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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Made By me 1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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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희완 Jun 27. 2020

EP 17) 진심을 알고 싶어. 그리고 말하고 싶어.

episode 17.


경미는 며칠 만에 작업실에 나온 정완이 몹시 반가웠다. 초췌해 보이는 몰골에서 풍겨 나는 미심쩍음이 매우 거슬렸지만 밝게 웃어 보이는 정완이 그저 반갑기만 했다. 늦여름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기 때문일까. 경미는 정완과 선영 사이에 좋지 않은 일이 있었음을 눈치챘다.


“그동안 집에만 있었어요?, 통 연락도 안 되고 걱정했잖아요.”

“일이 좀 있었어.”

“무슨 일이길래..”

“경미야, 계좌번호 좀 알려줄래?”


온도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차가운 말을 들은 경미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불길한 예감은 늘, 언제나, 항상 적중하기 때문이었다. 경미는 최대한 침착하게 대응하려 했지만 그동안 정완이 보여 주었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기에 도무지 침착할 수 없었다.


“왜 그래요?, 말 안 해주면 안 알려줄 거예요.”

“게워내던 마음 좀 마저 게워내고 오려고.”

“뭘 자꾸 게워내요?, 선영언니랑 싸운 거죠?”

“놓아주는 게 맞는 것 같아. 힘들더라도 그렇게 결정하는 게 맞는 것 같아.”

“왜 스스로 무덤을 파고 들어가려고 해요?, 다른 방법도 많잖아요.”

“없어.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것 말고는 없어.”

“오빠답지 않게 왜 이래요. 제발요 오빠..”

“계좌번호 좀 적어줘. 두 달 치 월세 미리 입금해줄게.”

“두 달씩 이나요?, 갑자기 왜 그러는 건데요?”

“그냥 내가 해달라는 대로 해주면 안 될까?, 경미야, 부탁 좀 하자.”


한없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힘겹게 말을 마친 정완은 작업실에 들어가 커다란 선반 위에 있던 물건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경미는 엉겁결에 계좌번호를 적어 정완에게 건넸다. 하지만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지금의 상황을 누군가와 상의를 해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수 언니, 저 경미예요.-

-응, 경미야. 어쩐 일이야?-

                                                                                         -정완 오빠랑 선영언니 또 싸웠나 봐요.-

-정말?, 선영이는 아무 말 없던데.-

                                                                                                            -짐작 가는 일도 없어요?-

-전혀. 무슨 일인데 그래?-

                                                                                                             -정완 오빠가 이상해요.-

                                                              -두 달 치 월세를 미리 주겠다면서 계좌번호를 묻더라고요.-

-뭐?, 계좌번호?-

-두 달 치 월세는 또 뭐야?-

                                                                                                                           -모르겠어요.-

                                                                                             -지금 작업실에서 짐 챙기고 있어요.-

-언니가 금방 갈 게.-

-정완이 어디 못 가게 좀 잡고 있어 줄래?-

-최대한 빨리 갈게.-


얼마 지나지 않아 지수가 황급히 사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정완은 아직도 작업실에서 짐을 챙기는 중이었다. 정확히는 짐을 챙기는 것이 아니라 이삿짐을 싸는 것처럼 보였다. 100리터짜리 종량제 봉투를 펼쳐놓고는 오래된 악보와 각종 팸플릿, 그리고 가사를 적었던 이면지와 낡은 노트들을 찢어버렸다.


“정완이는?, 아직 안에 있어?”

“네, 혼자 있게 해 달라고 해서..”

“분명 무슨 일이 있었네. 쟤가 저렇게 고장이 날 정도면 심상치 않은 일이 생긴 건데..”

“언니, 어떡해요?, 언니가 들어가 볼래요?”

“아니, 일단 여기서 정완이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게 좋을 것 같아. 나 잠깐 선영이랑 통화 좀 하고 올게.”


