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4) 진실된 마음. 시작되는 이야기 - 下.
episode 14.
지수는 병준이 홀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야외 테이블로 향했다. 아직 감정을 완벽하게 다스리지 못해 점점 어둠에 둘러 쌓여가는 병준을 혼자 내버려 둘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병준아, 우리 조금 걸을까?, 조금만 걷다 와서 마저 정리하고 올라가자. 나 걷고 싶어.”
“너 얼굴이 왜 그래?, 울었어?”
“별거 아니야, 선영이 달래주다가 같이 울어서 그래. 괜찮아.”
“그래, 나도 좀 걷고 싶다. 배도 부르고.”
지수와 병준은 낮에 다녀온 산책로를 다시 한번 걸었다. 밤이 되어서야 낮 동안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하나씩 고개를 들기 시작했고 들리지 않았던 소리가 음악소리처럼 들리기 시작했다. 캄캄한 밤하늘을 빼곡하게 수놓은 별들을 지붕 삼아 두 사람은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갑자기 불어오는 바람이 귓가에 간질간질한 휘파람 소리를 불어주었다. 아직도 떨림의 여운이 가시지 않았지만 숨 막히는 긴장감도, 얼음장같이 차가운 아픔도 지수는 받아들여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검은색 도화지에 설탕을 흩뿌려 놓은 듯한 하늘을 올려다보던 지수가 말했다.
“여기는 외곽이라 그런지 별이 엄청 많다. 그치?”
“그러게. 가을이라 더 그런가.”
조금 썰렁한 기온이었지만 두 사람은 천천히 걸었다. 조금이라도 함께이고 싶은 마음을 가진 어린 시절의 소년과 소녀처럼 풀이 듬성듬성 자란 흙길을 한 발짝씩 디디며 천천히 걸었다.
지수는 병준의 속마음을 정확하게 알게 된 오늘, 병준과 조금 더 확실한 관계로 발전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머릿속 한편에서는 병준에게 차였던 그날이 자꾸만 떠올랐다.
복지관의 지리도 꽤나 익숙해질 만큼 자주 드나들게 된 지수는 어슴푸레한 달빛이 고개를 치켜들 때쯤 병준의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지수의 집 근처에 도착하자 병준은 지수에게 인사를 하고 지수를 내려주었다. 그날따라 지수는 기분이 들쑥날쑥했다. 배려라고 생각하기에는 온정이 느껴졌고 남들처럼 평범하게 대해준다고 생각하기에는 사심이 다분히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사귀는 사이가 아니었음에도 이러한 감정을 느끼는 자신이 이상하다고 느꼈던 지수는 집으로 들어가자마자 메신저에 있는 친구들에게 자신이 놓인 상황을 있는 그대로 전했다.
그들이 하는 말은 하나같이 똑같았다. ‘그 남자, 아마도 너를 좋아하는 게 분명해.’라는 일관된 답변들이었다. 그들의 생각이 자신의 생각과 일치하다고 판단한 지수는 한껏 들뜬 마음으로 병준에게 지금 느끼고 있는 자신의 심정을 전해야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지수는 지금까지 남자에게 먼저 고백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늘 병준에게 고백을 하게 되면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 지수는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자신의 휴대폰으로 집 앞에 있는 호프집에서 혼자 술을 마시는 자신의 모습을 찍은 사진을 병준에게 전송했다. 한달음에 달려온다면 그들의 답변이 맞는 것이고,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다음을 기약한다면 그들의 답변이 틀린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떨리는 마음으로 지수는 병준이 오기만을 바랐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수의 바람대로 병준은 호프집에 나타났다. 술의 힘을 빌려서라도 지수는 오늘 꼭 병준에게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병준이 거절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지수는 병준에게 고백을 했다.
지수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은 아닌가 싶은 노파심에 번개처럼 달려온 병준의 얼굴에는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지수에게 고백을 받은 병준의 심장은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처럼 울려댔지만 병준은 지수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지수에게 야단을 치지도 않았다. 지수는 자신이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얼굴이 붉어졌지만 술을 마셨기 때문이라는 얼토당토않은 합리화를 하며 호프집을 나왔다. 병준은 몇 차례나 지수를 집까지 바래다주겠다고 했지만 지수는 선영을 만나기로 했다며 끝까지 마다했다.
