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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Made By me 1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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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희완 Jun 27. 2020

EP 16) 예견된 비극의 전말. 갈등의 씨앗.

episode 16.


11월. 부쩍 짧아진 가을은 작년보다 깊은 여운을 남겼다. 간간히 따듯하게 느껴지는 한낮의 기온을 제외하면 가을의 끝자락이라고 느낄 수 있는 흔적이 별로 없었다. 한때 거리를 뒤덮었던 노란빛과 붉은빛으로 치장했던 잎사귀들은 어느새 생명력을 잃은 듯 죽음과 같은 색을 띠고 있었다. 이미 앙상해진 나뭇가지에는 작은 새들만이 옹기종기 모여 있을 뿐이었다.


새로운 일거리가 좀처럼 들어오지 않았던 정완은 대부분의 시간을 작업실에서 보내고 있었다. 사무실에 도착한 경미가 긴 패딩점퍼를 의자에 걸어놓고는 따듯한 아메리카노를 들고 작업실의 문을 두드리며 정완을 불렀다.


“오빠. 요즘 선영언니랑은 어때요?”

“뭐, 똑같지.”
“똑같으면 안 되죠.”

“현수랑은 아직도 그 상태야?”

“네. 그나저나 곧 있으면 연말이네요.”

“그러게. 한 살 더 먹는 게 왜 이리 슬프지.”

“저는 별 감흥이 없어요. 앞으로도 몇 년은 계속 20대니까요.”

“방심은 금물이야. 서른 금방이?, 서른 되고부터는 나이를 먹는 속도가 차원이 달라.”

“모르겠네요. 어쨌든 저는 20대니까.”

“내일 기획사에서 좀 오라던데, 일거리나 줬으면 좋겠다.”

“심심해요?”

“심심해서 일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다 먹고살자고 하는 거지.”

“그것도 저는 모르겠네요. 저는 심심해서 하는 일이거든요.”


정완과 경미가 한창 사사로운 이야기를 주고받던 그때, 사무실에 병준과 지수가 찾아왔다.


“왜 이렇게 추워졌데. 아직 11월인데.”

“여기는 너무 따듯한데?, 선영 씨한테 사진 찍어서 보내줘야겠다.”


휴대폰을 들어 사진을 찍는 시늉을 하는 병준에게 정완이 번개같이 달려들었다. 이를 보고 있던 경미는 자신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지수는 사무실 테이블에 앉아 정완에게 커피를 요구했다. 종이컵에 인스턴트커피를 타 온 정완에게 병준은 또 한 번 장난을 쳤다.


“누구는 아메리카노 먹고, 누구는 종이컵에 믹스커피라.., 이것도 찍어서 선영 씨한테 보내야겠다.”

“이건 경미가 아까 사 온 거야. 다 식었다 식었어. 이거라도 줄까?”

“농담이야. 화내지 마.”

“그나저나 둘이서 여길 다 오다니 무슨 중요한 일이라도 생긴 거야?”

“중요한 건가.., 지수야. 이거 중요한 문제 맞지?”


커피를 입에 댄 채 얼굴을 가리고 있던 지수는 어울리지 않게 수줍어하고 있었다. 정완은 지수의 표정을 보고는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했다.


“정완아. 우리 결혼해.”

“뭐라고?,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결혼이야?, 설마..”


정완이 인지했던 사태의 심각성이라는 것은 임신의 여부였다. 창피한 줄 모르고 살았던 지수의 표정에서 문득 그런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말끝을 흐리던 정완이 지수를 쳐다보았다.


“아니야 그런 거. 너 음흉한 생각하고 있지?”

“설마.., 임신?”

“내 그럴 줄 알았다. 미리 말해두는데, 절대 아니다.”

“근데, 갑자기 결혼이라니..”

“오늘도 나는 늙어가고 내일도 늙을 예정인데, 어차피 그럴 거면 하루라도 같이 늙고 싶어서.”

“선영이한테도 말했어?”

“아니, 우리가 왜 여기를 왔겠니. 분명 선영이한테 먼저 말했다가는 네가 죽어나겠다 싶으니까 먼저 온 거지.”

“야, 갑자기 네가 결혼해버리면 선영이는 뭐가 돼?”

“남의 혼삿길 막을 생각 말고, 이제 어떻게 할 건지나 잘 생각해. 아직 구체적으로 정한 건 아니지만 일단은 그렇다고. 나 졸업하면 식 올릴까 해. 그냥 간소하게 할까 생각 중이야.”

“부모님들도 아셔?”

“우리 집에는 말했어. 근데 병준이네 부모님이 연락이 없으시네. 전화를 해도 안 받고, 메시지를 보내도 답장이 없어.”


