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3) 드러난 속마음. 시작되는 이야기 - 中.
episode 13.
정완은 잠에서 깨자마자 낮 동안 열어두었던 창문을 빠짐없이 닫았다. 남자 방 여자 방 할 것 없이 창문이라는 창문은 모두 닫고 지퍼가 달린 두툼한 후드티셔츠를 꺼내 입었다.
저녁식사를 준비하고 있던 선영과 지수에게 정완이 말했다.
“병준이는?”
“숯 가지러 갔어.”
“숯?, 저녁 메뉴는 바비큐야?”
“응. 근데, 고기를 너무 많이 샀나 봐. 다 먹을 수 있을까?”
“경미랑 현수는?”
“글쎄, 방금까지 여기 있었는데..”
“데이트 중인가?, 좋겠다. 나도 저런 때가 있었는데.”
“시끄럽고, 선영이가 썰고 있는 고기나 좀 같이 썰어.”
한편, 현수는 경미에게 꼭 해야 할 말이 있다며 경미의 팔을 붙들고 밖으로 나왔다.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둑해진 탓에 방향감각이 고장 난 경미는 걸음이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펜션이 엄지손가락만큼 작게 보일 때쯤에야 현수는 경미의 팔을 놓아주었다.
“갑자기 왜 이래 진짜.”
“할 말이 있어서.”
“뭔데 그래?”
“아까 네가 했던 말이 너무 거슬려서 가만히 있지를 못하겠어.”
“어떤 말?”
“무섭다며.., 이 여행이 무섭다며?, 상처받아도 괜찮을지 안 괜찮을지도 모른다며!”
“그게 뭐 어쨌는데?”
“그대로 두면 분명히 너는 만신창이가 되고 말 거야.”
“마음대로 생각해. 그리고 참견할 생각이면 그만둬.”
“참견이 아니고 제안이야. 받아들이는 건 네 자유고.”
“여기 오기 전에 내가 뭐라고 했었는지 잊었어?”
“이쯤에서 그만 멈춰 경미야.”
“여기서 멈출 거였으면 시작도 안 했어.”
“외사랑이 끝사랑으로 남지 않는 방법이 뭔지 알아?”
“외사랑이라니?, 좋아한다는 말 꺼낸 적 없어.”
“짝사랑이라고 믿고 싶은 건 아니고?”
“참견하지 말라니까. 내가 알아서 한다고!”
“어차피 알게 될 거잖아. 정완이 형이나 선영이 누나도 언젠가는 알게 될 거잖아.”
점점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음을 서로가 눈치챘기 때문일까. 갑자기 대화가 끊어져버린 둘 사이에는 차가운 바람만 불어대고 있었다.
“그래 좋아. 어디 그 방법이라는 것 좀 들어나 보자.”
“아차 싶었을 때 멈추는 거야. 아까 망설이던 네 눈동자를 보니까 알겠더라고. 여기서 멈추면 네가 바라는 대로 예쁜 짝사랑이 담긴 추억으로 간직할 수 있을 거야. 네가 싫어하는 상처나 미움을 받을 필요도 없고.”
현수의 말은 틀린 것이 없었다. 경미는 맥없이 풀려버리는 다리에 힘을 주지 못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현수의 제안을 받아들이기에는 힘이 부쳤다. 반박할 기운마저도 잃은 것 같은 표정으로 경미가 말했다.
“정완 오빠를 알게 되고 나서부터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꿈인 것만 같았어. 그래서 그랬나 봐. 그냥 이 꿈이 영원히 이어지길 바랐나 봐. 뒤척이기라도 하면 금방 깨버릴 것 같은 꿈이라서.., 그래서 꼼짝 하기도 싫었나 봐.”
“경미야, 꿈은 안식처가 될 수 없고, 도피처가 될 수도 없어. 깨어나면 그걸로 끝인 게 꿈이야. 꿈에서 깨기 싫다고 언제까지 잠만 잘 수는 없잖아.”
“알아. 네가 하고 싶은 말이 뭔지..”
“한때나마 너를 설레게 했던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하고 싶다면, 이쯤에서 그만 멈추는 게 좋을 거야. 어디까지나 제안일 뿐이야. 멋대로 굴어서 미안해.”
“그만 가자. 나 춥다.”
경미와 현수가 펜션에 도착했을 때 병준은 숯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정완과 선영 그리고 지수는 병준 옆에 있는 야외 테이블로 손질을 해둔 음식을 나르고 있었다.
“어디 갔다 이제 왔을까?, 우리 상큼한 막둥이들은.”
“죄송해요 누나. 경미랑 할 얘기가 좀 있어서 한 바퀴 돌고 왔어요. 저녁 준비하는 것도 몰랐네요.”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만 얹으시겠다 이거니?”
“설마요. 제가 고기 구울게요. 고기 하나는 기똥차게 잘 굽거든요.”
현수는 넉살 좋게도 일행의 틈에 섞여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반면 경미는 머뭇거리기만 하다가 2층으로 올라가려 했다.
“경미야 어디가?, 밥 먹어야지.”
“네, 너무 추워서 옷 좀 갈아입게요. 금방 올게요.”
“그럼 내려올 때 언니 옷이랑 술도 좀 가지고 내려올래?”
지수는 경미와 현수의 안색을 살펴보았지만 특이사항은 없어 보였다. 아까부터 현수가 신경이 쓰였던 지수는 예상에 없었던 변수가 생길까 싶은 마음에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정완과 선영은 어째서 경미를 이곳에 데리고 왔는지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에 하나 그런 연유로 경미를 데려온 사실이 들통이 난다면 정완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거 먼저 드세요. 저는 구우면서 먹으면 되니까, 신경 쓰지 마시고 식사들 하세요.”
“미안해서 어쩌지?, 힘들면 말해. 형이 교대해줄게.”
2층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온 경미는 양손 가득 술병을 챙겨 들고 테이블 쪽에 내려놓았다. 아직도 한기를 느끼고 있어서였을까. 병준의 옆에는 지수, 정완의 옆에는 선영이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경미는 숯불 앞에서 고기를 굽고 있는 현수의 옆에 의자를 바싹 붙여놓고 앉았다. 현수는 옆에 앉아 정완에게 시선을 떼지 못하는 경미에게 잘 구워진 고기 한 점을 말없이 들이밀었다.
많다고 생각했던 고기의 양이 눈에 띄게 줄어들자 경미가 들고 내려온 술의 양도 줄어들었다. 저녁식사를 마친 일행은 슬슬 뒷정리를 하자며 자기 주변부터 정리하기 시작했다. 2층으로 올라온 지수는 남은 돼지고기는 내일 아침 김치찌개로 쓰자는 현수의 의견에 동의해 냉장고에 넣어두고 자신이 가져온 가방에서 샴페인을 꺼내 밖으로 나왔다. 현수와 경미는 빈병과 각종 쓰레기들을 한데 모아 분리수거를 하러 갔다.
“짜잔. 오늘 같은 날에는 이게 빠지면 섭섭하지.”
“어디서 많이 봤던 술인데..”
“오래됐지?, 선영이랑 처음 만났을 때, 기억나?”
“그래서 가져온 거야?”
