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2) 여섯 개의 마음. 시작되는 이야기 - 上.
episode 12.
다음 날 아침, 병준과 지수는 약속한 장소에 가장 먼저 도착해 있었다. 병준은 빌려온 승합차에 앉아 비상등을 켠 채 먼저 도착할 사람이 누군지 맞춰보기로 했다. 지수는 혹시라도 정완과 선영이 승합차를 발견하지 못할까 싶어 굳이 차에서 내려 은행 앞에 서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완이 도착했고 뒤이어 곧 선영도 도착했다. 병준은 나머지 한 사람이 누구인지 촉각이 곤두서 있었다. 정완은 선영의 짐을 받아 들고는 자신의 짐과 함께 승합차의 트렁크에 넣었다. 정완의 표정은 지난번보다 한층 밝아져 있었다. 이를 고깝게 보던 지수가 정완을 향해 말했다.
“아주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네. 못 봐주겠다 정말.”
“지수야, 네 짝은 차에 있잖아. 나는 선영이 거라고.”
“출발도 안 했는데 벌써부터 멀미가 나네. 선영아, 너는 저런 덜떨어진 애가 어디가 그렇게 좋은 거야?”
“덜떨어졌다니, 우리 정완이한테 막말하지 마.”
“아, 머리야. 졌다 졌어. 그렇게 좋아 죽겠으면서 왜 그 난리를 떨었던 거니?”
“그만하고 타자. 병준 씨한테 인사도 해야지.”
이를 지켜보던 병준이 차에 타는 선영과 정완에게 먼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인사를 나누고 10시 정각에 가까워져 갈 무렵 지하철 출구에서 커다란 캐리어를 힘겹게 들고 올라오는 한 남자와 한껏 멋을 낸 여자가 네 사람의 눈에 포착되었다.
“경미 씨, 여기야 여기.”
지수는 경미의 이름을 부르며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차 안에 있던 나머지 세 사람은 이 상황을 넋을 놓고 바라만 보았다. 쏜살같이 차에서 내린 정완이 지수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오기로 했다던 사람이 경미였어?”
“응, 내가 초대했어. 왜?, 문제 있어?, 남자 친구도 같이 왔잖아.”
정완은 경미 옆에 있는 남자를 기억하고 있었다. 경미의 수강생이었다. 정완은 훤칠한 키 때문에 유독 눈에 띄었던 현수를 기억하고 있었다. 정완은 반가운 마음에 현수에게 다가가 말했다.
“경미 남자 친구?”
“아.., 네. 정현수입니다.”
“경미야, 남자 친구 생겼으면 오빠한테 먼저 말을 했어야지.”
“만난 지 얼마 안 돼서요. 좀 더 친해지면 소개할까 했죠.”
“나중에 다 같이 시간 맞춰서 밥 한 끼 먹자. 전에 말했지?, 경미 남자 친구 생기면 근사한 곳에서 저녁 산다고.”
“네, 알겠어요.”
선영은 정완이 하고 있는 행동이 못마땅했다. 그렇지 않아도 상당히 친근해 보이는 경미의 말투가 상당히 거슬렸던 선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말을 아끼기로 했다. 될 수 있으면 이번 여행에서 정완과 얽혀있는 매듭을 완전히 풀어내야겠다는 생각만 했다. 바닥부터 뒤죽박죽으로 꼬여있는 매듭을 풀어내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승합차에 모두 모인 여섯 명은 각자 짧게 통성명을 하며 인사를 나누었다. 현수는 차에 타고나서야 무언가 굉장히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느꼈다. 하지만 경미와의 약속을 지키고자 묵묵히 자리에 앉았다. 병준은 목적지를 간략하게 설명했고 비용 부담에 대해 말했다. 정완은 경미와 현수를 대신해 장보는 비용을 모두 지불하기로 했다. 선영은 조금 기분이 상할 뻔했지만 자신들보다 한참 어린 동생들에게 비용을 문제로 삼아 얼굴을 붉히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비교적 빠르고 수월하게 정리된 것이 꽤나 만족스러웠던 병준은 목적지인 강원도 화천으로 차를 몰았다.
차량이 이동하는 동안 차 안은 비교적 조용했다. 답답함을 느꼈던 현수는 경미와의 약속을 벗어나지 않는 범주라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에 차에 탔을 때부터 느꼈던 수상함을 확인하고자 입을 열었다.
“이거 지금 커플여행 맞죠?, 근데 어째 정상적인 커플은 저희밖에 없는 것 같네요.”
경미는 자신의 어깨에 자연스럽게 팔을 올리려던 현수의 허벅지를 세게 꼬집었다. 쓸데없는 소리는 가급적 하지 않았으면 했던 경미는 다급히 둘러댈 변명거리를 찾고 있었다.
바로 그때, 조수석에 앉아있던 정완이 말했다.
“아무래도 자리 배치가 엉망이죠?”
이를 눈치챈 병준은 정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정완의 말에 동조했다.
“아주 잘못됐죠. 왜 지수가 아니라 정완 씨가 제 옆에 앉아 있는 거죠?”
“지수 때문이죠 뭐. 도착하기 전까지는 선영이를 줄 수 없다는데, 난들 어쩌겠어요?”
“이따가 휴게소 한번 들릴 건데, 휴게소 도착하면 자리 좀 바꿉시다.”
“바라던 바입니다.”
경미는 위급한 상황을 정완이 잘 넘겨주었다고 생각했다. 지수와 선영 또한 같은 생각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차에 타고 있는 여섯 명은 실제로 연인관계가 아님을 매우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차량 안에는 잠시 인위적인 웃음소리가 들리는가 싶었지만 이내 잠잠해졌다. 1시간여를 달려간 끝에 휴게소에 도착한 일행은 저마다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차에서 내렸다.
차에서 내린 병준이 조용히 지수에게 다가가 물었다.
“지수야, 그나저나 언제 알려줄 거야?”
