 이민을 가는 것이 가장 현명한 처사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병준은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혼자 남겨질 병섭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힘들어하는 모습이 참을 수 없을 만큼 힘이 들었고 병준은 병섭이 혼자 남겨지는 것이 견딜 수 없을 만큼 괴로웠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잊는 것만이 남겨진 이들이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수단라 생각했고 병준은 잊지 않는 것만이 남겨진 이들이 살아나가야 할 단 하나의 이유라고 생각했다.


계속된 설득에도 불구하고 병준은 아버지의 제안을 재차 마다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아버지는 병준에게 거처를 마련해주고는 어머니와 함께 이민 길에 올랐다.


지수는 병준의 입에서 자신이 알지 못했던 병준의 과거가 흘러나오자 참담한 심정에 동감하며 병준을 위로했다. 그러나 병준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은 지수는 참담함보다 놀라움이 더욱 크게 느껴졌다. 병준이 병섭을 생각하는 마음의 크기가 자신이 생각하는 것 이상이었기 때문이었다. 병준의 이야기가 끝나자 지수는 더 이상 병섭에 대한 아픈 기억을 떠올리게 할 질문은 두 번 다시 생각조차 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봉안당을 떠날 준비를 마친 병준은 오늘 복지관에 기부할 물품들이 어디쯤에 도착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복지관측과 화물기사에게 연달아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도 제시간에 도착할 수 있음을 확신한 병준은 통화를 마친 후,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차로 돌아왔다.


차를 몰아 복지관으로 향하던 중 봉안당을 떠날 때부터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있는 지수의 눈치를 살피던 병준이 말했다.


“피곤하지?, 요즘 선영 씨나 논문 때문에 많이 힘들 텐데.., 고마워 지수야.”

“고맙긴. 병준이 네가 소중히 여기는 일은 나한테도 소중한 일이야. 그러니까 고마워하지 마.”


병준은 마치 자신의 일처럼 생각해주는 지수에게 무언가 답례를 해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다. 그러나 딱히 답례라며 내밀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마음이 앞선 병준은 자신도 모르게 진심을 꺼내 보이고 말았다.


“너, 오늘 너무 예쁘다.”

“뭐래. 머리도 제대로 못 말리고 화장도 안 했는데 예쁘긴.”

“그래서 더 예뻐.”

“그만해, 듣기 거북하니까.”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있던 지수는 슬며시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내리쬐는 햇살에 한껏 얼굴을 찡그리며 덥다고 투덜대던 지수가 조수석의 창문을 활짝 열었다. 가을 냄새가 진동하는 창밖의 풍경은 가을의 풍요로움이 요동치고 있었다. 붉게 물들어가는 산등성이를 따라가며 천천히 시선을 옮기던 지수의 뺨은 갓길 사이사이에 만개한 빨갛고 하얀 코스모스처럼 예쁘게 물들어 있었다. 복지관에 도착할 때까지 병준과 지수는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있었지만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동안 병준과 지수는 우정이라는 명목 하에 반듯한 선을 그은 채, 되도록 그 선을 넘지 않기 위해 아슬아슬한 외줄 타기를 하고 있었다. 최악의 상황에 직면하는 것이 두려웠던 병준과 지수는 가급적이면 위태로운 상황을 연출하지 않으려 나름의 역할에 충실히 임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알고 있었다. 지금 서로가 짓고 있는 똑같은 미소가 결코 우정이 아니라는 것을.


지수는 지금처럼 아찔한 외줄 타기가 지속될 경우에 언제 또 바닥으로 곤두박질쳐져도 이상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병준은 팽팽했던 줄의 탄력이 점점 느슨해지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이제 더 이상 사랑이라는 감정을 자신들의 신념과 같은 방식으로 제어한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잠에서 깬 정완은 온몸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피곤함에 다시금 눈을 질끈 감았다. 최근 정완은 꾸준히 느껴지는 불편함 때문에 깊이 잠들지 못했다. 과로에 의한 피로 누적, 혹은 심리적 중압감, 카페인 과다 섭취 같은 자가진단이 가능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직감한 정완은 과거에 간헐적인 불면증으로 정신의학과를 찾았던 경험을 떠올렸다. 정완은 급히 휴대폰을 들고 그 병원을 검색한 후 전화를 걸었다. 주말이었지만 오후 2시까지는 진료가 가능하다는 간호사의 답변을 듣자마자 정완은 곧바로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에 도착한 정완은 접수를 하고 차례를 기다렸다. 곧, 간호사가 정완을 호명했고 정완은 원장실에 들어가 상담을 시작했다.