“응, 너희 두 사람 7년 전 그때처럼 다시 잘 됐으면 좋겠다 싶어서.”
“그나저나 병준이랑 선영이는 어디 갔어?”
“병준이는 차에 잠깐 갔고, 선영이는 춥다고 외투 가지러 올라갔어.”
“그렇구나.”
“정완아. 선영이 마음 다 알고 있으면서 왜 자꾸 모르는 척하는 거야?, 아기를 낳기 싫은 특별한 이유라도 있어?”
“딱히 이유가 있어서라기보다 입장의 차이겠지. 아마 내가 예전에 너한테도 말했을 거야. 동화 속 주인공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동화 속 배경처럼 만큼이라도 살았으면 좋겠다고.”
“기억나. 가만 보면 너는 동화를 참 좋아하는 것 같아.”
“인생은 한 편의 동화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서 그런가 싶다.”
“그래서 네 선택은 여전히 무던하게 살고 싶다 이런 거야?”
“그 배경처럼 이라는 말이 꼭 무던하게 살고 싶다는 뜻은 아니야.”
“그럼 무슨 뜻인데?”
“내가 재미없는 동화 한 편 읽어줄까?”
정완은 꺼져가는 숯불에 남은 숯을 모두 털어 넣고 지수의 옆자리에 앉았다. 차에 다녀온 병준은 정완과 지수가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은 기분에 계단을 올라 2층에 있는 남자방으로 가려했다. 그때, 외투를 걸치고 테라스 난간에 구부정하게 기댄 채 정완과 지수를 내려다보고 있는 선영을 발견했다.
“선영 씨, 왜 안 내려가고 여기에 있어요?”
“정완이랑 지수랑 얘기하는 거 보고 있었어요.”
“실은 저도 두 사람 이야기하는데 방해가 될까 봐 올라왔어요.”
“오랜만인 것 같아요. 둘이 저렇게 진지하게 얘기하는 모습.”
“많이 친했나 봐요?”
“네, 처음 정완이 소개시켜 줄 때도 그랬어요. 내가 끼어들기가 무서울 정도로 죽이 잘 맞았다고 해야 할까?, 뭐 그런 느낌이었어요.”
“얘기는 들었어요. 지수가 선영 씨랑 정완이 소개해줬다고.”
“맞아요. 제가 졸랐어요. 왠지 근사한 사람일 것 같아서 몇 번이고 계속 졸랐어요.”
“7년이라고 했죠?”
“네, 엊그제 같은데 벌써 그렇게 됐네요.”
“그만큼 잘 맞는다는 뜻 아닐까요?,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이해를 많이 해주니까 7년이나 만난 거잖아요.”
“저도 그런 줄 알았어요. 세상에서 정완이를 나만큼 많이 알고 이해해주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으니까요.”
“맞을 거예요. 그렇지 않았으면 7년이라는 시간을 함께 보낼 수는 없었을 테니까요.”
“병준 씨, 그나저나 우리 지수 어떻게 생각해요?”
“지수요?, 좋죠. 솔직하고, 용감하고, 의리도 있고..”
“그런 거 말고요.”
“그럼요?”
“내 눈에는 둘이 꼭 사랑하는 사람처럼 보여서요.”
“사랑이요?, 에이 말도 안 돼요.”
“잃을까 두려워하고, 깨질까 조심하고.., 갖고는 싶은데 말하면 혼날까 봐 망설이는 아이들.., 딱 그래 보여요.”
“우리는 그냥 좋은 친구예요.”
더 이상 말하기 곤란했던 병준은 급히 대화를 마무리하려 했지만 선영은 집요하게 물었다.
“병준 씨,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아파본 적 있어요?, 지수는 병준 씨한테 거절당한 날, 처음으로 내 앞에서 울었어요. 너무 아프다면서 종일 울었어요.”
“지수가 울었다고요?”
“그렇게 슬프게 우는 모습은 처음이었거든요. 이유를 물어도 대답하지 못할 만큼 많이 울었어요. 그렇게 계산적이고 냉철한 애가 이성을 잃을 만큼 정말 많이 아파했다고요.”
“그랬군요..”
“왜 그랬어요?, 정말 지수가 싫었으면 같이 복지관에 다니지도 말고, 부른다고 쏜살같이 오지도 말고, 아무 때나 전화를 걸어도 받지 말았어야죠.”
당황한 병준은 선영에게 그날의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해했다.
“병준 씨, 솔직하게 말해 봐요. 지수보다 더 지독하게 솔직하시다면서요. 지수 좋아하는 거 맞죠?, 사랑하고 있는 거 맞죠?”
병준은 체념한 듯한 표정으로 선영의 질문에 대답했다.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아파본 적 있었냐고 물었죠?”
“네.”
“많이 아팠어요. 너무 아파서 죽고 싶은 생각도 여러 번 해봤어요.”
병준이 어렵게 자신의 마음을 말하려던 그때, 분리수거를 마친 경미와 현수가 2층으로 올라왔다. 경미는 곧장 여자 방으로 들어갔지만 테라스를 지나가야 하는 현수는 자연스레 선영과 병준에게 말을 걸었다.
“짝이 바뀐 거예요?, 아래층에서는 정완형이랑 지수 누나가 얘기하고, 위층에서는 두 분이 얘기하고..”
“아, 정완이랑 지수랑 할 얘기가 좀 있는 것 같아서 2층에 올라왔다가 선영 씨 혼자 있길래..”
“그랬군요. 그럼 두 분 대화 나누세요. 저는 방에서 좀 쉴게요.”
“경미는?”
“씻고 싶다고 방에 들어갔어요.”
“그래.., 그럼 나도 그만 내려가 봐야겠다.”
“네, 형.”