“도착하면 얘기해줄게. 무슨 남자가 이렇게 인내심이 없니?”
지수에게 질문을 하던 병준이 휴게소 안쪽에 있는 편의점으로 가자 곧장 선영이 지수에게 다가왔다.
“너 제정신이야?, 경미 씨는 왜 데리고 온 거야?”
“슬프구나, 나의 깊은 뜻을 헤아려 주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니.”
“말 돌리지 마.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고.”
“화장실이나 가자, 참느라 혼났어.”
지수는 선영의 팔을 잡아채고는 끌고 가듯 선영을 화장실로 데려갔다. 뒤이어 정완도 차에서 내려 기지개를 켰다. 그 모습을 본 경미는 정완에게 곧장 다가갔다.
“오빠, 우리 사진 찍어요.”
“사진 찍어 달라고?”
“아니요. 우리 둘이 사진 찍자고요. 현수야, 사진 좀 찍어줘.”
경미는 들고 있던 카메라를 현수에게 주고 정완의 팔짱을 낀 채 포즈를 취했다. 현수는 기가 막힐 노릇이었지만 경미와의 약속을 떠올리며 시키는 대로 카메라의 셔터를 눌렀다.
현수의 표정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다고 느낀 정완은 경미와 현수를 나란히 세워놓았다.
“둘이 잘 어울린다. 좀 웃어봐.”
경미와 현수는 억지로 웃으며 최대한 다정한 척 포즈를 취했다. 현수는 사진을 찍은 뒤 경미를 힐끔 쳐다보았다. 아까와는 완전히 다른 표정을 짓고 있는 경미를 본 현수는 내심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이것 역시 어디까지나 비즈니스임을 잊지 않으려 최대한 노력했다.
편의점에서 간단하게 마실 것을 사 온 병준은 자연스럽게 뒷자리에 앉았다. 화장실에 다녀온 정완 역시 자연스럽게 운전석에 앉았고 뒤를 따라 나온 지수와 선영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각자가 앉아야 할 자리를 찾아 앉았다. 맨 뒷좌석에 앉아있던 현수는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고는 눈을 감았다. 보지도 듣지도 않는다면 더 이상 확인하고 싶어 지는 충동을 자제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내비게이션을 따라 목적지 인근에 도착한 것을 확인한 정완은 한 대형마트 앞에 차를 세웠다. 펜션에 도착해서 먹을 음식과 필요한 물품을 사기 위함이었다.
“지수야, 장 볼 것들 적어놓은 거 있어?”
“아니, 따로 적어놓은 건 없는데.”
“우리 몇 끼나 해 먹을 것 같아?”
“다들 아침 안 먹었지?, 그럼 최소 세끼는 먹어야 되지 않겠어?”
“그러면 우리끼리 장 보러 갔다 올게.”
“그러지 말고 다 같이 가자.”
“정신없을 텐데..”
“그래요, 그냥 다 같이 가요.”
일행은 차에서 내려 마트 안으로 들어갔다. 지수는 가장 먼저 주류 코너로 갔다. 정완과 선영은 물과 즉석 밥을 카트에 담았고 병준은 정육코너에 들러 고기를 사들고는 지수가 있는 주류 코너로 이동했다. 미아가 된 기분으로 멍하니 서있던 경미의 손을 잡은 현수는 마트 이곳저곳을 다니며 과자와 라면 그리고 생수와 음료수, 각종 1회 용품 등 필요해 보이는 물건을 집어 들고는 정완과 선영이 있는 곳으로 갔다. 마침내 장보기를 마친 일행은 주차된 차량에 짐을 싣고 최종 목적지인 풍차 모양의 펜션으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일행은 펜션에 도착했다. 산으로 둘러 쌓여있는 펜션 주변의 풍경이 한 폭의 그림 같았다. 화선지에 초록색 잉크를 뿌려놓은 것 같은 산세가 한눈에 들어오자 일행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차에서 내려 눈앞에 펼쳐진 경관에 감탄사를 연발했다.
“자자, 여러분. 집중하세요 집중.”
지수는 경치를 감상하던 일행들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다들 휴대폰 좀 주시겠어요?, 뭐 급한 일이 있다거나 꼭 통화를 해야 할 상황이면 지금 하시고 통화가 끝나면 여기에 넣어주세요.”
지수는 싱글벙글 웃으며 양철로 된 자물쇠가 달린 사각형의 상자를 들고 있었다. 일행은 지수가 하는 말을 단번에 이해하지 못했다.
“다들 내가 왜 승합차를 타고 오자고 했는지, 왜 휴대폰을 달라고 하는지 정말 모르는 눈치네.”
“말을 해야 알지.”
지수의 뜻을 전혀 알 리 없었던 병준이 마지못해 대꾸했다. 그런 병준의 표정을 본 지수는 차례로 일행들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모두가 병준과 같은 표정이었다.
“어떤 일이 생겨도 혼자 내빼지 못하게 하려고 승합차를 타고 온 것이고, 무슨 일이 있어도 방해받지 말자는 취지라고.”
지수의 말이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던 선영이 말했다.
“이게 여행이니?, 아니면 생존게임이니?”
바로 그때, 경미가 지수에게 다가와 휴대폰을 건네며 말했다.
“좋은 생각인 것 같아요 언니. 저는 동의해요.”
“내가 사람 보는 눈은 있다니까. 자, 다음은?”
현수도 경미의 뒤를 따라 지수가 들고 있던 상자에 휴대폰을 넣으며 말했다.
“바늘 가는데 실도 가야죠. 저도 동의할게요.”
서로의 눈치만 살피던 정완과 선영도 마지못해 휴대폰을 상자에 넣었다.
“다들 동의한 거다?”
“위급상황이 발생하면 어떻게 할 건데?”
병준은 냉정했다. 어떠한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투로 마지막까지 지수에게 저항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내가 해결하면 되지. 열쇠는 나한테 있으니까. 그럼 됐지?”