정완은 의사에게 과거에 겪었던 불면증과는 확연히 다른 상태라며 자신이 겪고 있는 이상증세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했다. 의사와 상담을 마친 정완은 일주일치 약을 처방받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도착한 정완은 책상 위에 어지럽게 널려있던 기획사 컨소시엄에서 받아온 자료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선영에게 줄 편지의 재료가 아직도 작업실 책상 서랍에 방치되어있다는 것이 떠올랐다. 갑자기 속이 울렁거리고 두통이 시작되자 가만히 서있을 수 없었던 정완은 맥없이 침대에 걸터앉았다. 정완은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은 듯 팔로 눈을 가린 채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눈을 감고 이를 악 물어도 여전히 머릿속에 가득 차 있는 불편함은 정완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결국 정완은 병원에서 처방받아온 수면제를 한입에 털어 넣고는 침대에 누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는 잠이 몰려왔고 누워있던 자세 그대로 깊은 잠에 빠졌다.


선영 역시 매일 밤 잠을 설쳤다. 한 주 동안 많은 깨달음이 잇따라 머릿속을 어지럽혔기 때문이었는지 평소 때처럼 숙면을 취하지 못했다. 물론 원인은 정완이었다. 선영은 밤새 뜬눈으로 고민했던 일을 실행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불쑥 전화부터 걸어볼 용기는 없었다. 몇 번의 망설임이 비켜간 후 내내 주저하기만 하던 선영은 아주 조금 용기를 내어 정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정완아, 바빠?- ①

                                                                            -사무실에 몇 번 갔었는데, 갈 때마다 없길래..- ①

                                                                                                              -오늘 만날 수 있어?- ①

                                                                                  -메시지 보면 답장해줘. 기다리고 있을게.- ①


정완은 선영에게 메시지가 온 것도 모른 채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어느덧 시간은 일몰에 가까워졌고 복지관을 방문했던 병준과 지수는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정완의 연락에 초조함을 느끼던 선영은 하루 종일 휴대폰을 손에 쥔 채, 아랫입술과 손톱을 반복해서 물어뜯었다.


한편, 경미는 윤지의 생일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지하철을 타고 홍대입구에 도착해 있었다. 길눈이 어두웠던 경미는 개찰구를 나오자마자 진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진희야. 나야.”

“지금 어디야?, 도착했어?”

“지금 4번 출구 쪽인데, 어디로 나가야 되는지 모르겠어.”

“4번이 아니라 9번이야. 9번 출구로 나올 수 있지?, 내가 그리로 갈게.”

“알겠어.”


진희는 경미와 전화를 끊자마자 윤지를 비롯한 친구들에게 경미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알렸다.


“경미 오면 다들 선우 오빠 얘기는 절대로 꺼내지 마. 알겠지?”

“선우 오빠 오는 거 몰라?

“혜정이랑 결혼하는 것도 모르겠네?

“아무튼 다들 입단속 잘해. 그동안 경미가 선우 오빠 때문에 안 나왔던 거 너희들도 알지?”

“알았어.

“명심해 다들. 

“걱정 마.”

“그럼 나 경미 데리러 갔다 올게.”


9번 출구 앞에 서있던 경미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진희를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었고 곧바로 두 사람은 윤지의 생일파티가 있는 클럽으로 향했다. 성인 남성 한 명 정도 겨우 내려갈 수 있는 비좁은 통로를 지나 클럽 안으로 들어간 경미는 아주 오랜만에 친구들과 재회했다. 이미 달아올라있던 그곳의 분위기는 경미의 등장으로 한층 더 고조되었다.


“경미야, 어서 와.”