분명, 지수는 병준에게 고백을 했었다. 거절을 당한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지금까지도 그때 자신의 고백을 거절했던 이유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그러나 지수는 오늘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싫어서 거절했던 것이 아니었다. 두려워서 말하지 못했던 병준의 마음을 오늘에서야 깨닫게 된 지수는 자신이 느꼈던 감정과 상당 부분 닮아있던 병준의 진심에 또 한 번 가슴이 시큰거렸다.
지수와 병준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칠흑 같은 밤하늘에는 보석으로 수놓아진 비단길이 끝이 어딘지 알 수 없을 만큼 길게 뻗어있었다. 붉게 빛나는 북극성을 기점으로 별빛이 강물처럼 흐르고 있었다. 강물에 비친 별빛이 진짜인지, 고개를 들어 바라본 하늘에 놓인 별빛이 진짜인지 모를 만큼 지수와 병준의 주변은 온통 반짝임으로 가득 차 있었다.
“병준아. 언젠가 사람이 죽으면 별이 된다는 말, 들어봤어?”
“응. 들어 봤지.”
“저 많은 별들 중에 병섭 오빠의 별도 있겠지?”
“그렇겠지..”
“어디에 있는지는 몰라도 분명 지켜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
“고마워, 지수야.”
“그나저나 무슨 별이 이렇게나 많아?, 저게 다 별 일까?, 아니면 죽은 사람들의 영혼일까?”
“지수야.”
“응?”
“저 별들 중에는 인공위성도 있어.”
병준의 말이 끝나자 가벼운 침묵이 머물렀다. 차가운 감촉의 바람이 지수의 가슴에 휘몰아치자, 지수는 더 이상 자신의 감정을 억누를 수 없던 나머지 무작정 병준을 끌어안았다. 병준은 어쩔 줄 몰라했다. 병준의 몸통을 바싹 끌어안은 지수가 병준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네 인공위성은 어디쯤에 있어?”
병준은 정완과 자신이 나누던 대화를 지수가 들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정완을 제외한 그 누구에게도 인공위성이 되고 싶다는 말을 꺼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병준은 지수의 질문에 대답을 해야 할지, 못 들은 척하며 지수를 자신의 품 안에 가두어 놓아야 할지 고민했다.
병준의 품에 안긴 지수는 자신의 생각을 한 치의 거짓도 없이 전하기로 했다.
“만약에 네가 태양으로 뛰어들어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나도 같이 갈게. 하얗게 타버린 채 먼지가 된다 해도 그곳이 네가 가야 할 곳이라면 어디든, 언제든 나도 따라갈게.”
병준은 안간힘을 쓰며 간신히 붙잡고 있던 외줄에서 손을 떼고 말았다. 끊어지지 않을 만큼 팽팽하게 유지하려 했던 그 줄을 마침내 자신의 손으로 놓아버리고 말았다. 병준은 지수와 산책로를 걷는 동안 하늘에 가득한 별들 사이를 이어가며 침착함을 최대한 유지하려 했다. 하지만 별과 별 사이를 잇던 시선의 끄트머리에는 지수가 있었다.
“병준아. 이제부터는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말고, 무서워하지도 마. 나를 만난 순간부터 너는 혼자가 아니었으니까. 그러니까 더 이상 잃게 될까 봐 겁먹지 마.”
잃는 것이 두려웠다. 더 이상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 존재들을 하나라도 잃고 싶지 않았다. 다만 곁에 머물러 주기만을 소망했다. 힘없이 풀려버린 외줄은 그대로 바닥에 널브러졌다. 긴 시간 쌓아왔던 감정들은 귓불까지 저리게 할 만큼 병준을 집어삼켰다. 병준은 자신의 품 안에서 이것이 사랑임을 확신하는 지수의 눈빛을 받아들였다. 병준의 얼굴과 맞닿은 지수의 얼굴에는 소리 없이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지수의 턱 끝에 맺힌 눈물은 별빛만큼이나 아름답게 반짝였다. 병준과 지수는 맞붙어있는 서로의 얼굴을 한동안 떼어내지 못했다.
그 시각, 정완과 선영은 TV를 보고 있었다. 방으로 들어온 현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곧장 이어폰을 귀에 꽂고 누웠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지수와 병준도 펜션에 돌아왔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경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지수와 병준이 2층으로 올라오자 정완은 병준에게 야외 테이블을 마저 정리하고 오자며 병준과 함께 테이블 쪽으로 갔다. 지수는 복권에 당첨된 사람마냥 싱글벙글하며 선영의 옆에 앉았다. 현수는 소란스러운 분위기에 방에서 나와 테라스로 향했다.