지수는 사무실 밖으로 나와 선영에게 곧장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선영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몇 차례 통화를 시도했지만 허사였다. 통화가 연결이 되지 않자 메시지를 남겼지만 선영은 묵묵부답이었다. 지수가 선영에게 연락하는 것을 포기하고 사무실에 다시 들어오자 정완이 작업실의 문을 열고 커다란 쓰레기봉투를 들고 나왔다.


“정완아, 갑자기 왜 이래?”

“응, 지수 왔구나. 어쩐 일이야?”

“난데없이 이게 무슨 일이냐고.”

“그냥 정리 좀 하려는 것뿐이야.”

“무슨 정리?, 선영이랑 또 싸웠어?”

“지수야, 나 피곤하다. 다음에 얘기하자.”

“두 달 치 월세는 뭔데?”

“경미가 얘기했나 보구나.”


경미는 꼼짝하지 않고 정완과 지수의 대화를 듣고만 있었다. 자신이 개입했다는 것을 비밀에 부치고 싶어 했지만 정완이 자신의 이름을 언급하자 정완과 지수의 대화에 자연스레 끼어들 수밖에 없었다.


“오빠, 그게.., 갑자기 그런 말을 하니까 걱정돼서요.”

“걱정해주는 건 고마운데, 지수는 왜 불렀어?

“지수 언니 말고는 말할 사람이 없어서요.”

“며칠만 쉬다 올게. 혼자 생각할 시간이 좀 필요해. 정리할 것도 좀 있고.”

“말없이 떠나버리려는  아니죠?”

“아니야, 며칠만 쉬고 사무실로 올게.”

“약속하는 거예요?”

“약속할게.”


정완은 한 손에는 쓰레기봉투를 들고 한 손에는 큼지막한 쇼핑백을 든 채 조용히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지수는 사무실을 빠져나가려는 정완의 어깨를 붙잡았다.


“뭘 정리하겠다는 건데?, 응?, 말 좀 해봐.”

“지수야, 이번에는 네가 나서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나 때문이야?, 내가 결혼한다고 해서 선영이랑 싸운 거야?”

“아니라고는 할 수 없지만, 네가 아니었어도 언젠가는 벌어질 일이었다고 봐.”

“그래서 어쩔 작정인데?”    

“생각해봐야 별 수 없는 건 그냥 생각하지 않으려고. 받아들일 수 있는 건 받아들이게. 지금으로서는 그게 최선인 것 같아.”

“여행 다녀온 뒤로 선영이랑 아무 문제없었잖아. 지금이 딱 좋다고 말 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잖아?”

“생각해보니까 그때보다 지금이 더 좋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과거를 떠올리면 후회만 하다가 죽을 것 같고, 미래를 떠올리면 불안해서 미쳐버릴 것 같으니까.”

“왜 이래 진짜. 어느 날 갑자기도 아니고, 매번 잘 넘겨왔으면서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뭐냐고.”

“시간이 필요 해. 나나 선영이나 서로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

“정완아..”

“지수야, 내가 결정한 일이야. 내가 택한 길이니까 말리지 마.”

“선영이는 연락도 안 되고, 너는 정리하겠다고 하고.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되는 거니?”

“아무것도 하지 마. 결혼 준비만 신경 쓰면 돼. 그뿐이야.”

“어떻게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있겠어?”

“아무리 주변에서 뭐라 한들 선영이나 내가 받아들이지 못하면 헛수고잖아. 이번에 정말 절실하게 느꼈어. 마음이 전해진 것 같아서 잠시 안심했지만 결국 우리는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던 거야.”

“그래서 그냥 정리하겠다는 게 네 입장이야?”

“일단은.”

“그럼 나도 더 이상 붙잡지 않을게. 대신 내가 도울 일이 있으면 언제든 말하기다?”

“응. 그렇게 할게. 그렇게 할 테니까 오늘은 그만 돌아가 줘.”


지수는 하는 수없이 정완을 붙들고 있던 손을 놓았다. 정완은 큼지막한 쇼핑백을 조수석에 던지듯 실어놓고는 차에 시동을 걸자마자 빠르게 지수 앞을 지나쳐갔다.