“어머 얘, 진짜 오랜만이다. 왜 이렇게 얼굴 보기가 힘드니?”

“학원 차렸다면서?, 어때?, 잘 돼?”

“연예인이네 완전. 연락이라도 좀 하고 살자.”


오랜만에 나타난 경미를 본 친구들은 그동안 하고 싶었던 말들을 일제히 쏟아냈다. 뜻밖의 환대에 살짝 경계가 풀어진 경미는 자신이 이 자리에 오게 된 본래의 목적을 까맣게 잊고 말았다. 경미는 과거에 확인하지 못했던 이야기와 그동안 따져 묻고 싶었던 이야기가 전부 기억나지 않을 만큼 친구들의 격정적인 반응이 그저 고맙고 신기할 뿐이었다. 자연스레 정완과 나누었던 대화가 떠오른 경미는 정완이 자신에게 전하고자 했던 그 감정에 대해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경미야, 이 옷 어디서 샀어?, 명품이야?”

“명품은 무슨.., 그냥 인터넷에서 샀어.”

“경미 엄청 예뻐졌다. 그치?”

“경미는 예뻐진 게 아니고 원래 예뻤어.”


다소 소란스러운 분위기 속에서도 오늘의 주인공인 윤지는 경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뒤늦게 윤지를 발견한 경미가 윤지의 옆자리로 쪼르르 다가가 앉았다.


“윤지야. 생일 축하해.”

“고마워.”

“미안해. 앞으로 자주 연락할게.”

“그러던지.”


윤지의 대답은 예상외로 쌀쌀맞았다. 윤지는 그때나 지금이나 경미가 주목받는 것이 마냥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더욱이 오늘은 자신의 생일이었음에도 자꾸만 경미에게 이목이 집중되는 것이 꽤나 불편한 모양이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클럽을 가득 메우고 있던 시끄러운 음악소리가 잠시 멈췄고 윤지의 스물네 번째 생일을 기념하는 케이크가 화려하게 등장했다. 클럽의 관계자는 생일 축하곡을 틀어주며 파티의 분위기를 더욱 뜨겁게 달구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경미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모든 것이 부질없었다는 것처럼 친구들과의 시간이 마냥 즐겁기만 했다.


케이크가 자리에 도착하자 윤지는 사진부터 찍자며 친구들을 재촉했다. 친구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예쁜 미소를 장착하고 장난기 넘치는 포즈를 취했다.


“경미는 좋겠다. 얼굴도 작고 예쁘니까 사진만 찍어도 그냥 화보네.”

“나, 괜히 경미 옆에 있었나 봐.”

“얘는, 포토샵 어플이 괜히 있겠니?”


친구들의 관심은 여전히 경미를 향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얼굴을 비춘 경미가 반가워서였는지, 혹은 선우의 이야기를 화두로 삼지 않으려는 의도였는지 알 수 없었으나 그 광경을 어이없다는 듯 쏘아보던 윤지는 그만 화를 참지 못하고 진희가 그토록 당부했던 금기를 깨부수고 말았다.


“경미야. 너 근데 선우 오빠 결혼한다는 얘기는 들었니?”


윤지의 감정 섞인 한마디에 일순간 정적이 흘렀다. 자리에서 그대로 얼어붙은 경미와 친구들의 시선이 점점 윤지를 향하던 바로 그때, 진희가 윤지에게 달려가 말했다.


“야, 최윤지!, 내가 얘기하지 말라고 했지?”


진희가 곧장 수습에 나섰지만 윤지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얘도 알건 알아야지. 선우 오빠, 혜정이랑 결혼한데.”

“윤지야, 제발 그만하라고 좀.”

“조금 있으면 선우 오빠 올 거야. 오늘 청첩장 주러 오기로 했거든. 기왕 온 김에 선우 오빠 얼굴이나 보고 가지 그래?


몹시 당황한 경미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경미는 여느 때처럼 서둘러 겉옷과 가방을 챙겨 들고는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가려 했다.


그 모습을 본 윤지가 자리에서 일어나 경미의 팔을 강하게 붙잡았다.


