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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Made By me 1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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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희완 Jun 24. 2020

EP 11) 완성된 그림. D-Day.

episode 11.


그 무렵, 정완과 선영은 여전히 엇갈리고 있었다. 정완은 점점 수면제에 의존하는 추세가 되어버렸고 경미는 그런 정완을 볼 때마다 안타까워했다. 경미는 정완에게 출근할 때마다 사 오던 커피 대신 잠에 효능이 좋다는 캐모마일 차를 끓여주기 시작했다. 작업실에서 일을 마치고 나온 정완과 오전 수업을 마친 경미는 늦가을의 정취를 만끽하며 따사로운 햇살을 벗 삼아 따듯한 캐모마일 차를 마시고 있었다.


“오빠는 왜 점심 안 먹어요?”

“배가 안 고프니까. 경미 너도 점심 안 먹잖아.”

“저는 다이어트 때문에요.”

“얼마나 더 예뻐지려고?, 경미는 자기 관리도 열심히네.”

“자기 관리까지는 아니고요. 그나저나 이번 곡은 어때요?”

“평범해. 늘 해오던 곡들이랑 비슷한 장르니까.”

“나, 얼마 전에 오빠가 전에 썼던 가사 써먹었어요.”

“내가 쓴 가사?, 어떤 거?”

“추억은 같은 기억을 갖고 있어야 추억이라고, 다른 기억을 하고 있다면 그건 추억이 아니라고.”

“와, 그걸 기억하고 있었어?, 머리도 좋네. 도대체 경미는 못하는 게 뭐야?”

“못하는 거 많아요.”

“근데, 그 가사를 어디다 써먹었어?, SNS에 올리기라도 했어?”

“아니요. 아무튼 써먹었다고요.”


정완이 오랜만에 작업실을 지키고 있으니 경미는 괜히 한마디라도 더 걸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할 일이 딱히 없어도 정완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지금 이 시간이 너무나 행복했다. 가끔은 하릴없는 이런 날도 간절히 기다려질 때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옷차림이 또 한 번 변했다. 계절이 바뀌고 있음을 나타내는 증거였다. 평온하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경미를 방해라도 하듯 지수가 정완의 사무실을 찾아왔다.


“뭐야?, 둘이 사귀어?, 언제부터 그런 사이가 됐어?”

“경미 기분 나쁘겠다. 이 시간에 어쩐 일이야?”

“너한테 할 얘 있어서.”

“전화로 하지 왜?”

“내가 방해했니?, 잘못 찾아온 거야?”

“참나. 됐다, 됐어. 그래서 할 얘기가 뭔데?”
“여행 가자고.”


한 발짝 뒤로 물러나 있던 경미는 지수가 정완에게 하는 말을 듣고는 깜짝 놀랐다. 경미는 여행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무의식적으로 지수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는 본능적으로 지수에게 캐모마일 차를 대접할 준비를 했다.


“뭐?, 뜬금없이 무슨 여행이야?”

“뜬금없는 거 아니야. 오래전부터 계획했던 거야.”

“계획?,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선영이도 올 거야. 너는 어떻게 할래?”

“선영이가?”

“응. 요새 선영이랑 자꾸 엇갈리지?”

“요즘 계속 그렇게 되네.”

“선영이도 너랑 똑같은 생각이야. 엇갈리는 중이라며 몹시 슬퍼하고 있어.”

“우리.., 남은 아닌가 보다. 아직, 남이 되지는 않았구나..”

“보는 내가 다 안타까워서 너희 두 사람 만나게 해 주려고.”

“정말?, 언제 가는 건데?”

“이번 주 토요일. 시간은 아직 안 정했어. 장소는 양재역이고.”

“양재역?, 지하철 타고 가?”

“아니, 렌터카 빌렸어. 다 같이 갈 거야.”

“번거롭게 뭐 하러 그래, 차가 몇 대인데.”