병준은 타이밍을 놓쳤다는 생각에 혼자 걷고 싶다는 핑계를 대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선영도 병준의 사정을 이해한 듯 말없이 병준의 뒤를 따라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같은 시각, 정완은 지수에게 들려주기로 했던 동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옛날에 한 마을에 젊은 남자와 여자가 살았어. 남자와 여자는 서로를 매우 아끼고 사랑했지. 그러던 어느 날 두 사람은 결혼을 했고 곧 아기도 태어났어. 평화로울 줄만 알았던 그 마을에 갑자기 괴물이 나타난 거야. 그때부터 괴물은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홀연히 사라지고 다시 나타나기를 반복했지. 부부에게도 예외는 없었어.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괴물에게 잔뜩 겁을 먹은 여자는 아기를 데리고 부엌으로 숨었고, 남자는 겁이 났지만 그 괴물을 쫓아내기 위해서 용감하게 맞섰지. 괴물의 습격을 막아낸 남자는 집으로 돌아와 여자와 아기가 무사한지 확인부터 했어. 남자도 무사했고 여자와 아기 또한 무사했음을 알게 된 서로는 괴물이 또 찾아와도 맞서 싸우면 괴물을 쫓아낼 수 있겠다는 긍정의 힘을 얻었지. 한동안 평화로웠던 부부의 가정에는 또 하나의 생명이 태어났어. 그때까지만 해도 괴물이 무섭다고 생각하지 않아서였는지 두려움도, 걱정도 없이 행복하게 살았어. 둘째가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괴물은 또 한 번 그들 앞에 나타났어. 덩치가 더 커지고 발톱도 더욱 위협적으로 자란 괴물은 무차별적인 공격을 퍼부었지. 비와 바람을 막아주던 보금자리는 금이 가고 지붕이 부서지는 피해를 입고 말았어. 지난번처럼 남자는 용감하게 괴물과 맞섰어. 물론 여자도 남자를 도와 괴물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쏟았지. 이번에도 괴물 퇴치에 성공한 그들은 언제든 괴물이 나타나도 이길 수 있다고 굳게 믿었어. 첫째가 중학교에 입학을 하고 둘째가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또다시 괴물이 나타났어. 이번에는 그 괴물이 다른 괴물들까지 불러와 전보다 더욱 거칠게 그들을 공격했지. 금이 가고 지붕이 뜯겨나간 집을 고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번 공격으로 그들은 보금자리를 완전히 잃을 정도로 심한 타격을 받고 말았어. 매번 괴물이 쳐들어올 때마다 상황이 악화되기 시작하니까 남자와 여자는 힘을 합치면 언제든 괴물을 이겨낼 수 있다는 생각이 착각이었다는 걸 깨닫고 말았지. 그 후로 남자와 여자는 괴물의 위협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그저 하루하루를 버티기 위해 기계처럼 변해갔어. 그러다 보니까 어느새 따듯했던 언어와 진심 어린 마음 따위는 사라지고 말았지. 아무것도 몰랐던 첫째와 둘째는 부부의 고단함과 불안함도 모르고 보채기만 했어.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고 때만 되면 찾아오는 괴물에게 더 이상 맞설 재간이 없었던 부부는 괴물의 횡포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지. 결국 상처투성이가 된 여자는 첫째를 데리고 다른 마을로 떠나가버렸고 둘째는 남자와 함께 그 집에 남겨졌어. 그런 슬픈 사연이 있음에도 괴물은 아랑곳하지 않고 날마다 이빨을 드러냈고 맞서 싸울 힘이 없는 남자와 둘째는 결국 그 괴물에게 벼랑 끝까지 내몰리게 되었어. 벼랑 끝에 매달린 채 날마다 울면서, 날마다 부들부들 떨면서 비명을 질렀지. 살려달라고, 누가 좀 구해달라고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때까지 매일매일 악을 썼지만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주는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었어. 고통에 몸부림치던 남자는 둘째가 고등학생이 되었을 무렵 홀로 그 집으로 돌아갔어. 괴물은 자신이 막겠다면서. 둘째는 가지 말라고 남자에게 애원했지만 소용없었어. 결국 외톨이가 된 둘째는 서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첫째와 함께 떠나버린 여자를 원망하고 있고, 지금까지도 그곳에 홀로 남겨진 그 남자를 걱정하고 있어.”
“해피엔딩이 아니네?”
“해피엔딩?, 지수야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동화나 동요들이 사실은 새드엔딩인 게 많아.”
“신데렐라, 인어공주 뭐 이런 거?”
“응, 동요도 몇 개 있지.”
“근데 그게 뭐?”
“결말이 왜곡된 채로 변했다는 거야.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다 보니까 좋은 얘기들만 쏙쏙 뽑아서 자기들 입맛대로 각색돼서 지나치게 미화되어버린 거라고.”
“그건 다시 써 내려간 사람들이 동화 속 주인공들처럼 행복하게 살고 싶었기 때문이 아닐까?”
“희망이지. 바람일 뿐이고. 현실이 굉장히 잔혹하다 보니까 동화 속에서나마 행복하게 살고 싶은 허황된 바람일 뿐이라고.”
“그래도 지금 전해지는 동화 속 결말은 해피엔딩이잖아. 누구나 바라고 원하는 그런 결말.”
“모르는 사람들이나 그렇게 생각하지. 동화가 왜 동화겠어?, 애들이 보는 거니까 동화지. 애들이 보는데 굳이 좌절과 분노, 공포와 절망을 심어줄 필요는 없잖아.”
“요즘에는 성인용 동화도 얼마나 많은데, 너 지금 동화 무시하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실을 부정하고 싶어 하는 생각이 강해. 왜냐?, 바꿔치기당한 동화의 결말이 원래는 매우 잔혹하다는 것을 아니까. 현실이 그만큼 고되고 냉혹하다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으니까.”
“넌 너무 현실적인 데다가 부정적인 것 같아. 가끔은 비현실적인 생각도 좀 해봐. 그래야 긍정적인 사고방식이 생기지.”
“만약에 내가 동화를 쓰게 된다면 절대로 바꿔 쓸 수 없는 동화를 쓰고 싶어. 가능하면 아무리 부정적이고 현실적이어도 내 손으로 직접 결말까지 쓰고 싶어. 그게 해피엔딩이든 새드엔딩이든.”
“근데, 아까 네가 얘기했던 슬픈 동화 속의 주인공이 설마 너희 가족들은 아니지?”
“애석하게도 맞아.”
“아직 엔딩은 아니잖아. 과정이 슬픈 거지 결말까지 슬픈 거라고 확정할 수는 없는 거잖아.”
“확정할 수는 없지. 나도 아직은 진행 중이라고 생각하고. 그래서 마무리되지 않은 동화를 내 손으로 마무리하고 싶다는 얘기야. 누군가의 힘을 빌려 멋대로 미화되지 않게끔, 진실이 훼손되지 않게끔, 반드시 내손으로 결말까지 쓰고 싶은 거라고.”
“복잡하다.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난해한 내용의 동화가 될 것 같다.”
“누가 이해해 달라고 내 힘으로 쓰겠다는 건 절대 아니야.”
“주인공이 되던, 배경이 되던 네 힘으로 무언가 만들어내겠다는 심정은 이해하겠는데, 현실을 그렇게 부정적으로만 생각하지 마. 인생은 언제 어떻게 될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거니까. 나는 정완이 네가 쓰는 동화의 결말이 해피엔딩이었으면 좋겠어. 그 동화 속에 선영이도 포함하면 더 좋고.”
“주인공들이 겪는 상황이 고되고, 애처롭고, 딱해도.., 배경은 그렇지 않잖아. 꽃이 피고 지듯이, 해가 지면 달이 뜨듯이, 봄이 가면 여름이 오듯이 그 배경은 항상 주인공과 함께잖아.”
“그게 무던하게 살겠다는 뜻이지 뭐가 달라?”
“해석하기 나름이지. 하지만 만약에 내 인생이 동화라면 주인공은 선영이야. 나는 선영이 곁을 따라다니는 배경이고 싶고.”
“선영이 데리고 인형놀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뭐야?, 네 인생이 동화라면 당연히 주인공은 너 여야지. 선영이를 주인공으로 놓고 너는 뭐 병풍처럼 있겠다는 거밖에 더 돼?”
“나 취했나 봐.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정완아. 세상이 정해놓은 기준에 맞추려고 무리하면서 살지 마. 어차피 네가 살아가는 인생이기 때문에 기준도 어디까지나 네가 정해야 되는 게 맞는 거라고.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지레 겁부터 먹고 부정적이니, 현실적이니 하는 핑계를 대면서 살 생각하지 말고 자신감을 좀 가져.”