“왜?, 또 도망치게?, 너 아직도 선우 오빠 못 잊었니?,”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아직도 너는 사랑이 인생의 전부야?, 언제까지 그렇게 도망만 다닐 건데!”

“아니라고 했잖아!”

“선우 오빠가 그러던데 뭘. 너는 사랑이 인생의 전부였다고. 아마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 너랑 선우 오빠 얘기 모르는 사람 한 명도 없을 걸?”


경미는 조금 전까지 별일 아니라며 아무렇지 않은 척했던 자신을 원망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친구들을 만나보라는 권유를 했던 정완도 원망하기 시작했다. 참았던 눈물이 터져버린 경미는 윤지의 손을 거세게 뿌리치고 그대로 자리를 박찼다. 입구의 문을 열고 계단을 오르려던 그때, 계단을 내려오던 한 남자와 부딪힌 경미는 중심을 잃고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경미를 따라 나오던 진희는 재빨리 경미를 일으켜 세우고는 황급히 클럽을 빠져나갔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 윤지의 생일파티는 더 이상 즐거울 수 없었다. 윤지는 자신의 행동이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했지만 후회는 하지 않았다. 삽시간에 엉망진창이 된 분위기에 친구들은 각자 자리에 앉아 휴대폰을 보며 딴청만 부렸다.


묵직한 정적이 모두를 집어삼켜버린 그때, 입구에서 경미와 부딪혔던 그 남자가 윤지에게 다가와 꽃다발을 건네며 말했다.


“윤지야, 미안. 내가 좀 늦었지?, 생일 축하해.”

“아니야, 딱 맞춰서 잘 왔어. 조금만 일찍 왔으면 큰일 날 뻔했으니까.”

“혹시, 방금 나랑 부딪힌 사람.., 경미 아니야?”

“경미 맞아.”

“별일이네. 근데 왜 울면서 나가?, 싸웠어?”

“싸운 건 아닌데, 아.., 나도 모르겠다.”


사실 진희는 경미가 윤지의 생일파티에 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진희가 경미와 통화를 했던 사실조차 알지 못했던 윤지는 당연히 자신의 생일파티에 선우를 불렀다. 당일이 되어서야 진희에게 경미가 올 것이라는 소식을 듣게 된 윤지와 친구들은 경미와 선우가 마주치게 되는 상황을 심각하게 우려했다. 하지만 최선책이 무엇인지 의견을 한 곳에 모으지 못한 친구들은 둘 중 한 사람이 먼저 도착했을 때, 그때의 분위기를 파악한 후에 고민해도 될 문제라고 넘겨짚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윤지의 발언에 의해 경미가 먼저 자리를 이탈해버렸고 경미와 선우가 대면하게 될 일도 자연스레 사라지게 되고 말았다.


윤지는 친구들에게 경미를 향한 질투심에 우발적으로 쏟아 뱉은 말이었다고 인정했다. 하지만 경미도 언젠가는 알게 될 일이라는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사람들의 관심을 독차지하는 경미가 못마땅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윤지는 누가 뭐라 해도 줄곧 경미를 친한 친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윤지가 경미에게 독설을 퍼부을 수밖에 없었던 핵심적인 이유 역시 경미를 위해서라는 배경이 깔려있었다. 윤지는 경미가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사람처럼 자꾸만 어딘가로 도망치고 어딘가에 숨어 지내려 하는 것을 누구보다도 안타까워했다.


3년 전, 경미가 대학에 입학했을 당시 선우는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을 했다. 선우는 복학생이라는 타이틀이 무색할 정도로 재학생들뿐만 아니라 신입생들에게도 인기가 제법 많은 편이었다. 선우는 활달한 성격과 곱상한 외모, 남다른 친화력 덕분에 다시 시작된 대학생활에 누구보다 빠르게 적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선우는 우연한 계기로 경미를 알게 되었고 그 후로 꾸준히 경미에게 대시를 했다. 하지만 경미는 선우의 마음을 쉽게 받아주지 않았다. 눈치가 빠른 선우는 작전을 바꿔 경미의 친구들을 공략했다. 비싼 음식을 사주는 것은 기본이었고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탁도 종종 들어주었다. 그 효과를 톡톡히 보았던 선우는 마침내 경미와 연인이 될 수 있었다. 선우와 경미가 연인이 될 수 있도록 가장 많은 도움을 주었던 일등공신은 혜정이었다. 윤지와 진희를 비롯한 다른 친구들도 선우에게 조금씩 호감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선우와 경미가 연인이 된 이후부터는 잠시나마 느꼈던 호감을 금세 지워버렸다. 그러나 혜정만큼은 예외였다.