“다 생각이 있으니까 그렇게 정한 거야. 불만 있으면 오지 말든가.”

“불만은 무슨, 당연히 가야지. 선영이가 간다는데.”


경미는 다용도실에서 지수의 눈치와 정완의 표정 변화를 동시에 살피고 있었다. 정완과 지수가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 지으려 하자 경미는 재빨리 지수 앞에 캐모마일 차를 내밀었다. 마침 정완은 자신에게 곡을 의뢰한 작곡가로부터 전화가 걸려오자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언니, 차 드세요. 불면증에 좋데요.”

“고마워요. 잘 마실게요. 근데, 정완이 불면증 도진 거 어떻게 알았어요?”

“불면증요?, 저는 그냥 요즘 오빠 얼굴이 안 좋아 보여서..”

“정완이 좋아하죠?”


경미는 허를 찌르는 지수의 한 마디에 전신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경미는 애써 부인해보았지만 심리학 박사과정의 끄트머리에 있는 지수를 이길 수는 없었다.


“경미 씨도 같이 갈래요?”

“저도요?”

“네. 조건만 갖추면 경미 씨도 같이 갈 수 있어요.”

“조건이라뇨?”


지수는 지금 눈앞에 펼쳐진 이 상황이 너무나 흥미진진했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병준에게 지금 이 장면을 실시간으로 중계해주고 싶었지만 아직 확정된 것이 아니기에 잠시 흥분을 가라앉히기로 했다.


“조건은 아주 간단해요. 남자 친구 데려오면 돼요.”

“남자 친구요?”

“네. 애인이든, 남자 사람 친구든, 동행할 남자만 한 명 데려오면 돼요. 구색은 맞춰야죠.”

“아니 그게.., 갑자기 그렇게 말씀하셔도..”

“정완이 때문에요?, 정완이한테는 비밀로 해줄게요. 어차피 지금 경미 씨가 정완이 좋아하는 거, 본인은 전혀 모르는 눈치던데.”


지수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말을 하지 못했던 경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이번 여행에 지수가 어떤 의도로 자신을 데리고 가려하는 것인지 확인부터 하기보다 그저 정완이 가는 곳을 무작정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 앞섰다. 급격하게 심경에 변화가 찾아온 경미는 지수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했다.


“이번 주 토요일이라고 했죠?”

“네, 아직 시간은 정하지 않았어요. 운전기사랑 상의를 좀 해보고 결정해야 될 문제라서.”

“운전기사요?”

“질문은 됐고, 갈 거예요, 말 거예요?”

“갈게요. 저도 갈래요.”

“그래요. 그럼 연락처 하나 적어줘요. 시간 정해지면 메시지로 알려줄게요.”

“잠시만요, 여기 명함 드릴게요. 장소는 양재역이죠?”

“귀가 참 밝으시네, 경미 씨는.”

“그런 거 아니에요. 언니, 차 식어요.”


통화를 마치고 온 정완은 지수와 경미가 웃으며 대화를 하고 있는 상황에 어리둥절했다. 지수의 표정을 보니 무언가 꿍꿍이가 있을 것이라는 의심이 들었지만 곧 선영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에 쓸데없는 것에 에너지를 소비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정완아. 얘기 끝났으니까 그만 갈게. 밥 좀 챙겨 먹어, 그 몰골을 하고 선영이 만나고 싶니?”

“내 얼굴 많이 이상해?, 면도 좀 해야겠지?”

“깔끔 떨던 애가 요즘 왜 이 모양이 일까.”

“고마워 지수야.”

“고마우면 잘 좀 해. 나는 약속이 있어서 이만 갈게. 경미 씨도 수고해요.”

“네 언니, 조심히 가세요.”


아무리 선영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어도 정완은 끝까지 정신 줄을 놓지 않았다. 이상하리만큼 친근하게 대화를 하는 두 사람이 너무나도 수상했기 때문이었다.


“지수랑 무슨 얘기 했어?”

“이런저런 얘기요.”

