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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Made By me 1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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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희완 Jun 27. 2020

EP 18) 다시 마주한 이별. 서로가 선택한 길.

episode 18.


사흘 뒤, 여행용 캐리어와 짐 가방을 메고 사무실에 나타난 정완의 모습에 경미는 심장이 멎는듯했다. 어디론가 떠날 것 같았다는 말이 현실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오빠, 이게 다 뭐예요?”

“두 달 치 월세 미리 입금했어. 전에 말했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정리 좀 하고 올게.”

“꼭 이래야 돼요?, 집에서 쉬면서 왔다 갔다 해도 되잖아요.”

“통 잠이 와야 말이지. 떠나기 전에 택배도 보내야 하고, 병원에도 들릴 예정이야.”

“불면증 때문에요?”

“응, 전에 네가 준 캐모마일 차랑 오일, 효과 좋더라. 고마워 경미야.”

“어디로 가는 건지 말 안 해줄 거예요?”

“일본. 항공권도 끊어놨어. 편도로.”

“편도요?, 왕복도 아니고 웬 편도예요?”

“돌아오고 싶어 질 때 돌아오려고. 비울 수 있는 만큼 비워내고 오고 싶어서.”

“나도 같이 가면 안 돼요?, 나도 갈래요.”

“학원은 어떻게 하려고?, 너는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잖아. 그리고 너랑 같이 가면 그건 관광이야.”

“지수 언니나 선영언니도 알아요?”

“그것 때문에 온 거야. 혹시라도 나 찾으러 오면 모른다고 말해줄 수 있지?”

“왜요?, 그걸 왜 나한테 말해요?”

“나랑 연락이 안 되면 분명 사무실부터 찾아올 테니까.”

“왜 말 안 하고 가야 되는데요?”

“말했잖아. 혼자 조용히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복잡하게 얽히면 무너질 것 같아서 그래.”
“언제 올 거예요?”

“두 달 안에는 올게. 걱정하지 마.”

“어떻게 걱정을 안 해요?, 휴대폰은 가져갈 거죠?”

“가져가야지. 그 정도로 무모한 사람은 아니야. 나, 의외로 겁이 많은 편이거든.”

“오빠를 이대로 보내줘야 하는 게 맞는 건가 싶네요.”

“모르는 거야, 너무 외롭고 겁이 나서 금방 돌아올지도.”


정완은 잔뜩 찌푸린 경미와 달리 활짝 웃고 있었다. 며칠 전 보았던 정완의 초췌함이라던가, 자신의 불안함  따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더 이상 정완을 붙잡지 않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 경미는 정완이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자신에게 사무실 열쇠 차 열쇠를 맡길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녀올게. 감기 조심해. 문단속 잘하고.”


다녀오겠다는 정완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경미는 아무 말이라도 꺼내야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두 팔을 벌리며 정완의 앞을 가로막은 경미가 말했다.


“크리스마스는요?, 오빠, 크리스마스는 어떻게 하려고요?”

“이 나이에 무슨 크리스마스야. 아마 너도 내 나이쯤 되면 크리스마스가 기다려지는 일은 없을 거야.”

“그럼, 새해 인사는요?, 종 치는 소리는 들어야 하잖아요.”

“한 살 더 먹는 게 썩 달갑지는 않을 걸?, 계란 한 판이라고, 계란 한 판.”

“알겠어요 오빠. 그럼 다치지 말고 잘 다녀와요. 도착하면 꼭 연락해야 돼요?”

“알았어. 연락할게.”

“기다릴게요.”


‘같이 갈게요. 나도 같이 갈래요. 오빠가 걱정된단 말이에요. 보고 싶을 것 같단 말이에요.’


경미는 짐을 챙겨 뒤돌아서는 정완에게 끝내 자신의 진심을 전하지 못했다. 우체국이 있는 골목으로 발길을 돌린 정완은 이내 경미의 시야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고백해보라던 현수의 말이 자꾸만 귓가에 아른거렸다. 하지만 경미는 후회하지 않았다. 위태로워 보이는 정완에게 섣불리 고백을 했다가는 본전도 찾지 못할 것이 뻔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기다리겠다고 말한 이상 경미는 정완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정완은 우체국에 들러 택배를 접수하기 위해 번호표를 뽑고 대기했다. 지난밤, 정완은 선영에게 주기로 했던 편지를 어떻게 처분할지 잠시 고민했지만 어차피 선영을 위해 만들었던 편지였기 때문에 그 편지의 주인은 선영이라고 판단했다.