선우와 경미가 사귄 지 6개월 정도 되었을 때까지만 해도 둘 사이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다. 그저 모두가 부러워할 수밖에 없는 완벽한 커플의 표본 같기만 했다. 그러나 실상은 달랐다. 선우는 사람들과 만나는 것을 좋아했고 술자리라면 어디든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경향이 있었으며, 언제나 경미보다 친구들이 우선이었다. 경미는 선우와 단둘이 만나는 것을 좋아했고 선우가 없는 술자리는 일절 마다했다. 친구들을 만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선우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오기라도 하면 경미는 친구들과의 중요한 약속도 간단히 깨버리곤 했다. 그 경미는 선우와의 다툼이 조금씩 늘어가자 성격차이에 대한 고찰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경미는 성격차이는 조금씩 맞춰 가면 될 문제라고 생각했고 빈번하게 일어나는 작은 다툼 역시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하나의 과정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하지만 경미의 바람과는 달리 날이 갈수록 다툼의 빈도는 잦아졌고 그 강도 또한 심해져갈 뿐이었다.


 원인이 단순히 성격차이 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다. 우연히 친구들과 한자리에 모이게 된 어느 날, 경미는 뜻밖의 상황에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자신이 한 번도 털어놓은 적 없었던 이야기를 자신의 친구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경미와 선우가 단둘이 몰래 떠났던 여행도, 단둘이 나누었던 달콤하고 부끄러운 비밀스러운 이야기까지도 경미의 친구들은 모조리 다 알고 있었다. 그날 밤 매우 화가 난 경미는 선우를 찾아가 심하게 다투었고 그 일로 경미는 회복이 어려울 정도의 커다란 상처를 받고 말았다. 선우에게 이별을 통보한 그날 이후, 선우는 온갖 치졸한 변명과 야비한 핑계를 대며 경미의 사랑을 시험했다.


그 당시의 경미는 화려한 겉모습과는 다르게 의외로 사랑이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순정파였다. 현실보다는 낭만을 동경했고 꿈보다는 해몽에 더욱 관심이 많았던 경미의 성향을 오래전에 간파한 선우는 집요하게 경미의 마음속을 밑바닥부터 크게 휘저었지만 반복되는 상황에 지칠 대로 지쳐버린 경미는 더 이상 친구도 사랑도 결단코 자신에게 유익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자신의 머릿속에 각인시키고는 마음의 빗장을 걸어 잠갔다.


경미는 사랑이 끝이 나고 나서야 처음부터 자신이 원했던 사랑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음을 절감했다. 스물한 살의 경미에게 찾아왔던 첫사랑은 경미의 기억 속에서 가장 추악하고 몹쓸 기억으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한동안 좌절, 실망, 분노, 배신과 같은 악질적인 감정들은 매일 밤 악몽으로 되살아나 경미의 꿈속마저 짓밟았다. 그 무렵, 경미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던 유일한 감정은 구원뿐이었다. 그렇게 경미는 스스로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근 채 하루빨리 상처가 아물 수 있기만을 바랐다.


선우는 경미와 사귀는 동안에도 꾸준히 혜정을 만났다. 자신이 바랐던 사랑은 늘 돋보여서 조바심이 났던 경미가 아닌,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주고 자신의 모든 상황을 감싸주던 혜정이었음을 점차 의식하게 되었다. 그 후로 혜정의 한결같음에 마음이 움직인 선우는 혜정과의 결혼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리고 바로 오늘, 윤지의 생일을 맞이해 한자리에 모인 혜정의 친구들에게 청첩장을 전해주기 위해 이곳에 오게 되었다.