“수상한데.., 너 책잡힌 거 아니지?”

“그럴 리가요.”

“기분 탓인가..”

“오늘은 어디 안 가요?”

“저녁에 회의가 있는데, 그냥 거기서 곧장 퇴근하려고. 요즘 잠을 너무 못 잤더니 피곤하네.”

“그럼 이거 가져가요. 자기 전에 뜨거운 물에 타서 한 잔씩 마셔요.”

“아까 마신 차야?”

“네, 그리고 이것도 가져가서 자기 전에 베개에 한 두 방울 정도 뿌리고 자 봐요.”

“이건 또 뭐야?, 라벤더 오일?”

“네, 이것도 잠 안 올 때 효과가 좋데요.”

“고마워 경미야.”

“뭘요. 아무튼 저는 오후 수업 준비해야 되니까, 오빠도 일 보세요.”

“그래, 수고해.”


정완이 작업실에 들어가자 경미는 팔짱을 끼고 코앞으로 다가올 주말까지 지수가 제시한 조건을 어떻게 충족시킬 수 있는지 골똘히 생각해보았다. 굳이 애인이 아니어도 된다는 지수의 말을 되뇌던 경미는 문득 현수가 떠올랐다. 최근 현수와 이런저런 일들이 있던 것을 구실로 삼는다면 현수는 차마 자신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시간이 지나 어느덧 야간수업시간이 다가왔고 정완은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사무실을 나갔다.


일몰 시간이 당겨진 거리에는 쌀쌀맞은 바람이 갈 곳을 잃은 채 거리를 헤매고 다녔다.


“경미야, 안녕.”

“친한 척 좀 적당히 하지?”

“작업실 형은?, 어디 가셨나 봐?”

“응, 뭐.”

“추워졌다. 가을이 왜 이렇게 짧아졌나 몰라.”

“아참, 현수야.”

“응?”

“나랑 여행 갈래?”


순간, 현수는 마시고 있던 커피를 쏟을 뻔했다. 하지만 갑자기 여행을 가자는 경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었다. 


“누구랑 가는 건데?”

“아는 사람들이랑. 저번처럼 남자 친구인척만 해주면 되니까 부담은 갖지는 마.”

“남자 친구인 척해달라고?”

“응. 그냥 척만 해주면 돼.”

“내가 왜 그래 줘야 하는데?”

“네가 말하던 오해나 요전번에 허락도 없이 남자 친구인척 했던 거, 전부 없던 일로 해줄게. 그럼 됐지?”


현수는 커피를 입에 가져다 대며 잠시 고민을 했다. 이것을 기회라고 보아야 하는 것인지, 꼬임에 넘어가는 것이라고 보아야 하는 것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조건은 그거 하나야?”

“응, 다른 건 없어. 해 줄 거야?”

“언제 어디로 가면 되는 건데?”

“이번 주 토요일, 양재역. 시간은 아직 나도 몰라.”

“주말이네..”

“왜?, 약속 있어?”

“약속이 있긴 한데..”

“무리해서 억지로 갈 필요는 없어.”

“아니야, 미뤄도 되는 약속이야.”


현수는 어쩌면 이것이 좋은 기회가 될지 모른다고 판단했다. 그동안 지독한 악연이라는 이미지를 청산할 수 있고 심지어 여행을 가게 되면 무언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막연한 기대감 때문이었다.


“그럼 시간 잡히는 대로 메시지 보내줄게.”

“내 전화번호 알아?”

“네 생년월일을 어떻게 알았겠니?, 학원 등록할 때 적었던 서류는 폼이야?”

“대단하네. 근데 너, 나한테 관심 있어?”

“아, 조건을 더 붙여야겠어. 착각하지 말 것. 집적대지 말 것. 비밀을 지킬 것.”

“그새 조건이 많아졌네.”

“싫으면 관두던가. 다른 사람 부르면 돼.”