“불은 다 꺼졌고.., 이제 치울 것도 없어 보이네.”
“그러게. 이것만 갖다 버리고 올라가자. 밤 되니까 엄청 춥다.”
야외 테이블을 정리하고 있는 정완과 병준에게 테라스에 있던 현수가 말했다.
“형들, 뭐 도와드릴 거 있어요?”
“아니, 아까 한번 치워서 그런지 정리할 것도 별로 없어.”
“대충 하고 올라오세요. 이따가 제가 한번 더 볼게요.”
“그래. 근데 현수야. 경미는?”
“경미요?”
남자들이 대화를 하는 소리를 들은 선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곧장 여자 방으로 갔다. 방안에는 경미의 짐이 그대로 있었다. 화장실에 노크를 해보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테라스로 간 선영은 정완과 병준에게 경미가 방에 없다는 사실을 알렸다. 주차장에 있는 차에도, 조금 전까지 현수와 함께 있었던 펜션 앞 벤치에도 경미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일행은 황급히 경미를 찾아 나섰다. 지수도 경미를 찾으러 나가려던 그때, 현수가 지수의 팔을 붙들었다.
“누나. 좋은 일 있었나 봐요?”
“좋은 일은 무슨.., 얼른 나가서 경미 찾자.”
“바라던 게 이거였어요?”
“무슨 소리야?”
“누나가 원하는 대로 돼서 참 좋으시겠네요. 도대체 경미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이렇게까지 하는 건데요?”
“현수야..”
“경미는요 기댈 곳이 없으면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애라고요!, 자기가 가야 할 길도 못 찾아서 매번 이리 부딪히고 저리 부딪혀서 상처투성이가 되는 게 경미라고요!”
“그게 내 탓이야?, 안 와도 되는데 굳이 여기까지 따라온 걔가 잘못한 거지!”
“경미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기만 해 봐요. 가만 안 둘 거예요.”
현수는 지수의 어깨를 밀치고 그대로 1층으로 내려갔다. 모두가 경미를 찾아 헤매던 그때, 1층 로비에 있던 펜션 사장이 밖으로 나왔다. 펜션 사장이 나오는 것을 확인한 정완은 펜션 사장에게 곧장 달려갔다.
“사장님. 긴 원피스 입은 여자분 혹시 못 보셨나요?, 머리도 묶었는데..”
“아, 그 찢어진 원피스 입고 발목에 상처 난 여자분요?”
“네, 맞아요. 혹시 어디로 갔는지 아세요?”
정완이 펜션 사장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 일행은 어느새 정완과 펜션 사장 주변으로 모여 있었다. 손전등을 들고 산책로 주변을 샅샅이 살피던 병준까지 돌아오자 펜션 사장은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일행에게 말했다.
“아까 남자 두 분 밖에서 술 드시고 계실 때 로비에 왔었어요. 다리를 다쳤다면서 병원에 태워다 줄 수 있겠냐고 묻길래 일행들 차 없냐고 제가 되물었죠.”
“그래서요?”
“다들 술을 마셔서 운전을 할 수 없다고 하니까 어쩔 수없이 제가 시내에 있는 병원까지 데려다줬지요.”
“그럼 지금 병원에 있는 거예요?”
“글쎄요.., 아까 병원에서 치료받는 것까지 보고 다시 펜션으로 데리고 올까 했는데, 여자분이 부모님께 연락했으니까 괜찮다고 해서 저 혼자 돌아왔어요.”
“많이 다쳤어요?”
“피가 좀 나긴 했는데, 부러진 것 같지는 않았어요. 응급처치만 해도 돼 보였는데..”
펜션 사장의 말이 끝나자 경미를 제외한 다섯 명은 굳은 표정으로 땅바닥만 쳐다보았다. 경미가 다친 것을 알았으면서도 어느 누구도 경미에게 신경을 써주지 못했던 것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상처를 본 정완도, 구급상자를 가지러 가던 정완을 만류했던 선영도, 다친 경미에게 막말을 쏟아붓던 현수도, 그리고 아무 관심도 없던 병준과 지수도 모두가 같은 마음이었다. 2층으로 올라와 한자리에 모인 일행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선영은 지수가 가져온 양철로 된 상자를 들고 와 바닥에 내려놓았다.
“지수야, 이거 얼른 열어. 열어서 경미 씨 전화번호 목록 좀 찾아보자.”