“지수야,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걸까?..”
두 사람의 대화가 마무리되어갈 때쯤 계단에서 내려온 선영은 정완의 옆에 앉았다.
“무슨 얘기 하길래 이렇게 심각해?, 여행까지 와서 토론하고 있는 거야?”
“토론은 무슨, 지수가 나한테 설교했어.”
“설교?”
“인생 똑바로 살라고 설교하더라고.”
계단을 내려온 병준과 선영에게 웃어 보이던 지수는 정완이 하는 말을 듣고 정색했다.
“내가 무슨 설교를 했다고 그래?, 네가 주절주절 헛소리 한 거 들어준 거지.”
“웃자고 하는 얘긴데 뭘 그리 발끈해. 아무튼 네가 해준 얘기 잘 생각해볼게. 고마워 지수야.”
“그래. 그럼 훼방꾼들은 이만 사라질 테니까, 둘이 오붓한 시간 보내렴.”
정완과 선영만의 자리를 만들어주고 싶었던 지수는 병준과 함께 2층으로 올라갔다.
“선영아. 이거 기억나?”
정완은 지수가 가져다준 샴페인을 흔들어 보이며 배시시 웃었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7년 전에 우리 처음 만났던 날.., 지수도 기억하고 있었나 봐.”
“지수 정말 대단하다.”
“우리 때문에 고생 많이 했지. 이 여행도 그렇고, 렌터카를 빌려온 것도 그렇고.., 지수는 왜 우리 사랑에 이렇게까지 열심인 걸까?”
“너도 친구고, 나도 친구니까 그런 거 아닐까?”
“그런가..”
“지수는 나에게 있어 가장 고마운 존재야. 가족이나 애인의 의미와는 다른.., 뭐 어쨌든 우리가 만나게 된 것도 지수 때문이고, 매번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자기 일처럼 나서 주는 사람도 지수고, 내가 힘들어할 때 가장 먼저 나한테 달려와 준 사람도 지수니까. 누구랑은 완전 다르게.”
“미안하다고 했잖아.., 이제 다시는 안 그럴게.”
“네가 다시는 안 그러겠다는 말도 하고, 별일이네.”
“지수가 설교해서 그래.”
“진짜야?, 지수가 뭐라고 했는데?”
“아니야, 농담이야. 그냥 너한테 잘하라고 해서 알겠다고 했어.”
정완은 선영에게 샴페인을 따라주었다. 청량한 소리와 함께 달달한 향기가 퍼지자 선영은 정완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했다.
“정완아. 나, 뭐 하나만 물어볼게. 부담 주려는 거 아니니까 네 생각만 말해줘.”
“그렇게 말하니까 굉장히 부담스러운데?”
“나 엄청 진지하거든?, 장난치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줘.”
“그래, 알았어.”
“너에게 결혼은 어떤 의미야?”
“결혼?, 그래서 부담 갖지 말라고 한 거야?, 괜찮아. 부담스러워했던 적 없어. 부담스러워할 이유도 없고.”
“정말?, 근데 결혼 얘기만 하면 왜 자꾸 말을 돌려?”
“일단 첫 번째 질문에 답할게. 내가 생각하는 결혼은..”
선영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솔직한 정완의 생각을 듣고 난 후,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결혼의 의미와 비교를 해보고 싶었다. 그렇기에 선영은 정완이 하는 말에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각자 자의든 타의든 할 일을 마치면 집으로 돌아가잖아?”
“응.”
“내가 생각하는 결혼은 집 같은 느낌이야. 오늘 너무 힘들고 지쳐서 쓰러질 것 같음에도 돌아갈 곳이 있어서 다행이라는 느낌으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것.”
“집?”
“응. 나를 기다리는 네가 있고, 너를 기다리는 내가 있는 집. 온기를 느낄 수 있고 안정감을 느낄 수 있는 집. 그게 내가 생각하는 결혼이야.”
“그건 동거도 마찬가지잖아.”
“아니지, 동거랑은 다른 느낌이지. 소속감이 없어 보이잖아.”
“그 집에서 너를 기다리는 내가 아기를 안고 함께 기다리고 있다면 더 행복해지지 않을까?”
“선영아. 내가 바라는 건 딱 한 가지야.”
“아기는 아닌가 보네..”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너한테만 집중하는 거. 너만 보고 살아도 인생은 살만하다고 느끼는 거.”
“그게 다야?”
“선영아. 진심으로 말하는 건데, 나는 너 하나만 있어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어. 내 삶의 의미에 무언가 얹으려 하지 마.”
“아기가 짐이야?, 얹게?”
“아기를 키우는 건 희생을 강요하는 일이야. 나는 말이야, 선영이 너 외에는 희생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
“그걸 왜 희생이라고 생각해?”
“그럼 그게 희생이지. 너는 아무 대가도 없이 마냥 희생당하는 기분이 즐거울 것 같아?”
“희생이라고 치자. 근데 그 희생도 내가 감수할 수 있는 부분이잖아?, 대가를 바라면서 아기를 키우는 부모는 없잖아.”
“나는 싫어. 싫다기보다 자신이 없어. 별로 즐거울 것 같지도 않고.”
“왜 시작도 하지 않은 일에 겁부터 내?, 왜 벌어지지도 않은 일을 미리부터 걱정하냐고!, 그냥 사랑해주면 되잖아, 사랑해주는 게 그렇게 어려운 거야?”
“나는 희생을 사랑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그 아기도 내 일부라고 생각해주면 안 되냐고.”
“나는 그럴 형편이 못 돼.”
“우리 아빠는 희생이 아니라 사랑이라고 하셨어!”
“우리 아버지는 포기라고 하셨어. 포기!”
정완과 선영의 대화가 격한 분위기로 흘러갈 때쯤 경미는 카메라에 찍힌 정완의 모습을 보면서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계단의 끝부분에 다다랐을 때 경미는 긴 원피스의 밑단에 다리가 걸려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경미가 계단에서 넘어지며 외마디 비명을 지르자 정완과 선영은 한달음에 경미가 넘어진 곳으로 달려왔다.
“경미야, 괜찮아?”
“너무 아파요.”
이번 여행에서 입으려고 며칠 동안 고민했던 고가의 원피스는 찢어지고 말았지만 다행스럽게도 카메라는 풀밭에 떨어지는 바람에 망가지지 않았다.
정완은 경미의 부상 정도를 확인하기 위해 다친 곳이 있나 살펴봤고 선영은 경미의 카메라를 주워주기 위해 카메라가 떨어진 곳으로 갔다.
카메라를 주워 들고 경미에게 전해주려던 선영은 카메라의 액정을 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카메라의 액정에는 평소 정완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표정을 하고 있는 정완의 얼굴이 찍혀있었기 때문이었다.
“경미야 일어날 수 있겠어?, 어디가 아파?”
“발목이랑 종아리요.”
“피나네. 모서리에 긁혔나 보다. 여기 잠깐 있어봐. 소독약 있나 물어보고 올게.”
정완이 다급히 1층에 있는 관리실로 가려할 때 결국 선영은 아침부터 쌓여갔던 분노가 폭발하고 말았다.
“가지 마!”
“뭐?”
“경미 남자 친구도 있는데 네가 왜 나서냐고!”