“아니야 갈게. 조건은 더 이상 늘리지 마.”

“어떤 일이 생겨도 꼭 지켜.”

“너도 약속 꼭 지켜. 그동안 있었던 일들 모조리 다 무효시켜주는 거다?”

“좋아.”


경미는 현수에게 손을 내밀었다. 무언가 굉장한 딜을 성사시킨 세계 각국의 정상들처럼 경미와 현수는 악수를 하며 활짝 웃었다.


경미는 현수가 사다준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야간수업 준비를 했다. 현수는 강의실에 앉아 교재를 펼쳐놓고 수업 준비를 하고 있는 경미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전에는 없었던 미묘한 기류가 흐르는 기분이었다. 핑크빛인지 잿빛인지 단언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현수는 왠지 모르게 자신이 사다준 커피를 마시고 있는 경미의 모습을 두 눈에 열심히 담고 있었다.


금요일 저녁이 되어서야 병준과 지수는 출발시간을 정할 수 있었다. 오래전부터 계획했던 여행이라고 생각했지만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그나마 하루 전이라도 시간을 정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에 만족했다.


                                                                                              -병준아. 장도 봐야 되는데 어쩌지?-

-그나저나 비용은 어떻게 하기로 한 거야?-

                                                                                         -논문 제출 때문에 아무것도 못 정했어.-

                                                                                                                              -어떡하지?-

-뭘 어떡해.-

-내일 만나서 정해야지 뭐.-

                                                                                                               -금방 정할 수 있을까?-

-숙박비는 내가 냈으니까, 지수 네가 렌터카 비용 내면 되고..-  

-내일 장보는 건 나머지 사람들이 내면 될 것 같아.-

                                                                                                 -미안, 일은 내가 다 저질러놓고..-

-한두 번인가 뭐.-

-그나저나 승합차는 어디다 써먹으려고?-

                                                                                                                 -내일 다 설명해줄게.-

-나는 모르겠다. 알아서 해.-

                                                                                                                              -나만 믿어.-

-아무튼, 정완 씨랑 선영 씨한테 시간이나 보내 놔.-

-깜빡했다면서 집 앞까지 픽업하러 가자고 하면 화낼 거니까.-

                                                                                                    -알았어, 바로 보낼게. 내일 봐.-

                                                                                                                        -고마워 병준아.-

-응, 내일 보자.-

-잘 자-

                                                                    


지수는 메시지로 정해진 시간을 정완과 선영, 그리고 경미에게 차례로 보냈다.


-내일 오전 10양재역 3번 출구 (신한은행 앞), 여행 경비는 당일 청구.-


메시지를 받은 정완은 집에서 대충 짐을 싸놓고 여행에 가서 선영에게 줄 편지를 마무리하기 위해 서둘러 작업실로 갔다.


같은 시각, 선영은 작은 가방에 짐을 싸고 있었지만 짐을 싸는 속도가 더뎠다. 집에 있는 어머니와 아버지 때문이었다.


                                                                                                                      -지수야. 있잖아..-

                                                                                                -이 여행, 정말 가도 괜찮은 걸까?-

-갑자기 왜 이러실까?, 가기로 한 거잖아.-

-이제 와서 말 바꾸면 안 되지.-

                                                                                                                -엄마랑 아빠 때문에..-

-내 그럴 줄 알았다.-

-너 그럴까 봐 내가 은영 언니한테 미리 부탁해놨어.-

-주말 동안 집에 좀 와달라고.-

                                                                                                                                   -정말?-

                                                                                                  -언니가 순순히 오겠다고 했어?-

                                                                                                             -주말에 약속 많을 텐데.-

-응, 정완이랑 간다고 하니까 바로 알겠다고 하던데?-

                                                                                                                              -다행이다.- 

                                                                         -너 없었으면 나는 어떻게 살고 있으려나 모르겠다.-

-짐은 다 챙겼어?-

-챙기는 김에 두꺼운 외투도 하나 챙겨.-

-산이라 밤 되면 추울 거야.-

                                                                                         -알았어. 그럼 내일 봐. 늦지 않게 갈게.-

-지각하기만 해. 벌금 왕창 물릴 거니까.-

-일찍 자.-


선영은 내내 답답했던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 들었다. 은영이 집에 와준다면 별로 걱정할 것이 없었다. 각자의 생활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선영은 쉽사리 은영에게 부탁하지 못했다. 이럴 때마다 시원시원하게 해결해주는 지수의 존재에 또 한 번 고마움을 느꼈다.