선영이 들고 온 상자를 쳐다보던 현수가 말했다.
“휴대폰을 꺼내봤자 보안은 어떻게 풀 건데요?”
“그럼 어떡해요?, 경미 씨한테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이 없잖아요.”
“누가 이 여행을 계획하셨을까.., 그분께 직접 물어보세요. 아마 이런 상황도 예상했을 것 같은데, 대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미리 생각해 놓은 게 있겠죠.”
현수는 싸늘한 시선으로 지수를 흘겨보며 밖으로 나갔다. 정완과 병준 그리고 선영은 동시에 지수를 쳐다보며 무언가 대답해 주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하지만 지수는 조금 전과는 다른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일행이 원하는 해답을 좀처럼 말하지 못했다.
밖으로 나온 현수는 펜션 앞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어차피 상처받을 일이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상처를 치료해줄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이 내심 마음에 걸렸다. 마음의 상처도, 발목에 난 상처도 자신이 직접 치료해줄 생각을 했더라면, 아니, 다친 사람에게 심한 말을 쏟아내지만 않았다면 이런 최악의 상황까지는 오지 않았을 것이라 자책했다.
지수는 남자방에 모여 있던 일행을 뒤로하고 펜션 앞 벤치에 앉아있는 현수를 찾아왔다.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어. 그냥 포기하게만 하려 했다고.”
“저한테 변명하지 마세요. 그럴 필요 없어요.”
“정완이랑 선영이 사이에 경미가 들어오는 게 싫었어.”
“경미가 언제요?, 막말로 경미가 정완이 형 좋다고 스토커처럼 쫓아다니기라도 했어요?”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나는 싫었다고.”
“본인이 싫으면 남한테 막 함부로 해도 되는 거예요?, 본인이 기분 나쁘면 아무한테 상처 주고 그래도 되는 거냐고요!”
“상처받을 거라고는 생각 안 했어.”
“그렇겠죠. 생각해보는 게 이상한 거겠죠. 누나는 참 이기적이에요. 아세요?”
“몰랐다고.., 정말 이렇게 될 줄 몰랐어. 미안해.”
“자꾸 나한테 사과해서 어쩌자는 건데요?, 처음부터 본인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게 이 여행의 목적 아니었어요?”
지수는 남들보다 자신의 통찰력이 높다고 생각했다. 남들보다 상황을 빠르게 인지하고 예측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하지만 일이 잘 풀릴 때만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 때문이라는 생각을 했다. 일이 잘 풀리지 않았을 때는 자신의 능력보다 천재지변 같은 변수 때문이라고 둘러댔다.
누구나 마찬가지였다. 행운이 찾아올 때는 자신의 노력과 능력 때문이라고 당연하게 여겼지만, 불행이 찾아올 때는 남을 탓하거나 주변의 환경을 탓했다.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로 무안해하던 지수가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
“경미 만나면 사과할게. 일단은 너도 당사자니까..”
“됐어요. 저한테 이러실 필요 없어요. 아까 경미가 싫다고 했었죠?, 저도 마찬가지예요. 저는 누나가 싫어요.”
“저기, 현수야. 내 말 좀 들어봐.”
“누나가 경미한테만 상처를 준 것 같죠?, 누나는 모두에게 상처를 준거예요. 자기 자신에게도, 여기 남아있는 사람들한테도 전부 상처를 준거라고요.”
현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곧장 2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지수는 현수의 뒤를 따라 2층으로 올라왔으나 방 안의 분위기는 꽁꽁 얼어붙어있었다.
늦은 밤. 정완과 병준 그리고 현수는 좀처럼 편히 잠들지 못했다. 즐거워야 할 정점의 시간이었지만 어느 누구 하나 웃지 못했다. 선영과 지수도 마찬가지였다. 싸늘하다 못해 차가워진 바깥의 공기만큼이나 202호와 204호에는 찬바람만 휑하니 불뿐이었다.
누구를 막론하고 상처를 입거나 입히지 않는 것은 불가능했다. 사람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곤 한다. 그것이 고의였는지, 고의가 아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형성되면 으레 마음에 생채기를 내는 상처 또한 함께 형성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최소한 주변에 상처를 입히지 않고 살아가려는 노력은 해야 했다.
다음날 아침, 일행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음에도 자연스럽게 세수를 하고 이를 닦으며 짐을 싸기 시작했다. 아침을 먹자는 말도 없었고 몇 시까지 퇴실을 해야 하는지 묻지 않았다.