진희는 똑바로 서있지도 못할 만큼 서럽게 우는 경미를 부축한 채 택시를 기다렸다. 좀처럼 잡히지 않는 택시를 기다리며 경미를 달래주던 진희도 눈물을 보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진희는 이대로 경미를 보내면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할 것 같은 불길함마저 느꼈다.


겨우겨우 택시가 잡히자 진희는 뒷좌석의 문을 열어 경미를 앉혔다.


“진희야, 미안해. 내가 괜히 와서 분위기 망쳤나 보다.”

“아니야, 내가 미안해. 오기 싫다는 사람 억지로 불러서 이게 무슨 꼴이니.”

“괜찮아. 오늘 일은 언젠가 다시 얘기할 날이 오겠지. 신경 쓰지 마 진희야.”

“경미야. 윤지도 분명 나쁜 뜻으로 말한 건 아닐 거야. 알지?”

“알아.., 바보처럼 거기서 왜 울었을까..”

“경미야, 도착하면 꼭 연락해야 돼. 알았지?”

“응. 윤지한테 미안하다고 전해줘. 나 때문에..”

네가 왜 사과를 해?, 그런 생각하지 말고 얼른 가. 아저씨 기다리신다.”

전화할게 진희야.”


경미는 몇 번이고 택시기사에게 죄송하다며 사과를 하고 목적지를 말했다. 흥건하게 젖어있는 휴지조각을 손에 꼭 쥐고 목소리를 가다듬은 경미는 정완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정완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경미는 정완을 탓하며 세차게 따져 물은 뒤 그보다 몇 배만큼의 위로를 받으려 했으나 경미의 바람은 끝내 정완에게 닿지 않았다.


정완의 연락을 기다리는 사람은 한 명 더 있었다. 오전에 보냈던 메시지를 아직도 확인하지 않은 정완이 온종일 신경이 쓰였던 선영은 손에서 휴대폰을 놓지 못한 채 안절부절못했다.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오만가지 생각에 사로잡혀있던 그 순간 선영의 휴대폰이 울렸다.


“선영아, 언니야.”

“응, 언니.”

“저녁 먹게 오라고. 바쁜 일 있으면 다음에 먹고.”

“아니야, 지금 출발하면 돼?”

“그래. 도착하면 전화해.”


은영과 저녁식사를 마치기 전까지는 정완에게 반드시 연락이 올 것이라 믿고는 외출 준비를 서둘렀다. 만에 하나 그때까지도 연락이 없다면 다시 한번 정완의 사무실로 찾아가야겠다는 결심까지 한 선영은 애써 조급한 마음을 눌러 담고는 차를 몰아 은영의 집으로 향했다.


은영의 집 근처에 도착한 선영은 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은영의 집에 들어온 선영은 신발을 벗자마자 집안 가득히 퍼져있는 맛있는 냄새에 이끌려 자연스럽게 주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식탁 위에는 둘이 먹기에는 제법 양이 많아 보이는 음식들이 차려져 있었다. 주로 선영이 좋아하는 갈비찜, 불고기, 제육볶음 같은 육류로 된 음식이었다.  


“언니, 오늘 무슨 날이야?”

“날은 무슨.”

“형부는?, 태호도 안 보이네.”

“형부는 일하고 있고, 태호는 학원 갔어.”

“토요일인데?”

“뭐, 이젠 그러려니 하고 살아.”

혹시, 저번처럼 잔소리하려고 부른 건 아니지?, 나 오늘 아침에 정완이한테 메시지 보냈으니까 잔소리할 생각은 하지도 마.”

“헛다리 짚지 마. 그냥 너랑 둘이 밥 먹으려고 부른 거야.”

“수상한데..

식겠다. 얼른 손부터 씻고 와.


손을 씻던 선영은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그냥'이라는 말을 꺼내는 은영의 모습이 어쩐지 쓸쓸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어때?, 맛있어?”

“당연하지. 언니 음식 솜씨 좋은 게 뭐 하루 이틀이었나.”

“그래, 많이 먹어.”