“못 말리겠다 정말.”
병준은 저항을 포기하고 지수의 뜻에 따라 마지막으로 휴대폰을 상자에 넣었다. 휴대폰을 반강제로 반납한 일행은 트렁크를 열고 각자의 짐을 꺼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짐을 꺼내러 간 현수가 경미의 커다란 캐리어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아참, 기왕 이렇게 된 거 다들 말씀 편하게 하세요.”
“그럼 그럴까?”
“뭐, 아무래도 그게 낫지. 여자분은 경미라고 했나?”
“병준 씨, 이참에 우리도 말 트죠?”
“좋죠, 그럼 그렇게 합시다.”
“좋아요. 그럼 저도 언니, 오빠라고 부를게요.”
일행이 펜션에 도착한 이후로 한층 편해진 분위기가 만들어진 탓인지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펜션의 사장님을 만나 인사를 나눈 병준은 호수별로 적혀있는 열쇠를 받아 들고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짐을 내리다 말고 열쇠를 받으러 갔다 온 병준의 표정을 본 지수가 병준에게 물었다.
“왜 그래?, 뭐가 잘못됐어?”
“응, 방이 두 개밖에 없데.”
“뭐?, 그걸 왜 이제 얘기해준데?”
“오늘 아침에 보일러 점검하려다가 온수관이 터지는 바람에 갑자기 수리를 해야 되는 상황인가 봐. 어쩌지?”
“어쩌긴 뭘 어째. 한방에는 남자들, 한방에는 여자들 이렇게 하면 되지.”
“그래도.., 오늘 처음 보는 사람도 있는데 같이 자기는 좀 그렇잖아.”
“그럼 차에서 자던가.”
“밖이 얼마나 추운데, 그리고 펜션 비용은 내가 냈거든?”
“잔말 말고 열쇠나 줘.”
병준은 지수가 방을 세 개 잡으라고 했을 때 은근슬쩍 기대를 했다. 정완과 선영이 한 방을 쓰게 되면 자연스럽게 지수와 한 방을 쓰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아무리 올곧고 대쪽 같은 병준도 이성 앞에서는 그저 한 마리의 수컷일 뿐이었다.
“지수 누나, 짐 어디로 옮기면 돼요?”
“2층이야. 2층 202호가 남자들 방이고, 204호가 여자들 방이야.”
“방이 두 개밖에 없어요?”
“그렇다나 봐. 왜?, 너도 아쉽니?”
“아니, 뭐 꼭 그런 건 아니고요.”
“다 똑같네 이것들은.”
경미의 캐리어를 한쪽 팔로 들고 지수와 선영의 가방을 포함해 자신의 백팩까지 둘러맨 현수는 계단을 올라 2층으로 짐을 옮겼다. 힘든 기색 없이 계단을 올라가는 현수를 본 정완과 병준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지수와 선영 또한 마찬가지였다.
“야, 나도 저 나이 때는 저 정도 했어. 안 그래 병준아?”
“난 더 무거운 것도 들었어. 저건 일도 아니었지.”
“놀고들 있네. 아무튼 남자들이란..”
“지수야, 우리도 가만있지 말고 장 봐 온 거 들고 올라가자.”
한편 경미는 휴대폰을 반납하고 난 후부터 줄곧 말이 없었다. 그 모습을 본 정완이 경미에게 다가가 말했다.
“경미야, 어디 아파?, 멀미해?”
“아니에요, 오빠. 시키는 게 없으니까 뭘 해야 할지 몰라서요.”
“아, 그런 거였어?, 그럼 됐어. 우리가 알아서 할게.”
장을 봐온 물건들을 옮기던 선영은 정완이 하는 말을 듣자마자 낯빛이 변했다. 하지만 정완과의 관계를 악화시키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딱히 정완이 경미에게 마음이 있어서 하는 행동은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에 평소처럼 가슴에 쌓아놓을 뿐이었다. 하지만 심술이 난 선영은 큰 소리로 정완을 불렀다.
“정완아, 얼른 와서 이것 좀 들어줘.”
“응. 무거운 거는 들지 마. 다치면 어떡하려고.”
선영의 부름에 쪼르르 달려가는 정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경미도 자신의 카메라와 소지품을 들고 정완을 따라갔다. 병준은 차에 시동을 끄고 빠뜨린 물건은 없는지 차 안을 살펴보았다. 나머지 짐들을 챙기고 차 문이 잘 잠겼는지까지 확인하고서야 2층으로 올라갔다.
오후 2시가 되어 갈 때쯤 일행은 모든 짐을 옮긴 후 2층에 있는 널찍한 테라스에서 점심식사 준비를 했다. 남자들은 주로 물건을 옮겼고 여자들은 오늘 먹을 음식과 내일 먹을 음식을 구별해 놓았다. 각자가 알아서 맡은 일을 하는 동안 경미는 여전히 우물쭈물하고 있을 뿐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스스로 찾아내지 못했다. 아침부터 그런 경미의 모습이 신경이 쓰였던 현수는 경미에게 자질구레한 일을 부탁하기 시작했다. 현수는 무언가 큰일은 아니더라도 경미 스스로가 도움이 되고 있다는 정도만 느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점심메뉴는 즉석밥과 라면이었다. 마트에서 사 온 종이컵과 나무젓가락, 김치와 일회용 접시를 펼쳐놓은 지수는 라면의 개수 때문에 고민하고 있는 선영을 도와 라면의 봉지를 찢었다. 테라스 난간에 기대어 지수와 선영을 바라보던 정완이 병준에게 말했다.
“병준아. 그림 참 예쁘지?”
“그러게. 진작 이렇게 여행도 좀 다니고 할 걸 그랬다.”
“그나저나 지수한테 언제 고백할 건데?”
“글쎄, 할 수 있을지나 모르겠네.”
“왜?, 둘이 무슨 일 있는 거야?”