소란스러운 광경에 눈을 떼지 못하고 있던 현수는 급히 계단을 뛰어내려와 경미를 부축했다. 선영이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지수와 병준도 테라스에서 내려왔다.
“현수가 없었잖아!”
“아까부터 계단 위에 있었거든?, 너희 둘이 진짜 무슨 사이라도 되는 거야?”
“말 함부로 하지 마!, 뻔히 다친 사람을 보고도 못 본척하라는 거야?”
“너는 항상 그러더라. 남한테는 그렇게 친절할 수가 없는데 나한테는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처럼 차가워. 알아?, 네가 알기나 하냐고!”
“그런 상황이 아니잖아.”
“상황?, 지금 네가 하는 행동이 이 상황에 맞는 거라고 생각해?”
“나는 못 봤다고!”
“그래, 보일 리가 없겠지. 보고 싶지 않았던 건 아니고?”
“그만해!, 그만하라고 좀!”
“사무실 같이 쓰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니?”
“야, 윤선영!”
“왜?, 찔리는 게 있나 보지?”
“막말로 내가 사무실 구한다고 했을 때, 네가 단돈 천 원이라도 보태줬어?”
“뭐라고?, 너 지금 말 다했어?”
“내가 사무실 얻으려고 했을 때 돈이 부족했던 것도 뻔히 알고 있었으면서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냐고!”
오늘 이 여행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선영은 불쾌한 감정을 계속 쌓아두기만 했었다. 결국 선영은 분노와 함께 눈물이 터졌고 상황을 수습하려 급히 내려온 지수와 병준은 선영과 정완에게 갔다. 현수는 어떻게든 상황이 나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경미의 손을 잡고 2층으로 올라가려 했다.
그때, 현수의 손을 뿌리친 경미가 선영에게 말했다.
“선영언니, 죄송해요. 다 저 때문이에요.., 정말 죄송해요.”
결국 당황했던 경미도 울음을 터뜨렸다. 점점 복잡해지는 상황에 지수와 병준은 최대한 냉정하게 사태를 수습하려 했다.
“병준아, 정완이 데리고 테이블로 가. 선영이는 내가 2층으로 데리고 갈게. 조금 진정되면 같이 내려갈 테니까 그때까지 정완이 좀 부탁해.”
“그래, 그게 좋겠다.”
지수와 선영은 계단에 주저앉아 울고 있는 경미의 옆을 겨우 비켜갔다. 현수는 바닥에 있는 카메라를 집어 들고 경미를 일으켜 세우고는 펜션 앞에 있는 벤치로 갔다. 경미를 벤치에 앉힌 현수가 카메라의 전원을 끄기 위해 액정을 접으려던 순간, 말문이 막혀버리고 말았다. 선영마저도 경미가 정완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이제 정완도 이 사실을 알게 될 것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다.
“정완이 형이 그렇게 좋아?”
“..”
“정완이 형한테 그렇게 잘 보이고 싶냐고!”
“확인하고 싶은 게 뭔데?”
“너, 오늘만 네 번이나 옷을 갈아입었어. 알고 있어?”
“너랑 상관없어.”
“대체 네가 지금 울고 있는 이유가 뭐야?, 솔직한 심정으로는 이렇게 되길 바라고 있었던 거 아니야?”
경미는 눈물을 그치지 못했다. 하지만 자신을 비꼬는 현수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아니야, 아니라고.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고..”
더욱더 서럽게 울어버리는 경미에게 현수는 조금도 미안해하지 않았다. 그리고 망설이지도 않았다.
“그럼 너 때문에 선영이 누나랑 정완이 형이 싸우게 됐다고 죄책감이라도 느낀다는 거야?”
“미안해 죽겠다고 나도!”
“너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정말 그렇게 생각해?”
“열받게 하지 말고 저리 좀 가!”
“네 스스로 자존감까지 깎아내릴 필요는 없잖아?, 우연히 마음속으로 바라던 일이 눈앞에 펼쳐진 것뿐이잖아?, 전혀 미안해할 필요 없어!, 울지도 마!”
“네가 무슨 상관인데 왜 자꾸 나를 괴롭혀!”
“네가 상처받는 게 싫으니까!, 네가 다치는 걸 보는 게 싫으니까!”
현수와 경미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자 테이블에 앉아있던 정완은 펜션 앞 벤치 쪽으로 고개를 들어 쳐다보았다. 병준은 일어서려는 정완을 붙잡았다.
“나서지 마. 네가 관여할 일은 아닌 것 같다.”
“그렇지만..”
“선영 씨가 왜 화를 냈는지 나는 조금은 알 것 같아.”
“나도 아는데, 알고 있는데 왜 이렇게까지 일이 꼬여버린 건지 모르겠다.”
“비율로 따지자면 네가 90이고 선영 씨가 10.”
“지수한테 듣던 대로네. 그래 인정할게. 말이 좀 심했던 것 같다.”
“심한 정도가 아니지, 달래주지는 못할망정 망언을 쏟아부었으니..”
“선영이를 너무 편하게 생각한 내 잘못이지. 바보같이.., 낮에도 인정해놓고 반나절도 지나지 않았는데 이게 뭐람.”
“인정했으면 됐지 뭘. 선영 씨한테 인정했다는 걸 증명해. 그럼 자연스럽게 풀릴 거야.”
“증명까지 해야 돼?”
“증명이라기보다 표현이 맞지. 네가 가진 생각을 상대방에게 표현해주는 일. 그거 정말 중요한 거야. 마음속으로 백날 미안하면 뭐하고 머릿속으로 백날 사랑하면 뭐할 거야. 표현을 안 해주는데 상대방이 그걸 무슨 수로 알겠어?”
“그럼 너는 지수한테 어떻게 표현하는데?, 네가 가진 생각과 마음, 전부 다 알아들을 수 있게끔 표현하고 있어?”
병준은 정완을 설득시키려다 호되게 당할 것 같은 기분에 표정이 굳어졌다. 조금 전 선영에게도 힘겹게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으려던 병준은 호되게 당하더라도 누군가에게 한 번쯤은 자신의 속마음을 말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무 살 때, 나는 고아가 됐어. 부모님은 계셨지만 고아나 마찬가지였지.”
“의절이라도 한 거야?”
“아니, 말하자면 긴데..”
병준은 정완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기로 했다.
“내가 중학교 3학년 때 우리 형이 죽었어.”
“가슴 아픈 얘기면 일부로 말하지 않아도 돼.”
“아파트 옥상에서 추락했는데.., 안 믿었어, 아니 믿을 수 없었어. 그래서 출동한 경찰이랑 관리실에서 CCTV를 돌려보는데.., 그 CCTV 속에서 형이 혼자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고는 불편한 몸으로 옥상까지 기어서 올라가는 모습이 담겨있더라.”
“설마..”
“우리 형, 뇌성마비를 앓고 있는 지체장애인이었거든.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우리 가족들은 CCTV 속 형의 모습을 보고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
“그랬구나..”