“언니도 얼른 먹어.”

“앞접시 줄까?

언니, 어차피 다 못 먹을 거 같은데 덜어놓고 먹는 게 낫지 않아?”

“그래, 그게 좋겠다.”


은영은 국자를 가져와 빈 통에 음식을 덜어냈다. 선영은 오늘따라 유난히 기력이 없어 보이는 언니가 걱정된 나머지 은영의 음식 솜씨를 연거푸 치켜세우며 밥을 두 공기나 먹었다. 음식을 덜어낸 은영도 선영과 마주 보고 앉아 젓가락을 들었다.


식사를 마칠 동안 줄곧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는 은영이 신경 쓰였던 선영이 말했다.


“언니, 고민 있어?”

고민은 무슨.., 있다면 아빠랑 너.”

“엄마는?, 형부랑 태호는?”

“아직 순위권 밖이야.”

“이런 일순위를 매겨?

농담이야. 설거지할 동안 가서 앉아있어. 커피 마실래?”

설거지는 내가 할게. 언니나 좀 쉬어.”

“우리 선영이 이제 다 컸네. 시집가도 되겠다.”

“언니. 나도 부모 입장이 되면 엄마랑 아빠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까?

“글쎄. 솔직히 나는 잘 모르겠다. 고등학생이나 된 아들이 있는데도, 아직 잘 모르겠어..”

“우리 언니 오늘 되게 이상하네. 언니, 가을 타?, 아님 갱년기야?”


은영은 선영의 농담에 피식거릴 뿐 화를 내지 않았다. 평소 같았으면 선영의 등짝을 세게 때리고도 남았을 테지만 오늘은 이상하게도 싱겁게 웃기만 할 뿐이었다.


선영이 설거지를 하는 동안 은영은 식탁을 행주로 닦고 냉장고를 정리한 후, 전기포트의 전원을 켜 물을 끓였다. 설거지를 마친 선영이 고무장갑을 벗고 손을 씻는 동안 소파에 앉아 선영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은영은 무언가 생각이 난 듯 안방으로 들어갔다.


“선영아. 다했으면 잠깐 이리 와 봐.”


앞치마를 벗어 가지런히 개어놓은 선영이 안방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언니, 물 다 끓었는데?

“나 결혼하기 전에 네 형부가 우리 집에 인사하러 왔던 날, 기억해?”

“당연하지. 갑자기 그건 왜?”

“형부가 뿌리고 왔던 향수 냄새도 기억나?”

“잊을 수가 없지. 그 마성의 냄새.”

“나도 사실.., 그 향수 냄새를 엄청 좋아했어.”

“언니도?, 역시 우리는 핏줄이네.”


별안간 은영은 화장대의 서랍을 열어 향수를 꺼내고는 자신의 손목에 향수를 뿌렸다. 그러자 은은하게 달 큰 거리는 향수 냄새가 안방에 퍼지기 시작했다.


“지금도 가끔 그때가 그리울 때면, 이렇게 한 번씩 꺼내서 뿌리곤 해.”

“언니도 지나간 시간을 그리워하는구나..”

“그럼. 나도 사람이고, 여자인데.”

“그리우면 그립다고 말해봐. 하긴, 말해도 그때로 돌아갈 수 없는 노릇이니..”

“너, 언니랑 형부랑 따로 자는 거 알지?”

“응, 뭐 대충은.”

“지금은 담배 냄새에 술 냄새에 아주 미쳐버리기 일보직전이지만 가끔 네 형부 잠들어 있는 거 보면, 그때 맡았던 좋은 향기랑 산뜻하게 웃어주던 때가 가끔 생각나.

“그게 벌써 몇 년 전이야.”

“살다 보니까 뭔가 자꾸 잃어버리는 기분이 드는 거 있지?”

“잃어버린 다기 보다, 잊어버리는 거 아닐까?, 나이가 들면 기억력이 떨어지는 건 당연한 거니까.”

“네 말도 틀린 말은 아니네.”

“언니 요즘 자꾸 깜빡해?”