“딱히, 그런 건 아니고..”
정완과 병준이 대화를 하는 사이 점심식사 준비가 끝났다. 옷을 갈아입으러 간 현수를 부르러 갔던 경미가 돌아오자 정완과 병준은 하던 이야기를 멈추고 지수가 음식을 차려놓은 곳에 앉았다. 때마침 도착한 현수는 배가 고팠는지 자리에 앉자마자 젓가락부터 손에 쥐었다.
“지수 누나. 우리 점심 먹고 뭐해요?”
“글쎄.., 뭐 하고 싶은 거 있어?”
“아니요. 딱히 하고 싶은 건 없어요.”
“근데 왜?”
“이번 여행.., 누나가 계획한 거죠?”
현수의 접시에 라면을 덜어주던 지수는 순간 멈칫했다. 어떤 의미로 말을 꺼낸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기 때문이었을까. 지수는 현수의 심리를 읽어보려 했지만 현수의 말에서는 어떤 의도나 목적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없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읽히지 않는다는 느낌이 강했다.
경미는 모두의 종이컵에 물을 채워서 나누어 주었다. 김치가 부족해지면 김치를 채워놓고 물이 비워져 있으면 다시 채워놓기를 반복했다.
점심식사를 마친 일행이 하나둘 뒷정리를 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그때 경미가 말했다.
“뒷정리는 제가 할게요. 언니 오빠들은 쉬세요. 오빠들은 운전하느라 힘들었을 테고, 언니들은 식사 준비하느라 힘들었을 테니까 뒷정리는 제가 할 수 있게 해 주세요.”
경미는 겨우겨우 용기를 내어 자신의 의지대로 하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다. 아까부터 눈치를 채고 있던 현수는 경미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주고 싶은 마음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말했다.
“그래요. 형들, 누나들 고생 많이 하셨으니 치우는 건 저희가 할게요.”
경미는 항상 어떤 상황이 주어져도 빠르게 적응하는 정완을 신기해했었다. 하지만 어떤 상황 앞에서도 수동적이지 않고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사람은 정완만이 아니었다. 현수도 낯선 환경에 발 빠르게 적응하는 것을 본 경미는 적응력은 나이와는 무관하다는 생각을 했다.
생각하고 있는 것을 행동에 옮기는 것. 경미는 점식식사를 하는 동안 자신이 보내온 지난날을 잠시 돌이켜보았다. 자신의 의지를 얼마만큼 표현을 해왔는지에 대해서 골똘히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상황 앞에서 그 어떤 방식으로도 자신의 의지를 굳건히 표명해본 적이 없었음을 깨달았다. 경미는 자신의 일은 스스로가 행동으로 옮겨놓지 못하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신이 생각하고 느끼고 있는 감정을 말이나 행동으로 보여주지 않으면 더더욱 의미가 없다는 것을 조금이나마 깨닫게 되었다.
지수를 비롯한 일행들은 마지못해 경미와 현수에게 뒷정리를 맡기고 테라스 밖으로 나왔다.
지수는 정완과 선영을 위해 둘만의 시간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병준아, 우리 소화도 시킬 겸 산책이나 할까?”
“좋지, 안 그래도 그 말하려고 했는데.”
“우리 지금 통한 거야?”
“그럴걸?”
정완이 선영에게 줄 편지를 가지러 잠시 방으로 들어간 사이, 지수와 병준은 산책을 간다며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을 따라 내려온 지수와 병준은 나무로 된 팻말을 따라 펜션의 주차장과 연결되어있는 산책로로 향했다.
방으로 들어온 정완은 급하게 나오는 바람에 선영에게 줄 편지를 두고 왔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챘다. 밖에서 정완을 기다리고 있던 선영은 한참 동안 방에서 나오지 않는 정완을 찾아 남자방으로 향했다.
“뭐해?”
“너한테 줄 거 있었는데.., 놓고 왔나 봐.”
“괜찮아, 다음에 주면 되지 뭘.”
“기껏 다 만들었는데, 짜증 나네.”
“짜증내서 뭐해, 꼭 오늘이 아니어도 되잖아?, 우리도 바람 쐬러 가자. 응?”
“지수는?”
“방금 산책하러 간다고 갔어.”
“요즘 왜 이렇게 깜빡하지..”
“뭔데 그래?”
“아니야. 집에 가면 그때 줄게, 미안해.”
“그래, 짜증 그만 내. 기왕 놀러 온 거 좋은 기분으로 있다 가자.”
“알았어, 그럼 우리도 좀 걸을까?”
“응, 여기 오니까 공기도 너무 좋고, 기분도 너무 좋다.”
정완과 선영은 펜션 밖으로 나와 지수와 병준이 먼저 출발했던 산책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정완의 손을 잡고 보폭을 맞추어 걷다 보니 자연스레 옛 생각이 났던 선영은 지갑 속에 간직하고 있던 사진 한 장을 꺼내어 정완에게 보여주었다.
선영이 정완에게 내민 사진은 오래전 선영과 정완이 함께 일본으로 여행을 갔을 때 찍었던 사진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선영은 디지털카메라보다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선호했다. 필요할 때 언제든 인화할 수 없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지만 세상에 단 한 장뿐이라는 희소성에 많은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이었다.
“이때 기억나?”
“당연하지, 기억이 안 나는 게 이상하지. 우리 참 어렸었네.”
“그치?, 나 볼 살 통통한 것 좀 봐.”
“귀여운데 뭘.”
“지금은?”
“지금?, 지금은 예쁘지.”
“말 더듬지 말고.”
“아니야, 진짜야. 근데 너, SNS에 사진은 왜 지운 거야?”
“아, 그거?”
“응. 나는 아직도 그때 그 사진인데.”
“그날.., 솔직히 너무 화가 났었어. 화가 난 것도 이유였지만 정완이 네가 밉기도 했고, 우리들이 같이 보낸 7년도 조금 미웠었어.”