현수는 경미가 가져온 커다란 캐리어와 전원이 꺼져있는 휴대폰을 챙겨 차에 실었다. 정완과 병준 역시 선영과 지수의 짐을 트렁크에 넣었다. 병준은 빠뜨린 물건이 있나 펜션 내부를 몇 번이나 확인하고서야 주차장으로 돌아왔다.
바로 그때, 1층에서 펜션 사장이 병준을 향해 걸어왔다.
“병준 씨, 왜 벌써 가요?”
“다들 일이 있어서요.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는요 뭘. 그 아가씨 때문에 그래요?”
“아니에요. 부모님께 연락했다니 집에 잘 갔겠죠.”
“그래요. 다음에 또 놀러 와요. 하필 보일러가 고장이 나는 바람에 불편을 드린 것 같네요.”
“괜찮습니다. 그럼 이만 가볼게요.”
시동이 켜진 승합차의 운전석에는 정완이 앉아 있었다. 경미의 빈자리가 제법 크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정완아. 내가 운전할게. 너 한숨도 못 잤잖아.”
“됐어. 나만 못 잤나 뭐. 중간에 힘들면 얘기할게.”
“그래, 그럼 그렇게 하자.”
펜션을 빠져나와 서울로 향하는 차량 안에서 현수는 밤새 고민했던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을 하고 있었다. 정완은 아직 이 상황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한 것 같은 느낌에 함부로 말을 뱉을 수 없었다. 생각하고 있는 것을 입 밖으로 꺼냈을 때 감당할 수 있을지가 걱정이 되었다. 물론 감당해야 할 사람은 본인이 아닌 경미였기 때문이었다. 더 이상 이 일에 깊게 관여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 현수는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결국, 서울에 도착하기까지 세 시간 남짓 동안 일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내로 들어서자 오랜 침묵을 깨고 병준이 입을 열었다.
“정완아. 렌터카 반납해야 되니까 교대하자.”
“아, 맞다. 잠깐만.., 갓길에 차 좀 대고.”
정완과 자리를 바꿔 운전석에 앉은 병준은 일행에게 말했다.
“선영 씨네 집이 제일 가깝죠?, 가까운 순서대로 내려드리고 저는 마지막에 렌터카 반납하고 갈게요.”
선영의 집 근처에 도착했을 때 정완은 선영과 함께 차에서 내렸다. 선영의 짐을 꺼낸 정완은 집에 도착하면 전화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차에 올라탔다. 지수의 집 근처에 도착해서도 정완이 차에서 내려 지수의 짐을 꺼내 주었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운전석에 앉아있는 병준에게 겨우 다가 온 지수는 연락하겠다는 말을 하고 손을 잠시 흔드는가 싶더니 집으로 들어갔다.
“현수는 집이 어디야?, 그나저나 경미 짐은 어떻게 하지?”
“경미네 학원 근처에 내려주시면 돼요. 그 근처예요.”
“그럼 경미 짐은 네가 사무실에 갖다 놓을래?”
“어차피 나도 사무실 잠깐 들려야 하니까, 현수랑 나랑 사무실에 내려줘.”
이윽고 정완의 사무실 앞에 차량이 멈춰 섰다. 그리고 정완과 현수는 차에서 내려 각자의 짐과 경미의 짐을 꺼냈다. 병준에게 인사를 마친 두 사람은 잠시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경미의 짐을 사무실에 들여놓은 정완은 현수에게 인스턴트커피를 내왔다.
“현수야. 형이 면목이 없다.”
“네?, 형이 왜요?”
“경미가 다친 걸 봐놓고도 선영이랑 싸우는 바람에..”
“괜찮아요. 저도 경미 다친 거 알았는데 걱정은커녕 화만 냈는걸요.”
“싸웠어?, 어쩐지 목소리가 크다했더니.”
“별거 아니니까 걱정 마세요. 형, 혹시 경미네 집 아세요?”
“응. 너는 몰라?”
“네. 어쩌다 보니..”
“경미 걱정되면 같이 가볼래?, 아니면 데려다줄 테니까 너 혼자 가볼래?”
“아니에요. 내일 수업 있으니까 내일 보면 되죠 뭐.”
“일부러 모른 채 한건 아니니까 이해해줘.”
“저는 괜찮아요. 내일 경미 만나면 지금처럼 말해주세요. 경미가 좋아할 거예요.”
“그래. 근데, 경미가 왜 좋아해?”