경미는 손톱을 잘근잘근 씹으며 불안해하고 있었다. 어디론가 훌쩍 떠나버릴 것 같은 정완의 모습에서 불안함이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지수는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것을 인지하고 병준에게 전화를 걸어 정완과 선영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지켜보고 있던 경미 역시 달리 방법이 없음을 느끼고는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머릿속에 가득한 갖가지 추측들은 경미를 자꾸 불안하게 만들었지만 가슴속에서 불안함이 싹틀수록 사랑이라는 감정도 함께 자라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경미는 정완을 향한 자신의 마음이 짝사랑이라며 자신의 감정을 숨긴 채 바라만 보아도 좋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어느 틈에 자리를 잡은 안정감은 불안감을 증폭시켰고, 그 불안함은 사랑을 돋아나게 만들었다. 야간수업을 마치고 나서도 경미는 내내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경미야, 경미야.”


야간수업이 끝나고 수강생들이 모두 빠져나가자 현수는 멍하니 한 곳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경미에게 다가갔다.


“경미야. 무슨 생각해?, 아까부터 계속 멍하니 있던데.”

“아, 응?, 뭐라고 했어?”

“아니야, 혹시 이 일러스트 좀 봐줄 수 있어?”


현수는 투박하지만 어딘가 귀여워 보이는 꽃의 일러스트 이미지를 내밀며 경미에게 물었다.


“여기 밑동을 최대한 동그랗게 그리려면 어떻게 해야 해?”

“아 그거, 마커 펜으로 그릴 거지?”

“응. 펜 끝으로 긁어봤는데도 동그랗게 잘 안되네.”

“그럴 때는 샤프나 연필로 먼저 가볍게 스케치를 해놓고 속을 채우듯이 그리면 돼.”

“아, 한 번에 전부를 그리는 게 아니라 색칠하듯 색을 입히라는 거지?”

“응. 스케치할 때는 너무 진하게 그리면 안 돼. 잘 안 지워지면 자국이 남으니까.”

“고마워.”

“뭘, 또 궁금한 거 있어?”

“아니 없어.”

“근데 웬 일러스트야?, 너도 학원 차리려고?”

“그럴 리가.., 그나저나 수업에 관련된 얘기를 하는 경미랑, 사적인 얘기를 할 때의 경미랑은 참 많이 다르네.”

“왜?, 이중인격자 같아?”

“응, 조금.”

“물어볼 거 다 물어봤으면 그만 가. 나도 퇴근 준비해야 되니까.”

“나랑 술이나 한 잔 할래?, 고민 있어 보이는데.”

“고민은 있데, 너랑 술 마시고 싶은 생각은 없어.”

“네가 싫어하는 말은 절대로 하지 않을게. 그래도 싫어?”

“듣기 싫은 말 하는 즉시 바로 집에 갈 거야. 그래도 좋으면 가자.”


현수는 모처럼 경미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매번 경미와 대화를 할 때마다 자신의 감정을 너무 많이 드러냈던 현수는 적어도 오늘만큼은 악순환의 반복이 되지 않게끔 감정을 조절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주 어렵게 자그마한 틈이라도 열어준 경미가 실망하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무슨 일이든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기 때문이었다.


현수와 경미는 사무실 근처에 있는 호프집에 들어갔다.


“저기 앉자. 난 구석자리가 좋더라.”


입구 쪽에 앉으려던 현수를 지나쳐 가장자리에 있는 작은 테이블에 먼저 앉은 경미가 현수에게 말했다.


“나는 소주 마실 건데, 너는?”

“나도 소주.”

“안주는 딱히 없어도 되니까, 너 먹고 싶은 걸로 시켜.”

“그럼 탕이나 하나 시키자.”


경미는 볼 때마다 놀라움을 자아냈다. 정완 앞에서는 그저 착하고 순종적인 가녀린 소녀의 이미지였다면, 현수 앞에서는 전혀 거칠 것이 없어 보이는 액션 영화 속의 터프한 누나 같은 이미지였다. 현수는 경미의 이중적인 태도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너 술 잘 마셔?, 주사는 없지?”