정완은 더 이상 질문을 하지 못했다. 2년을 알고 지냈지만 사귄 지 이제 겨우 한 달밖에 안 된 커플이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그동안 자신은 무엇을 하고 살았나 싶은 생각에 깊은 절망감을 느꼈다. 선영도 분명 똑같은 기분을 느낄 것이 뻔해 보였다. 아니, 선영이라면 정완보다 백배, 천배는 더 깊은 절망감과 상실감에 빠질 것이 분명했다.


“언니, 오빠. 미리 축하드릴게요. 날 잡히면 말씀해주세요. 꼭 갈게요.”

“고마워 경미야.”

“너무 부러워요.”


경미와 눈웃음으로 시선을 맞추던 지수가 테이블에 엎어져있는 정완에게 말했다.


“아무튼 정완아. 오래 숨길 수 없다는 거 알지?”

“왜 하필 결혼이냐.., 왜 하필 너냐..”

“네 사정 때문에 내가 하고 싶은 걸 미룰 수는 없잖니?”

“그건 그렇지만..”

“그럼 우리는 이만 가볼게. 결혼반지 보러 갈 거거든.”


사무실을 나서는 병준과 지수의 뒷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그들에게 연애기간 따위는 안중에도 없던 모양이었다. 오래 만나고 짧게 만나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사랑 앞에서는 시간 따위는 결코 중요한 것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잔뜩 풀이 죽어있는 정완에게 경미가 말했다.


“오빠, 선영 언니한테 뭐라고 할 거예요?, 나 같아도 가장 친한 친구가 결혼한다고 하면 무지 서운할 것 같은데.”

“큰일이네,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하나..”

“뭘 망설여요?, 남자가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어야죠!”


경미는 오후 수업을 준비해야 할 시간이 되었음을 확인하고는 마시던 커피를 내려놓고 급히 자료를 챙기기 시작했다. 멋쩍게 웃어 보이던 정완은 경미에게 수고하라는 말을 하며 작업실로 들어갔다. 정완의 축 늘어진 어깨너머로 왠지 모를 쓸쓸함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오후 수업을 마친 경미는 곧장 야간수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정완은 선영의 퇴근시간에 맞춰 회사로 마중을 갈 채비를 했다. 요즘 이렇다 할 일거리가 없던 정완의 일상은 선영의 중심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최근 경미는 전보다 서운함이 느껴지는 빈도가 잦아졌다. 자신의 생각을 견주어 말했던 것도, 선영과 잘되기를 바랐던 마음도 결국에는 선영이 되고 싶었던 속내를 빗대어 표현했다는 것을 자각했기 때문이었을까. 사무실 밖으로 사라져 버린 정완의 뒷모습이 자꾸만 아른거렸다. 축 처진 어깨를 다독여 주고 싶은 마음도, 가지 못하게 붙잡고 싶은 마음도 가슴 한편에 묻어 둘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점점 더 자라나는 바람과 욕심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훌쩍 자라나 있었다. 포기할까도 여러 차례 생각해보았지만 그것이 마음대로 될 리가 없었다. 순수한 짝사랑이라고 믿고 싶었던 경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정완을 향한 마음은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갔다.


야간수업시간이 가까워졌을 무렵 현수가 사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성큼성큼 경미 앞에 다가온 현수는 경미에게 신용카드를 내밀었다.


“수강료 내는 날이잖아.”

“아, 응. 이번 달도 등록하는 거야?, 그 정도면 이제 배울 것도 없어 보이는데.”


현수는 말없이 영수증을 받아 들고는 강의실로 들어가 자리에 앉는가 싶더니 다시 경미에게 다가왔다.


“경미야. 둘 중에 하나라도 받아주면 안 돼?”

“뭘?”

“사과를 받아주던지, 내 마음을 받아주던지 둘 중 하나만 받아주면 안 되냐고.”

“사과는 할 필요 없다고 얘기했고, 네 마음은 받아줄 수 없다고 말했잖아.”

“요즘 내 기분이 불편해서 그래. 너 때문에 잠도 설친다고.”

“그게 내 탓이야?, 내가 경고했지?, 착각하지 말라고.”

“착각 아니야. 처음에는 호기심이었어. 인정할게.”

“그것부터가 착각이야. 인정하고 자시고 할게 뭐 있어?”

“언제부턴가 네가 자꾸 생각나고, 보고 싶어 졌어. 그래, 그건 착각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네가 걱정되는 건 착각이 아니야.”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누군지 뻔히 다 아는 사람의 고백을 내가 어떻게 받아주냐고.”

“나는 괜찮아. 네가 어떤 마음을 가져도 나는 괜찮을 수 있어.”