“나만 미워하면 됐지 왜 우리들이 보낸 시간까지 미워해?”
“그냥.., 그때는 내가 정말 원하는 게 무엇인지, 내가 바라던 게 무엇이었는지 진심으로 알고 싶기도 했고.”
“그래서, 알아냈어?”
“완전히는 아니지만, 아주 조금은 알아낸 것 같기도 해.”
정완은 석 달 전 선영이 헤어지자고 말했던 그날을 회상했다. 함께 보낸 7년을 미워할 만큼 화가 났던 선영을 잡지 않았던 그날의 상황을 정완은 조목조목 기억하고 있었다.
“억지로 밥 먹기 싫어. 그냥 배고프면 먹는 거지 왜 자꾸 잔소리야.”
“너랑은 참 말이 안 통해. 나 TV 볼 거니까 말 시키지 마.”
정완은 헤드폰을 쓰기 전 TV 앞에서 티슈로 눈물을 닦고 있는 선영을 힐끔 쳐다보았다. 언제부터인가 정완은 토라진 선영을 다독여주지 않았다. 그리고는 디지털피아노에 헤드폰을 연결한 후, 곡 작업에만 몰두했다.
한참 동안 TV의 채널을 바꾸던 선영은 때마침 빼놓지 않고 챙겨보던 드라마가 시작하자 채널을 고정했다. 곧이어 그 드라마의 최종회가 방영되었고 드라마에 푹 빠져있던 선영은 부디 주인공들이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기를 염원하며 두 손을 모았다.
선영은 조금 전 정완과의 다툼은 까맣게 잊어버린 채 드라마 속 주인공들의 재회를 열렬히 응원했다. 선영의 감정은 가공의 인물에 도취되어 설렘과 안타까움으로 시작해 간절함과 애달픔으로 치닫고 있었다. 정완과는 다른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을까. 정완의 말투와 행동, 생각과 성격 중 그 어느 하나 닮아있지 않아서였을까. 정완이 곡 작업을 마쳤을 때 드라마는 마침내 선영의 바람대로 끝이 났다.
곡 작업을 마친 후 인스턴트커피를 마시고 있던 정완에게 선영은 아쉬움이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
“왜 꼭 마지막 회는 몇 달 후, 아니면 몇 년 후, 이러면서 급하게 마무리를 하는 거야?”
“그 몇 년 동안의 이야기를 다 해버리면 그게 주말 드라마야?, 대하드라마지.”
“그래도 아쉬운 걸 어떡해. 내가 응원해서 잘 된 기분이었는데.”
“너 아니었어도 아마 해피엔딩으로 끝났을 거야.”
“너는 말을 꼭 그렇게 하더라. 그나저나 정완아, 우리는 언제 결혼해서 언제 아기 낳아?, 지금 낳아도 우리가 마흔 살 정도 되어야 초등학교 갈 텐데..”
“선영아, 전에 드라마 볼 때도 내가 얘기했지?”
“무슨 얘기?”
“얼마 전에 만삭의 산모가 위급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말이야. 산모를 택할 것이냐, 아기를 택할 것이냐고 물어봤었잖아.”
“아, 그 드라마?”
“응. 나는 지금도 같은 질문을 받아도 그때랑 똑같이 말할 거야.”
“그때 뭐라고 했었지?”
“나는 너야. 망설일 필요도 없이 너라고.”
“그럼 아기는?, 아기가 불쌍하지도 않아?”
“별로.”
“매정하다 너.”
“내가 매정한 거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너인데, 왜 굳이 아기를 택해서 너를 죽게 만들어?”
“그래도 불쌍하잖아..”
“혼자 남겨진 내가 더 불쌍하겠다.”
“근데 우리 도대체 결혼은 언제 하고 아기는 언제 낳아?”
“내 말 허투루 듣지 마. 나는 너랑 결혼할 생각은 있지만 아기를 키울 생각은 없어.”
“그럼 결혼을 왜 하는데?, 결혼하면 당연히 아기를 낳아야 하는 거 아니야?”
“그게 왜 당연해?, 요즘 아기 없이도 행복하게 잘 사는 부부들도 많아. 결혼하면 당연히 아기를 낳고 키워야 한다는 게 도대체 무슨 논리야?”
“결혼이 하고 싶긴 한 거니?”
“하고 싶다고 했잖아.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상대가 너라면 나는 마다할 이유가 없어.”
“나는 아기를 원해 정완아.”
“나는 너만 원해.”
선영은 왠지 모를 서운함이 밀려왔다. 따지고 보면 정완이 분명 나쁜 뜻으로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선영이 생각하는 결혼은 둘만의 행복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결혼을 하면 가족을 꾸리고 꾸려진 가정을 잘 이끌어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완이 말하는 결혼의 의미는 연애의 연장선 같은 느낌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의견이 좁혀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곧 두 사람의 대화는 끊기고 말았다.
일시적인 침묵을 깨고 선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헤어지자.”
선영은 가방을 챙겨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문 쪽으로 갔다.
“왜 또 그래?”
정완은 현관 앞에 꼿꼿이 서서 신발을 신고 있는 선영을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어쩌다 한 번씩 겪는 진통 정도라고 여겼다. 이번 일도 역시 별일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전과는 달리 선영은 한 마디 대꾸도 하지 않은 채 현관문을 열고 그대로 정완의 집을 나가버렸다.
선영의 손을 잡고 있던 정완의 손에 힘이 들어가자 선영은 가던 길을 멈추고 정완을 쳐다보았다.
“정완아, 무슨 생각해?”
선영이 7년이라는 시간에 의미를 붙이려 했던 이유를 깨달은 정완은 선영에게 말했다.
“선영아, 그날 있잖아.., 내가 잘못했어.”
“아니야, 나도 잘한 거 없는데 뭘.”