병준은 병섭과 자신이 다르다는 것을 유치원에 다닐 쯤에야 실감했다. 병준은 유치원에 등원했지만 병섭이 유치원에 가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시간이 지나 병섭이 특수학교로 입학을 하게 되면서부터 병준은 비로소 병섭이 장애인이라는 것을 받아들였다. 병준은 중학교에 진학하고 많은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지만 병섭의 곁에는 늘 가족뿐이었다. 병준은 병섭과 자신이 다르지 않음을 친구들에게 보여주려 친구들을 가끔 집으로 초대했지만 한번 다녀간 친구들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병준의 초대를 거절하곤 했다. 병준은 그때까지만 해도 그들이 병섭을 보는 시선이 자신과 다르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병준이 중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처음으로 여자 친구를 사귀게 되었다. 병준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고 사랑하는 병섭에게 여자 친구를 소개해주고 싶은 마음에 여자 친구를 집으로 데리고 왔지만, 여자 친구는 십 분도 지나지 않아 병준의 집에서 나가버렸다. 어느 날부터 학교에는 병섭이 지체장애인이라는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고 떠돌기 시작했던 작은 소문은 또 다른 소문을 낳게 되었다. 그 후, 병준의 삶은 조금씩 변해갔다. 병준의 집 근처에 살고 있던 병준의 동급생들은 병준과 함께 있는 병섭을 우연히 보기라도 하면 그들을 괴롭히거나 험한 욕설을 뱉었다. 병준은 아무래도 괜찮았다. 그저 자신에게는 하나뿐인 형을 창피해하거나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눈이 좋지 않으면 안경을 쓰면 되고, 다리가 부러지면 목발을 집고 다니면 되잖아?, 궁금한 게 생기면 물어보면 되고. 설사 목이 아파서 말을 못 할 정도로 아프면 글로 쓰면 되잖아?, 그런데 우리 형은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어. 아침에 일어나면 씻겨 줘야 하고, 옷을 입혀 줘야 하고, 밥을 먹여 줘야 했거든. 그런 형이.., 그랬던 형이.., 자살을 택했어. 온전히 본인 스스로의 의지로 죽음을 택했던 거야. 가족들 없이는 아무것도 못할 것 같았던 형이 처음으로 자신의 의지를 드러낸 게 죽음이었다고..”
병준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정완은 병준을 애처롭게 쳐다만 보았다. 정완은 굳이 끝까지 들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저 지수와의 관계에 대한 것만 알면 되는 일이었음에도 듣는 이의 가슴을 저리게 만드는 이야기를 재촉하고 싶지 않았다.
그 시각, 지수와 선영은 2층에 있는 여자 방에 있었다. 가까스로 울음을 그친 선영은 자신이 가져온 가방에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지수야, 열쇠 줘.”
“선영아, 진정해.”
“택시 부를 거야. 열쇠 내놔.”
“선영아. 그러지 말고 잠깐 앉아 봐.”
지수는 잔뜩 화가 난 선영을 달래기 위해 일단 선영을 자리에 앉혔다. 그럼에도 선영은 곧장 일어났고 지수는 선영을 무작정 끌어안으며 선영을 진정시키려 했다.
“선영아, 정완이도 본심은 아니었을 거야. 너도 알잖아.”
“이거 놔 지수야. 부탁이야.”
“너희 두 사람 다시 잘 됐으면 하는 마음에 여행 가자고 했던 거 너도 알지?, 진정하고 천천히 생각 하자. 응?”
“너도 미워. 정완이도 밉고. 경미 씨는 왜 데려와서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드니?”
“그게 있잖아..”
지수는 겨우 선영을 진정시킨 후 자리에 앉았다. 지수는 아직도 두 사람이 서로를 사랑하고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이 여행에서 확인시켜 주기만 하면 된다고 강하게 믿었던 지수는 선영에게 경미를 데려온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너랑 정완이랑 다시 잘 만나게 되면 경미가 정완이를 좋아하는 마음을 접을 것 같았거든. 그래서 데려왔어.”
“뭐라고?, 경미 씨도 알아?”
“응. 경미도 꽤나 당돌하더라. 어차피 그건 예상했었어.”
“정완이랑 나랑 싸우게 될 건 예상 못했고?”
“전에 녹음기에 담겨있던 파일 기억하지?, 그 녹음기를 정완이 앞에 내밀었을 때도, 네 앞에 내밀었을 때도 나는 똑같은 생각을 했어. 아마 그때 서로 다른 생각을 이야기하거나 허튼소리를 했다면 나도 이렇게까지 안 했을 거야.”
“그러니까 네 말은 경미 씨 마음은 생각도 안 한 거네?”
“괘씸하잖아. 뻔히 정완이 옆에 네가 있는데도 호시탐탐 그 자리를 노리고 있는 게 괘씸하잖아.”
“그건 내가 알아서 할 문제 아니야?, 설령 경미 씨가 정완이한테 좋아한다고 고백했으면 모를까 고백하지도 않은 사람한테 너무 가혹한 거 아니니?”
“네가 지금 남 걱정할 때야?, 너 정완이 좋아하잖아?, 사랑하잖아?, 그런 정완이를 눈앞에서 빼앗겨도 상관없다는 거야?”
“지수야. 네 마음 잘 알아, 잘 안다고. 그래도 이건 도가 지나친 것 같아.”
“아무튼 선영아. 정완이가 너한테 나쁜 뜻으로 한 말은 아니잖아. 화 풀어. 응?”
“나도 화가 나서 아무 말이나 했는걸 뭐.”
“정완이도 알 거야. 너희 두 사람.., 서로가 서로를 잘 알잖아, 눈빛만 봐도 아는 사이잖아.”
“알았어 지수야. 근데, 경미 씨는 이대로 괜찮을까?, 그냥 좋아하기만 하는 것 같은데.., 좋아하는 마음을 가졌다고 해서 이렇게 벌을 주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아.”
“언젠가는 잘라내야 할 싹이야. 이번 기회에 똑똑히 각인시켜 줄 거라고. 근데 경미가 정완이 좋아하는 거 어떻게 알았어?”
“아까 경미 씨 넘어졌을 때 카메라가 떨어졌거든. 카메라를 주워서 액정을 봤는데 정완이가 웃고 있는 사진이 있더라고. 실은 아침부터 나도 안 좋았어. 정완이가 은근히 경미 씨 챙기는 게 거슬렸다고.”
“그러니까 이제라도 정신 차리게 우리가 도와줘야지. 하필 좋아해도 정완이냐 걔는..”
“그래도 이건 좀 너무한 것 같아.”
정완은 굳게 닫혀버린 병준의 입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딱히 떠오르는 말이 없었던 정완은 샴페인을 종이컵에 따른 후 병준에게 건넸다.
“경찰 조사가 끝나고 결국 자살사건으로 수사가 종결됐어. 그 일이 있은 후 어머니는 쓰러지셨고, 아버지는 직장을 그만두시고 어머니 곁을 지켰어. 어린 내가 받아들이기에도 그 충격은 결코 가볍지 않았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형의 빈자리가 너무 심하게 느껴져서 형이 쓰던 방에 들어갔는데, 내가 형한테 자주 읽어주던 책 속에 종이 한 장이 끼워져 있는 걸 우연히 발견했어.”
종이컵에 담겨있는 샴페인을 단숨에 마신 병준이 말을 이어갔다.