“아니, 아무리 지금 네가 괜찮다고 해도 언젠가 나는 너에게 미움을 받고 말 거야. 나는 그게 싫어. 그러니까 그만 단념해.”

“그래도 상관없어.”

“너는 왜 이렇게 겁도 없이 적극적이야?, 왜 자꾸 가만히 있는 사람을 자극해서 경계심을 만들게 하는 건데?”

“너처럼 겁이 많은 사람들의 특징이 뭔 줄 알아?, 후회를 많이 한다는 거야. 나는 후회하는 게 세상에서 제일 싫어.”

“남 이사 후회를 하든 말든 제발 참견하지 마.”

“정완이 형이 그렇게 좋아?”

“그래, 좋아서 미치겠다. 왜?”


현수는 자신을 피하려고만 하는 경미의 모습에 화가 난 나머지 감정적인 말을 뱉고 말았다.


“어디가 그렇게 좋은 건데?, 나는 왜 안 되는데?”

“수업 준비해야 되니까 그만해.”


경미는 차갑게 대꾸하고는 그대로 수업에 필요한 자료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야간수업시간이 다가오자 수강생들이 한둘씩 사무실에 들어왔다. 현수는 경미와 의미도 없는 감정싸움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다만 답답한 자신의 마음과 경미를 좋아한다는 마음을 전하고자 했던 것뿐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마음들을 표현할 때마다 상황은 더욱 악화될 뿐이었다. 자신의 표현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는 했지만 좀처럼 이야기를 제대로 해볼 생각도 하지 않는 경미에게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수업시간 내내 현수의 머릿속에는 경미에게 해주고 싶은 말만 켜켜이 쌓여갔다. 하지만 자신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 경미에게 끝내 아무것도 전할 수 없었다.


입동이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땅거미가 내려앉은 거리에는 시린 바람이 몰려왔다. 차가워진 바람은 사람들의 걸음을 재촉했고 불편해 보일 만큼 두꺼워진 옷차림은 당연한 듯 보였다.


여느 때와 같이 정완은 선영의 회사 앞에서 선영이 퇴근하기를 기다렸다. 선영은 퇴근을 하자 회사 앞에 주차되어있던 정완의 차에 몸을 실었다.


“많이 기다렸지?, 춥다. 이제 겨울인가 봐.”

“그러게, 너무 추워졌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소고기.”

“안 질려?, 맨날 고기만 먹으면 안 되는데. 골고루 먹어야지.”

“나는 고기가 좋단 말이야. 고기 먹으러 가자.”


정완과 선영은 자주 가는 고깃집에 주차를 한 뒤, 고깃집 안으로 들어갔다. 평일이었지만 꽤나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오늘 아버지 검사 결과 나왔다며?”

“응. 다행히 암세포로 변이 되기 전 이래. 아무래도 나이도 있고, 전에 비해 면역력도 떨어졌으니까.”

“거봐, 내가 뭐라고 했어?,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했지?”

“그땐 정말 심각했단 말이야.”

“아무튼 별일 아니어서 정말 다행이다.”

“그래도 항암치료는 해야 한데. 용종을 제거해야 되는 수술도 해야 하고.”

“얼른 돈 많이 벌어서 몸에 좋은 거 사드려야겠다.”

“아 맞다. 요즘 기름 값은 있어?, 일 끊겨서 또 스트레스받는 건 아니지?”

“응. 얼마 전에 작사료 받아서 아직까지는 괜찮아. 걱정 마.”


정완과 선영은 식사를 마치고 선영의 집으로 이동했다. 밥만 먹고 들어가기에는 조금 애매하다고 생각했던 선영은 집 근처에 있는 카페에 들렀다 가자며 정완에게 애교를 부렸다.


“네가 밥 사줬으니까, 내가 차 한 잔 정도는 사야지.”

“좋지. 나도 그냥 집에 가기 아쉬웠는데.”


주문을 마치자 선영은 곧장 화장실로 갔다. 정완은 선영을 기다리며 휴대폰을 살펴보고 있었다. 우연히 지수의 프로필 사진을 보게 된 정완은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뭐 보고 있었어?”

“아니야, 아무것도.”

“그나저나 편지는 언제 줄 거야?, 다 써놨다면서.”

“아 맞다, 미안해. 깜빡하네 자꾸.”

“그건 둘째 치고, 지수 결혼하는 거 알?, 걔는 어쩜 그렇게 추진력이 좋을까.”

“결혼?, 지수가 결혼해?”

“아까 퇴근하면서 지수 메신저에 프로필 사진 보고 깜짝 놀랐어. 커플링인 줄 알았더니 글쎄 결혼반지라는 거 있지?”