“미안하다는 말도, 고맙다는 말도 어느새부턴가 익숙해졌나 봐. 마치 당연히 하는 인사 같은 걸로 생각했나 봐. 표현 하나하나에 신경 쓰지 못해서 미안하고, 네 입장이 되어서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도 미안해.”
“나도 미안해. 실은 너랑 헤어지고 나서 줄곧 떼를 쓰는 것 같다는 생각 때문에 마음이 편하지 않았어. 당장 결혼을 한다고 해도 바로 아기를 낳을 것도 아니었으면서 나는 뭐가 그렇게 급했던 걸까?..”
정완은 목소리가 점점 작아져가는 선영을 꽉 안았다.
“선영아, 네 마음 모르는 거 아니야. 그때도 지금도 나는 너를 사랑해.”
“나도 사랑해.”
선영은 오랜만에 정완에 품에 안겼음에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눈물이 나올 만큼 듣고 싶었던 말이었고 눈물이 나올 것 같은 상황이었음에도 선영은 울지 않았다.
한편, 테라스 주변을 말끔하게 정리한 경미는 열심히 쓰레기를 봉투에 담고 있던 현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고마워 현수야.”
“뭘..”
“나, 바보 같지?”
“아니.”
경미의 말에 현수는 짧게 답했다.
창피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경미를 애써 못 본 척하며 현수는 쓰레기로 가득 찬 봉투를 묶었다.
“나 사실, 중학교 때부터 줄곧 따돌림을 당했었어. 길도 잘 못 찾고 덤벙거리기 일쑤였는데 누구들 눈에는 그게 다 연기로 보였나 봐.”
현수는 쓰레기봉투를 내려놓고는 경미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옛날부터 그랬어. 누가 나를 좋아한다고 하면 거절을 못했어. 그 사람이 상처받을까 봐. 혹은 내가 그 사람한테 미움을 받을까 봐. 중학교 2학년 때였나, 한 번은 선배라는 남자가 나를 좋아한다며 고백을 했어. 반애들이 모두 보고 있는 교실에서.”
“모르는 사람이었어?”
“응, 전혀. 나는 내 의지대로 하지 못했어. 그때도 마찬가지로 그 사람이 상처받을까 봐, 아니면 내가 미움을 받을까 봐 그 고백을 받아줬어.”
“반 친구들이 다 보고 있는데도?, 용감했구나, 너.”
“미련했던 거지. 그 선배라는 남자가 꽤나 인기가 있던 사람이었나 보더라고.”
“애들이 질투했구나?”
“질투만 했으면 다행이었게?”
“그럼?, 또 무슨 일이 있었는데?”
“그 남자.., 앞에서는 나를 좋아하는 척했던 거였어. 뒤에서는 나를 욕하고 다녔으면서..”
“욕 한 거는 어떻게 알았어?”
“듣고 싶지 않아도 들리더라고. 먼지 같은 소문도 내 귀에는 눈덩이처럼 불어나서 들려왔으니까.”
“그게 따돌림을 당한 이유야?”
“응. 중학교 때뿐만이 아니었어. 고등학교에 가서도 소문은 끊이질 않았어. 입학식 날부터 나는 남자를 꼬시려고 학교를 다니는 불순한 사상을 가진 불건전한 여자가 되어있더라고. 그때 내가 욕을 얼마나 많이 먹었는지 아마 너는 짐작도 못 할 거야.”
“이상한 애들이네. 그걸 그냥 참았어?”
“참아야지 어떡해. 내가 무슨 힘이 있다고.”
“답답하네..”
“그냥 3년만 버티면 이 지긋지긋한 헛소문들도 사라지겠거니 하면서 그냥 참고 버텼지, 뭐.”
“지금의 네 성격이랑은 차이가 좀 있네. 지금은 무지 사납잖아.”
“사납기는.., 자기 방어야. 자기 방어 몰라?, 아무튼 대학교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때 진희라는 친구를 만났어. 그 친구 덕분에 내 성격이 조금 변한 건 사실이지.”
“진희?, 그래도 대학생 때는 친구가 있긴 했나 보네.”
“중고등학교 때도 있긴 했거든?, 몇 명 없어서 그렇지.”
“그럼 그때 찾아왔던 남자도 대학교 친구였어?”
“인정하긴 싫지만 그 남자, 내 첫사랑이야.”
“첫사랑?”
“응. 학창 시절에 여기서 치이고 저기서 데이다 보니까 남자라면 아주 치가 떨릴 정도로 싫어졌거든?”
“그럴만하지..”
“그 남자를 수도 없이 거절하고 무시했는데도, 그 남자는 매번 같은 얼굴로 몇 번이고 다시 내 앞에 섰어. 솔직히 친구들 영향이 컸지. 받아줄 때도 됐다는 둥, 정성이 갸륵하다는 둥, 주변에서 자꾸 그런 소리를 해대니까 나도 모르게 마음을 열게 된 것 같아.”
“참 파란만장하다.”
“웃긴 얘기 하나 해줄까?”
“뭔데?”
“그날, 왜 그 남자가 사무실에 찾아왔었잖아.”
“응, 내가 네 남자 친구인척 했던 그날?”
“내 친구들한테 물어봤는지 어떻게 알고 나를 찾아왔더라고. 결혼한다는 얘기도 할 겸, 그동안 못했던 말도 전할 겸, 뭐 그랬다나 봐.”
“결혼?, 너한테 청첩장을 주러 왔다고?, 제정신 아니네.”
“그치?”
“근데, 별로 안 웃긴데?”
“그 결혼상대가 내 친구야. 나랑 사귀던 도중에 내 친구랑도 사귀었던 모양이더라고.”
“쓰레기네. 이 봉투에 담아서 같이 버려버리고 싶다.”
“예전부터 그랬어. 그 남자는 나한테 상처 주는 일을 서슴없이 했고, 아무렇지도 않게 나를 미워했어. 그날도 그러더라고. 추억이니, 오해니, 네 몫이라니.., 그냥 진심 어린 사과만 했어도 받아줬을 수 있었을 텐데. 그 남자는 입만 열면 변명에 거짓말에.., 가식은 기본이고.”