간밤에 정완은 올여름 선영이 자신에게 내밀었던 그 상자 속에 켈리그라피로 예쁘게 노래 가사를 적어 만든 골판지를 넣었다. 그리고 언제나 선영과 편지를 주고받을 때 해왔던 것처럼 PS가 적힌 메모도 잊지 않고 동봉했다. 선영의 회사로 택배를 접수하고 우체국을 빠져나온 정완은 병원에 들러 수면제를 처방받은 후, 지하철을 타고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몸과 마음은 천근만근이었으나 이겨내고 싶었다. 이대로 무너지고 싶지 않았다. 외로움을 지독하게 싫어했고, 소외감을 미친 듯이 경멸했다. 따듯한 온기가 필요했고, 사랑이 절실했다. 가시가 돋친 것처럼 말을 하게 된 것도, 어차피 인생은 혼자 사는 것이라며 부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게 된 것도, 행복한 동화 속 세상을 동경했지만 비참한 현실에 무릎을 꿇는 것까지도 전부 내려놓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지하철에 몸을 실은 정완은 이명이 생긴 것처럼 귀가 먹먹했지만 예전처럼 눈을 가리고 모른 채 하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그 길의 끝을 반드시 자신이 찾아내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결코 미루고 싶어 하지 않았다.


비슷한 시각, 좀처럼 연락이 닿지 않았던 선영에게서 한 통의 메시지를 받은 지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마침 병준과 함께 있던 차에 선영의 메시지를 확인하게 된 지수는 병준에게 지난 며칠 동안 발생했던 기이한 사건에 대해 털어놓으며 선영에게 받은 메시지를 보여주었다.


“병준아. 이것 좀 봐.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뭔데 그래?”

“선영이가 결혼정보업체에 등록했데. 벌써 세 명이나 만났데.”

“뭐?, 결혼정보업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잘 지낸다고 했잖아. 희한하네.”

“나 때문 인가 봐. 얼마 전에 내 SNS 프로필 사진에 우리 반지 맞춘 거 올렸거든. 선영이가 그걸 보고 전화를 했는데, 아무래도 그때 내가 너랑 결혼할 거라고 자랑하듯이 말해서 정완이랑 싸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선영 씨 입장에서는 기분이 좀 상할 수는 있겠지만, 그게 너 때문은 아닌 것 같은데?”

“우리가 너무 서두른 걸까?”

“뭐 기분이 별로일 수 있겠지만 엄연히 별개의 문제지. 우리는 우리대로, 선영 씨는 선영 씨대로 사는 게 맞으니까.”

“네 말이 틀린 건 아닌데, 괜히 미안해지네..”

“미안해하지 마. 자신의 인생은 자신이 만들어가는 거니까. 결혼 문제로 수도 없이 다퉜겠지만, 선영 씨가 이게 진짜 끝이라고 생각해서 내린 결정이라면 너도 그냥 받아들여. 언제까지 엄마처럼 쫓아다니면서 이래라저래라 할 수는 없잖아. 겸허하게 받아들여.”

“정완이는 며칠째 연락도 안 되고.., 정말 답답해 죽겠다.”

“시간이 약이라면 언젠가 치유가 되겠지. 이제 그만 너도 손 떼. 그게 맞아 지수야. 전에도 말했지?, 너무 깊숙이 관여하면 재앙이 온다고.”

“알았어. 이제 안 그럴게.”


카랑카랑한 바람이 제멋대로 나부끼는 하늘을 잠시 올려다본 정완은 공항 안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탑승수속을 마치고 수화물을 체크한 뒤 게이트번호를 확인하던 그때, 한 남자가 커다란 기타 케이스를 등에 짊어진 채 정완의 곁으로 다가왔다.


“저기요, 실례지만 혹시 제 항공권 좀 잠시 봐주실 수 있나요?, 비행기는 처음 타보는 거라 어디가 어딘지 도통 모르겠어요.”