“아무것도 아니에요. 커피 잘 마셨어요.”
“진짜 안 데려다줘도 되겠어?”
현수는 애써 웃어 보이며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정완에게 할 말이 꽤나 많이 있었지만 말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모든 상황을 이실직고하기에는 경미가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현수는 내일 경미를 만나면 반드시 정중하게 사과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정완은 경미가 가져온 커다란 캐리어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고작 하루일 뿐인 여행에 캐리어까지 대동해야 했는지 잠시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정완은 그저 경미가 남들보다 꾸미기를 좋아하고 누구에게나 예뻐 보이고 싶을 나이였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했다. 자기 관리나 꾸미기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던 정완은 나름의 이유를 가져다 붙이며 경미를 이해하려 했다.
병준은 렌터카업체에 차량을 반납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지수에게 분명 전화나 메시지가 올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휴대폰은 잠잠하기만 했다. 어젯밤, 펜션 앞 벤치에서 현수와 대화를 하던 지수의 표정이 아른거렸다. 부끄러워하거나 창피해하지 않았던 지수였다. 그러나 어젯밤은 그동안 보여주지 않았던 다양한 표정을 보여주었다. 마지막에 보여준 지수의 무안한 표정이 내심 병준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여보세요?”
“나야. 이제 차량 반납하고 집에 가는 중이야.”
“고생 많았어. 나 때문에 네가 참 고생이 많다..”
“지수야, 왜 이렇게 기운이 없어?”
“기운이 나질 않네.”
“왜?, 그냥 털어버려. 너답지 않게 왜 그래?”
“이번 여행.., 반은 성공인데, 반은 실패인 것 같아.”
“정완이랑 선영 씨랑 다시 잘 되면 성공이라고 하지 않았어?”
“그랬지, 그랬는데.., 내가 생각했던 대로 마무리가 되지 않아서.., 그래서 그런가 봐.”
“경미 때문에?, 언제 시간 날 때 찾아가서 사과해.”
“너도 알고 있었어?”
“모를 리가 있나. 뻔하지..”
“내가 잘못한 거니?, 네가 봐도 내가 잘못한 거야?”
“네 편에서 얘기해줄까, 중립에서 얘기해줄까?”
“최대한 냉정하게 말해주라.”
“네가 잘못했지. 과실비율로 치면 네가 100.”
“그치?, 그러니까 현수가 그렇게 화를 냈겠지..”
“현수가 화를 냈어?”
“응. 나 같아도 기분 나쁠만하겠다 싶어.”
“지수야.”
“응?”
“전에 내가 말했지?, 너무 깊숙이 관여하면 언젠가 재앙이 올 거라고. 가만히 두었으면 오히려 정완이랑 선영 씨 일도 저절로 잘 풀렸을 수도 있었어. 어떤 방식이 최선인지 몰랐을 뿐이라고. 그 방식의 기준은 각자만 알고 있는 거니까.”
“그래서 지금 나 혼내는 거야?”
“혼나는 건 잘못된 게 아니야.”
“지금 이게 혼내는 거니?, 위로하는 거니?”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고 상심하지 말라는 뜻이야. 인간이기 때문에 실수를 하는 거고, 인간이기 때문에 잘못도 저지르는 거니까.”
“나 정말 잘못한 건가 봐. 내일 당장 경미한테 사과하러 가야겠어.”
“그래. 그렇게 해. 이해를 바라지도 말고, 설득시키려 하지도 마. 그냥 네가 지금 느끼는 미안함만 경미한테 고스란히 전해주고 와.”
“응. 그렇게 할게.”
“지수야, 실수를 해도 괜찮고, 잘못을 해도 괜찮아. 그때마다 느낀 점을 인정하고 바로잡으면 되니까. 어제 나한테 어디든 따라가겠다고 했지?, 나도 마찬가지야.”
“창피하게 왜 이래.”
“내가 항상 지켜봐 줄게. 그러니까 실수해도 괜찮고, 잘못해도 괜찮아. 알겠지?”
“고마워. 한결 마음이 편해진 기분이다.”
“그래, 잠도 못 잤을 텐데 낮잠이라도 자.”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얼굴이 탱탱 부어있던걸?”
지수는 전화를 끊고 거울 앞에 섰다. 붓기는 없었지만 붉기는 남아있었다. 병준의 말 한마디에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평정심을 찾게 된 지수는 내일 반드시 경미를 찾아가 진심으로 사과를 해야겠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