“그 종이를 꺼낸 순간 눈물이 앞을 가리더라. ‘병준아 미안해.’라고 온몸으로 눌러쓴 삐뚤빼뚤한 글씨가.., 그 글씨가 형이 남긴 마지막 흔적이었다고 생각하니까 눈물이 나오더라고. 그게 유서일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어. 내가 태어나서 가장 심하게 울어본 게 그때였어.”
손안에 있던 종이컵을 구긴 병준은 깊은숨을 내쉬며 다시 말을 이어갔다.
“인생에서 가장 소중했던 사람을 잃고 나니까 알겠더라고. 잃고 나면 그걸로 끝이라는 걸. 아무리 해주고 싶은 게 많아도 더 이상 해줄 수 없다는 게.., 그게 정말 슬펐어. 다시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아니까..”
“아무래도 그럴 수밖에 없지.”
“혼자 살기 시작하다 보니까 외로움도 점점 커졌고, 약해빠진 생각 때문에 눈물도 제법 늘더라고. 누구를 좋아하는 것도 겁이 나고, 누구를 싫어하는 것도 겁이 났어. 그땐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더라고.”
“그건 나랑 좀 비슷하네. 나도 사회생활을 일찍 시작했거든.”
“비관적인 사상으로 똘똘 뭉친 채로 아무렇게 막 살아가다 보니까 점점 사람 냄새가 안 나는 거야. 그럴 때마다 죽으면 편해질까?, 죽고 나면 아무 생각도 하지 않게 될까?, 뭐 이런 나쁜 생각도 하게 되고.”
“닮았다 진짜. 사정은 조금 다르지만.., 지금 내 성격이 부정적이게 된 것도, 현실적으로 된 것도 정말 나랑 닮았다.”
“다행이다. 너랑은 말이 통하는 것 같아서.”
“병준이 너도 정말 의외다. 지수가 본인보다 철저하게 계산적이고 칼같이 냉정한 사람이라고 하길래, 단순히 똑 부러진 놈인 줄만 알았는데.”
“남들 눈에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지. 아무튼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형을 생각하니까 죽지도 못하겠더라고. 나까지 죽어버리면 우리 형을 보러 와 줄 사람이 아무도 없잖아?”
“부모님은?”
“나 스무 살 때, 미국으로 이민 가셨어.”
“그것도 나랑 비슷하네. 사연은 조금 다르지만.”
“어쨌든, 누군가는 살아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만 하면서 살아가던 중에 지수를 알게 되었어.”
“복지관에서 만났다고 했지?”
“응. 지수를 만나고 지수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면서부터 신기하게도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생기더라.”
“뭐, 어떻게 보면 지수가 생명의 은인이네. 근데, 지수가 예전에 너한테 고백했었는데 네가 안 받아 줬다며?, 왜 안 받아준 거야?”
“받아줄 수가 없었어.”
“왜?, 서로 잘 통하고 은근히 좋아하는 눈치던데. 거절할 이유가 없잖아.”
병준은 지수의 이야기로 화제가 바뀌자 영문 모를 표정을 지으며 쑥스러워했다. 병준은 어차피 털어놓는 김에 시원하게 모든 것을 털어놓기로 결심했다.
“지수를 만나고부터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생겼다고 했지?, 살고 싶었어.., 살고 싶어서 그랬어. 지수를 잃게 되면 간신히 생겨난 삶의 의지가 꺾일까 봐.., 겨우 살고 싶어 졌는데 다시 죽고 싶어 질까 봐.., 그래서 그랬어.”
뜻밖의 무게감에 정완은 당황했다. 병준이 생각하는 지수의 존재가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이 느껴졌다.
“지수랑 같이 살면 되잖아.”
“내 삶에 의미를 부여했다는 게 전제였으니까. 지수랑 가끔 얼굴 보고 얘기만 할 수 있다면 나는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어. 중간중간 욕심이 생긴 건 사실이었지만 만에 하나라는 게 있잖아?, 지수를 잃기라도 하면 뒷일은 상상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겁이 났거든.”
“보기보다 겁이 많네.”
“내가 어떤 생각까지 한 줄 알아?”
“모르지.”
“지수가 다른 남자를 사귀어도 좋고, 다른 사람과 결혼을 해도 좋으니까 가끔 한 번씩 얼굴 보고 얘기만 할 수 있으면 좋겠다. 뭐, 이런 생각.”
“한심한 마인드 구만.”
병준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무엇이 병준을 지탱하고 있는지, 무엇이 병준의 심장을 뛰게 하고 있는지 알고 있으면서 두렵다는 이유로 손발이 꽁꽁 묶여버린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도 한심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정완아. 인공위성 알지?, 행성 주변을 떠돌며 관측하고, 각종 정보를 지구로 보내주는 인공위성. 나는 지수한테 그냥 인공위성 같은 존재로 남고 싶어.”
“인공위성?, 홀로 광활하고 공허한 우주를 돌아다니면 굉장히 쓸쓸하지 않겠어?”
“말했지?, 나는 다 괜찮다고. 만약 내가 괜한 욕심을 부리기라도 하면 곧장 태양으로 뛰어들어 녹아버릴지도 몰라. 나는 그게 두렵고 무서워.”
“사상은 나랑 비슷하네. 너는 잃는 게 두려운 거고, 나는 지키는 게 두려운 거고. 너나 나나 진짜 겁쟁이들이네..”
“내일 당장 내가 죽어도 세상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잖아?, 그래서 더더욱 살고 싶었는지도 몰라. 지수라면 나를 기억해 줄 것 같았으니까. 단 한 사람만이라도 나를 기억해주면 그걸로 충분하니까. 그래서 나는 죽고 싶은 생각이 안 들 만큼.., 살아있고 싶어.”
병준의 이야기를 듣던 정완은 자신과는 사정이 조금은 다르지만 비슷한 부분이 꽤나 많다는 것을 느꼈다. 정완은 두 개의 종이컵을 새로 꺼낸 후, 샴페인을 가득 채워 병준에게 건넸다.
“나는 선영이를 사랑해. 선영이가 행복해지는 게 내 인생의 최종 목표야.”
“나도 지수를 많이 사랑해. 지향하는 목표는 똑같네.”
정완과 병준이 건배를 하는 순간 펜션의 귀퉁이에서 사람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긴 머리를 하고 있는 여성의 그림자를 발견한 병준이 정완에게 말했다.
“선영 씨 내려왔나 보다. 어서 가봐. 사랑하는 만큼 실컷 표현해주고 와.”
“그래, 고맙다 병준아. 지수한테는 비밀로 해야 되는 게 맞겠지?”
“응. 그래 주면 고맙지. 얼른 가봐.”