“늘 깜빡하지.., 무엇이 나를 위한 일인지, 무엇이 소중한 일인지, 매일매일 눈 뜰 때마다 깜빡하는걸.”

“갑자기 왜 이래?, 언니 오늘 진짜 이상하다.”

“언니는 예전부터 알고 있었어.”

“뭘?”

“선영이 네가 아빠랑 많이 닮았다는 거. 편식이 심한 것도, 매사에 진지한 것도.”

“요점이 뭔데 자꾸 말을 빙빙 돌리실까?”

“요점?, 그런 거 없어.”

“뭐야, 나 지금 진지할 뻔했는데.”

“선영아. 그나저나 정완이랑 어떻게 할 생각이야?”

“아까 메시지 보냈다고 말했잖아. 그새 깜빡했어?”

“그랬지 참.., 선영아. 사실 나는 네가 정완이랑 헤어진다고 해도 말릴 생각 없었어.”

“여태 정완이한테 이러쿵저러쿵 해놓고는.”

“그냥, 네 선택을 존중해 주기로 했다고 할까?”

“이제 와서?, 그건 좀 아니다.”

“아무튼 언니가 하고 싶은 말은.., 사랑도 이별도 자신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만들어가는 건 어디까지나 본인이 결정해야 될 몫이라는 거야. 아빠일도 마찬가지고. 사람 태어나면 언젠가는 태어나기 전으로 돌아가기 마련이잖아?, 목숨을 가지고 태어난 생명체라면 언젠가는 분명 죽음을 맞이하는 게 순리라고 생각해. 받아들이기 힘든 순간들도 때로는 겸허하게 받아들일 줄도 알아야 한다는 뜻이야. 그나마 여건이 되면 조금 더 머물다 가는 거고.., 조금만 더 머물러 줬으면 하는 마음은 누구나 똑같겠지만 언젠가 그런 때가 왔을 때, 좋은 방향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네 스스로가 결정해야 돼.”

“언니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는 잘 알겠는데, 생각처럼 안 되니까 그러지. 그게 내 생각처럼 쉽게 조종할 수 있는 일은 아니잖아.”

“모든 일이 생각처럼 된다면야 얼마나 좋겠냐만은.., 그래도 선영아. 네가 생각했던 것처럼 최대한 비슷하게 살기 위해서는 주저하거나 망설이고 있는 일은 반드시 실행에 옮겨보도록 해.”

신기하다. 오늘 나도 그 생각했는데.”

“실천하는 것도 어디까지나 네가 만들어 가야 한다는 거, 절대 잊지 말고.”

“걱정 마 언니. 나도 최근에 깨닫게 된 일이 참 많았으니까. 고마워 언니.”


선영과 은영의 대화가 끝나갈 무렵 선영의 전화벨이 울렸다. 발신자가 정완이기를 바랐지만 아쉽게도 지수였다. 지수는 선영에게 급한 용무가 생겼다며 선영의 집 근처에 있는 카페에서 만나자는 말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현관문을 나서는 선영을 배웅한 은영은 소파에 앉아 TV를 켰다. 그리고 조금 전 선영과 나누었던 대화를 곱씹으며 상념에 잠겼다.


‘외로웠음에도 외롭다는 말을 꺼내지 않았던 것은 자신이 결정한 몫이었을까.’

‘사무치게 외로웠지만 외롭지 않다고 최면을 거는 것 또한 자신이 결정한 몫이었을까.’


TV에서는 유명한 코미디쇼가 방영되고 있었지만 은영의 눈에서는 가느다란 눈물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자신을 희생하는 것마저도 사랑이라고 당당하게 외치던 아버지도 가끔은 외롭지 않았을까. 매년 겨울이면 낡고 허름한 코트를 걸치고 출근을 하는 아버지에게 잔소리를 하던 어머니도 때로는 사무치게 외롭지 않았을까. 은영은 자신이 인정하지 않는 감정을 타인에게 투영하려 했던 자신의 나약함에 몇 번씩이나 긴 한숨을 토해냈다. 그날 밤, 은영은 꽤 오랜 시간 동안 소파에 웅크려 앉아 눈물을 훔치 한숨을 쉬는 행위를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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