“벌써 반지까지 했어?”

“알면서 왜 모르는척해?”

“미안.., 나중에 말하려고 했지.”

“지수는 좋겠다. 결단력이며 추진력이며, 나로서는 도저히 따라갈래야 따라갈 수가 없네.”

“그게 왜 부러워?, 별걸 다 부러워하네.”

“정완아. 우리는 언제 결혼해?, 응?”

“거기서 갑자기 결혼 얘기가 왜 또 나와..”

“우리 아빠 조직검사받으러 입원했던 날 생각 안 나?, 나 결혼하는 거 보고 싶다잖아.”

“선영아..”

“아기라도 먼저 만들자. 요즘에는 혼전임신에 대한 인식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잖아. 게다가 우리 나이 대에는 혼수라도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잖아. 응?”

“내 입장도 좀 생각해주라. 아기부터 만드는 건 좀 아닌 것 같다.”

“네 입장 모르는 거 아닌데 서운한 걸 어떡해. 결혼이 하고 싶은 걸 어떡하냐고..”

“선영아, 결혼은 우리 둘이 하는 게 아니잖아. 알면서 왜 그래.”

“그럼 지수는?”

“그쪽이랑 우리랑은 상황이 다르잖아.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뻔히 알면서 왜 자꾸 그래.”

“정완아. 우리도 곧 있으면 서른하나야.”

“알아, 다 안다고. 네 말처럼 우리 곧 서른하나야. 그렇지만 안정적으로 살 수 없는 형편에 결혼이 가당키나 한다고 생각해?, 이제 겨우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데, 악착같이 버티면서 여기까지 온 걸 결혼 때문에 포기하라는 거야?”

“포기하라는 말은 안 했어.”

“모아둔 돈도 없고, 수입이 불규칙적인 것도 알잖아. 당장 살 집은 어떻게 구할 거며, 매달 들어가는 생활비는 어떻게 충당할 건데?”

“나도 일하잖아. 정 힘들면 우리 집에 얘기하면 되고.”

“그게 무슨 결혼이야?, 아직도 비좁아 터진 단칸방에서 사랑만 먹고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결혼이 무슨 소꿉장난도 아니고.., 그리고 왜 매번 네 입장만 얘기하는 건데?”

“너는 어쩜 그렇게 내 마음 같지 않은 거니?, 닿을 것 같아서 손을 뻗으면 왜 잡히지가 않는 거니?”

“솔직하게 말해봐. 너는 비정상적인 가족 구성원의 일원이 될 마음가짐이나 있어?, 우리 아빠도 이제 늙었어. 혹시나 어디 아프기라도 할까 봐 매일 걱정이라고. 우리 엄마랑 형은 또 어떤 줄 알고 하는 소리야?, 정 그렇게 결혼이 하고 싶으면 다른 남자 찾아. 나는 지금 당장은 너랑 결혼 못해.”

“너 말 다했어?”

“결혼에 안달 난 사람처럼 왜 자꾸 들들 볶는 거야?”

“그래, 좋아. 나도 너랑 결혼 못해. 아니 안 해.”


촉촉하게 젖어있던 선영의 눈가에서 뜨거운 눈물이 두 뺨을 타고 내렸다. 긴박한 상황이 몇 차례 선영을 흔들자 조급해하지 말자던 여행에서의 약속은 어느새 기억 저편에 묻혀버렸다. 서럽게 눈물만 뚝뚝 흘리던 선영은 이내 카페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정완은 선영을 붙잡지 않았다. 붙잡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카페의 폐점시간까지 정완은 홀로 그 자리를 지키며 무수히 많은 생각을 했다.


집으로 돌아온 선영은 어머니가 왜 우느냐고 하는 말에 대답도 하지 않고 그대로 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자신의 입장만 고수한 것이 아니었다. 살면서 맞추어갈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했다. 선영이 생각하는 결혼의 의미는 둘이 만들어가는 하나같은 인생이었다. 둘이 만드는 것이 벅차면 주변의 도움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이가 빠진 톱니바퀴처럼 서로를 아프게만 하는 서로의 존재를 그만 놓아주라는 속삭임은 밤새도록 선영을 울렸다.


그날 밤, 정완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지난번처럼 미련이나 후회 같은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정완은 이쯤에서 그만 선영을 놓아주어야 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씻지도 않은 채 침대에 누워있던 정완의 눈앞에는 지난 7년간의 사랑이 주마등처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길고도 길었던 시간을 따라 곳곳에 세워진 이정표를 찬찬히 둘러본 정완은 오늘에야 비로소 긴 여정의 마침표를 찍어야 하는 순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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