“그런 건 남자가 먼저 묻는 거 아니야?”

“묻고 싶은 사람이 먼저 묻는 거지, 거기에 남자 여자가 왜 따라붙어?”

“대단하다. 동영상 찍어서 정완이 형한테 보여주고 싶다.”

“그러던가. 그런다고 내가 눈 하나 깜짝할 것 같니?”

“그럴 리가 없겠지.., 그나저나 아까는 왜 그렇게 멍하니 있던 거야?, 정완이 형 때문이야?”

“응.”

“누나랑 또 트러블이 생긴 모양이네. 오래 만나면 싸울 일도 없을 것 같은데. 참 별나다.”

“오빠가 오늘따라 좀 많이 이상했어.”


경미는 앞에 놓인 잔에 소주를 한 잔 따라 마셨다. 현수가 맞춰주려는 행동을 생각하기도 전에 무서운 속도로 비워낸 잔에 한 잔을 더 따랐다.


“어디론가 훌쩍 떠나버릴 것 같아. 쥐도 새도 모르게..”

“떠나긴 어딜 떠난다고 그래, 기분 탓이겠지.”

“네가 아까 못 봐서 그래. 장난 아니었다고. 작업실에 있는 물건들을 찢고 버리고..”

“심하게 싸웠나 보다.”

“많이 힘들어하는 게 눈에 보이니까.., 눈에 보이는데 해줄 수 있는 게 없으니까.., 그래서 아까 멍하니 있었던 거야.”

“그랬구나.”


현수는 잔뜩 우울해진 경미의 표정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좋아하는 사람을 곁에 두고 그 사람을 쭉 바라만 본다는 것이 얼마나 괴롭고 외로운 일인지 현수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새로 시킨 소주가 절반가량 남았을 때, 현수는 혹시라도 경미가 싫어할까 싶어 망설이기만 했던 말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경미야. 정완이 형이 그렇게 좋으면 고백이라도 한번 해보는 게 어때?”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내가 어떻게 그래.

“전에 내가 했던 말 기억해?, 겁이 많은 사람들은 후회를 많이 한다고 했던 말.”

“응, 솔직히 나도 그때 조금은 공감했어. 나는 겁도 많은 편이고, 후회도 많은 편이니까.”

“지금도 후회하고 있어?”

“뭘?, 너랑 엮인 거?”

“아니, 정완이 형 좋아하는 거 후회하냐고.”

“후회는 늘 하는 걸?, 애초부터 시작을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어디 그게 마음대로 돼야 말이지.”

“이번 기회에 고백해봐.”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하지 마.”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지. 정완이 형이 그 정도였으면 거의 헤어졌다고 봐도 무방할 텐데.”

“그래도.., 내가 어떻게 그런 말을 꺼내.”

“아무것도 해보지 않고 후회할 바에 뭐라도 해보고 후회하는 게 낫지 않아?, 어차피 후회하는 건 마찬가지겠지만 뒤끝은 남기지 않는 게 좋지 않을까?”

“얘가 갑자기 왜 이래?, 거슬리는 말 하면 집에 간다고 협박해서 이러는 거야 지금?”

“아니. 나는 그냥 내 생각을 말해주는 것뿐이야. 내가 너였다면 나는 고백했을 것 같으니까.”

“저돌적이네.”

“답답한 게 싫은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나는 후회하는 게 싫. 게다가 감정에 관한 일이면 나는 절대 못 참아. 왜 참아야 되는지도 모르겠고.”

“그래서 나한테 불쾌하다는 말까지 하면서 좋아한다고 했던 거야?”

“갑자기 그 얘기는 왜 해?, 창피하게. 웃길지도 모르겠지만 그때 나 엄청 진지했다.”

“왜 나를 좋아하게 됐는데?, 그냥 겉모습에 끌린 거야?, 솔직하게 말해봐.”