“어, 저랑 같은 비행기네요. 저쪽에서 탑승 수속하시고 수화물 맡길 거 체크하시면 돼요.”

“감사합니다. 근데 혹시 이 기타는 들고 갈 수 있나요?, 혹시 몰라서 하드케이스에 담아오긴 했는데..”

“수화물 칸에 실어야 할 것 같은데요?, 일단 저쪽 데스크에 가서 직원에게 물어보고 시키는 대로 하시면 될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커다란 기타 케이스가 다소 인상적인 제법 앳돼 보이는 남자였다. 남자는 정완이 일러준 대로 직원에게 가서 탑승수속을 마치고 수화물에 관한 안내를 받았다. 그리고는 다시 정완이 대기하고 있던 장소로 돌아왔다.
 

“덕분에 살았어요. 해외는 이번이 처음이라.., 마음만 앞서서 무턱대고 공항까지 오긴 왔는데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뭘요, 저도 이번이 두 번째인데요.”

“혼자 가시는 거예요?”

“네.”

“관광인 가요?, 아니면 비즈니스?”

“뭐, 관광 정도로 해두려고요.”

“아, 네. 근데 왜 일본이에요?, 가까워서요?”

“아니요. 전에 한번 가본 곳이 일본이라서요.”

“그러셨군요.”

“그쪽도 관광이에요?”

“저는 딱히 목적 같은 건 없는데, 그냥 가보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요.”

“혼자 가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어요?”

“아니요, 같이 갈 사람이 없다는 게 이유라면 이유겠죠.”

“비슷하네요.”


두 사람이 이야기를 하던 와중에 벽면에 위치한 커다란 전광판을 확인한 정완이 말했다.


“가요. 이제 슬슬 탑승해야 하니까.”

“벌써요?, 아직 40분 정도 남은 것 같은데..”

“탑승 게이트까지 가는데 시간이 꽤 걸리거든요. 미리 가 있어야 당황하는 일이 없을 거예요.”


한편, 퇴근을 마친 선영은 결혼정보회사에서 연락을 받고 낯선 사람과의 네 번째 만남을 위해 지정된 장소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주차를 하고 차문을 닫으려 할 때, 지수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했다.


                                                                                                        -선영아. 오늘 시간 괜찮아?-

-아니. 약속 있어.-

                                                                                    -그래?, 아쉽네. 요새 통 얼굴 보기 힘들다.-

                                                                                                  -목소리 듣는 것도 엄청 힘드네.-

-이따 집에 가는 길에 전화할게.-

                                                                                                                                  -선영아.-

-응?-

                                                                                                                                 -미안해..-

-네가 왜 미안해.-

-나 도착했으니까, 이따 집에 갈 때 전화할게.-


약속 장소에 도착한 선영은 호텔 라운지로 천천히 걸어갔다. 오늘은 조금 다른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마음이 가득했다. 그동안에 있었던 세 번의 만남은 선영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지나치게 결혼에 대한 이야기만 하기 바빴고, 지나치게 현실적인 이야기만 하기 바빴다. 가족관계, 재산 보유현황, 2세 계획, 연봉, 등등 자신의 배경과 비슷한 것이 있나 비교만 할 뿐,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려 하는 낭만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혼에 대한 이상향이 남들보다 원대했던 선영은 매일 낭만을 꿈꾸었다. 하지만 꿈은 단지 꿈일 뿐이었다. 자고 일어나면 언제나처럼 제자리일 뿐이었다. 이상향에 도달하지 못했음을 깨달을 때마다 선영은 순조롭지 못한 자신의 얄궂은 운명에 수 백 번씩 질문을 던지곤 했다.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과 자신이 행복해지는 것은 어째서 별개의 문제일까.’

‘사람마다 주어진 운명이 있다면 나에게 주어진 운명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선영이 라운지에 도착해서 휴대폰의 알림을 확인하고 있던 그때, 창가 쪽 자리에 앉아있던 한 남자가 선영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선영 씨, 윤선영 씨 맞죠?”

“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이리 앉으세요. 생각보다 빨리 오셔서 놀랐어요.”

“아, 네.”