그 시각, 사무실에 도착한 정완은 선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응, 정완아.”

“지수가 보낸 메시지 받았지?”

“응, 내일 10시에 양재역..”

“왜 이렇게 기운이 없어?, 졸려?”

“아니, 그냥..”

“진작 이렇게 할 걸 그랬다. 지수는 역시 머리가 비상하다니까왜 나는 이렇게 간단한 일을 어렵게 빙빙 돌리고 있었을까?”

“그러게..”

“왜 그래?, 내일 만나는 거 안 내켜?”

“아니야, 나도 기대돼. 만나러 갈 거야, 꼭.”

“줄 거 있으니까 내일 만나면 줄게.”

“알겠어. 일찍 들어가서 자. 지각했다가 괜히 벌금 물지 말고.”

“벌금?, 그런 것도 있었어?”

“지수가 지각하면 벌금이래. 그것도 왕창.”

“늦으면 안 되겠네. 아무튼 선영아, 내일 보자. 많이 보고 싶어.”


선영은 전화를 끊고 짐을 챙기고는 곧장 침대에 누웠다. 할 말은 쌓일 대로 쌓여있었다. 하지만 막상 어떤 말부터 꺼내야 할지 머릿속이 복잡하기만 했다. 정완과 석 달이나 떨어져 있었던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기에 어떤 말부터 순서대로 꺼내야 꼬일 대로 꼬여버린 정완과의 매듭을 풀 수 있을지 선영은 고민에 여념이 없었다.


경미는 지수로부터 메시지를 받자마자 현수에게 곧장 전화를 걸었다.


“내일 오전 10시에 양재역에서 출발이고, 하루 자고 올 거야.”

“뭐?, 1박 2일?, 그걸 왜 지금 말해?”
“그래서 못 오시겠다?, 자꾸 투덜거릴 거면 지금 말해. 다른 사람 데려가면 되니까.”

“아니야, 아니야. 정확하게 시간 맞춰서 갈게.”

“넌 꼭 협박을 해야 알아듣는구나?”

“아무튼 갔다 오면 전에 있었던 일들은 다 잊는 거다?”

“약속이나 잘 지켜. 하나라도 안 지켜봐.”

“알았어, 알았다고. 숨 좀 쉬자.”

“늦지 마. 1분이라도 늦으면 버리고 갈 거니까.”

“누구랑 가는 건지 끝까지 말 안 해줄 거야?”

“몇 시간 안 남았어. 그냥 참고 자.”


경미는 진작부터 짐을 다 싸놓았다. 다소 커 보이는 캐리어가 조금 민망하기는 했지만 경미는 잔뜩 들떠있었다. 정완이 불행해지는 것을 원치 않았지만 만에 하나 불행해지기라도 한다면 자신이 거두어줄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다. 


한편, 현수는 백팩에 갈아입을 옷만 몇 장 챙긴 뒤 아무렇게나 던져놓고 알람을 맞추어놓았다. 그리고는 침대에 누워 점점 옥죄여오는 수상한 기운에 생각이 많아졌다. 옳은 결정인지, 잘못된 결정인지는 가보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그 시각, 정완은 여전히 자신의 작업실에서 선영에게 보낼 편지를 만들고 있었다. 골판지에 빽빽하게 적은 올곧지만 투박하지 않은 글씨를 보면서 만족해하던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오빠?, 아직, 안자요?”