현수는 조금씩 마음의 틈을 열고 있는 경미가 사랑스러워 보였다. 자신의 접근방식이 잘못되었음을 늦게나마 깨달았기 때문일까. 생각해보니 경미는 상처가 많은 사람이었다. 상처투성이였기에 경계심이 강할 수밖에 없었다. 사라져 버린 사랑을 원망하며 울기 바빴지만 여전히 기댈 곳을 찾고 있었다. 누군가를 사랑할 자신도 없었으면서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싶어 했다. 그동안 현수는 그런 경미의 나약함을 일찍이 눈치 채지 못했다. 그저 미움받기 싫어하는 사람, 단지 상처받기 싫어하는 사람, 그래서 자꾸 뾰족한 울타리를 세워 자신을 감추는 사람인 줄만 알았다.


“응, 솔직히 그랬어. 남자의 본능이지 뭘.”

“그럴 줄 알았어. 역시 남자들은 정완 오빠 빼고는 다 늑대야.”

“정완이 형은 왜 빼는데?”

“눈빛이 너랑은 다르거든. 탐욕스럽지가 않아.”

“탐욕 같은 소리 하고 있네. 호감은 외모 때문에 생겼지만 진심은 외모랑 관계없어.”

“네 진심은 불쾌함이잖아?, 안 그래?”

“그때 내가 왜 그렇게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너를 좋아하는 건 사실이야.”
“됐어, 그만해. 이 늑대야.”

“너, 늑대가 얼마나 대단한 동물인지 잘 모르나 봐?”

“늑대가 대단해?, 늑대는 엉큼한 남자들을 비유하는 말 아니었어?, 여자는 여우 같다고 하고.”

“수컷 늑대는 암컷 늑대랑 한번 연을 맺으면 일생을 함께 동고동락해. 이 세상에 늑대처럼 신중하고 의리 있는 동물도 없다고.”


경미는 약간 홍조를 띤 얼굴에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진지하게 늑대를 찬양하고 있는 현수의 모습이 마냥 웃겨 보이기만 했다.


“너, 그거 지어낸 얘기지?”

“지어내기는, 믿기 싫으면 믿지 마. 늑대가 얼마나 로맨틱한데.”

“로맨틱은 무슨, 꿈 깨.”

“너는 꿈같다며?, 나는 꿈도 꾸면 안 되는 거야?”

“알잖아. 나 정완 오빠 좋아하는 거. 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정완 오빠가 좋아. 오빠가 너무 좋아서 다른 사람은 보이지도 않아. 이게 내 진심이야.”

“알아. 네가 진심인 거 아니까.., 그래서 고백해 보라고 한 거야.”

“고백은 좀 아닌 것 같아. 어쨌든 이해해줘서 고마워.”

“이해는 해주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너를 포기한 건 아니야.”


현수와 경미는 두 시간 남짓 대화를 나누는 동안 한 번도 언성을 높이지 않았다. 현수는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고 이야기를 할 때와 상대방의 감정에 맞춰가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천지차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경미 또한 현수에게 오해하고 있던 부분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경미에게는 정완만 보일 뿐이었다.


호프집에서 나온 현수와 경미는 불어오는 찬바람에 잔뜩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인상을 잔뜩 쓰고 도로변을 기웃거리는 경미에게 현수가 말했다.


“경미야. 나, 너 안 데려다 줄 거야.”

“너 취했니?, 괜히 쫓아와서 우리 집 주소 알아낼 생각이라면 꿈 깨셔.”

“너 바래다주고 나면 집에 못 갈 거 같아서.”

“술주정 그만하고 얼른 가. 난 여기서 택시 타고 갈 거야.”

“알았어.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더 하고 갈게.”

“뭔데?”

“고백해보라고. 어차피 인생은 한 번뿐이잖아. 그럼 나 갈게. 내일 보자.”


현수는 찬바람을 뚫고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현수가 자리에서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경미도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날 밤, ‘고백해봐’라는 말은 한동안 경미의 심장을 간지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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