“이정진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서글서글한 말투와 푸근해 보이는 인상은 선영의 이상형과 제법 거리가 있어 보였다. 하지만 억양에서부터 전해지는 따스함은 선영이 원하던 그것과 매우 유사했다.


“차로 주문하시겠어요?, 식사는 하셨고요?”

“아직 식전이긴 한데 요즘 입맛이 없어서요. 저는 그냥 레몬티 마실게요.”

“그럼 얼른 주문하고 올게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말을 할 때마다 과해 보일 정도로 친절하고 웃음기가 짙었던 그 남자는 선영이 주문한 메뉴를 점원에게 부탁할 때도 한결같았다. 친절이 익숙한 사람. 매너가 몸에 베인 사람. 선영은 왠지 모르게 남자의 그런 행동이 싫지 않았다.


“선영 씨, 생각보다 키가 크시네요. 게다가 미인이시고.”
 

선영은 정진이 거침없이 내뱉는 형식적인 말투에서도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곧 주문했던 레몬티가 나오자 선영은 외투를 벗어 옆자리에 걸어두었다.


“뭐, 업체를 통해서 대충 들으셨겠지만 다시 한번 정식으로 소개할게요. 이정진입니다. 나이는 서른여섯이고 작은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애인은 없고요.”

“보기보다 동안이시네요. 저는 웨딩플래너예요. 서른이고요.”

“선영 씨는 취미가 뭐예요?, 저는 활동적인 걸 좋아하는데.”

“딱히 취미는 없어요. 그냥 책 읽고 음악 듣는 걸 좋아해요.”

“그러시구나, 저는 스킨스쿠버도 하러 가고, 서핑도 하러 다녀요. 가끔 하프 마라톤이나 철인 3종 경기에 참가하기도 하고요.”

“자전거도 타시고 등산도 하시고요?”

“어떻게 아셨어요?, 요즘처럼 쌀쌀한 날씨에 자전거 타고 한강변을 따라 달리면 얼마나 좋은데요. 차가운 바람에 얼굴이 찢어질 것 같이 아프지만 숨이 멎을 정도로 불어오는 맞바람을 이겨냈을 때, 그 쾌감은 안 타본 사람들은 잘 모르죠.”

“일하는 것도 힘드실 텐데 그 많은 취미를 즐기는 이유가 뭐예요?”

“좋은 질문 하셨네요. 안 그래도 언제 말씀드릴까 고민하고 있었거든요.”


선영은 레몬티를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기분 좋은 상큼함이 입안에 가득 퍼지자 반사적으로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번졌다. 다소 수다스러울지도 모르는 낯선 남자를 경계한다거나 의심하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선영이 던진 미끼를 문 정진은 의자를 바싹 당겨 테이블 쪽 가까이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


“바쁘게 살자는 주의거든요. 힘들다는 생각도 나지 않을 만큼 바쁘게 살고 싶어서요.”

“그렇게 일하고 취미생활에만 매진하니까 애인이 생기지 않는 게 당연한 거 아니에요?”

“틀린 말은 아니네요. 그나저나 선영 씨는 여름이 좋아요?, 겨울이 좋아요?”

“저는 둘 다 싫어해요. 봄이나 가을 중에 택하라면 고민이 좀 되겠지만.”

“저는 겨울을 좋아해요. 여름도 좋지만 사계절 중에는 겨울을 제일 좋아해요.”

“주관이 뚜렷하시네요. 저는 주관이 뚜렷하지 못해서 정진 씨 같은 분이 참 부러워요.”

“저도 얼마 전까지는 우유부단함의 정점에 있던 사람이었어요. 세상이 내 마음처럼 움직여야 말이죠. 매일 겉돌기만 하다가 최근에서야 그 우유부단함에서 벗어났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에요.”

“무슨 좋은 방법이라도 찾은 거예요?”

“음, 저 같은 경우에는 충격요법을 썼어요.”

“충격요법이요?”

“네, 아주 혼이 쏙 빠져나갈 정도로 큰 충격을 받고 나니까 정신이 번쩍 들더라고요.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 뭐 그런..”

“듣고 보니 그게 가장 확실한 방법일지도 모르겠네요. 저는 성격이 워낙 둥그렇다 보니 충격을 받아도 그걸 충격이라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혼이 쏙 빠져나갈 정도로 큰 충격을 받으면 조금은 변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이게, 효과는 확실한데. 부작용이 있어요.”