“뻔뻔하게 찾아와서 잘도 그런 소리를 지껄였네.”
“그 남자랑 헤어지고 이런저런 얘기가 들려오니까 그 어떤 누구도 믿을 수가 없게 되더라고. 그러다 마침 아빠가 회사일 때문에 이사를 가야 한다고 해서 무작정 따라온 곳이 지금 그 동네야.”
“정완이 형이랑은 어떻게 알게 된 거야?”
“켈리그라피를 배우면서 어느 정도 수준이 되고 자격을 갖추게 되다 보니까, 작은 학원이라도 차려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 근데 어쩜 임대료가 그렇게 비싼 건지..”
“비싸지.., 요즘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는 말도 있잖아.”
“아무튼, 동네에 있는 부동산이라는 부동산을 다 돌아봐도 조건에 맞는 매물이 없어서 고민하던 차에 인터넷 부동산에서 쉐어링이라는 걸 알게 됐어.”
“쉐어링?”
“응, 사무실 쉐어링. 임대료는 서로 분담하고, 각자가 필요한 만큼 영역을 나눠서 사용하는 거지. 보증금도 반씩, 월세도 반씩, 공과금도 반씩. 얼마나 좋니?”
“정완이 형도 그럼 사무실 알아보다 만난 거야?”
“응, 부동산 계약할 때 조금 마찰이 있긴 했는데, 정완 오빠는 아무렇지도 않게 내 기준에 맞춰줬어.”
“무슨 마찰?”
“정완 오빠는 기본으로 2년 계약을 원했는데, 나는 어떻게 될지 몰라서 1년 계약을 하고 싶어 했거든.”
“아, 너는 리스크를 염두에 두었고 정완이 형은 가능한 오래 머물고 싶었나 보구나.”
“응. 입주도 그렇고, 인테리어도 그렇고, 모든 게 너무 수월했어. 지금까지도 단 한 번의 언쟁도 없었고.”
“하긴, 그 형이 조금 부처님 같은 이미지가 있지.”
“처음부터 정완 오빠가 허물없이 대해 준건 사실이지만 솔직히 나는 거부감이 있었어. 어차피 이 남자도 그렇고 그런 남자들 중에 한 명일 뿐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으니까.”
“네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럴 수 있지.”
“근데.., 다르더라. 다른 남자들이랑은 너무 다른 거 있지?”
“뭐가 다른데?, 정완이 형이 애인이 있어서?”
“선영언니는 사무실 입주 전부터 알고 있었어. 묻지도 않았는데 정완 오빠가 7년째 연애 중이라고 자랑을 했으니까.”
“처음부터 알고 있었구나.”
“애인이 있기 때문에 나한테 집적대지 않는 건가 싶었는데, 그게 아니더라..”
“그게 결정적인 다른 점이야?”
“솔직히 선영언니는 사무실에 자주 오지 않았어. 어쩌다 가끔 한 번씩 왔다가 금방 갔거든. 그게 너무 신기했어. 충격이라고 할까?”
“충격까지 받을 필요 있나, 처음부터 애인이 있다는 걸 몰랐던 것도 아니었으면서.”
“그런 충격이 아니라.., 있는 듯, 없는 듯 지내면서 아는 듯, 모르는 듯 살고 있는 데도 사랑이 느껴지는 거야. 매일 통화하고 만나는 사이가 아닌데도, 사랑이 느껴졌어.”
“그건 좀 신기하네.”
“그렇게 지내다 보니까 어느새 선영언니가 부러웠던 건지, 아니면 선영언니의 자리가 부러웠던 건지 헷갈리기 시작하더라고.”
“처음부터 네가 범접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네 뭘.”
“맞아. 나도 알고 있었어. 그래서 가질 수 없으면 깨뜨려버릴까도 생각해봤는데, 차마 그렇게 까지 할 자신은 없더라고.”
“미움받기 싫어서?, 아니면 상처받기 싫어서?”
“둘 다. 그 비참한 기분을 동시에 느끼고 싶지 않았어. 내가 그렇게 까지 바닥은 아니기도 했지만..”
“그런데도 왜 정완이 형을 좋아하는 거야?”
“모르겠어 나도. 그냥 같이 있으면 편하고, 나한테 조금이라도 관심을 주면 그냥 그게 좋으니까.”
“내가 관심 주면 받지도 않으면서.”
“내가 이 여행에 올 때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온 것 같지?”
“난 그게 제일 걱정이야. 아무것도 모른 채 이용만 당할까 봐.”
“알고 있어. 지수 언니가 나를 이곳에 데려온 이유.”
“정말?, 지수 누나가 사랑에 눈이 멀어서 사리분별 못하는 너를 질질 끌고 온 줄 알았는데.”
“처음에는 옆에만 있어도 좋았는데, 그러다 보니까 점점 더 욕심이 생기는 거 있지?, 나도 알아. 내가 지금 굉장히 못된 짓을 하고 있다는 거. 다 알고 있는데도 오고 싶은 걸 어떡해. 차라리 오늘 정완 오빠랑 선영언니랑 다시 잘 됐으면 싶어. 그렇게 되면 정완 오빠를 포기할 마음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요새 들어 자꾸 선영언니 몰래 반칙을 하고 있는 기분이 딱히 좋지만은 않았던 것도 있고.”
“너 아주 막장은 아니구나?”
“솔직히 말해서 이 여행이 무서워. 마지막 추억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너무 무서워.”
“무섭다면서 왜 왔어?”
“상처받아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정완 오빠한테 받은 상처는 어쩌면 추억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그거 굉장히 아플지도 모를 텐데.., 괜찮겠어?”
“괜찮아. 혹시나 상처가 생겨도 그 상처마저 사랑스러울 것 같은 기분이 드니까.”