“응, 영숙이구나. 오랜만이다. 어때?, 신혼생활은 달콤해?”

“말도 마요. 맨날 지지고 볶고 싸우기만 해요.”

“왜?, 싸울 일도 없어야 되는 거 아니야?”

“오빠가 결혼을 안 해봐서 그래요. 준비하는 것부터 얼마나 많이 부딪히는데요.”

“부딪힐게 그렇게나 많아?”

“그럼요. 오늘도 싸웠어요.”

“오늘도?, 왜 싸웠는데?”

“결혼 전에는 알아서 척척 안전벨트를 채워주더니, 결혼하고 나니까 자기 혼자 살겠다고 본인만 벨트를 매는 거 있죠?, 아차 싶더라고요. 이제 내 목숨 따위는 안중에도 없구나, 뭐 이런 생각이 드니까 눈물이 막 나는 거예요. 내가 울면서 안전벨트를 매는데도 쳐다보지도 않더라고요. 오늘 진짜 너무 서러웠어요.”

“저기, 영숙아..”

“오빠. 이 사람, 이제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거죠?, 그렇죠?”

“아니 영숙아, 내 말 좀 들어봐.”

“미안해요. 너무 억울해서..”

“그래, 네 성격상 그럴 수 있다고 이해해줄 수는 있는데, 너는 사랑의 기준이 정말 모호한 것 같아.”

“내가 이상한 거예요?”

“이상하다고 말하는 건 좀 그렇고.”

“그럼 뭔데요?, 이런 일로 사랑이네 아니네 하는 게 잘못된 거예요?”

“영숙아. 그 사람이 더 이상 너를 사랑하지 않게 되었다고 느꼈을 때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알아차릴 수 있는 기준이 하나 있어.”

“그 기준이 뭔데요?”

“상대방과 대화가 끊겼을 때야. 그때가 바로 그 사람과의 관계가 끝나 버리는 거라고.”

“듣고 보니 맞는 말 같기도 하네요.”

“서럽고 억울한 건 그냥 네 기준이잖아. 그렇다고 아예 대화가 끊겨버린 것도 아니고.”

“그건 그래요. 근데 오빠는 결혼 언제 해요?”

“준비가 되면 하려고..”

“오빠는 꼭 결혼 얘기하면 말끝을 흐리더라. 그러지 말고 그냥 해요. 전에 오빠가 그랬잖아요. 넘어지고 상처가 나 봐야 아픈 것도 알고 조심도 하게 된다고. 부딪혀보라고 말한 건 오빤데, 왜 오빠는 뱉은 말에 책임감이 그리 없어요?”

“그거랑 그거는 다른 거지.”

“다르긴 뭐가 달라요. 더 나이 먹기 전에 언니랑 빨리 결혼해요.”

“응.., 새겨들을게.”

“아참, 언니한테 고맙다는 말도 못 했는데 언니 만나면 고마웠다고 꼭 좀 전해주세요. 결혼식 도와주시느라 엄청 고생하셨잖아요.”

“그래, 꼭 전해줄게.”

“그리고 오빠, 내가 인생 선배로서 충고하나 할게요. 매일 비슷한 패턴으로 싸우게 되지만 아무리 싸워대도 내 자리가 있다는 게 결혼이에요. 마음이 약해질 것 같을 때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게 가정이고요. 잘 새겨들어요.”

“영숙이 네가 나보다 먼저 결혼했으니 인생선배 맞네. 조언도 고맙다.”

“조만간 좋은 소식 들려오길 기대하고 있을게요. 또 연락할게요.”

“응, 고맙다.”


영숙과의 통화를 마치고 두 시간 정도 흘렀을 무렵, 정완은 비로소 완성된 결과물을 번쩍 들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지각을 면하기 위해 서둘러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침대에 누웠다. 오늘따라 정완은 신기하게도 수면제의 도움 없이 가뿐하게 아늑한 잠의 문턱을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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