“부작용이요?”

“네. 저처럼 활동적인 취미가 많아진다는 거예요. 그래도 욕심나시면 말씀하세요. 언제든 가르쳐드릴게요.”


선영은 아주 오랜만에 낯선 남자를 앞에 두고 잇몸을 보일 정도로 웃고 말았다. 결혼이 공통적인 관심사라는 것을 숙지하고 나온 자리였지만 다소 결혼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실없는 이야기를 하고, 취미를 물어보며, 좋아하는 계절을 물어보는 이 남자가 부담스럽지 않았던 눈치였다. 정진도 오랜만에 편한 만남을 가졌다는 생각에 자꾸만 실소했다. 정진은 자극적인 질문들로 예민하게 굴 필요가 없었음을 선영보다 먼저 깨우쳤다. 선영은 네 번째 만남이었지만 정진은 이런 만남을 이미 열 번 이상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시계를 본 정진이 선영에게 말했다.


“선영 씨, 혹시 배고프지 않으세요?”

“아니요. 요즘 입맛이 통 없네요. 왜요?, 배고프세요?”

“그게 아니라, 솔직히 오늘 이렇게 오래 앉아있을 줄은 모르고 나왔거든요.”

“한 시간밖에 안 된 것 같은데요?”

“보통 길어야 30분 정도였거든요.”

“아, 그러셨구나. 하긴, 저도 오늘이 가장 오래 앉아있는 날이긴 하네요.”

“다시 레스토랑에 가봐야 해요. 혹시나 선영 씨 배고프다고 하면 식사대접도 할 겸 같이 일어날까 하는데.”

“아, 바쁘시면 먼저 가셔도 괜찮아요.”

“이거 죄송해서 어쩌죠?, 실례가 안 된다면 모셔다 드리고 싶은데..”

“괜찮아요. 저도 차 가지고 왔어요. 퇴근하고 바로 온 거라서.”

“그럼 다음에 또 뵐 수 있을까요?, 선영 씨랑 또 만나고 싶어요. 오늘 선영 씨가 나올 줄 알았으면 오프를 했을 텐데, 저녁 예약 손님을 받아놓는 바람에..”

“그래요. 혹시 제 연락처 아세요?”

“아니요. 연락처까지는 알려주지 않았네요.”

“여기 명함이에요. 다음에 시간 맞으면 또 봬요.”

“혹시, 좋아하는 음식 있으세요?”

“저는 고기면 다 좋아요. 채식보다는 육식이거든요.”

“알겠습니다. 그럼 같이 나가시죠?, 여기 계산은 제가 할게요.”

“아니에요. 제가 먹은 건 제가 낼게요.”


계산대에서 잠시 옥신각신하던 선영과 정진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주차장으로 갔다.


“그럼, 조심히 가세요.”

“선영 씨. 오늘 너무 즐거웠어요. 그리고 정말 죄송해요.”

“아니에요. 덕분에 저도 즐거웠어요.”


선영은 정진에게 인사를 하고 자신의 차량에 탑승했다. 결혼정보업체를 통해서 만난 사람 치고는 별로 결혼할 마음이 없어 보이는 것이 조금 의아했지만 나쁘지 않았다. 어쩐지 정완과는 다른 성격과 행동, 말투 때문이었을까. 낯선 사람이었음에도 전혀 낯설지가 않았다. 정완과 상반되는 사람이라면 선영이 생각하는 이상향에 함께 어울려줄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선영은 차를 몰아 집으로 가는 도중 지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응, 선영아. 이제 끝났어?”

“응, 방금 차 타고 집에 가는 중이야.”

“무슨 약속인데?”

“오늘 네 번째 남자를 만났지, 앞으로 네 번 더 남았어.”

“왜 그래 진짜. 충동적으로 하는 행동이면 그만둬.”

“아니야, 절대 그런 거 아니야.”

“정완이는?, 연락 없어?, 정완이도 너 이러고 다니는 거 알아?”

“몰라 나도. 그날 이후로 연락 온 것도 없고, 하지도 않았어.”

“싸운 거 아니었어?, 헤어지자고 막 투닥거린 거 아니냐고.”