정완은 전쟁터에서 아군을 만난 것처럼 든든했다. 병준과 대화를 마치고 인기척이 느껴졌던 펜션의 모퉁이 쪽으로 정완은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지수와 선영은 한참 전부터 정완과 병준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지수는 선영을 겨우 설득시킨 뒤 정완과 화해를 시키기 위해 1층으로 내려왔다. 하지만 정완과 병준은 이야기에 집중하느라 계단을 내려오는 지수와 선영을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일부러 엿듣는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지수와 선영은 도둑고양이가 된 기분으로 건물의 모퉁이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우연히 듣게 된 병준의 이야기가 끝나자 지수는 하염없이 울기 시작했다. 소리라도 내면 들킬까 싶어 입을 틀어막고 눈을 질끈 감았다. 선영은 그런 지수의 모습이 안쓰러워 말없이 지수의 등을 쓰다듬을 뿐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모퉁이 쪽으로 빠르게 다가오는 정완을 보게 된 지수는 에어컨 실외기의 뒤에 몸을 숨겼고 숨소리도 새어나가지 않을 정도로 자신의 입을 힘껏 막았다.
선영은 빠르게 다가오는 정완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정완의 손을 잡고 먼저 사과를 했다.
“저기, 정완아.., 아까 내가 말이 좀 심했지?, 미안해. 욱하는 바람에..”
“사과하지 마 선영아, 내 생각이 짧았어.”
“아까 아빠 얘기 꺼낸 것도 미안해. 가족 얘기 싫어하는 거 알면서.., 나도 생각이 짧았어.”
“춥다, 일단 올라갈까?”
“그래, 그러자.”
정완과 선영이 계단을 올라가는 동안 선영은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았다. 지수는 여전히 실외기 뒤에 잔뜩 웅크린 채 울고 있었다. 병준의 속마음을 확인하게 된다면 분명 좋거나 나쁘거나 둘 중 하나일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 지수가 느끼는 감정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만큼 복잡한 감정이었다. 가슴은 미친 듯이 두근거렸고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벅차올랐지만 매우 슬펐다. 그동안 자신이 슬펐다고 느꼈던 것들 조차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가슴이 시큰거렸다.
한편, 펜션 앞 벤치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현수와 경미는 서로의 감정을 앞세울 뿐, 화해의 물꼬를 터볼 기미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뻔히 보이는 가시밭길을 맨발로 걷고 있는 게 눈에 보이잖아. 그게 너한테 상처를 입히는 길인걸 알면서도 왜 그 길을 고집하는 거야?, 왜 그렇게 피까지 철철 쏟아가면서 그 길을 가는 거냐고!”
“내 인생이야!, 네가 끼어들 권리 없다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
“내가 신발이라도 신겨주겠다고.., 조금이라도 덜 다치게 신발이라도 좀 신으라고 멍청아!”
“멍청이?,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한테 이래라저래라 하는 너는 정상인 줄 알아?”
“적어도 지금의 너보다는 훨씬 정상이야!”
“왜 네가 신발을 신겨주겠다고 나서는 건데?, 내가 분명히 여기 오기 전에 말했지?, 착각도 하지 말고, 기대도 하지 말라고!”
“그래, 네 마음대로 해. 결국 네 몸과 마음만 피폐해질 뿐이니까. 아무리 절뚝이면서 불쌍한 척해봐라, 누가 거들떠나 보나.”
“할 말 다했으면 가. 더 이상 너랑 얘기하고 싶지 않아.”
“너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할 수 있었던 순간을 네 발로 걷어찬 거야. 명심해. 받지 않아도 될 상처와 미움까지도 결국 네 스스로가 만들었다는 걸.”
현수는 그대로 2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싸늘한 바람은 날카롭게 변해 상처가 난 경미의 발목을 더욱 욱신거리게 만들었다. 정완에게 예쁘게 보이고 싶어 샀던 고가의 원피스도, 정완의 미소를 가득 담아두었던 카메라도 경미를 위로해 주지 못했다.
2층에 있는 남자방으로 온 정완과 선영은 조금 전에 있었던 다툼에 대해 거듭 사과를 했다. 멀찌감치 앉아있던 선영에게 정완이 다가가 앉았다. 선영은 정완의 손을 잡으며 정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예전에 지수한테 너에 대한 얘기를 듣고, 네가 쓴 시집 샀다는 거 기억나지?”
“부끄럽게 시집 얘기는 왜 꺼내고 그래.”
“네가 쓴 시를 읽을 때마다 온기가 느껴졌어. 아무리 봐도 슬픈 내용인데 가슴이 따듯해지는 기분이 들었어. 반대로 밝은 내용으로 쓴 내용은 가끔씩 나를 울렸고. 네가 쓴 노랫말도 그랬어. 분명히 밝고 따듯한 내용인데 이상하게도 슬픈 거 있지?, 네가 쓴 시나 노랫말을 이해하는데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린 것 같아. 네가 긍정적인 생각이 부족하다는 것도, 비현실적인 얘기를 싫어하는 것도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알게 됐어.”
“마음의 거울이었어. 거울에 비친 현실이 아닌, 갈망하고 있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나 봐.”
“알아. 나는 그 글을 볼 때마다 너한테 연민이 느껴졌고, 그러다 보니까 어느새 의지가 되어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어. 아픈 상처를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따스함이 느껴졌거든. 그래서 너한테 더 끌렸던 것 같아.”
“가사를 쓰는 시간은 내가 유일하게 희망을 꿈꾸는 시간이었어.”
“나는 참 그게 섭섭했어. 노랫말처럼 살면 좋을 텐데, 왜 정완이는 마음속에 담아둔 말을 적어두기만 하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되니까 무지 섭섭했어.”
“지금도 섭섭해?, 섭섭해서 아까 그렇게 화를 낸 거야?”
“응. 솔직하게 말할게. 지금도 너무너무 섭섭해서 가끔 집에서 혼자 울 때도 있어.”
“말을 하지.., 섭섭하다고.”
“굳이 말을 안 해도 너는 알아줄 줄 알았거든. 7년을 함께 했으니까. 들리지 않을 만큼 작게 말을 해도 확성기를 켠 것처럼 크게 들릴 줄 알았어.”
“나도 그렇게 너를 대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자연스러우니까.., 익숙하니까.., 그러다 보니까 가장 중요한 걸 잊고 지낸 것 같아.”
“내 생각도 그래. 내가 섭섭하고 서운한 걸 표현을 해야 상대방이 아는 게 당연한 건데,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다 보니까 순서가 바뀐 것도 몰랐던 거지.”
“오늘만 너한테 미안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7년 동안 했던 미안해보다 많은 것 같지?”
“나는 7년 동안 미안해를 입에 달고 살았는걸 뭐.., 정작 뭐가 미안한지도 몰랐으면서. 이제 우리 서로 미안해하지 말자. 모르면 모르겠다고 물어가면서 섭섭해하거나 서운해하지 말자.”
“그래. 이제부터는 당연하다는 생각도 하지 말자.”
정완과 선영은 차분하게 서로를 인정하며 자연스레 화해를 했다. 서로가 놓치고 있는 부분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두 사람은 잠시 7년 전 그때로 돌아가 그곳에 두고 온 소중한 것을 찾아온 기분이 들었다.
오래 만난 연인들의 가장 큰 특징이자 단점은 바로 서로의 존재를 당연하게 여기는 마음가짐이었다. 조금 오래 곁에 머물고 있을 뿐인데 마치 평생 머물러 줄 것이라는 착각을 하곤 했다.
당연한 것은 없었다. 원래 그랬으니까, 늘 그래 왔으니까, 그런 안일한 생각들이 끈끈했던 정 마저도 순식간에 희석시켜버리는 심각한 문제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