“너, 생각보다 심각한 것 같은데. 내가 좀 도와줄까?”
“아니야, 너까지 끌어들여서 미안해. 하지만 약속한 건 지켜줘. 부탁할게.”
“그래, 부탁까지 하는데 거절할 수 없지. 대신 너도 약속 지켜.”
“언니 오빠들 왔나 보다. 우리도 내려가자.”
현수는 양손에 쓰레기봉투를 든 채 앞서가는 경미를 따라 펜션 밖으로 나왔다.
산책을 마치고 온 병준과 지수는 벤치에서 일어나 펜션으로 돌아오는 정완과 선영을 불렀다. 마침 계단을 내려온 경미는 정완에게 칭찬이라도 받고 싶은 듯 열심히 청소를 했다는 말을 두 번이나 강조하며 말했다.
일행은 다시 2층으로 올라가 남자들의 방으로 향했다. 그때 쓰레기를 버리고 온 현수가 지수의 옷깃을 살짝 잡아당기며 지수를 불러 세웠다.
“누나, 경미도 알고 있어요.”
“뭘?”
“누나가 경미를 왜 이곳에 데려왔는지요.”
“의외네. 근데 그게 뭐 어때서?, 걱정돼?”
“많이요. 경미뿐만 아니라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가 걱정돼요.”
“너도 의외구나?, 걱정하지 마. 그냥 너는 네 임무만 잘 수행하면 돼.”
“제 임무가 뭔지 헷갈리기 시작하네요.”
“잘 될 거야. 쓸데없는 의심은 그만 거두렴.”
“그럴게요. 일단은 아무도 상처받는 일이 없기만을 바랄게요.”
지수는 일행이 모여 TV를 보고 있는 방으로 들어갔고 현수는 홀로 테라스에 있는 의자에 앉아 오늘 아침부터 벌어진 이 해괴한 상황을 정리하려 했다.
“뭐 재밌는 거라도 하나 봐?”
방안에 옹기종기 모여 TV를 보고 있던 일행에게 지수가 말했다.
“정완 오빠, 쟤네들 맞죠?, 저 노래 맞죠?”
“응, 맞아. 갑자기 속 쓰리다.”
TV에는 최근 데뷔를 한 걸그룹이 상큼한 춤을 추며 낭랑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정완은 TV에서 흘러나오는 익숙한 멜로디를 듣자마자 그대로 도망치고 싶은 기분이었다.
“요즘, 쟤네들 인기 많지 않아요?, 그래서 속 쓰리다는 거예요?”
“바람 쐬고 싶다. 나 잠깐 나갔다 올게.”
“누군데?, 왜 그러는데?”
지수의 호기심 가득한 질문이 정완과 경미의 대화를 비집고 들어왔다. 밖으로 나가려는 정완을 붙잡고 누구냐고 재차 묻는 지수에게 병준은 보고 있는 그대로 상황을 전했다.
“인기 많은 걸그룹 이라잖아.”
“나는 요즘 아이돌은 누가 누군지 잘 모르겠더라,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가사도 잘 안 들리고.”
“그래도 저 정도는 알아들을 수 있잖아?, 템포도 느리고 영어 가사도 없고, 콘셉트랑 잘 어울리는데?”
“그렇긴 한데, 뭔가 평범하다.”
경미는 반가운 마음에 걸그룹이 부르고 있는 노래에 대해 지수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저 노래가 정완 오빠가 작업하던 곡이에요. 가사를 이상하게 쓰는 바람에 퇴짜를 맞았지만.”
“정말?, 그때 오래된 연인들의 이별 어쩌고 했던 게 저거였어?”
“네, 그 곡이에요. 나는 정완 오빠가 쓴 가사도 좋았는데.”
“정완이가 쓴 가사도 직접 봤어?”
“네, 정완 오빠가 피아노 치면서 노래 부르는 것도 봤는걸요?”
“가사도 알아?”
“추억이라는 건 비슷한 기억이라도 갖고 있어야 해. 같은 기억을 떠올리면 그게 추억이야. 그런 내용이었어요.”
“퇴짜 맞을만했네. 정완이가 쓴 가사를 본 작곡가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아무튼 저 노래는 주인을 잘 만난 것 같아서 참 다행이다. 솔직히 스무 살도 안 돼 보이는 애들이 부를 가사는 아니지.”
“아니에요. 정완 오빠가 쓴 가사도 직접 들어보면 또 느낌이 달라요. 피아노랑 무지 잘 어울렸는데.., 저는 솔직히 조금 아깝다고 생각해요.”
지수와 경미의 대화를 듣고 있던 선영은 자신도 모르는 일을 경미가 알고 있다는 사실이 불쾌했다. 지난번 경미를 만났을 때 정완과 선영이 헤어졌던 이야기마저 알고 있었다는 것 또한 우연이 아니라는 확신에 걷잡을 수 없을 만큼 기분이 가라앉았다. 하지만 선영은 이마저도 쌓아놓기로 했다. 아직까지는 정완과 풀어야 할 매듭이 먼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선영은 냉장고를 열어 차가운 물을 꺼내 마셨다. 그럼에도 쉽게 가라앉지 않는 불쾌함이 매우 찝찝할 뿐이었다. 정완은 피곤했는지 구석진 곳을 찾아 벽을 마주 보고 그대로 누웠다. 지수와 병준은 저녁에 먹을 메뉴를 정하고 있었고 경미는 카메라를 들고 출발할 때부터 찍었던 사진을 한 장씩 보며 뿌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해가 산등성이 사이로 숨어들자 산으로 둘러싸인 펜션에도 곧 어둠이 내렸다. 도심보다 부쩍 차갑고 밀도 높은 바람이 불어왔다. 산등성이 끝에 걸린 빨간 태양이 모습을 감추자, 높다란 하늘에는 노른자를 쏙 빼닮은 달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