“생각해보니까.., 그런 말은 없었어. 그냥 내가 울면서 집에 간 게 다야.”

“왜 울었는데?, 결혼 얘기했지 또?”

“응, 아빠가 나 결혼하는 거 보고 싶다고 해서 그 말 꺼낸 건데 짜증을 내더라고.”

“내 얘기도 했지?, 비교하면서 뭐라고 막 칭얼댔지?”

“응, 조금. 네가 부러운 건 사실이었으니까.”

“너 정말 결혼이 하고 싶은 거야?”

“응. 나는 결혼이 하고 싶어. 연애 말고 결혼이 하고 싶어.”

“그 상대가 정완이가 아닌 누구라도 상관없고?”

“아직까지는. 그나저나 오늘 꽤 괜찮은 남자가 나온 거 있지?, 말투며 행동이며 정완이랑은 완전 딴판이야.”

“얘 좀 봐, 별소리를 다하고 있네. 이제 그만해. 너한테 도움 될 거 하나도 없어 보이니까.”

“지수야, 언니가 오늘 기분이 매우 좋거든?, 계속 잔소리할 거면 끊는 수가 있다?”

“선영아. 정완이가 너한테 청혼할 때까지 내 결혼 미룰까?, 그러면 네가 원래대로 돌아올까?”

“아니. 그러지 마 지수야. 너한테는 아무 감정 없어. 어차피 인생은 각자가 알아서 사는 건데, 네가 결혼한다고 해서 따라 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 언젠가 한 번은 쏟아질 물이었다고 생각해.”

“그래도.., 나는 너희 두 사람 때문에 요즘 잠도 잘 못 잔단 말이야.”

“지수야. 내가 마흔이 될 때까지 정완이랑 연애를 하고 있다고 가정하면, 그때도 지금처럼 두 팔 걷고 나서 줄 거야?”

“미쳤니?, 생각만 해도 징그럽다. 그 나이까지 그러고 있으면 너희 둘 다 만나기 싫어질 것 같아.”

“시기가 조금 당겨진 거라고 생각해. 엎질러질 것도 알고 있었고 주워 담아야 할 것도 알고 있어. 그건 온전히 내 몫이라고 생각해. 얼마만큼을 주워 담을 수 있을지 가늠해보는 것도 내 몫이고, 주워 담을 수 없을 만큼 엎질렀다고 생각하면 다시 채워 놓아야 하는 것도 내 몫이야.”

“이번에는 진짜 둘 다 독하게 마음먹은 모양이구나. 정완이는 경미한테 두 달 치 월세 미리 내고 신변 정리를 하겠다고 하질 않나..”

“신변 정리?, 뭐 어디 절이라도 들어가겠데?”

“모르겠어. 통 연락이 안 돼. 이렇게 피곤할 줄 알았으면 애초에 너희 두 사람 만나게 해주는 게 아니었는데.”

“어머, 못하는 말이 없네. 그래도 우리 덕에 재미있었으면서.”

“충동적인 행동이 아니라면 됐어. 실은 조급해하고 있나 싶어서 걱정했거든. 아프면서 아프지 않은 척하고 있지는 않나 무지 걱정했어.”

“걱정하지 마 지수야. 우리 곧 서른하나야. 언제까지 너한테 응석만 부리고 있을 수는 없잖아. 내 걱정은 이제 붙들어 매고 네 결혼 준비나 신경 써.”

“알았어. 그 대신 연락 자주 하고, 시간 날 때 얼굴 좀 보여줘. 예전 같지 않아서 나 요즘 우울증 걸릴 것 같단 말이야.”

“알겠어. 미안 미안. 그럼 나중에 또 통화하자.”

“그래, 운전 조심해. 감기 조심하고.”


밤바람이 무척이나 차갑게 느껴지는 초겨울 밤. 지수는 선영과의 통화를 마치자마자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꾸지람을 들은 어린아이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무언가 해주고 싶은 바람은 무언가 해줄 수 없는 현실에게 조금씩 잠식당하고 있었다. 정완과 선영의 관계가 얼마나 깊은 관계인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지수는 그런 둘 사이가 그저 눈부시게 빛나 보일뿐, 점점 빛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을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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